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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문학소녀

운영자 2020.10.12 10:25:18
조회 161 추천 1 댓글 0
늙은 문학소녀

 

십 이년 전 한 모임에 참석했던 여성의 얘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와 일기에 적어놓았던 적이 있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소설가 정을병씨와 만나고 있는데 담백한 스타일의 반코트를 입고 묵직한 가방을 든 여성이 와서 합석하게 됐다. 그녀의 눈 밑에 잔주름이 끼고 눈꼬리가 쳐진 모습이 어느 정도는 고단한 세월의 강을 흘러온 느낌이었다. 그녀가 의외로 생기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작년에 환갑이 지났어요. 그리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 이 나이까지 독신으로 살아요. 삼십대까지는 명동의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다방에 내 자리가 있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살았어요. 물론 연애도 실컷 했구요. 동아방송의 성우 1기로 들어가서 일을 했죠. 연극도 하고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벌어서 먹고 살아야하는 데 연극이나 문학으로는 밥을 먹고 살 수 없죠. 그래서 책이나 화장품세일즈를 열심히 했어요. 여러 해 동안 세일즈를 하니까 그래도 작은 아파트 하나를 마련할 수 있더라구요. 그 아파트를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평생 나의 꿈을 실현 시키려고 한 거죠. 나혼자 살 아주 작은 오피스텔을 얻고 아파트판 돈과의 차액으로 살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어느새 나는 호기심이 일었고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을 써서 문학지에 원고들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참 권위주의적이고 더럽더군요. 연줄이 없으면 추천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러다가 옆에 계시는 정을병 선생을 무조건 찾아가서 작품을 보이고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죠. 그래서 정을병 선생을 알게 되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간신히 등단을 하게 됐습니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설가 정을병씨가 이렇게 말했다.

“일본 작가들을 보면 정말 문학 하나에 자기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거는 걸 봅니다. 그리고 연애소설이건 추리소설이건 환타지 건 한번 정하면 정말 깊숙이 그 속에 침잠을 하죠. 그런데 한국의 이름이 좀 났다고 하는 작가들을 보면 작품보다는 교수직이나 사회운동에 더 정력을 뺏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소설도 이 분야 저 분야 막 건드려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특색이 없어지고 팔구십퍼센트의 작품이 전부 똑같아져 버리는 거죠. 그리고 소설이란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걸 써야 해요. 소설을 쓰기 위해 잠시 경험한다는 정도로도 부족하죠. 그건 일시적으로 담넘어 보는 정도인데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할 수 있어요. 방구석에서 머리만 굴려서 쓰려고들 하니까 작품이 없는 거예요.”

그 말에 그녀가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일본 소설 실낙원 같은 걸 보면 스토리는 단순한 연애에 불과한 데도 문장에 의해 독자들이 흡인되어 버리는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예술성 있는 묘사를 심도있게 공부하셔야 겠죠. 그리고 민 선생은 세일즈를 몇 십년 했잖습니까? 그 마케팅 경험을 가지고 그에 관련된 것만 한번 깊이 써보세요. 마케팅 책을 구해서 우선 많이 읽으시구요.”

듣고 있던 내가 그녀의 노년의 삶이 궁금해서 물었다.

“민선생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가방을 싸들고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을 갑니다. 거기서 독서를 많이 해요. 버지니아울프부터 시작해서 고금 소통까지 읽었어요. 그리고 글을 쓰죠. 점심은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해결합니다. 하루하루가 즐겁죠.” 

육십대 문학소녀의 독특한 인생을 보았다. 그녀를 만난 후 십이년이 흘렀다. 지금은 칠십대 중반을 넘겼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그녀 자신이 되려는 것 같았다. 삶이 어떻게 그녀를 만들어도 그걸 받아들이고 즐기려는 태도였다.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은 것 같다. 그것은 순식간에 영원의 심연 속에 묻혀 버린다. 나도 인생을 즐기고 일을 즐기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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