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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장인의 은밀한 사랑

운영자 2021.04.05 09: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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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장인의 은밀한 사랑




장인은 조용한 도인 같은 타입이었다. 자식이나 사위가 가서 인사를 하면 잠시 후 소리 없이 자리를 피해 가셨다. 여든여섯 살이 되던 해에도 새벽에 일어나면 방에 모셔둔 불상 앞에서 경문을 외우셨다. 누가 부딪쳐도 빈 배 처럼 반응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떤 때 보면 투명인간 같은 느낌이고 보호색으로 자신을 주위의 환경 속에 집어넣어 기억되지 않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새벽예불이 끝나면 산책을 갔다 오는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리듬에 따라 사는 분이었다. 그러던 장인이 동네 야산에 산책을 갔다 아파트 앞까지 돌아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싶어 하는 평소의 마음같이 마지막을 정리한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장인은 동경의 중앙대학교 법과를 다니다 일본군 병사로 징집이 됐었다. 장인은 훈련소 막사 뒤에서 스스로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뜨려 일본 병사 자격을 반납한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장인은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관료를 하다가 5.16혁명을 맞이했다. 군인들이 관료자리들을 점령하고 들어왔다. 장인은 바로 사직을 하고 의성의 깊은 산속에 창고 같은 진흙벽돌집을 짓고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산자락을 따라 곡괭이로 구멍을 파고 사과나무 묘목을 심은 후 개울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다 뿌리를 적셔주었다. 장인은 그렇게 일찍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은자가 된 것 같았다. 입관식 때였다. 죽은 장인이 잠을 자듯 조용히 누워있었다. 나는 죽은 장인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가는 실눈을 뜬 열반에 든 듯 황홀한 표정이었다. 평생을 새벽이면 경문을 읽고 수도하던 장인이 부처가 된 것 같았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주름의 고랑에 퍼져 있었다. 아무런 회한도 없었다. 자식들이 지어준 한 벌의 베옷을 입고 장인은 아들과 딸이 떨어뜨리는 보석 같은 한 방울의 눈물을 선물로 받았다. 장인은 자신이 심은 묘목들이 울창한 거목이 된 숲의 봉우리에 묻혔다. 산 자락 아래 쪽으로 자신이 일구어 놓은 과수원과 한동안 진한 땀을 흘렸던 진흙 토담집이 반쯤 부서진 채 보였다. 장인이 살아있을 때 내가 다가가 억지로 이말 저말 말을 붙인 적이 있었다. 장인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가 내가 기억하는 딱 한마디 이런 말이 있었다.

“살아 보니까 인생이란 게 자기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가는 거지 한 발짝도 자기 의지대로 벗어나지 못하겠더라.”

장인의 운명론의 깊은 내면을 나는 들여 다 볼 수 없었다. 그냥 시대의 물결에 따라 수동적으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을 얘기하나 보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굳은 의지로 삼십만평의 민둥산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숲과 과수원으로 만들어 버린 보면 의아하기도 했다. 다시 한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처가 친척들의 모임에서 장인의 여동생 되는 분이 자식들 앞에서 주저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다 들 돌아가셨으니까 말을 해도 되겠지 싶다. 우리 오빠가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한 여학생을 보고 사랑에 빠졌지. 그러니까 동경의 대학교에 유학가기 전이었어. 그 여학생이 오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기라. 그런데 오빠가 나이 칠십을 훌쩍 넘은 어느 날이었지.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모자를 쓰고 단장을 짚고 고등학교 때 사랑 하던 잊지 못하던 그 여학생을 찾아갔더란다. 돌부처 같던 우리 오빠의 내면 어디에 그런 사랑과 열정이 남아 있었는지 몰라.”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장인의 사랑은 불같이 한번 타고 재가 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스치면서 녹아 물이 되어 평생 마음 깊숙이 흐르던 강이었다.

“엄마야, 그러면 우리 엄마는 평생 껍데기하고 산 거잖아? 우리 엄마 알고 보니 불쌍한 사람이었네.”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소년시절 보았던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갈 수 있던 장인은 진정 한 아름다운 삶을 살고 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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