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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장 떠 볼까

운영자 2021.04.26 10: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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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짱 떠 볼까




오래전 앞을 보지 못하는 내 또래의 한 사람을 만났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다섯살 때 우리 마을 밭에 떨어져 있는 쇠붙이를 가지고 놀다가 그게 터지는 바람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됐죠.”

6.25전쟁 무렵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그런 사고가 많았다. 전쟁 중에 여기저기 버려진 수류탄이나 폭탄이 많았었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됐는데도 나는 맹인이라고 자각하지 못했어요. 항상 보이던 마을의 길, 냇물, 우리 집 마당이나 툇 마루가 그대로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야 비로서 내가 맹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익숙한 것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거나 어떤 충격이 있어야 사람은 자각을 하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나는 지독히 단순하고 고지식했다. 편견과 고정관념의 두꺼운 틀 안에 갇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의 일이 불쑥 떠오른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 같은 반에 있는 다른 아이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 아이가 운동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교를 나와 버스를 타고 그 아이가 사는 집을 찾아갔다. 아이가 식구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선생님이 부른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아이와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텅 빈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독히도 융통성이 없었다. 그런 성격은 커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십대 중반 무렵 아파트의 일층에 혼자 사는 사십대 여자 교수가 가끔씩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따금씩 한 영감이 밤에 불쑥 찾아와서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다. 정면으로 대놓고 거절하기는 힘든 입장인 것 같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같이 있어만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영감이 밤늦게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 여교수의 아파트에 가 있었다. 어떤 영감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단뿐 아니라 사회적 거물인 인사였다. 그는 적당히 나를 구슬르면서 내가 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부탁을 받은 대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영감이 가고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었다. 마침내 인내의 한계를 넘었는지 그 영감이 내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내 마음 같아서는 이 앞 공원에 가서 한번 맞짱을 떴으면 좋겠어. 그래서 당신 가슴을 덮고 있는 그 막을 위아래로 좍 찢어버렸으면 좋겠어.”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교수를 지키는 나의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건 그 다음 말이었다. 나의 내면을 덮고 있는 답답한 막이 있다는 것이다. 누에고치나 달걀 속에 있는 병아리 같이 나는 영혼이 갇혀 있다는 의미가 다가왔다. 세상에서 그 영감은 깨달음을 얻은 도인(道人)으로 보고 있기도 했다. 뭐 도인도 여색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부탁은 부탁이었다. 나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성실하게 경호 임무를 수행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내 가슴을 가로막고 있는 막을 화두같이 떠올리곤 했다. 나는 분명 그런 답답한 인간인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섯 살 때 맹인이 된 그 사람같이 나는 막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자각할 수가 없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듯이 나는 노력을 했다. 책을 보면 사람마다 막을 찢고 나오는 계기가 있는 것 같았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병영에서 보초를 서다가 깨달았다. 마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걸 보고 하나님께 깨달았다. 유대교의 광신자 사도 바울은 크리스챤들을 잡아 죽이다가 길거리에서 번쩍하는 빛을 보고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사흘간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깨달음의 상징 같았다. 거울을 보면 눈썹까지 하얗게 바래고 있다. 인생의 말년이 왔는데도 나의 영혼은 아직도 젖꼭지를 입에 물고 있는 단순한 어린아이인 것 같다. 수시로 분노하고 욕심을 내고 어른답지 못하다. 평생을 꿈속에서 그리고 영혼이 두뇌라는 막 안에 갇혀 보아도 보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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