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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뻔뻔함을 반성한다

운영자 2021.05.17 10:22:10
조회 98 추천 2 댓글 0

나는 뻔뻔스러웠던 걸 반성한다.




나이 칠십 고개의 대학 동기 세 명과 하룻밤 자는 짧은 여행을 했다. 오십년전 대학 시절 기억의 영상을 끝없이 떠올리면서 차 안에서 즐겁게 얘기들을 나누었다. 변호사를 하는 친구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엄 변호사 너는 한동안 검게 물들인 무명 한복을 입고 법정을 다녔잖아? 그걸 보고 네가 무척 가난한 줄 알았어. 그래서 너를 볼 때마다 내가 네 번이나 밥을 샀는데도 너는 밥을 사지 않는 거야. 그런데 지금 알고 보니까 그때도 너는 나보다 훨씬 잘살고 돈이 많았어.”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에게 네 번이나 밥을 얻어먹은 기억조차 없었다. 그는 속으로 은근히 괘씸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워낙 좋은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지독히 뻔뻔스러웠다. 지난해 연말 그에게 더 염치없는 짓을 했었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다가 나는 불쑥 집을 나갔다. 여관이나 호텔에 가서 혼자 잔다는 게 청승맞은 것 같았다. 갑자기 두물머리 강가의 작은 집에서 혼자 사는 그가 생각났다. 그렇게 자주 만나거나 친하지는 않은 사이였다. 대학 동기라 그의 법률사무소가 있는 법원 쪽에 재판이 있을 때 잠시 들려서 얼굴을 본 정도였다. 나는 양수리역에서 내려 그에게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가 몰고 나온 차를 타고 무조건 그가 혼자 사는 방으로 쳐들어갔다. 물을 끌어 올리는 모터가 고장이 나서 강가 그의 집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는 좁은 방 온돌 침대에서 자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그의 침대 속으로 들어가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가 내게 이런 불평을 했다.

“싸우고 집을 나왔다는 친구가 코를 골면서 어떻게 잘자는지 덕분에 나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 친구는 싱크대에 양팔을 짚고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한쪽 발이 불편한 친구였다. 그는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개결한 자존심이었다. 하기야 일을 모르는 내가 도울 능력도 없었다. 그는 네 번 밥을 산 정도가 아니라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밥을 나에게 해 바친 셈이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 그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 사이 허리가 갑자기 아픈 나를 데리고 그 친구는 시골병원으로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뻔뻔스런 인간이다. 열 다섯살 소년이던 시절 내가 선망하던 동네의 예쁜 자매가 있었다. 동네 친구의 사촌누이들이었다. 차갑고 어둠침침한 방에서 혼자 지내던 내가 동네 친구의 집을 찾아온 그 자매를 보면 환하고 따뜻한 빛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친구를 만난다는 핑계로 자매가 그 집에 있는 날이면 매일 그 집을 찾아갔었다. 그냥 함께 있는다는 자체가 소년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자매중 동생은 명문 여중을 다녔고 언니는 명문여대를 다녔다. 둘 다 미녀였다. 한번은 자매가 사는 약수동 언덕집까지 놀러간 적이 있다. 그 집 식구들이 상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집 아버지가 모르는체 하면서 중학생이었던 내게 밥을 먹고 가라고 했다. 사양하지 않고 끼어들어 맛있게 밥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군대시절 전방에서 장교로 근무하다가 사단장실에서 역대 사단장이던 장군들의 사진이 걸려있는 걸 무심히 봤다. 밥 먹고 가라고 하던 그 자매의 아버지의 얼굴과 이름이 그곳에 걸려있었다. 군사정권 시절 높은 사람이었구나를 처음으로 알았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나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재벌가인 친구 집안의 사건을 맡게 됐다. 우연한 기회에 그 재벌가의 인척 며느리로 들어온 분이 뒤에서 나를 밀어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안 문중 회의에서 변호사선임을 위해 의논할 때 내 이름을 전해 듣고 적극적으로 나를 민다는 내용이었다. 열다섯 소년 시절 선망하던 동네 누나였다. 따뜻한 마음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소년 시절 내가 그 집에 밥상머리에 끼어 밥을 먹었다는 얘기까지 재벌가 노회장 부인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나서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절제했다.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보름달 같이 아름답던 자매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넉넉한 할매들이 되어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도한다. 때로는 뻔뻔한게 좋은 추억을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밥을 네 번이나 샀는데도 안 산다고 불평한 친구에게는 아예 죽을 때까지 밥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는 그럴 능력도 있다. 절대 남의 밥을 안먹을 놈이 입으로만 내가 밥을 안 샀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그의 넉넉한 마음에 속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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