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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배역을 맡고 싶어서

운영자 2021.06.07 10: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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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배역을 맡고 싶어서




늙어서 한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정다운 친구가 있다. 이제는 원로 배우인 탈랜트 정한용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나왔다. 대학 시절 나는 정한용이 연포해수욕장에잠시 차려놓은 해변 까페에서 며칠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며칠 전 함께 점심을 하고 스타벅스에서 까페라떼를 사 들고 사무실로 올라가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구청 문화센터에서 하는 연극학교에 나가 감독을 한 적이 있어. 연극을 한다는 게 이게 아주 좋은 면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 함께 뭔가를 한다는 거지. 팜플렛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무대장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조명이나 미술 같은 스텝진이 있어. 무대 위에 올라서는 배우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는 거야. 마음을 모아 뭔가를 이룬다는 게 아주 재미있고 보람이 있는 거지. 한번은 스텝역할을 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교대해서 배우로 출연을 해 보기도 하고 말이야.”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어려서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날 하던 어린이 연극이 생각났다. 웃통을 벗고 군용담요를 둘러쓰고 막대기를 짚고 성경 속의 동방박사 흉내를 내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난하고 없던 시절 어설픈 교회 무대라고 해도 그날은 가장 화려하고 기쁜 날이기도 했었다. 무대장치로 바른 은박지와 금박지를 보면서 나는 신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도 했었다. 친구 정한용이 말을 계속했다.

“공연을 하는 날이면 그 연극에 관계된 사람들이 가족이나 주변의 친척들을 불러서 공연장이 꽉 차.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구경을 해. 공연이 끝나면 배우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은 특히나 박수를 받으면서 성취감을 느끼지. 그런데 그런 아마추어 연극에서도 참 미묘한 게 있어.”

그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뭔데?”

“거기서도 좋은 배역을 맡으려고 사람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거야. 하기야 여왕 노릇을 하고 싶지 누가 하녀가 되고 싶겠어? 온통 가족들이 와서 보는데 말이야. 좋은 배역을 맡고 싶어서 그런지 어떤 사람은 감독인 나를 따로 만나 부탁을 하려고 하더라구.”

아무리 짧은 순간의 공연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거기서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해가 갔다. 얼마 전 동네 작은 성악발표회를 간 적이 있었다. 은퇴 후 뒤늦게 성악을 배운 노인들이 작은 공연장을 빌려 친구들 몇 명을 초청해 발표를 하는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서도 비교와 경쟁이 있는 걸 봤다. 중심에 서고 싶은 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 같았다. 무용수들의 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한 무대 뒤의 피 튀기는 경쟁을 얘기 들었다. 그러다 보니 기억의 우물 깊은 곳에서 이미 죽은지 오래된 한 유명한 원로 여성 탈랜트의 얘기가 물방울이 되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 사람은 탈랜트 여운계씨였다. 고려대를 나왔다는 그녀는 초창기 시험을 치고 탈랜트가 됐었다고 했다. 우수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녀는 미모가 바쳐주지 못해 항상 뒷전에 쳐졌었다고 했다. 가족이나 주변에서는 그녀가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걸 알고 관심을 가지고 살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처음에 배정받은 역은 교통사고의 피해를 당한 사망자 역할이었다고 했다. 가마니를 덮어쓰고 발만 내놓은 역할이었다. 그 장면을 찍으면서 어둠 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그녀는 내게 얘기했다. 그 다음으로 식모나 청소부 역할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인내하고 버티면서 연기력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고 그녀는 얘기했었다. 우리가 사는 인생도 한바탕의 짧은 무대가 아닐까. 어려서부터 좋은 배역을 맡기 위해 주인공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자리다툼을 하고 살아왔다. 하녀역을 맡고 나서 나는 이런 배역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여왕처럼 행동한 우스운 일도 많다. 삶을 살다 보니 엑스트라건 문지기 같은 단역이든 조역이든 하나님이 정해준 배역이 있었다. 단 한 장면에 나오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감독이고 연출인 그 분이 흡족해 하시는 걸 이제야 알았다. 진작에 이런 걸 알았더라면 좀 더 행복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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