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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든 정원

운영자 2021.06.28 09: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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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든 정원




강가에 혼자 살고 있는 수도사 같은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해서 말했다.

“누가 나한테 카톡을 보냈는데 네 고등학교 몇 년 선배 되는 이홍훈 대법관 말이야. 퇴임 후 부인과 함께 낙향해서 정원을 가꾸었는데 좋아 보이더라. 그런데 암에 걸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나 봐. 방송에서 인터뷰를 한 것 같은 데 한번 유튜브에서 찾아봐.”

우리 같은 법조인에게 대법관이라는 자리는 인생 사다리의 마지막까지 올라가야 앉을 수 있는 영광이었다. 그런 영광 뒤에는 산그늘이 지고 인생의 저녁 어둠이 오기 마련인 것 같았다. 나와 좋은 인연은 아니었던 대법관이 있었다. 그가 고등법원의 재판장이었을 때 나는 그에게서 심한 모욕감을느꼈 던 걸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재판장 석에 삐딱하게 앉아서 그는 방청석에 있는 내 의뢰인의 가족을 불러세웠다. 그들에게 나의 변론서를 손에 들어 보이면서 이런 실력 없는 변호사는 잘못 선임한 것 같다는 취지로 말했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갑자기 온 몸에 오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치욕을 느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일찍 판사가 되어 자만심이 강했던 그에게 나의 변론서는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시각에 따라 재판장인 그에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나에게만 그렇게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재판에 들어갔던 상당수의 변호사가 그런 수모를 겪었다고 욕을 하는 걸 보기도 했다. 재판뿐 아니라 윗사람에 대해서는 처세에도 능력 있는 그는 대법관이 됐다. 어느 날 대법원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던 법과대학교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을 전했다.

“그 대단히 잘난 대법관 말이야 같이 토론자가 되어 논쟁을 하는 데 자기 같은 대법관이 어떻게 돈 몇 푼이 오가는 사건들을 심리할 수 있겠느냐는 거야. 대법관들의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시킨다는 거지. 정말 세상 모르는 건방진 발상 같았어. 서민들은 그 몇 푼의 돈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고 대법관이라고 해도 그런 서민들의 시각에서 생각해 주는 게 법의 배려 아닌가? 그게 법의 사명이고 말이지.”

그 철이 없는 대법관은 국무총리나 대통령에 관한 사건이 자신에게 배당되면 온 정성을 바쳐서 일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한번은 사위가 부장판사를 하는 선배가 사석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그 유명한 대법관이 말이지 지방법원 부장판사인 우리 사위에게 연락을 해서 사건을 부탁하더래. 그런데 내 사위가 보니까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케이스더라는거야. 그래서 죄송하다고 하고 그 청탁을 거절했더니 뒤에서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더라는 거야. 거 참.”

그 대법관에 대해서는 선호가 분명히 갈렸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잘해주고 잘 못 보이면 나같이 공개적인 능멸을 당하기도 했었다. 세월이 가니까 그도 높은 의자에서 내려왔다. 시간이 흐르고 바람결에 그가 암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평범한 하나의 인간으로 내려오고 병을 앓으면서 많은 걸 깨달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그가 회복되어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활약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그에게 병은 하나님의 메시지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분이 주는 메시지였다면 더 이상 돈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법조인의 정상인 대법관 자리에서 내려온 이후의 행태도 여러 가지였다. 나는 유튜브에서 강가의 친구가 전해준 이홍훈 대법관의 인터뷰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그는 평범한 시골 노인이 되어 삽질을 하고 외바퀴 수레에 블록을 싣고 땀을 흘리면서 정원을 만들고 있었다. 낫으로 풀을 베서 퇴비를 만드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담도암이 간에가지 전이된 그는 멸망하는 지구를 두고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같이 자기가 살던 깡촌의 고향집 앞 밭을 꽃밭으로 변신시키고 있었다. 그는 아픈 딸과 함께 꽃을 심고 물을 주면서 진작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둘째 딸이 일을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잠시 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스케치 하고 있었다. 대법관의 영광보다 평생 그가 재판을 해온 그 많은 사건보다 그가 한 시골 영감으로 죽기 전에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정원이 훨씬 소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천국을 간 후에 그 자식들과 손자들이 할아버지의 영혼이 깃든 정원에서 밤하늘에 깔린 무수한 별들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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