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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싫었다.

운영자 2021.07.05 09: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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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싫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장교복을 입은 육군 대위 출신이 지휘하는 학생부대의 군인이었다. 엠원소총을 들고 총검술을 하고 눈을 감고도 총기를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었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첫 문장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나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의 한 병사로 키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역적기질을 물려받았던 것 같다. 교장 선생님이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문장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싫었다. 개인인 내가 그냥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때는 저녁에 국기가 내려올 때 멀리 가까이서 차렷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그때 그냥 내 할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잠시 후 상급생이 다가와 나의 뺨을 때렸다. 국가관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게 시대의 분위기였다. 대학 일학년 무렵이었다. 나는 데모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미팅을 하고 도서관에서 소설 한 권 읽는 게 훨씬 즐거웠다. 그런데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날 때면 학생지도부에서는 꼭 나 같은 인물을 시위대의 맨 앞에 배치했다. 그것도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스크럼을 짜게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힘차게 전진하라고 데모 주동자들이 선동했다. 민주화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 게 된다고 해도 나같이 정치적이지 못한 평범한 집안의 아들들은 별로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전문시위꾼들은 국회의원 보좌관자리라도 꿰어차고 정치 쪽을 기웃거리겠지만 우리는 동원된 이름없는 군중의 한 명이었다. 데모 때 보면 벌써 힘 있는 집안과 개뿔도 아닌 집안의 아들은 차이가 났다. 한 친구가 경찰차를 향해 돌을 날려 유리창을 깨다가 검거됐다. 그 친구는 저녁때 훈방되어 나왔다. 아버지가 국회 위원장이고 여당의 실력자라고 했다.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던 또 한 친구도 나왔다. 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이었다. 빽 있는 집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다 법의 그물에서 빠져 나왔다. 나같이 맨 앞에 있다가 사진이 찍히거나 잡힌 힘없는 집 아이들은 자칫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석방은커녕 실컷 두들겨 맞고 신세를 조졌다. 병역 문제에서도 있는 집 없는 집의 자식들 사이에서 차이가 났다. 힘 있는 집 아이들은 병역면제가 많았다. 학교시절 멀쩡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군 복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나쁜 걸 몰랐던 것 같았다. 군대를 가도 방위병으로 집에서 동사무소로 출퇴근을 하던가 서울지역의 편한 부대에 가서 근무를 했다. 나중에 그들 대부분의 진단서가 가짜인 걸 알았다. 나는 가기 싫은 군대를 장교로 끌려갔다. 훈련소에 입소해서 먼지가 풀풀 나는 연병장을 끌려다니면서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나라 지키는 보람에 산다’고 꽥꽥 소리쳐야 했다. 속으로는 나라 지키는 보람보다는 내가 하던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눈이 두껍게 덮힌 전방으로 갔다. 수은주가 영하 이십도 아래로 떨어지는 휴전선을 밤새 적의 선전방송을 들으면서 순찰을 돌곤 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진다고 했다. 그냥 닥쳤으니 그 일을 할 뿐이었다. 우연히 군대 생활을 남들의 두 배 이상 했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당당 하려면 군대를 갔다 오고 세금을 내야 한다. 그게 국민의무의 전부라는 생각이다. 기업도 수다를 떨 게 없다. 기업은 이익을 내는 게 목적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 세금만 내면 된다. 국가는 그 돈으로 살림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기업보고 사회사업과 공익을 위하라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본질은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는 변호사업을 하고 재산을 증식하면서 이것 저것 합쳐서 수십억원은 국가에 세금을 낸 것 같다. 남에게 뒤지지 않게 기부도 했다. 그만하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맡기 싫었어도 기본적인 국민 노릇은 한 것 같다. 그냥 자기가 선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 되는 게 아닐까. 국가와 민족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정치인 중에 제대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이 많지 않다. 나라를 위한다는 의원 중에는 뒤에서 탈세하는 사람도 많다.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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