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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갤문학대회/단편] 안녕, 게일 - 下

안녕게일(211.37) 2020.01.16 00:32:52
조회 745 추천 65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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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많아서 글이 이상하게 업로드되었기에 두 편으로 나누어 다시 올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ㅜㅜ


안녕 게일 - 上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3650740




6년이란 세월은 생각보다 쉽게 망각 속으로 가라앉는다. 또다시 왕국에 위험이 닥쳐 마법의 숲으로 모험을 떠났던 기억은 일상으로 덧칠되어가며 많은 부분이 흐릿해졌다. 군주의 위치에서 여기저기 바쁘게 살아가는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기억력이 약해지는 탓인지, 한 때 어른이 되기만을 꿈꾸던 나에게 있어 사계절의 변화는 이제 새로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때의 기억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고, 잊어서도 아니 되었다.


아토할란의 부름을 받아 5번째의 정령이 된 나의 언니 엘사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의 곁을 떠났다.


엘사는 말했다. 정령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고. 때문에 당분간 서로 헤어져 있어야 한다고. 34년 동안 인간과 정령 사이의 간극이 심해진 탓에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토할란의 의지를 이어받아 당분간 깊은 심연 속으로 들어가 그 책무를 맡아야 한다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할 일을 찾았으니 서로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언제 돌아오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그것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인정 할 수 없다.

아니, 인정해서는 안 되었다.

13년간 닫혀졌던 문을 열어젖히고 얼어붙은 세상을 되돌린 보상이 고작 3년이라고?

이 무슨 얄팍하고도 지독한 운명의 굴레인가.

왜 나는 항상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나는 가족으로서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변하지 않는 행복을 누릴 수 없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상황에 조금씩 회복하고 있던 나의 심장은 예전처럼 다시 얼어붙다 못해 조각조각 난도질당하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역겹고 억울하기만 했다.

엘사의 귓가를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괴상망측한 목소리

엘사를 끊임없이 위험에 빠뜨리는 초자연적인 현상들.

뜬금없이 예언서가 되어버린, 어린 시절 귓가를 간질여댄 자장가.

너희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을 앗아가고 이제는 마지막 남은 나의 혈육마저 빼앗아 가려는 건가?


내가 살아갈 의미를 앗아가 버리는 이 상황이 싫다. 너무나도 싫다.

나에게서 소중한 것들을 자꾸 빼앗아가는 이 세상이 밉다.

그토록 후벼 파진 마음을 고통스러워도 억지로 부여잡아 참고 꿰메어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려 하는데도 냅다 잡아 뜯는 운명의 가혹함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토할란이 엘사의 근원이라면......대체 왜 엘사에게 마법을 주었는가?

왜 하나밖에 없는 내 언니가 마법을 가진 채로 태어났는가?

마법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엘사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터이다.

매일같이 계단을 올라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면서 마음이 시려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겨울마다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지낼 수 있었을 테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조차 가로막혀 쉴 새 없이 쾅쾅 두드려대던 단 한 쪽의 문쪼가리도 그냥 쉽사리 열어젖히고 서로 보듬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책임지기 위해서 장장 13년 동안 마법을 저주로 여기고 강박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홀로 고통 받아야 했었다니? 도대체 선조들이 쌓아올린 업보를 왜 하필 우리 언니가 지고 살았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문을 또 다른 의문을 낳고 분노와 부정의 감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늘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언젠가 더 좋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살아왔으나 살아가는 이유 자체를 상실해버린 지금만큼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가족을 향한 내 마음을 줄곧 지켜나가리라 다짐했지만

지키고자 하는 것들은 변해버리고, 바꾸고자 하는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저 멀리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수평선의 바다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한 사람, 물의 정령을 타고 나에게 달려오는 엘사를 바라보자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불안과 공포는 더 이상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턱밑까지 차올랐다.

새하얀 눈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한 언니가 지면에 살포시 발을 내딛어 나를 쳐다볼 때, 나는 줄곧 부정해왔던 사실에 끝내 체념해버렸다.


엘사는 결국 변할 수 없는 사람,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기에, 나와는 고민하는 방법도 달랐고 행복의 의미도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달랐던 것이었을까.

결국, 내가 무슨 노력을 한다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었을까.

13년이라는 세월의 간극 속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불협화음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서로간의 부족한 점을 알아가고 두 손을 맞잡고 걸어간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온갖 사고회로를 돌려 봐도 도달하는 결론은 절망뿐이었기에 엄습하는 쓰라림은 간장의 마디 하나하나를 사정없이 끊어내고 있었다.


나는 엘사를 부여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왜 언니여야만 하냐고, 왜 또 이렇게 날 떠나서 멀리 가버리는 거냐고, 나는 나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할 일을 하면서 같이 지낼 수는 없냐고 언니의 팔을 쥐어 잡으며 질문했다.


이제야 언니와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됐는데 왜 다시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건지,

우리가 함께라면, 모든 것을 이겨나갈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는지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뱉지는 못하고 목구멍에서는 그저 서러운 곡소리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우리는 ‘할 일을 해야만 해’ 안나. 알았지?....넌 씩씩하고 용감한 아이니까 틀림없이 나보다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언니의 품에서 울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티 하나 없이 새하얀 순백의 얼굴, 고결하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한 백금발의 머리칼, 그 얼굴에 수놓인 맑고 깨끗한 토파츠 블루의 깊은 눈동자. 매일같이 본 소중한 언니의 눈동자에서도 나처럼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나야. 비록 내가 다섯 번 째 정령이지라지만, 세계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어. 내가 정령과 자연의 다리를 잇는다면 너는 아렌델과 인간의 다리를 이어주는 존재야. 그러니 너도 아렌델을 위해, 인간들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하렴.”


떨리는 목소리로 맞잡은 두 손을 더욱 꽉 쥔 언니의 손. 차디찬 냉기가 흐르면서도 따스한 온기가 공존하는 그 손을 나는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줄곧 울기만 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사랑스러운 동생아.....어디서나 널 지켜보고 있을게. 언젠가 다시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볼을 쓰다듬는 언니의 손에 오한을 느꼈다.


잠깐 얼굴에 느껴진 차디찬 감촉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사랑해, 안나....”


그 말을 끝으로, 하나밖에 없는 나의 언니는 무수한 눈의 결정이 되어 공중에 흩뿌려졌다.


뚜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크리스토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나는 통곡하다 못해 실신해버렸고 그가 나를 스벤에 태워 내려왔다고 한다.




* * *




“참나...보고 있기는 한 거야 언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노을빛 밀밭에서 안나는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하늘을 지긋이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목이 멘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살랑살랑 기분을 간질이던 바람은 저녁놀이 붉게 타오르면서 어느새 쌀쌀하게 변해있었다.


“그래, 안나. 다시 마음 추스르고 할 일을 해야지.”

몸에 두른 스카프를 그녀는 양손으로 꽉 쥐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자 사라져버린 엘사가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던 것.

여왕으로서의 책무를 맡은 지 수 년이 지나서야 안나는 자신의 언니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얼마나무거웠는지, 왜 언니가 그토록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는지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우아하며, 품위를 잃지 않고, 속마음을 감추며, 모두에게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하는 여왕. 이 압박의 무게를 그녀의 언니는 통제할 수 없는 마법과 함께 지고 왔던 것인가. 엘사 스스로는 자신을 싫어했을지 몰라도 안나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고 이상적인 존재였다. 물론 조그마한 일에도 문 닫고 혼자서 끙끙 앓는다는, 조금은 큰 흠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존재였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혼란스러워하던 엘사는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불안감을 감춰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안나는 엘사의 고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지난날의 대화를 돌이켜 곱씹을수록 잘못만이 머릿속 한 켠에 쓰디쓴 잔재로 남아있었다.




* * *




“그저...내가 모든 걸 다 망쳐버릴 까봐 두려워서 그래.”


“오 엘사, 나는 너를 이토록 이해하는데 너는 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이해? 무엇을 이해하기에 그리 간단히 입 밖으로 내뱉었을까. 인간의 세계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자신의 능력에 불안해하고 어째서 자신만이 마법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는지 고뇌에 빠진 언니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알고 있다니,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얼어붙은 심장이 한 번 녹았다고 해서 모든 고민이 해결된 줄 알았던 나는 완전히 착각에 빠져 살고 있던 것이었다.


“안나, 네가 없으면 난 어떻게 될까.”


“그럴 일 없도록 늘 함께 있을 거야.”


침대 위에서 다짐한 나의 말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나.

스스로 질문을 내릴수록 의구심은 더욱 세져만 갔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 소리를 듣고도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거야?”


“미안, 안나. 차마 널 걱정시킬 수는 없-”


“우리 사이에 비밀 없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또 감추는 건데?”


차마 남에게 뭐라 말할 수 없기에 고개를 내리깔며 입술을 달싹였던 언니를 나는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비밀을 감추었다는 사실에만 집착하며 정작 언니가 나에게 왜 말을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또, 또 혼자만 등에 짊어지고 해결하려 하는 거 봐! 자장가 잊었어? 혼자 깊숙하게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 잖아?그걸 알면서 혼자 가겠다고? 어제도 불 속에서 혼자 불 다 끄려고 한 것도 그렇고 대체 언니는 왜 맨날 그리 무모한 건데!!”

“네가 방금 말했잖아, 이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가지 말라니? 안나, 이건 내 문제고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야. 아토할란으로 가는 여정은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여정과는 차원이 달라. 나 혼자서 가기도 벅찬데 너까지 따라오면 어쩌자는 거야? 너야말로 맨몸인 주제에 어젯밤 불 속에 함부로 뛰어들지를 않나 무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니? 언제까지 언니가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야!”

“누가....누가 가지 말라했어? 가도 좋아, 좋다고! 하지만...자꾸 혼자서만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언니가 누군지를 찾는 거 나도 궁금해! 그런데 그걸 알기 위해서 혼자서만 죽기를 각오하고 희생하려 하지는 말란 말이야....엘사, 제발 모든 걸 혼자서만 하려 하지 마. 우리 함께 하기로 약속했잖아? 3년 전 아렌델을 녹일 때도, 내 생일파티에도, 크리스마스 때도 우리 함께라면 다 헤쳐 나갈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다시 혼자서만 하려 해? 제발, 엘사....너마저 잃으면, 난 정말 살아갈 이유가 없어. 제발 부탁이야. 나도 함께 하게 해 줘....”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는 약속이 무색하게 언니는 나를 다시 저만치 밀어냈다.

지난 3년 동안 언니와의 관계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나에게는 더없이 큰 충격이었다.

사실, 엘사와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우리의 관계는 결국 언제나 이대로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구나...앞으로 닫힐 리가 없다고 여긴 문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닫혀있었기에 보이지 않는 데에서까지 우리를 다시금 갈라놓고 있었구나.

삶의 목적과 이유, 원동력을 잃어버린 나는 한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깨달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마법을 타고난 엘사는 변하지 않고, 마법이 없는 나는 변하지 않는다.

자연과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살펴야 할 엘사의 역할은 변하지 않고, 주변의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고 책임져야 할 나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변하게 하려 할수록 경계가 그어지고 막이 생기고 벽이 만들어져 열리지 않는 문을 만들어낸다.


나의 할아버지는 세계와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강제로 자신의 뜻에 복종시키기를 원했고

나의 아버지는 의도가 어떻든 간에 변할 리가 없는 엘사의 본질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 했으며

나 역시 언니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였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이기심에 사로잡혀 다름을 강제로 변화시키려 한, 아렌델 왕가가 지닌 악순환의 고리.

때이른 겨울이 불어 닥쳐 온 아렌델이 냉랭한 설원의 세계로 탈바꿈하고, 정령의 소동으로 아렌델의 땅이 뒤틀리고 물이 메마르며 돌풍이 휘몰아치고 한 줄기 빛조차 사라져 암전된 지난날의 혼돈은 어쩌면 자연이 아렌델에 내린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그리고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나야 함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그토록 엘사에게는 제발 문 좀 열고 나를 봐달라고, 나에게 살아갈 의미를 달라고 고함치던 나는 정작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나서려는 엘사의 문을 다시 잠그려 하고 있었다.

차갑고 시린 손길만을 지녔기에 나에게 가까이 오기를 거부했던 언니가 직접 나의 손을 늘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던 따스한 온기를, 그저 찰나의 순간이 아닌 영원한 행복으로 간직하고 싶었기에 나는 차갑고 시린 손길을 가진 이유와 아픔에 늘 염려하던 언니의 고민이 나의 행복 속에 비집고 들어올 틈새 하나하나를 무의식적으로 막으려 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채고 깨달았으면 엘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철이 들었다면, 심장이 얼어붙기 전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생각했다면 홀로 걱정하던 언니의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소중한 언니를 저 편에 보내고 나서야 밀려드는 후회는, 너무나도 때늦은 후회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아프고 후회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평생 등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속죄의 궤짝이다. 엘사가 선조들의 잘못을, 대자연의 의지를 떠맡아 희생한 것처럼, 지난날 나를 괴롭혔던 외면당한 아픔을, 앞으로 나를 평생토록 매질할 상실과 후회의 채찍을 나는 견디고 또 견뎌야 한다.

늘 감추고 느끼지 않으며 홀로 숨어서 자신을 부정하던 엘사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어둠의 바다 앞에 서서 두려움에 맞선 것처럼, 나도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놓인 무수한 가시밭길 앞에 서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헤쳐 나갈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변하지 않는다.



* * *


“그래....변하지 않는 것은 아주 많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안나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


거친 바람이 나뭇잎과 밀밭을 흔들고 여왕이 두른 스카프가 정신없이 휘날린다.

그녀는 스카프를 쥔 두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어머니의 기억, 엘사의 기억이 스며든 스카프.

그리고 이제 안나 자신의 기억이 스며들고 있는 스카프....

문득 안나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가 떠올렸다. 북쪽의 바람이 바다와 만나는 강, 모든 기억이 잠들어 있다는 그 강. 우리들의 기억이, 어머니의 기억이 담겨 있다는 강을 구슬프게 노래하는 자장가.

더 이상 그 자장가를 가족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안나에게는, 이 스카프만이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한 어머니와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 때의 엘사도 지금의 안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터이다.

아토할란이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마 엘사는 그곳에서 어머니의 기억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영원히 어머니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줄곧 닫혀진 문에서 자신을 봉인한 엘사.

그런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탱하려 한 부모님마저 자신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죄책감, 저주와도 같은 빙결의 능력 때문에 검은 상복조차 입지 못하고 한없는 비애와 자괴감에 갇혀 산 가엾은 왕가의 장녀.

홀로 방안에서 제멋대로 피어져 오르는 냉기를 억제하기 위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도 피차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절규와 자학의 울음소리를 틀어막지는 못한, 여름의 태양빛을 만끽하고 싶어 했지만 늘 겨울잠에 들어야만 했던 소녀.

오직 스카프로만 어머니의 흔적을 더듬으며 절망과 공포를 억눌렀던 그녀의 유일한 혈육은

이제 비로소 그토록 원하던 어머니의 품에 영원히 거할 수 있으리라.


어머니, 엘사를 가두고 통제하려 한 아버지의 모습에 당신은 어떠하셨을까요?

그 누구보다 마법에 친숙하고 정령들과 소통하며 열린 모습으로 다가선 당신께서 모든 문을 닫고 소통을 차단하며 마법을 가진 자신을 저주하는 엘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할아버지께서 마법이 자만심을 가져다준다며 노덜드라인들을 배신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마법을 있어서는 안 될 저주로 생각하며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편해지기 위해 억지로 바꾸려는 우리들의 모습에, 어쩌면 아토할란이 우리에게 벌을 준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들도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을까요...



* * *



기나긴 상념에서 벗어난 안나는 문득 주변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휘몰아치던 바람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고 서쪽을 향해 기울어진 저녁놀은 하늘에는 주황빛과 보랏빛의 단층을, 황금의 밑밭에는 더욱 붉은 빛을 비추었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 안나가 궁금해하던 찰나, 저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아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작은 바람소리는 안나에게 만큼은 분명 낯이 익은 소리였다.


흡사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아이의 목소리 같기도 한 바람의 소리.

한 방향으로만 부는 것이 아닌,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어가며 나뭇잎과 함께 요리조리 날아다니는 바람의 형상.



안나의 눈앞에서 멈춘 바람의 곡선은,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한 때의 친구였다.



“...안녕, 게일?”


예상외의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 안나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는지 게일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안나 주변을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안나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젓기도 하고 망토 사이를 들썩거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안나는 스카프를 부여잡은 채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서있을 뿐이었다.


문득 황색의 빛을 받아 게일의 주변에 반짝거리는, 무언가 이상한 흔적이 보였다.

예전과는 다른 게일의 형상에 안나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아.....”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눈의 결정이었다.

좌우 대각으로 펼쳐진 마름모꼴의 얼음 크리스탈에 각각 새겨진 4정령의 표식, 그 가운데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롭게 핀 작은 눈송이.

작지만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

그것은 과거에 안나가 언니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벽 한쪽에 매달려 청명한 푸른빛을 발산하는 추억의 모양.

기하학을 매우 좋아하던 그녀의 언니가 자주 공들여 조각하던 프랙탈(Fractal) 형상의 눈송이였다.


안나는 떨리는 두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고 이유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음을 두 손이 뜨겁게 느끼고 있었다.

흡사 오랜 여행 끝에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온 그립고도 낯익은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게일은 그녀가 기뻐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도 지쳤는지 이제는 맴돌기를 멈추고 조용히 안나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다. 자신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주저리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람의 정령이 가져온 소식들을 먼저 접하고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그 전에 안나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스카프를 꽉 쥐고 있던 그녀의 양손은 이제 잠든 아기를 토닥거리듯이 양 쪽 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천천히 뜬 안나는 게일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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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은 게일이 옛날에 함께 뛰놀던 소녀에게서 본 미소이자 5대 정령의 미소였고, 동시에 성숙한 어른이 된 아렌델 왕녀의 성숙한 웃음이기도 했다.



화해의 날로부터 6년째를 맞이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안나는 마침내 언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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