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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문학대회 참가작] 엘사에 대하여 - 1

Arp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18 00: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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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여왕으로 즉위한 이후, 아렌델은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선대 국왕인 엘사가 엄청난 성군이었기에 안나도 그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백성들이 만족할만한 복지를 베풂과 동시에 주변국들과의 교류도 잊지 않았다. 비록 엘사가 틈틈이 도와주러 온다고는 하지만 그녀 또한 노덜드라에서 정령으로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안나는 거의 혼자서 국정 업무를 수행했다. 끊임없는 서류작업과 타국방문을 하느라 힘이 들 때면 안나는 창밖으로 나가 일상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 이제 막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햇병아리 여왕님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더 많은 걸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안나는 이제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두고 있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라고 했던가. 자매는 한마음이고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하나라고 했지만,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바람에 실려 서로의 안부를 묻던 종이비행기는 날이 갈수록 그 빈도가 차츰 줄어만 갔다. 비극적인 것은 안나는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가 점차 줄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엘사는 그것을 크게 느끼고 있지만 안나가 짊어진 왕관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엘사 자신이 조금씩 편지를 쓰는 횟수를 줄여갔다는 것이다. 이제 서로의 자리를 존중해줘야 할 때가 왔음을 안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엘사와 안나 뿐만 아니라 말하는 눈사람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릴 적 그녀들의 모습처럼 이 유쾌한 눈덩이 역시 왕실도서관 이곳저곳을 누비며 세상의 이치와 수많은 인생을 탐닉했다. 올라프는 특히나 철학적인 책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관점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의문을 즐겼다. 그리고 그건 한 나라를 이끄는 아주 바쁜 여왕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나는 누구일까요, 안나?"


가끔은 국서인 크리스토프가 상대해주면 좋겠지만, 그 특유의 서투른 말투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꼬마철학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나도 이미 인지하고 있기에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뭐냐니. 올라프는... 올라프지! 우리 철학자 선생께서 이번엔 어떤 책을 읽고 오신 걸까? 오우. 고마워, 게일!"


때마침 게일이 안나에게 잘 접힌 종이비행기 편지를 건네주었지만, 올라프의 질문에 대답하기 바쁜 안나는 손을 뒤로 뻗어 편지를 자신의 가방 안에 몰래 넣어두었다.


"그냥 문득 의문이 들었죠. 엘사는 이제 정령이 되어서 노덜드라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던 뭘 하던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고, 안나도 지금 여왕이 되어서 아렌델을 다스리는 여왕이 되었잖아요! 크리스토프도 안나에게 청혼을 했고요. 맙소사!"


올라프는 게일이 왔다 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뭇가지가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지금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나타내주었다. 엄청난 기세로 말을 하던 올라프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마법의 숲에 다녀온 이후로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것 같은데 정작 난 내 자리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네요. 젊은 나이에 언니의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꿈을 이룬 안나라면 자신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폭포처럼 쏟아지는 올라프의 말을 듣고 안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최대한 올라프가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올라프를 보면 난 엘사와의 어린 시절 추억도 떠올릴 수 있고, 또 올라프와 이겨낸 수많은 시련도 생각이 나. 물론 내가 힘들 때 옆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도 올라프고 말이야! 크리스토프가 들으면 서운해할 테니 어디 가서 말하진 말구."


마지막은 일부러 기분 좋게 해주려고 올라프를 띄워준 거였는데도 정작 올라프 본인은 여전히 눈썹을 모으고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안나의 이야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으로 만들어진 뭉뚝한 두 다리가 이리저리 왔다 가며 올라프의 감정을 대변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안나에게 큰 의미가 되는 건 아주 기쁜 일이지만, 역시 내가 누군지에 대한 답변은 되지 못하네요. 나 자신만의 의미가 무언지 참 궁금하네요. 그저 엘사와 안나의 중요하고도 녹지 않는 친절한 눈사람으로 그쳐도 되는 걸까요? 이것도 어른이 되면 이해가 될까요?"


솔직히 올라프의 고민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던 안나는 밤을 백번만 더 자면 금세 어른이 될 거라는 달콤한 말로 올라프의 마음을 녹이고 철학의 감옥에서 탈출했다. 몸은 올라프에게서 떨어져서 자유로웠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곧 안나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잔잔한 호숫가에 던진 돌이 되었다.


'나는 누구지?'


올라프의 말대로 그녀는 아렌델을 다스리는 여왕이었다. 하지만 '아렌델의 여왕' 한 문장만으로는 그녀를 규정짓기 너무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오던 안나는 그제야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끊임없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지막으로 문 꼬리의 끝은 결국 크리스토프였다.


"나는 누굴까요?"


생전 처음 받아보는 질문에 사랑에도, 조언에도 서툰 새신랑은 머리를 긁적이며 가장 그다운 말을 했다.


"안나는 말하기 부끄럽지만 이제 내 아내죠. 그건 갑자기 왜요?"


안나는 그 말을 듣고 아까 자신의 말을 들은 올라프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이해가 갔다. '크리스토프의 아내' 역시 안나를 규정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신을 설명할 때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보인다는 것도 안나의 기분을 긁는 데 일조했다. 다만 여기서 올라프와 안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질릴 정도로 밤을 새워서 질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밤이 깊고, 크리스토프로부터 '매력적인 안나', '재밌는 안나', '용감한 안나', '훌륭한 안나', '아름다운 안나',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안나' 라는 수많은 수식어를 듣고 나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 안나는 드디어 순록의 왕에게 잠을 허락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기분은 좋아졌을지언정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의문은 쉽게 가실 생각을 않고 천천히, 하지만 넓게 안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



엘사는 그럭저럭 노덜드라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솔직히 말해, 아렌델의 왕실에 비하면 자신을 도와줄 카이같은 시종도 없고 원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루테피스크를 먹을 수도 없어서 다소 불편한 감이 있지만, 고개만 돌리면 펼쳐진 드넓은 장관과 신비로운 정령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엘사를 위로했다. 엘사는 다섯 번째 정령으로서 인간과 정령의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정령들보다도 더 바쁜 삶을 보냈다. 때로는 정령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을 해석해서 전해주느라 진을 쏟기도 하고, 어쩔 때는 자연의 의도를 해석해서 인간에게 전달해주기도 하며, 자신의 힘이 필요할 때가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얼음 마법을 펼쳤다. 엘사는 자신이 저주라고 생각했던 마법이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고 느끼면서도 더는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마법이 지금보다도 더 강해져서 손만 뻗으면 안나가 있는 아렌델까지 자신의 힘이 닿아 동생의 왕국을 지키길 원했다. 하지만 힘이 강해질수록 이따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엘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힘이 더 강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자신의 마법이 무엇을 원하는지. 엘사는 아토할란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남몰래 아토할란에서 자신의 힘에 관해 탐구하고 노덜드라로 돌아오면 항상 옐레나가 따뜻한 수프를 대접하며 엘사를 맞이했다. 노덜드라에서의 생활은 대체로 평화로웠지만, 항상 즐겁고 유쾌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아토할란에 갔다 돌아오는 엘사는 저 멀리서 바위 거인이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녹크를 몰아서 조금 더 빠르게 달리니, 엘사의 귓가에 게일이 마치 무언가를 속삭이듯이 휘릭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정말 못 말리겠다니깐. 서로 조금씩만 더 양보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녹크는 말 그대로 매섭게 질주했다. 엘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나무 막대기를 든 인간들과 거대한 바위 거인 하나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었다.


"그러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곳에서 멋대로 잠이 들면 물고기가 다 도망가버린다고!"


"우워어어어어어!"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한 엘사는 녹크에게서 내린 후에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뻗고 바위 거인과 인간의 대치점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자, 자. 다들 진정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네요."


"엘사 정령님..."


다행히도 그녀가 도착하니 분위기가 좀 진정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들의 눈빛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일주일 전에도 말했고 당장 사흘 전에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낮잠 장소는 저번에 정했잖아요. 그런데도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면 저희는 점점 사냥할 장소가 줄어들게 됩니다."


"우우우우... 워우워..."


"그래, 네 입장도 알겠어. 말을 들어보니 저번에 이야기했던 내용을 바위 거인들에게 말해줄 때 이 친구는 조느라 못 들었다고 하네요. 제가 잘 말해서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 다들 화 풀어요, 네?"


그 말을 듣고서야 노덜드라인들은 조금 진정하는듯했다. 엘사 역시 자신의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해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돌렸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한순간이었다.


"항상 일없이 잠만 자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화가 난 바위 거인이 거대한 발을 힘껏 내리찍었고, 엘사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펼치려다 발을 헛디뎌서 손이 자신의 머리를 향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다섯 번째 정령은 눈을 뜨지 못했다.


엘사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게일을 통해 빠르게 안나에게 전해졌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지만 "엘사가 마법에 당해 쓰러졌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안나는 곧바로 정예병사를 몇 명 꾸려서 전속력으로 노덜드라를 향해 내달렸다. 밤이라서 눈앞이 컴컴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프의 충직하고도 노련한 순록 친구는 지치지도 않고 매섭게 달려주었다.
마침내 안나가 노덜드라에 도착해 옐레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안나를 맞이했다.


"여왕 폐하.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물론 편지에 적혀있듯이 사고였습니다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요! 엘사 언니는 어딨죠? 무사해야 할 텐데.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로 있는 건가요?"


"다행히도 정신은 들었습니다만, 한 가지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괜찮아요! 일단 엘사 언니의 얼굴부터 보고 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엘사 언니! 내가 왔어!"


옐레나는 침소로 달려가는 안나를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떨궜다. 지금만큼은 안나의 머릿속에 일에 대한 걱정이나 자신의 대한 고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하나뿐인 언니가 무사하길 바랐다. 침소에 들어가서 수프로 몸을 녹이고 있는 엘사를 보고는 안나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언니. 쓰러졌다는 소리 듣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나 몰라. 요즘 계속 신경을 못 써줘서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큰일 나면 동생 마음 찢어진다구."


안나는 평소처럼 엘사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평소와는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뼈를 찌르는 냉기가 안나의 몸을 타고 흘렀다. 조금씩 느껴지던 차가움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본질적이고도 아찔한 감각,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혹한이었다. 안나의 팔을 밀쳐낸 것은 다름 아닌 엘사였다.
안나는 영문을 모르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엘사는 또렷하고도 분명한, 심지어 약간의 적의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안나를 쳐다보았다. 안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엘사의 얼굴을 보고 세상이 뒤집힌 안나에게 최후의 칼을 뽑아든 것은 애석하게도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언니였다.


"죄송하지만... 저를 아시나요?"


그날 밤, 안나의 세상이 무너졌다.



***



안나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쳐버린 언니의 냉랭한 태도를 보며 어린 시절 항상 닫혀있던 문이 떠올랐다.


"안나.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직은 절망하기에 너무 일렀다. 엘사에게 무슨 변화가 생겨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사실확인이 우선이었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는 걸까? 옐레나에게 물어도 답을 얻지 못하자 안나는 의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오르는 한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괜찮아요... 패비에게로 가봐요. 패비 할아버지는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크리스토프는 안나와 눈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스벤의 등에 올라탔다.


"좋은 생각이에요. 가자, 올라프."


"미스터리는 패비탐정님에게 맡기자고요."


안나는 옐레나에게 짧게 상황에 관해 설명하고는 곧바로 트롤들이 사는 북쪽 산으로 향했다. 몇 년 전, 엘사를 찾으러 왔을 때의 추억이 생각이 나서 순간 아련한 기분을 느끼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드는 나쁜 생각들이 안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만약 엘사가 영영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어쩌지?"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어둠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그대로 안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문득 조금 전에 마주친 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과 행동은 분명 엘사였지만 자신이 알던 엘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안나는 가슴 한편에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였다.


"안나! 도착했어요!"


"도착... 방금 뭐라구요?"


"나 참. 패비 할배한테 도착했다고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정신을 차려보니 쉬지 않고 달린 스벤은 어느새 일행을 패비에게로 데려왔다. 크리스토프가 보고 싶었다는 트롤들이 마구 구르며 등장하고 올라프의 주변에도 아기 트롤들이 산을 이루자, 그 뒤에서 위대한 선지자 트롤인 패비가 낮게 신음하며 등장했다. 그는 안나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엘사의 문제 때문에 저를 찾아오신 모양이군요."


"맞아요.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이 늙은이가 최소한 그 질문에 대한 답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패비는 곧바로 두 손을 뻗어 허공에 마법의 오로라를 펼치며 말했다.


"일어난 일 자체는 간단합니다. 마법을 사용하려다 실수로 엘사 자신의 머리에 마법을 써버린 거지요. 그 결과로 엘사의 기억이 얼어붙어 여왕님은 물론이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조차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상황설명을 들은 안나는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졌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해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안나는 기대를 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사랑의 힘으로 녹이면 되는 거겠죠?"


희망적인 답변을 바랐건만 오히려 패비의 표정은 굳어졌다. 늙은 선지자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젓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사실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지요. 이제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의 문제라구요?"


"그렇습니다. 안나 여왕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실제로 정령의 힘이란 너무나도 막강하기에 인간의 정신으로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그 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지요. 그렇기에 안나 여왕님과의 추억은 곧 엘사의 진정한 각성을 위한 마지막 관문과도 같습니다."


"마지막 관문이라는 건 무슨 의미죠? 설마 짐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안나는 말을 다 알아들으면서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자신과 쌓아온 추억들이 엘사에게 있어서 짐이 된다니. 죄책감과 우울함 이전에 찾아온 것은 의문이었다. 안나의 표정을 읽은 패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엘사는 정령으로서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럴 수 있었습니다만,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엘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지요. 심지어 안나 여왕님과의 추억마저도요. 엘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사고가 일어나서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진 겁니다. 아마도 이미 모든 기억을 잃은 지금, 엘사에게는 정령으로 각성하겠다는 강렬하고도 본능적인 열망밖에는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더는 잃을 게 없으니 말입니다."


패비의 말은 절망적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억을 찾는 방법은커녕 엘사에 대해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안나의 마음을 짓눌렀다.
다시는 비밀이 없게 하자고 약속했지만 정작 안나 자신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엘사가 고민을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아마도 고민을 듣고 아파했을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을 걱정했으리라.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된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늘이 어두워졌지만 거대한 구름 탓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옳은 일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패비에게서 해결책을 찾고 기억을 되찾으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문제는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은 엘사가 진정한 모습으로 각성하려면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잃어야 하고, 만약 기억을 되찾게 된다고 해도 엘사는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기억을 잃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안나는 엘사가 노덜드라에서 정령들과 교감하며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동시에 아렌델에서 자신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고민 속에서 괴로워했을 엘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안나는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일그리는가 싶다가도 또 어느새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채 먹먹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구름 사이로 달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안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패비 할아버지."


패비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돌의 형상으로 변해 산속으로 굴러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도 안나는 말이 없었다. 패비를 찾기 전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까는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허공을 응시하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쪽 팔로 안아주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스벤의 무거운 발걸음과 점점 작아지는 올라프의 실없는 농담뿐이었다.



***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새벽이 되었지만 안나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처음에 들었던 감정은 엘사의 고민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였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같이 고민할 수 있었을 텐데. 혼자 그 큰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었는데.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눈을 감으면 언니의 따스한 미소가 어렴풋이 떠올라 계속 안나의 마음을 휘저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 행복한 표정을 노덜드라에서 정령들과 함께할 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지금까지 쌓아온 안나 자신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다. 자신과 쌓아온 과거와 앞으로 엘사가 원하는 미래 두 가지를 두고 안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저울질을 시작했다.
고민하면 할수록 엘사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감히 선택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 고통받던 언니가 비로소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그것이 엘사를 위해서라면 안나는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안나는 이 선택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것을 패비와 대화를 나누던 시점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지만 지난 세월 엘사도 같은 결정을 내렸음을 알고 있는 안나는 그 시절의 언니가 했던 것처럼 그저 자기 자신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기로 했다. 가슴 한쪽을 누군가 쥐어짜듯 괴롭고 허탈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디선가 이유모를 평정심과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근본적인 물음이 또다시 안나의 내면에 떠올랐다.


'만약 엘사가 정말 기억을 잃고 진정한 정령이 된다면 그때의 엘사는 누구일까?'


두 눈만 껌뻑이며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옆에서 중저음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안 오는 모양이네요, 내 사랑."


"크리스토프..."


"이리 와요."


안나의 조그만 몸에 따뜻한 온기와 익숙한 향기가 전해져왔다. 눈을 감고 체온을 느끼자 잠시나마 자신을 괴롭히던 수많은 감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분노, 괴로움, 좌절, 원망 그리고 슬픔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그저 평온한 마음과 담대함,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새롭게 자리 잡은 엘사에 대한 의문이었다. 안나는 두 팔로 누구보다 듬직한 자신의 동반자를 조심스레 끌어당기고는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만약에 내가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고 해도. 아니, 당신마저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절 사랑할 수 있나요?"


"누가 들으면 치매라도 걸리는 줄 알겠네요. 지금 엘사에게 일어난 일이 대충 그런 상황인 거에요?"


"대충 그런 상황이죠."


크리스토프는 두 눈을 잠시 위로 치켜뜨며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이내 곧 입을 열었다.


"당연히 사랑할 거예요. 안나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슬프겠지만 안나를 사랑하는 제 감정마저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내 사랑은 그 정도로 꺼지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내가 기억을 잃어도 나는 여전히 안나일까요?"


"그럼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안나와는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안나는 안나죠. 전 그렇게 믿어요. 그러니까 너무 크게 슬퍼하지 마요, 안나. 힘들 땐 내게 기대요."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그런 답을 얻는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질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안나는 그냥 크리스토프의 말대로 그의 품속에서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어쨌든 엘사는 자신의 자리를 찾은 거고 행복할 거야. 그거면 된 거야.'


안나는 수많은 상실감과 슬픔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



안나가 눈을 떴을 땐 웬일인지 자기 자신보다 일찍 일어난 크리스토프가 평소엔 절대 입으려고 하지도 않는 귀족의 옷에 억지로 자신의 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안나가 침대에서 튀어나와서 옷 입는 것을 도와주고서야 환복전쟁은 막을 내렸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모르는 안나를 보며 크리스토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엘사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 국정 일은 내게 맡기고 노덜드라에 가 있어요. 어차피 엘사 생각하느라 일도 손에 안 잡힐 텐데 내가 도와주도록 하죠. 어차피 중요한 결정은 카이랑 같이 할 거라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내 사랑. 이미 말이랑 외투까지 다 준비해뒀다고요. 말해두겠지만 엘사의 일이 해결될 때까지예요. 감사인사는 뽀뽀로 갚아요. 어우, 잠깐? 잠깐!"


안나는 아침부터 자신을 생각해준 크리스토프에게 셀 수 없이 뽀뽀세례를 퍼부어준 후에 순식간에 외출 준비를 마치고는 말을 타고 출발하기 전에 루테피스크와 초콜릿, 혹시 모르는 일을 위해 엄마의 스카프를 가방에 넣은 후, 마지막으로 기세 좋게 늘어져 잠을 자고 있던 말하는 눈사람을 깨웠다.


"흔히들 아침 사과가 금 사과라던데 무례하게 아침부터 잠자던 무고한 눈사람을 깨운 것에 대한 사과는 안 해도 되는 걸까요, 안나 여왕님?"


"하하. 미안해, 올라프. 노덜드라까지 가는 길은 머니까 혼자 가기엔 심심하기도 하고 올라프 너한테도 해줄 이야기가 있어서 데려왔어. 용서해줘."


항상 유쾌한 눈사람은 손사래까지 치며 한바탕 웃고는 다리는 그대로 말의 목에 탄 채 안나의 방향으로 몸의 위치만 바꾸고 말을 이어갔다.


"껄껄껄! 괜찮아요, 다 장난이었다고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기가 도사리는 숨겨진 세상으로의 여행은 언제든 환영이죠. 그건 그렇고 어서 말해줘요. 저한테만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가 뭐죠?"


안나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올라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순수한 눈사람에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울한 감정을 전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여행을 가는 길이니만큼 사소한 걱정이나 근심은 가는 길에 내려놓고 가지고 결심했다.


"올라프. 어쩌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던 엘사를 보내주러가는 길인지도 몰라."


안나는 패비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와 어제 침실에서 크리스토프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다섯 살짜리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큰 단어를 응용하여 설명했다. 처음엔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올라프도 안나의 말이 끝날 때쯤엔 눈썹이 팔자로 늘어져서 자신의 얇은 나뭇가지 팔로 안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갔을 때 엘사가 그런 반응을 보인 거였군요...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니 굉장하면서도 슬픈데요. 한 사람분의 삶을 잊게 된다는 거니까요."


"그런 말 하지 마, 올라프. 비록 기억은 잃어도 엘사는 엘사야. 좋아하는 음식도 똑같고, 좋아하는 옷도, 머리스타일도 다 같을 거야 아마도. 게다가 본인이 원하는 자리까지 찾았잖아. 엘사는 행복할 거야."


"그럼 안나는요?"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안나는 숨겨두었던 약점을 콕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성적인 슬픔보다는 어젯밤에 내린 자신의 결정이 올라프에게 답변을 해주었다.


"난 엘사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 말을 들은 올라프는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답이 어찌나 감명 깊었는지 몸에서 팔이 한쪽 떨어져서 안나가 간신히 그걸 잡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한참은 있었다.


"역시 안나는 어른이네요. 제가 안나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안나 말대로 백번 밤을 보내고 나면 그땐 저도 안나처럼 어떤 슬픔이 있어도 견뎌낼 수 있겠죠?"


이번에는 안나도 올라프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 심지어 한 나라의 국왕이 된다고 해도 슬픔이란 감정은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다만 외면하고 그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에만 익숙해질 뿐이라는 것을 안나는 알아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안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큰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엘사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알테니 그것 하나는 어떻게 보면 다행이네요."


"그건 무슨 말이니?"


"그렇잖아요. 이제 엘사가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면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거에요. '내 이름은 엘사, 다섯 번째 정령이지요.' 그 한마디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할 거라고요. 그에 비해 나는... 역시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네요. 얼른 밤이 오면 좋으련만."


다섯 번째 정령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엘사를 정의하기엔 너무나도 벅차다. 엘사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희생했고 그렇기에 더 강하고 더 여린 면이 있으며 누구보다도 마음씨가 따뜻하고 현명하고도 용감한 그런 사람이었다. 엘사에 대한 생각을 거듭할수록 굳게 먹은 마음조차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안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잘될 거야. 딴 생각하지 말고 엘사의 행복만 생각해.'


괜히 주제를 돌려서 의미 없고도 유쾌한 이야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노덜드라에 도착했다. 경비병이 고개를 숙여 예의를 보인 후에 곧장 달려가 자신들의 족장에게 아렌델의 여왕이 왔음을 알렸다. 현명한 노장은 이웃 국가의 국왕에 행차에 맞는 형식과 예의보다는 그저 오랜 친구로서 안나를 대했다.


"역시 오셨군요.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아무래도 어제 일이 조금 신경 쓰여야 말이죠. 혹시 엘사는 어디에 있나요? 제가 왔다고 어디 도망가거나 한 건 아니죠?"


안나가 말에서 내리며 가벼운 농담을 던지자 옐레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정령님께서는 도망이 아니라 잠시 산책하러 나가셨습니다. 계속 무언가가 자신을 부른다고 하더군요. 아참, 여왕님에 대해 질문을 하시기에 대답을 해드렸습니다만 아무래도 기억을 못 하는 건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올라프가 갑자기 끼어들어서는 나뭇가지 팔과 당근 코를 맞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여전히 기억을 못 하다니 그건 슬프네요. 아토할란 청정수라도 한 바가지 마시면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요? 물은 엘사와 다르게 기억이 있으니까요."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러면 좋을 텐데. 하고 답할뻔했다. 고개를 저어 잠깐 스쳐 지나간 자신의 욕심을 털어버리고 옐레나에게 엘사가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기분 좋은 살랑 바람이 안나의 몸을 휘감고는 마치 안내라도 하듯이 들판의 방향으로 나뭇잎을 날리며 날아갔다. 자신보다 더 나은 안내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아는 옐레나는 고개를 숙여 정령에 대한 존경을 나타낸 후에 다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다.


게일의 안내를 받은 덕분에 엘사를 찾는 일은 굉장히 쉬웠다. 거대한 숲을 가로질러 나타난 들판에는 붉은 잎을 가진 이름 모를 꽃도 피어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오랜지색의 잔디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기도 했다. 나무도 한그루 자라나지 않아 그저 평탄하기만 한 지상낙원의 한 편에는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바위 거인 하나가 기세 좋게 늘어져 자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펼쳐진 들판보다도 더 눈부시게 빛나는 눈의 여왕이 낙원의 한복판에 있었다.
엘사. 어쩌면 지금 안나의 감정과 기억은커녕 이름조차 잊었을 그녀는 따스한 태양 빛을 받으며 세상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빛이 반사된 찰랑거리는 머릿결과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 무엇보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말썽꾸러기 도롱뇽을 보며 웃어주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행복이라는 단어를 현실에 꺼내놓은 듯했다.
자신이 다가가기조차 힘든 비현실적인 풍경을 앞두고 안나는 잠시 위축되었지만, 곧 용기를 가지고 올라프의 손을 맞잡은 채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누가 큰 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건만 갑자기 구석에서 자고 있던 바위 거인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도 굉장한 위압감에 압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안나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내가 아는 사람이야. 걱정 마. 그래, 그래. 잘자."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안나가 그토록 기다리던 엘사가 있었다. 아니, 그토록 기다린 엘사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만난 엘사가 반갑다는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았다.


"와우. 방금 들었어요? 아는 사람이래요. 혹시 하룻밤 사이에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닐까요?"


안나는 올라프의 말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엘사의 표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이방인을 경계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안나... 라고 했었나요? 오늘도 저를 찾아왔군요."


"엘사... 정령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맞아요. 어제의 무례함도 사과하고 겸사겸사 해서요. 하하..."


안나의 말을 들은 엘사는 아까보다는 다정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례를 범한 건 저죠. 당신은 이웃 나라의 국왕인걸요. 그리고 옐레나에게 사정도 어느 정도 들었답니다. 기억을 잃기 전, 제 동생이라는 것도요."


"그, 그래요? 하하. 그럼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게, 저, 찾아온 이유가 뭐냐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안나는 13년간 이야기조차 안 하다가 언니의 대관식 첫날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지 또한 깨달았다.


"혹시 초콜릿 좋아하시나요?"



***



기억을 잃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엘사는 루테피스크를 한 입 먹을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노덜드라에서는 먹지 못했던 음식이라며 이것저것 질문하는 엘사에게 안나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다주겠다고 얼음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기억을 잃긴 했지만 귀여운 것을 볼 때 양손을 가슴팍에 얹는다든지, 앉을 때도 다소곳이 앉는다든지, 관심 있는 이야기를 꺼내면 특유의 팔자 눈썹을 하면서 경청하는 것을 보고 안나는 역시 기억만 없을 뿐 자신이 알던 엘사가 맞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야기가 조금 과열되어서 안나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함께 있었던 즐거운 추억을 꺼내면 엘사는 그저 시리도록 다정한 표정으로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할 뿐이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분명 엘사이지만 엘사가 아니다. 안나가 고민 끝에 내린 잔인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런 엘사라 하더라도 이왕이면 행복한 엘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안나의 심정이었다. 안나는 디저트로 가져온 초콜릿을 먹다 말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노덜드라에서 인간을 도와준다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기억을 되찾고 싶다거나..."


"맞아요. 내면의 소리!"


엘사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와서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뻔했다.


"눈을 떴을 때부터 느껴졌어요.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본능적인 이끌림일까요. 순간순간마다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럴수록 제게 들려오는 이 소리도 점점 커져요.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목소리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아요. 내 힘이, 내 마법이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아요. 어딘가로 가야 한다고."


"제 생각엔 아마 마법보다는 아토할란 같네요."


"아토... 뭐라구요?"


"아토할란이요. 모든 것을 아는 강이래요. 그리고 엘사... 정령님도 기억을 잃기 전에 그곳에서 힘을 각성했었다고 들었어요."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도 아토할란이 저를 부르고 있나 봐요. 진정한 힘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요. 어쩌면 아토할란에 가서 힘을 찾는 게 제 존재 이유일지도 몰라요. 서둘러 가봐야겠어요."


그저 아토할란에 가서 정령으로 각성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니. 안나는 기억을 잃은 엘사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과 지내온 추억이 스쳐 지나가며 안나의 마음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내었다. 엘사는 정령 그 이상의 존재가치가 있다. 애초에 존재가치나 이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저 안나의 사려 깊고 마음이 연결된 자매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안나는 목 끝까지 밀려오는 부정의 말들을 삼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항상 입을 열기 직전에 들판에서 마주했을 때 봤던 엘사의 미소가 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엘사를 위해서.'


자신에게 주문을 건 안나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아토할란까지 가는 길은 제가 알고 있어요."


"정말요? 당신이 어떻게 그곳을 알죠?"


"그것도 전에 기억을 잃기 전에 같이 가본 적이 있거든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어둠의 바다까지는 가본 적이 있지만 아토할란은 성역과도 같은 느낌이었기에 경외심이 들어,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안나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보다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엘사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잘됐네요. 옐레나에게 사정을 말하고 얼른 다녀와야겠어요. 지금은 해가 지고 있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잠을 청한 후에 내일 아침에 같이 가는 게 어때요? 그래 주시겠어요?"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다. 안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엘사에 대하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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