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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문학대회 탈락작] 기억의 조각 - 2

LibreSoy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28 00:55:02
조회 309 추천 35 댓글 15


한기가 돋는 공허한 감촉이 느껴져 엘사는 깨어났다. 하지만 눈을 감았던 때랑 다를 게 하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황급히 두 눈을 비빈 후 다시 눈을 떠 봐도 어둠은 그대로였다. 옆을 두리번거려 봐도,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여 봐도 암흑의 공간에는 빛 한줄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다잡고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둠의 바다를 건너던 도중에 화가 난 물의 정령을 진정시키고 빙하의 강을 건너 도달한 땅 아토할란. 눈이 부시도록 황홀한 위용을 자랑하는 빙하들을 지나 최심부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마주하였고 아렌델의 과거, 왜곡된 진실을 알기 위해 보다 깊은 심연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분명 얼어붙었지, 나. 그렇다는 말은-”


사후세계? 천국이라면 황금의 궁전이 있어야 하고 지옥이라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건가? 그렇다면 당장 눈앞에 뭐라도 보여야 했다.


곰곰이 생각에 빠진 그 때, 공허한 칠흑의 세계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눈을 떴는가, 다섯 번째 정령이여.”


엘사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죠?! 아니, 그 전에 여기는 대체 어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엘사는 알아챘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했다. 시야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이었지만 익숙하면서도 편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미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아토할란인가요?”


“이미 네 마음속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분명 저는 온 몸이 얼어붙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저는....역시 죽은 건가요?”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역할과 자리가 달라도 역시 혈육은 혈육인가.”


“네? 지금 그게 무슨-”


목소리는 엘사의 질문을 가볍게 흘리며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죽었다라...틀린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었다기보다는 생명이 정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


엘사는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칠흑으로 가득한 세상, 그 와중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아토할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뜬금없었고 말하는 내용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단 제 발로 들어온 이상 마음의 준비는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 말과 함께 주변이 샛푸르게 변하며 기억의 단편들이 홀로그램처럼 그녀를 감쌌다. 처음 아토할란에 당도했을 때 보았던 과거의 기억들과 비슷한, 푸른 사파이어 색의 얼음에 담긴 기억의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 불투명한 과거의 환영을 비추고 있는 형태였다. 하지만 뭉클한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그때와는 달리 지금 엘사의 눈에 비치는 영상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엘사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영상은 그녀가 마주하지 않고 계속 회피하던 깊은 심연 속이었다.


문, 그녀의 심연을 이루는 기억은 전부 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언제나 엘사의 눈앞에는 문이 있었다. 그녀에게 문이란 공간과 공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출발선이 아닌, 공간을 차단하며 타인과의 접점을 끊기 위한 최후의 차단선이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서도 누군가가 이 자물쇠를 따고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상반된 감정, 그 모순이야말로 지난 세월 동안 엘사의 마음을 괴롭힌 암세포였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걸어 잠그고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봐도, 울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눈앞이 아른거려 흘러내리는 눈물을 쉴 새 없이 옷소매로 닦아내어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노크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큼은 차단할 수 없었다.



같이 눈사람 만들래?



저 너머 나를 봐달라는 목소리, 하지만 간절히 애원하는 문 너머의 목소리를 무심하게 끊어버리는 차디찬 말 한마디.



저리 가, 안나



거짓으로만 점철된 그 한마디에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방향을 잃고 계속 저 멀리 흩어져버렸다.


3년이 지나도, 6년을 넘어 13년에 이르러서도 문은 항상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닿지 않는 목소리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서로를 향한 추억조차 빛이 바래게 만들며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른 기억이 얼음에 비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싸우고 있다. 아버지는 빌어먹을 마법이 또 우리 가족을 괴롭힌다며 왜 이제와서 노덜드라 출신임을 말하냐고 어머니에게 소리치고 있고 어머니는 왜 자꾸 편견을 가지고 부정적으로만 보냐며 그에 맞서 거세게 항변하고 있다.


가슴아파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조각에서 빛이 난다. 대관식 날, 마법을 들켜 정신없이 도주하고 있는 나의 모습. 북쪽 산에 이르러 얼음성을 짓고 홀로 다시 갇혀 지내려는 꼴을 3자의 시선으로 보니 꼴불견이기 그지없었다.


새로운 기억이 또다시 눈으로 만들어진다. 그 모습은....


“맙소사...”


가장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의 조각, 내리쳐지는 칼을 막고 안나가 얼어붙어버린 그 날. 나 때문에 병들어가던 동생은 결국 나 때문에 죽고야 말았다.


조각들에 비친 기억들은 하나같이 다 부정적인 과거를 투영하고 있었다. 혼자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안나, 혼자서 장갑으로 만든 목도리를 인형에 묶어주고 말을 걸던 나, 가족 누구도 축하해 주지 않는 생일날에 홀로 케이크를 먹으며 벽에 걸린 그림들에게 말을 거는 안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한 채 방안에서 숨죽여 울기만 하던 나...


왜 나에겐 좋은 과거가 없을까?

왜 남들처럼 단란한 일상마저 허락되지 않았을까?

고통으로 가득한 기억의 단편들을 마주하다 보면 결국 근원적인 물음에 도달한다.


왜 나는 마법을 타고났는가?


내가 과거에 집착하는 이유는 마법이라는 그 두 글자에서 비롯되었다.

이 마법만 없었다면 부모님과 함께,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생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일상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마법이 있지도 않았으면 부모님이 나 때문에 풍랑에 휩쓸릴 일도, 동생이 마법에 맞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마법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자신은 이 능력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괴로웠나?”


“......”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괴로웠다. 너무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도 없어 방 안에 홀로 입을 틀어막고 숨죽이지 않고는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아픈 과거를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있다고? 설마 과거를 바꾼다고 말하는 건가? 고개를 들어 있을 리 없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본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 너에게 단 하나의 소원을 빌 기회를 줄 생각이다 정령이여. 너와 네 동생이 13년 동안 받은 고통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중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마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네가 더 큰 고통을 마주했으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너에게 선택권을 주려고 한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과거가 아니라 부모님이 풍랑에 휩쓸리지 않고 너희와 함께 살아가는 때로 말이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엘사가 알지 못한 세계가 기억의 조각들에 새로이 스쳐 지나간다. 금발의 머리칼이 아닌, 안나와 똑같은 스트로베리 블론드의 머릿결은 가진 어렸을 때의 자신이 안나와 함께 소복이 쌓여 있는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부모님은 정원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앉아 행복하게 노다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시간이 흘러 나는 제왕학 수업을 받느라 안나와 같이 노는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안나는 틈틈이 쉬는 시간마다 쿠키가 담긴 티세트를 들고 와 하루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해준다. 내가 스케줄에 지치면 뒤에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주고 이상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켜주기도 한다.


환영의 시간축은 어느새 대관식으로 옮겨간다. 아버지는 정정한 나이로 보였지만 이제 때가 되었다며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셨다. 홀과 보주를 들고 의식을 거행하는 나를 향해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갈채. 옆에서 눈물을 지으며 나를 흡족히 바라보는 부모님. 그리고 이 이상 없을 환한 미소로 나를 축하해주는 사랑스러운 내 동생.


도달할 수 없는 과거, 있을 리 없는 찬란한 과거에 그저 눈이 부시기만 했다.


“그 곳은 얼어붙은 아렌델도, 거짓된 사랑을 연기하는 자도 없는 세계. 그리고 노덜드라와 아렌델 간의 반목도 없이 그저 평화로운 세계이다. 너는 거기로 갈 자격이 있다. 3년 전에 보여준 진실의 사랑의 행동으로 나는 감명을 받았다. 따라서 너희에게 그에 대한 보상을 주고 싶군.”



과거...13년 동안 상처로만 가득한 엘사의 과거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부모님도, 안나와의 관계도, 명랑한 성격도 다 사라졌다. 얼음으로 가득 찬 방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으며 수백 번을 넘게 기도했다.



옛날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안나가 사고 나기 전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살게 해 주세요



상황이 더 절망과 파국으로 치달을수록 헛된 바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기에 도저히 자학과 절규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바꿀 수 있다면 과거를 바꾸고 싶다. 그것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바라던 소원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령이여. 네 마음에 품던 그 소원을 지금 이룰 건가?”


“........”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거짓은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그 소원을 지금 이룰 수가 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있는가? 그저 단 한 마디면 된다. 긍정하는 말 한 마디면 아픈 기억도, 찢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울 필요도 없이 행복한 세계로 갈 수 있다. 마법 때문에 안길 수 없던 부모님에 품에도,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짓는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금 계단을 뛰어내리고 지겹도록 인형놀이를 할 수 있다. 내 능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배를 타고 운명을 달리하실 일도 없이, 늘 함께 밥을 먹고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며 화목하게 대화할 수 있다.


내가 바라던 눈부신 세상이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 있다.


‘엘사, 뭘 망설이는 거야. 빨리 그렇다고 답해.’





하지만-


하지만...어째서일까. 그 쉬운 긍정의 단어 하나조차 목구멍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들이 과거를 맞바꿀 만큼 고통스럽기만 한 걸까?





‘언니 마법은 축복이야. 선물이라고! 왜곡된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이야. 바로 그 마법을 통해서!’


왜 하필 이런 때 안나의 말이 떠오를까. 매사에 다 괜찮을 거라며,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며 낙관적인 동생의 마음가짐이 한없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널 믿어, 엘사. 네가 힘들 때도, 어디에 있을 때라도 나는 늘 함께 손을 잡고 해결해 나갈 거야.’


믿어? 늘 함께 있는 다고? 그 태도 때문에 내가 힘들다는 걸 너는 대체 왜 모르는 건지 답답했다. 믿는다면 자신의 행동을 왜 이해해주지 못하는지 솔직히 화가 났다. 언제나 태양처럼 빛나는 동생은 오랫동안 그늘에 있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 안나. 나는 이 과거를 바꿔야겠어. 너의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너와 우리 부모님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이게 최선이야.’



이번에야말로 잡념을 떨치고 아토할란의 제의에 승낙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엘사, 마법! 마법 보여줘 마법!’


‘안나, 너는 이상하지 않아? 사람 손에서 눈송이들이 막 나오는데? 완전 동화책에서 보던 마녀랑....완전 똑같잖아.’


‘무슨 말이야? 언니 마법이 얼마나 예쁜데!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아름답다구! 언니 마법 볼 때마다 너~무 신나고 재밌단 말이야.’


‘정말로..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당연하지! 그니까 마법 더 보여줘! 눈송이 하늘에 뿌려줘! 빨리!’





“아......”


그러나 저만치 내던지려던 잡념을 끝내 떨쳐낼 수 없었다.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아 주지 않던 동생.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봐 준 건 다름 아닌 안나였다. 마법이 무섭지 않다며, 오히려 세상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며 활짝 핀 개나리처럼 순수한 웃음을 짓는 어린 시절 동생의 얼굴. 언제나 해맑게 웃으며 같이 눈사람을 만들자고 한 아이. 늘 언니의 마법을 보고 싶다며, 더 화려하고 빛나는 얼음 결정들을 보고 싶다며, 더 큰 얼음 미끄럼틀을 만들어 달라며 작고 귀여운 손을 매일같이 먼저 내밀어 나를 붙들고 달려가 앙증맞게 조르던 그 아이의 순수하고도 맑은 눈동자.


여기저기 패인 상처로 얼룩진 과거에도 즐거웠던 시절, 소중한 추억은 분명히 있었다.


자신을 언제까지고 믿고 도와준 가족들이 가져다 준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 그들은 나를 계속 믿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미워하고 저주했으며 죽고 싶다는 생각만 늘 품어온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서 고생해온 사람들의 심정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 불만만 내뱉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만 힘들다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과거를 바꾼다면 나를 위해 같이 아파해주고 울어주며 희생한 사람들이 뭐가 될까.





“.....래요.”


“잘 들리지 않는군. 더 크게 말해줄 수 있나.”


“거절할래요. 전 갈 수 없어요.”


“호오...방금 전까진 분명 바로 뛰어들 것 같은 모습이더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무미건조하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내비쳤다.


“솔직히 과거를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요.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 마법 능력이 의문스럽기만 했죠. 하지만-”


“하지만?”


“그저 나 혼자 힘들다고 내 과거를 바꾸면,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거 아닐까요? 나를 위해 애쓰시다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금까지 내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주는 제 동생을 위해서라도 저는 더욱 과거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엘사의 목소리는 항변하듯 거센 어조로 바뀌어 있었다.


“이상하군. 과거를 바꾼다고 해서 네 부모님의 희생도, 동생의 사랑도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서로를 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들 역시 네가 마법을 타고나지 않고 평범한 삶을 바랬다면? 아마도 내가 말하는 제안에 선뜻 동의했을지도 모르지.”


“그, 그건-”


날카로운 대답에 엘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짐했던 마음이 다시금 흔들렸다. 만약 마법에 대한 푸념이 내 생각만이 아니라 안나도, 부모님도 똑같다면?


“네 아버지는 네가 마법을 통제하지 못하니까 문을 닫고 외부로부터 분리시켰지. 즉, 네 마법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자 마법만 아니었다면 네 방문을 닫을 일도, 성문이 닫힐 일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안 그런가? 애초에 마법만 아니었으면 두려움이 생길 이유도 없었겠지.”


얼음의 벽면에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빛나더니 또다시 주변을 가득 채웠다. 엘사는 말없이 은은하게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더듬어 걸어갔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을 통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꼬마 시절에서부터 튀어 보이지 않기 위해 예절과 품위를 완벽하게 지키는 모습, 왕위 계승자로서 모든 지식을 두루 섭렵하고 빈틈없이 하루 일과를 지켜 나가는 모습, 슬픔에 휩싸여 문에 기댄 채 하루를 꼬박 세웠지만 이내 다시 해야 한다며 책상에 앉아 책을 폈다.


“보는 바와 같이 너는 바라지도 않던 마법 때문에 평범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고 언제나 강박에 시달려야 했다. 최고이자 정점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 그리고 마법으로 다른 누군가가 절대 해쳐서도 안 되고 알아서도 안 된다는 두려움마저 겹치고 말았지. 그것이 너의 지난 13년 동안의 과거다. 이런데도 너는 돌아가지 않을 텐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 말고도 다들 평범한 삶을 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도 내가 마법이 없는 평화롭고 보통의 가정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타인과 거리를 두고 고독하게 살아가려는 자들은 고립되는 좌절감을 겪거나 노력하지 않는 비참함을 겪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엘사는 동굴에 들어가 영원한 겨울잠에 빠지는 쪽을 택했다. 그녀의 마음은 언제라도 산산조각 부서져 내릴 듯이 위태로웠다. 겉으로는 매혹적이고 강력한 마법을 타고났지만 내면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크나큰 의문을 가진 가녀린 소녀에 불과했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둘렀다 한들 그녀의 몸은 갑옷의 충격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유약했다.


하지만 정말로...그 태도가 오로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저주하고 잊고 느끼지 말라는 강박이 마음과 정신을 깎아내리긴 했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올바른 자세를 굳건히 지키며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나라의 군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온갖 분노와 스트레스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또 참아냈다. 비록 아렌델을 얼어붙게 만들고 무책임한 도피행각을 보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을 수 있었던 그 마음가짐과 의지가 있었기에 그녀에게는 구원의 빛줄기가, 빛의 세상으로 향하는 문고리가 줄곧 부서시지 않고 문에 걸쳐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계속 고개를 숙였던 엘사가 마침내 고개를 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어쩌면 자신이 싫어서, 평생 좋아할 수가 없어서, 그마저도 스스로가 깨닫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좋아하고 싶어서 발버둥 쳐 왔는지도 모른다. 내면이 약해빠졌기에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외면을 철저하게 가꾸려고 몸부림쳤다. 터져 나오는 울분과 멈추지 않는 눈물을 곡소리를 내며 토해내도, 얼어붙은 심장 안에서 피어오른 날카로운 고드름이 여기저기를 찔러댔기에 살기 위한 호흡조차 괴로웠음에도,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래, 어떤 참혹하고 절망적인 일이 있었다 한들 끈질기게 버텨왔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길을 잃었다 한 들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그 처절한 모습 하나만으로도 어쩌면 그녀는 사랑받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저를 계속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살아있어요.”


대답 없는 목소리를 향해 엘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두려움에 빠졌다지만, 저는 제 의지로 부모님의 통제를 받아들였어요. 왜인지 아세요?”


이번에도 침묵이 이어졌다. 긍정이라 여긴 엘사는 천천히, 단호하게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는 마법을 가진 자를 욕하고 저주하며 혐오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발아래에 눈꽃의 표식이 환하게 새겨졌다. 붉게 비치던 조각들이 부서지고 새하얗고 투명한 기억의 조각들이 공간 전체를 가득 메웠다.


“호오....”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내지르는 탄성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슬픔과 절망으로만 가득하던 기억의 조각들은 어느새 다양한 추억들을 투영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안나가 녹고 서로를 부둥켜안은 모습, 대관식 날 초콜릿 냄새가 난다며 실없이 웃던 모습, 성의 광장에 발을 내딛어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아름다운 얼음의 조각상들을 만드는 모습, 두 자매가 아버지의 옛날이야기에 흠뻑 빠진 모습,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고스란히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모습...


“가족들이 저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고통스럽지만 기어이 몸부림치고 두려움에 맞설 수 있었어요.”


온갖 눈초리와 비난의 화살을 손수 맞아 가며 자신을 지키려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마법을 티 하나 없이 진심으로 사랑해준 최초의 존재인 동생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절대 괴물이 될 수 없었고, 되어서도 아니 되었다.

자신이 괴물이 되면, 정말로 그들이 나를 포기할 것 같았기에

마녀가 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일 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죽고 싶어도 꾹 참고 견뎌왔으리라.


그 모습이야말로 어두운 자신의 마음을 줄곧 지탱해 주었으며

벼랑 끝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유였다.


길이 없다고, 두려움에 빠져 그 문고리를 이른 때에 잡지 못했던 점이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이 험난한 여정을 기어코 이겨내 온 자랑스러운 모습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고 계속 옭아매며 자학한다면 누가 인정해 주며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줄 수 있을까


단지 힘들 때마다 그녀를 안아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이, 오랫동안 끊겼을 뿐이다.


잠시 잊고 있었다. 상처로 가득한 지난날의 아픔 가운데서도 새 살이 돋아나도록 치료해주고 돌봐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의 여지가 없이, 저는 제가 가진 이 능력을 저주하고 혐오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안나와 떨어져 지낸 것도, 대관식 날 그 사단이 난 것도 다 이 능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과거를 바꿀 수 없어요. 부모님이 내 마법 때문에 풍랑에 휩쓸렸으니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고, 동생이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사랑에 목말라 했으니 내가 사랑을 계속 줘야 하는 거겠죠. 도피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팠던 과거를 버리고, 행복한 과거로 바꿀 수 있다? 그거야말로 도피 아닐까요?”


“그리고 이제야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단호한 목소리는 이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바뀌었다.


“안나가 태양이라면, 저는 달이 되겠어요. 비록 내가 태양처럼 빛나지 않더라도 태양의 역할은 태양에게 맡기고 저는 달의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거죠. 태양이 하루의 역할을 끝내고 잠이 들어 어둠이 깔린 두려움 많은 밤에 빛을 비춰주는 건 오직 달뿐이죠. 안나가 보이는 세상에서 환하고 따뜻한 햇살을 모두에게 비춰준다면, 저는 잠들어 있는 이 세상을 은은하게 비춰 보호하고 혹여나 길을 잃은 자들에게 저 멀리서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되겠어요.”




그러므로 이제 다섯 번 째 정령은 이제 두려움에 빠진 채 도피하지 않는다.

엘사 아그나르스또띠에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는다.




엘사는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이상 없을 천상의 표정에 아토할란은 사뭇 놀랐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후,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어느새 목소리는 환희의 어조로 변해 있었다.


“훌륭하다. 아주 훌륭하다 정령이여.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이루어라. 나 아토할란은 아렌델의 속죄를 받아들이고 진실이 밝혀졌음을 인정하리라. 가서 네 동생이 희생을 무릅쓴 아렌델을 구하여라.”


잠깐, 동생? 안나가 여기에 왔었다는 말인가? 엘사의 동공이 급격히 팽창했다.


“잠깐, 지금 뭐라구요?? 안나가, 안나가 여기에 왔었다구요??”


“아, 그러고 보니 너는 모르는 게 당연하군.”


몇 초 동안의 공백. 머릿속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지만 그 적막감은 몇 분처럼 느껴졌다.


“3년 전에 얼어붙은 너의 동생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만났느니라.”


적막을 깨고 들린 목소리에 크게 놀란 나머지 엘사는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안나가 왜...왜 여기에 온 건가요? 원래 얼어붙으면 다들 이곳에 오는 건가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거라. 나는 자연의 의지, 이 의지를 들으려면 인간과 자연 사이를 이어주는 ‘소통’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만이 가능하다. 너는 마법을 통해 자연과 소통할 수 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건 제가 정령이라서 그런 거잖아요! 안나는 그저 평범한 아이인데 왜 여기에-”


순간 엘사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쩍 스쳤다.


“설마...”


“그렇다. 정령은 너 혼자만이 아니다. 네 동생 역시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다섯 번 째 정령이니라. 네가 타고난 마법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여 인간과 이어준다면 그녀는 인간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불어넣어 자연과 이어주는 역할이지. 너처럼 물리적인 마법의 능력이 없다 한들, 그녀의 마음가짐은 세상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결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녔다. 사랑하는 이들을 믿음으로써 진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은 실로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능력이지. 이건 나조차도 감히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일지도 모르겠구나.”


소스라치게 놀란 엘사의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촉촉해져 있었다. 안나, 사랑스런 나의 동생. 그저 이 못난 언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자그마한 소망만을 바라며 배시시 웃던 사랑스러운 아이, 나를 구해야 한다며 제 목숨을 저버리고 나에게 달려온 고귀한 용기를 가진 소녀. 그 아이가 이토록 공허한 공간에 떠다녔다는 사실에 3년 간 꾹꾹 눌러 담아온 자책감이 다시금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언니로서 동생을 이끌어주지는 못할망정, 자신은 또다시 동생에게 구원받았다. 내가 얼어붙었다면 아마 안나와 함께 있던 올라프도 사라졌을 터이다.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절망했을까, 행여나 다친 곳은 없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훌륭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그러니 이제 너의 차례다, 정령이여. 너희 동생이 온 힘을 다해 외치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이젠 네가 답을 해야 할 때이니라. 그녀의 행동과 용기로 얼어붙은 세계가 녹고 아렌델은 용서받았으니, 이젠 네가 자연의 대표로서 그에 대한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금 엘사의 눈앞에 기억의 조각이 펼쳐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녀가 알고 있는 기억이 아니었다. 분명 이것은...안나다. 저 복장과 묶은 머리는 분명 몇 시간 전에 만난 안나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달리고 있었다. 땅의 정령이 안나의 뒤를 쫓아 무시무시한 바위를 던지고 있다. 안나가 향하는 곳은 진실을 덮고 목소리를 잠재운 표상인 댐이었다. 소중한 이들이 다 사라져버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어도, 그래도 주저앉거나 도망가지 않고 지금 이렇게 내가 한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어 목숨을 걸어서까지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나의 동생...


돌이켜보면 안나는 늘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굽히지 않는 아이였다. 아무리 회색빛 가득한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밤에게 자리를 잠시 빼앗겼다 한들 언제나 다시 차올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태양이었다. 줄곧 햇볕이 닿지 않는 하얀 얼음의 빙벽을 세워 몸을 움츠리려는 엘사에게 언젠가 반드시 양지로 나오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없는 햇살을 비춰주었다. 줄곧 대답 하나 없던 문을 계속 두드리며 언젠가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폭풍 속으로 기어들어가 기꺼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3년이나 늦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너는 나보다 먼저 답을 얻었구나...나의 사랑하는 동생, 우리들의 빛이자 어머니의 영원한 햇님이었던 소중한 나의 동생.


네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는 주저앉은 다리를 일으켜 세워 걸어갈 수 있었다.

네가 슬픔과 절망에만 빠지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기에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눈가에 맺혀있던 한 방울의 이슬이 엘사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안나는...안나는 이미 답을 얻었던 거군요.”


“그녀는 이미 3년 전에 답을 얻었다. 너희들의 모친처럼 진정한 사랑, 희생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깨닫고 실천했다. 그 때 나는 네 동생에게서 너희 어머니를 느꼈다. 누군가를 향한 믿음, 진실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실로 모친과 똑 닮은 모습이었지. 물론, 그 후 3년 동안 완벽하진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기에 너희는 서로를 완전하게 믿지는 못했던 거겠지. 하지만 너의 동생은 잠시 혼란스러웠을 뿐,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고결하고도 강인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빛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지.”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안나와 크게 다퉜는데, 다시 얼굴을 볼 면목이 없네요...그래도 사과하고 먼저 손 내밀어야 언니답겠죠?”


“왜 사람들이 빛에 이끌리는지 아는가? 어둠 깊숙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서는 그 때까지 늘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야. 네가 돌아서기만 한다면 네 동생은 언제든지 맞이해 줄 거다. 지금 네 반대편에 비치는 문처럼 말이지.”


황급히 뒤를 쳐다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수평선의 끄트머리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내가 처음에 말했지 않았나? 정확히는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있다고. 즉, 지금 너는 얼어붙어 있는 상태 그대로다. 하지만 저기 보이는 빛으로 나아가면 네 동생이 녹았듯 네 몸도 녹아내릴 것이다. 그 뒤는 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느니라.”


그 말과 함께 기억의 조각으로 가득한 공간에 쩍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기억의 마지막 조각이 채워졌는가...그러면 이제 이 공간도 끝이군.”


“끝이라니?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저 사라질 뿐이다. 원래 나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자, 신경 끄고 어서 출구로 달려 나가거라.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정말로 영원히 얼어붙고 말 것이니.


“그런가요....고마워요, 나와 안나를 구원해줘서.”


“구원이라니? 난 그저 질문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구원은 너희 스스로 한 거지. 자연은 그 어떤 인위도 가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다. 그러니 가서 네 동생에게 꼭 사과부터 하거라.”


“잠깐만요, 그러면 과거를 바꿔준다는 말은 설마 거짓말이었나요?”


“당연하지. 이미 지나온 세월을 그 누가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너의 마음가짐을 살펴보려 했을 뿐이다.”


끝까지 진지한 투로 설교하는 듯한 어투에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걸로 족했다.

이 또한 어떠한 가식도 없는 그만의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생각했다.


엘사는 눈물을 머금고 이내 다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완전히 돌렸다.



새하얀 빛이 점점 가까워진다. 빛의 갈무리가 점점 눈가를 하얗게 채운다.

몇 걸음 걸어가니 빛은 사각의 형상을 띠었다. 몇 걸음 더 달려 나가 보니 빛의 사각형은 문, 틀림없이 손잡이가 달려있는 문이었다.

언제나 문을 닫았던 나에게 문을 열기 위해 달려가는 지금 이 모습이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문은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직전의 떨림으로 여겨지리라.

나의 능력, 이 축복받은 마법의 능력으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나는 저 문을 열고 싶다.


세상이 두렵다며, 자신이 혐오스럽다며, 저주받은 능력이라며 스스로 자물쇠를 걸어둔 문을

다른 존재라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기 위해 언제라도 닫을 수 있게 반쯤 문고리를 끌어당겼던 문을

이제 내 손으로 직접 젖혀 나아가 세상을 찬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리라.


문에 가까워질수록 백색의 시야가 눈가를 가득 뒤덮는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온 몸의 감각이 무뎌진다.

그러나 두려움을 무릅쓰고 어둠의 바다를 건넜듯이 그녀의 달리기 멈추지 않는다.

의식이 있는 한, 이 두 다리에 계속 힘을 주어 걸어 나간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시야는 이제 빛으로 눈을 가득 채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요리조리 더듬은 엘사는 이내 손잡이를 찾을 수 있었다.

힘을 주고 돌리려는 찰나, 돌아가신 부모님이 홀연히 떠올랐다.

마지막 임종조차 지켜드리지 못한 내 부모님, 검은 상복조차 입지 못하고 방안에서 울기만 하던 나.


생각해 보니, 부모님 앞에서 새로운 다짐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 도 없었다. 안나와 함께 부모님의 묘비에 다가설 때마다 이번에는 울지 않겠다며 꿋꿋이 다짐했지만 3년 내내 그저 같은 울음소리만 반복했다. 동생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부끄럽기만 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이지만 아득히 먼 북쪽의 바람이 강과 만나는 곳, 기억의 강이 있다면 아마 그곳에서 나와 안나를 줄곧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면, 가장 먼저 부모님의 묘비부터 찾아가리라 다짐했다.


잠깐의 망설임을 뒤로 한 채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렇게 순백처럼 하얀 눈의 여왕은 찬란한 빛의 사각형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빛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다시금 푸른색의 얼음빛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희망은 언제라도 있는 법인가....34년 동안 닿지 않던 진실의 목소리가 마침내 모두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구나.”


다섯 번 째 정령이 완전히 스스로를 자각하고 책무를 이어받은 이상 아토할란의 의지는 이 세계에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 자연은 이제 새롭게 태어난 눈의 여왕의 품에 거할 것이리라.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 그 자의 용기와 사랑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이두나여, 그대의 불꽃같은 용기와 강인한 믿음이 진실의 목소리를 찾고 마지막 기억의 조각을 맞췄느니라.”


그 말을 끝으로 새벽칠흑의 빛깔을 띤 공간은 와장창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얼음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소리가, 있을 리 없는 공간에 가득 울려 퍼진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시간의 끝이 임박하자 아토할란의 의지는 안개의 저편, 신화의 공간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3-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327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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