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각서를 둘러싸고 파동이 일어났다. 김영삼은 그런 각서를 쓴 적조차 없다고 뻔히 들킬 거짓말을 계속 했는데, 본인의 사인까지 들어간 각서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돌연 "합의문이 공개된 진상을 공개하라"고 초점을 바꾸면서 모든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 칩거해버렸다. 김영삼이 몽니를 부리자 노태우는 결국 내각제 포기 선언을 했다. 각서가 만들어진지 10개월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권력이란 참 비굴한 것이어서, 노태우가 감영삼에게 이렇게 휘둘리는 모양을 보이자 권력의 냄새를 맡은 자들이 급속히 김영삼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태우에게 "김영삼과 차제에 완전히 선을 그어버리십시오"라고 말했다. 사실 김영삼에 대해서는 1963년 할아버지 곁에서 비서 역할을 하던 시기부터 그가 어떤 인물인지, 남들이 모르는 내막까지 많이 알고 있었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이 점차 권력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자 나랑 같이 하자는 메시지를 몇 차례 보내오기도 했다. 물론 거절했다. 만나자고 하는 것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 그런 회유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더라면 어쩌면 내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양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 시기에 김영삼과 얽힌 여러 가지 일들이 많지만 굳이 공개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일들이 나중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될 줄은 그때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김영삼과 가까이하지 않았던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