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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시위진압부대 백골단
https://youtu.be/KNjL3v13eSUhttps://youtu.be/_KgX-hb1amohttps://youtu.be/ooHwHu4CpXE요즘 제대한 전.의경들이진사복중대. 특수기동대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요.. 제대로 말씀드릴께요..ㅋㅋ 백골단은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집권시절.. 직업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복부대였습니다.당시 특수기동대라는 명칭과. 형사기동대. 사복기동대라는 명칭으로 만들어졌었죠.또한 형기대는 무도1단 이상으로 의무근무3년. 사복기동대는 무도2단이상과 전의경출신자들(데모진압경험이 있으므로..)중심으로 2년조건부로 각각 채용을 했습니다.당시 말이 무도1단. 2단이지.. 대부분의 직원들은 당시 유도대.(현 용인대)출신들과 특전사 복무자(당시 제대및 장기지원경력자들 중심으로 채용..또한 전두환정권때는 공수출신들을 정말많이 채용했었구 그당시 출신들이 지금 경찰 형사계에 많이 포진되어 있으며 유도대출신들과 경합중이죠. )을 했고, 군복무시 데모진압경험이 많은 전의경출신들도 많은 수를 이뤘습니다. 이들은 하얀색 오토바이 헬멧과. 청색카바. 청바지(화염병 공격시 화염과 유리조각등으로부터 보호할수 있었다더군요)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들은 일정한 대형등을 유지하는것이 아니라.. 데모진압시 어떠한 건물등을 목표로 (대부분100m 거리간격을 두고 뛰어나가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치는 식으로)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또한 붙잡혔을을시 시위대를 반 거의 죽음으로 만들정도로 공포의 부대였습니다.무조건 진격을 하니.. 데모꾼들이 아무리 강력하더라구...일단 튀기 마련이였죠..어떤분이 대답하시길 뭐 100%구속이니 뭐니 하시던데...당시 백골단이 추격을 시도하면 시위대는 도망가다가 다시 뭉쳐 공격대형을 이루기 마련인데..아님 경찰쪽을 쳐다보기 마련인데..그런점을 노려 그들이(시위대)가 지켜보는 시위대들중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강한척 하며 난동을 부리고 선동을 하던 데모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하게 폭력적인 진압을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그러한 까닭에 더이상의 진압 중대에 더이상 다가서지 못하였다더군요. -그러한 점을 노린것이죠.-그리고 실컷 두들겨 패준후 그대로 풀어준다고 합니다. 반쯤 정신나간 사람이 시위대 길에 널부려져 있는데 시위대들은 바로 공포감이 몰입되어 패닉상태로 빠지게 되죠. 또한 진압후 다친사람 데리고 와봤자 시끄럽기만 하니까.. 수배걸리지 않는 사람만 빼곤 그냥 버스에 실고 데리고 가다가 내려주기도 하구 그랬다구 하더군요,.. 그후...93년도에 형사기동대 마지막기수가 만들어 지구..나서 정식 백골단은 97년도 연대사태까지 유지하고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집고넘어가야할것은..일부 전.의경들이 백골단이였다고 말하는것에 대해서인데요.. 당시 진압효과가 뛰어나자..시위대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목적으로일부 전.의경 진압부대원들을 위와 같이 사복부대로 옷을 갈아입히구 진압작전에 내몰았습니다.시위대들은 당시 사복부대만 보면 다들 도망갈때라 그점을 노린것이였죠.. 그러나..직업경찰들과는 달리..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의 특성상 자율성이 있는 진압이 이루어 지지 않았구..(직업경찰관들은 분대별로 작전을 참 많이했다더군요. 작전명령이 좋지 않으면 따르지도 않았구 부당한 지휘를 남용하면 지휘차량을 찿아가 마구 때려부셔 지휘관들이 막 도망두 가구 그랬다네요.. 그런저런 이유로 직업 경찰관 중대는 독자적인 작전이 주로 이뤄졌죠) 이러한 과정에서 명지대 학생(강경대 였던가? 갑자기 이름이 정확히 생각이 안나네요)이 5월달이던가.. 암튼 당시 신입생이였는데.. 시위를 하다가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백골부대처럼 사복을 입구 진압하던 전경부대원들에게사망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김영삼 정권때는김영삼 대통령이 경찰관 사복중대를(백골단)을 무지 싫어했다더군요. 전두환. 노태우정권과 싸울때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 가택연금 경비를 한 중대도 백골단이였고가택연금생활당시 백골단원들한테 많은 제약등을 받자.. 자신이 정권을 잡자마나...김영삼 정권 참모진들은 더이상의 사복중대를 뽑지 않았다더군요. 그래서 93년도 형기대가 마지막기수죠.현재 그들은 대부분 일선서 형사계에 많이 포진되어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암튼. 자신이 정치를 하면 잘할줄 알았는데..당시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바뀌면서 데모가 줄지 않자 (전대협은 군사정권시설에서의 민주화를주장했구.. 한총련은 반미.북 주체사상등으로 약간의 성격이 틀려지기 시작했죠) 당황한 나머지..전. 의경중대로 데모진압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일선서에 있던 일부 젊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순번을 정해 강제적으로 차출하는 방식으로차출하여 1년을 조건을 걸구 진압을 시켰는데 그때는 일선서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다가..강제 차출당해 휴일도 없이 또다시 진압을 시키구 군생활같은 단체생활을 하는터라 그들의 반발이 심했구..그런저런이유로 인해 초창기 사복중대의 위엄을 찿아볼수가 없었죠.그리고일선서에서 차출되었던 경찰관(계급은 순경)이 93년도 8.15범민족 대회때 판문점으로 가려던 시위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골목길에서 공격을 당해 쇠파이프로 머리를 수회 맞고 사망한 사건도 있었구요. 그후한총련의 96년도 연대대 사태이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93년도 형기대 기수가 활약을 끝으로 대부분 3년조건부 근무를 마치고 일선서로 나가버리자.. 다급해진 김영삼정권에서 옛 경찰관 진압중대인 백골단을 회상하고,1997년도에 특수진압요원이라는 명칭하에 직원중대 5개 중대를 창설했죠.자신들의 정권 말기였기에 강력한 카드가 필요했구..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 대대적인 포상을 걸어97년도를 중심으로 한총련의 강력한 지도부가 검거되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폴리스 라인이니.. 무최루탄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2년 조건부로 뽑던 백골단의 후예들인 2기생까지 뽑구나서.. 일선서 순경들을 대상으로 순번을 정해 의무적으로 근무를 조건으로 3개중대를 운영중이고 2007년도에는예전처럼 무도시험이 없어진 상태에서 간단한 체력시험만 거치고 진압중대를 현재 각 시도별로 경찰관을 채용하여 만들어 중앙경찰학교에서 2년 조건부로 현재 교육중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난후 자신이 근무한 부대의 특성과 운용에 대해 전문가가 되죠..그와 마찮가지로 군제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초창기 직업 경찰관의 중대는 정말 막강했구.. 당시 직업경찰관으로 채용되었던 전.의경출신들이 각 타군출신들에게 시위진압요령. 최루탄사용요령등을 가르쳐주며 이들의 시위진압은 무패행진을 계속해 나갔구.. 이들을 지휘하던 지휘부들 사이에서 일당백이라는 말이 나왔다구 합니다. 경찰관 중대 사복 1개중대만 출동하면 광화문. 종로. 신촌일대는 시위대의 공포등으로 금방 진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예로민주화를 요구하며 종로. 신촌 및 서울 시청방면에서 광화문까지 밀려들어온 수만의 시위대로 인해(거기서 시위대가 좀더 밀고들어가면 서울지방청. 미대사관. 기무사. 정부종합청사. 청와대. 그냥 끝입니다.) 최대의 위기로 몰리자. 직원중대인 백골단이 최후의 보류로 포진해 있다가 광화문 16차선에 포진되어 있던 가스차등이 발포하며 백골단원들이 쇠파이프등들고 중무장한채 뛰어들자..수많은 전.의경중대를 깨뜨리고 몰려든 시위대가 순식간에 이들의 위세에 놀란 시위대가 도주하기 시작해 서울시청까지 밀려들어가 길거리엔 그들이 떨어뜨린 소지품과. 신발등이 널부려져 있었다구 합니다. 그 무지막지한 군사정권때 민주화를 요구하며 목숨을 걸고 시위를 했던 모든국민과...또한 경찰관으로서 그들과 대치를 해야만했던 백골단원들.......모두가 이제는 잊혀져간 역사이자..아픔입니다. 제가 흔히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형사기동대 1기생입니다. 형사기동대에 약 3년 근무하고 일반 경찰서 형사계 등 약6년근무하다가 퇴직하고 현재 사업하는 40대 후반 사람인데 인터넷을 보다가 몇자 적고자 합니다.대학을 졸업하고 특수군부대를 85년에 전역해서 태권도장(당시 4단)이나 차릴려고 하다가 경찰서 계시판에 형사 기동대 모집를 보고 지원 했습니다. 당시는 경찰에 투신하여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20대의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약 20대 1의 경쟁을 통해 합격 하였습니다. 경찰 학교에서 6개월간 경찰교육을 받고 126명의 동기들이 모여 1개 중대를 만들었습니다.제가 키가 170센티인데 동기들이 모두 장신들이라 제 키가 제일 적었습니다. 참고로 요즘 젊은들이 키가 크지만 80년 당시 170센티는 중키에 해당 했습니다. 형사기동대 근무는 하루 당직 다음날 휴무 다음에 일근으로 근무를 했는데 데모가 있는 날은 몇일간 집에 갈 수가 없었어요. 데모가 없는 평일에는 소매치기 전담반이 되어 중심가 사복 근무를 했습니다.소매치기도 데모도 무지막지하게 체포 햇습니다. 집해시위자에는 백골단이였지만 소매치기들에는 저승사자로 불렸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녹을 먹고 있는 공직자로서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의지와 신념이 있었습니다. 동기들이 공수부대, 해병대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요즘젊은이들 군에 안 갈려고 하는데, 동기들은 특수 부대에 스스로 지원하여 나라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젊어서 부정 부패도 몰랐고, 월급타면 몇일 술을 먹고나면 없는 돈이였지만 우리는 젊음을 불 살랐습니다. 당시 저는 신혼 이였는데 울산에 데모 진압 한다고 파견나가 2달간 있었는데 그 때 제 아내가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서 통화를 쉽게 하지만 그때는 공중전화를 통해 밤 늦게 전화를 했습니다.보고 싶다는 아내의 목소리에 그리워 말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운동 했는 사람들이 강할 것 같지만 마음 약하고 정에 약합니다.우리가 운동을 해서 그런지 시민들이 날라다니다는 과장을 하고 하는데 ,우리도 뛰어다니고 때리고 했을 때 참으로 힘들고 회의를 느끼곤 했습니다.데모를 막다가 동기들 수명이 대학교 안에서 가스통에 순직한 동기들이 있었는데, 장례식때 저도 많이 울었어요, 그 동기중에 갓 결혼하여 아기가 있는 동기도 있었습니다.또 소매치기와 싸우다가 아킬레스껀이 잘리어 장애인인 된 동기도 있어요.세월이 지나서 저는 일반인으로 사업을 하지만 현재 동기들은 일선 경찰서 형사계에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세줄 요약1. 백골단은 전의경,해병대,특전사,공수부대, 유도대(현 용인대 유도학과) 출신들로 이루어진 직원 중대였다.2. 일부 전의경 중대들도 백골단처럼 백골단 복장으로 시위진압 동원되었지만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의 특성상 지휘관의 지나친 개입 때문에 자율적인 진압작전이 불가능해 직원중대처럼 진압을 잘하진 못했다.3. 윗 글에 나오는 오류인데 김영삼씨때는 나라가 완전히 민주화되었었기 때문에 이때 폭동 일의킨 한총련 진압했던 백골단(형기대)는 말 그대로 민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고 한총련 전에 있던 전대협도 북한,중국 찬양하는 이적단체였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의외로 치열했던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경쟁
심심해서 찾아보다가 재밌는 사실 발견해서 글 써봄크로노그래프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음(출처: crowns and caliber blogs)( Nicolas Mathieu Rieussec가 1821년에 개발한 최초의 크로노 그래프 회중시계)크로노그래프는 방수시계보다도 역사가 깊다는 걸 알 수 있음.(출처: crowns and caliber blogs)(1913년 론진의 최초 수동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손목시계 크로노 타이틀은 당시 갓티어 론진이 가져감.(출처: crowns and caliber blogs)(1958년 호이어가 최초로 탑재한 타키미터 : 최초의 레이싱 크로노그래프 시계)크로노 명가 호이어도 최초 타이틀 하나 가지고 갔음.여기까지 왔으면 다음 타깃은?(출처 : 구글 검색)롤렉스 <= 그냥 이새끼들임롤렉스 덕분에 급속도로 퍼진 오토매틱 수요에 맞춰 크로노 명가 친구들도 수동 크로노에 안주할 수는 없었음.따라서 1960년대 들어서 제니스, 호이어, 브라이틀링, 해밀턴 등은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개발에 착수함.1. 제니스 + 모바도해당 타이틀에 가장 먼저 시도한 회사는 제니스임.제니스는 당시 해밀턴 라이벌 : 모바도라는 회사를 꼬드겨 합작으로 1962년부터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개발에 착수함.제니스는 처음부터 컬럼휠, 고진동같은 선진적인 기능을 염두하고 개발하였으며특히 기존의 쓰리핸즈 모듈에 모듈을 올리는게 아닌 처음부터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만들려 했음.(출처: timeandwatches)그 유명한 '엘 프리메로'가 이렇게 탄생하였다 함.그러나 1965년 개발 완료해야 했을 이 프로젝트는 위와 같은 많은 요구조건 때문에 4년이 더욱 늦어졌고,제니스는 1969년 1월이 되어서야 자사의 엘프리메로가 개발 완료에 임박했음을 알림.(경쟁사 연합이 3월에 자동 크로노 제품을 최초 발표하자, 부랴부랴 3월에 내놓은 제니스의 광고)하지만 제니스는 생산 능력이 부족했는지, 제품 판매는 그 해 3분기가 되어서야 시작됨.물론 3월에 일본에서 극소량 판매는 했다는데 양산된 수준은 아닌거 같음.이러는 사이 경쟁사가 한발 더 앞서있었는데....2. 프로젝트 99 : 호이어 + 브라이틀링 + 해밀턴(1950년대 호이어 오타비아 / 출처 : 구글 이미지) 1960년대, 호이어는 고민에 빠졌음.앞서 설명했던 롤렉스가 촉발시킨 오토매틱 제품의 폭발적인 인기 때문에안전영역이라 생각했던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인기까지 사그러드는게 느껴졌다고 함.(1960년대 초, 호이어의 수동 크로노 라인업 / 출처 : 호딩키)호이어는 크로노그래프에서는 강자였지만,오토매틱이란 '이세계' 에서는 한낯 뉴비에 불과했음.그래서 회사를 하나 인수하는데(출처 : 호딩키)바로, BUREN 이라는 당시 마이크로로터 좀 치던 친구들이었음.이 뷰렌의 칼리버 1000은 이후 개발할 크로노그래프의 원형이 되었음.즉, 호이어는 앞서 설명한 처음부터 똥빠지게 크로노 모듈 만들던 죄니스와 달리 기존 오토모듈에다가 크로노 얹어서 쉽게 쉽게 가려 했던거고그러기 위해서 오토매틱 로터가 아래에 내장되는 마이크로 로터를 낙점했고 그 회사를 인수한거임.(태그호이어 오타비아 / 출처 : 구글 이미지)하지만 문제가 있었음.현재는 LVMH 응딩이 아래서 따뜻한 생활을 하는 태그'호이어' 지만의외로 '호이어' 시절에는 회사 히스토리보면 죄다 뭔 따값되 형식으로 오늘만 사는 시계회사마냥재정난일때 기깔나는 제품 출시해서 살아나는 재밌는 회사였음.이번에도 뷰렌 인수한건 그렇다 치는데 돈이 없었음.그렇다고 제니스한테 최초 크로노 뺏기기는 싫고...(잭 호이어 / 출처 : www.watches-news.com)그래서 당시 호이어 수장인 '잭 호이어'는 대가리를 굴리는데,바로 이이제이 전술을 사용함.앞서 제니스 엘프리메로와 합작한 '모바도'가 있는데당시 모바도의 라이벌이 바로 해밀턴이었다고 함.이 때문인지 해밀턴은 호이어가 뷰렌을 인수한 이후, 호이어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되었음.심지어 호이어는 자기의 적도 사용함.(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1950s / 출처 : 구글 이미지)자신처럼 크로노 명가였던 '브라이틀링'까지 끌어들임.사실상 최대의 경쟁자를 끌어들인 셈인데,당시 호이어는 미국, 영국, 독일에서 강했고브랄은 당시 프랑스, 이탈리아가 주요 고객층이었다 하니 그나마 충격은 최소화될거라 생각했던듯.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쟁자였는데.. 여러모로 호이어가 자금사정이 절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이렇게 호이어 + 브랄 + 해물탕 연합은'프로젝트 99'를 실행에 옮겼고기존의 오토 모듈을 사용한 만큼 제니스보다 빠른 속도로 무브 개발이 진행 됨.(호+브+해 합작 : 칼리버 11 / 출처 : 구글이미지)1969년 1월, 제니스가 엘프리메로 무브먼트 거의 다 만들었도르를 외친 당시,호브해 합작은 그해 3월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탑재 제품들을 제네바, 홍콩, 뉴욕, 베이루트 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함.(1969년 3월 3일 발표된 해밀턴, 호이어, 브라이틀링의 최초 자동 크로노그래프 모델들 / 출처 : 호딩키)호이어는 결국 무브 개발은 제니스에 비해 약간 늦어졌어도,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를 탑재한 제품을 세상에 발표함.(1969년 바젤 월드에서 공개한 호이어 연합의 오토매틱 크로노 제품들 / 출처 호딩키)이 제품들은 바젤 월드에서 추가로 공개되었고,같은 해 7월부터 민간판매가 시작됨.같은해 3분기 이후에나 판매가 시작된 제니스보다는 확실히 빨랐지.하지만 이 칼리버11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출처 : 구글 이미지)앞서 말했듯이, 마이크로 로터가 탑재된 오토매틱 모듈위에 그대로 크로노 모듈을 얹은것이다 보니밥통같은 두께는 물론이고, 안정성마저 심각하게 떨어졌음.이러한 문제를 인식했는지 이 칼리버11은 공개 직후 바로 구조를 개선한 후속 무브들로 교체되기 시작함.여러모로 '최초' 타이틀에만 목숨을 건 무브먼트임을 알 수 있음.(1969년 세이코 카탈로그 / 출처 : thegrandseikoguy)뭐 아무튼반쪽짜리 무브라 해도 최초 탑재 제품 출시라는 타이틀도 얻어갔고여러모로 당시에는 센세이션했던 제품이라세이코 핫토리 회장도 바젤월드 당시 호이어에 축하 했다는 풍문이 전해짐.제니스도, 호이어+브랄+해밀턴도 서로 최초 타이틀을 가져갔으니 해피엔딩이라 보면 될듯.끝.그런데..(1969년 1월에 생산된 세이코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 출처 : plus9time)추후 밝혀진 사실로는제니스가 엘프리메로 개발 거의 완료했도르를 외친 1969년 1월 당시세이코는 이미 오토매틱 크로노 제품을 생산중이었음 ㅋㅋㅋㅋ이것 때문에 십수년간 논쟁이 이어졌던걸로 암.제니스, 호이어의 2파전에서세이코까지 얼떨결에 최초 논쟁에 끼어들게 되는데저 1월 제품이 공식 판매전에 생산된 제품이기 때문에 무효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핫토리 회장 축하썰은 뭐임?? 하는 사람들도 있어왔음.이런 혼파망인 상황속에서 어떤 양덕이 세이코 내부자료를 가져왔는데(세이코 사내 잡지 / 출처 : plus9time)놀랍게도 세이코는 제니스보다 빠른 호이어 연합보다 빠른 1969년 5월에 대량생산 완료하고 판매 시작했음.바젤월드에서 호이어가 공개하기도 이전임.심지어 시제품은 68년 8월에 개발되었다 하니엘프리메로 무브 개발보다도 더 빠르게 탑재된 제품을 개발했던게 밝혀짐.즉 제니스가 1969년 1월에 프로토타입과 샘플의 완성을 발표하고, 호이어가 1969년 3월에 발표했을 때 세이코는 이미 출하를 위한 양산 작업을 진행 중이었음.이때 무브먼트가 바로, 세이코 6139 무브먼트(세이코 6139 무브먼트 / 출처 : 구글이미지)이 제품은 번갯불에 콩구워먹듯이 오토 모듈에 또 모듈올린 호이어 칼리버 11과 다르게엘프리메로처럼 처음부터 크로노를 위해 설계된 무브였음.심지어 이 제품, 제작이 쉬운 캠도 아니고 수직 클러치 방식임.여러모로 황금기라 불렸던 60-70 시대의 세이코다운 무브라 할 수 있지.(출처 : 세이코 홈페이지)결국 세이코 피셜 :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타이틀은 세이코가 가져가게 됨.근데 의문이 있음.스위스에서 피터지게 싸우던 회사들과 다르게 세이코는 이런 제품을 왜 조용히 출시했던걸까?첫 번째로 세이코는 애초부터 자동모듈의 일반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함.크로노모델이 자동되는건 당연한거 아님??이렇게 생각했을거라는 거지.두 번째로, 세이코는 자동 크로노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음.같은해, 세이코는 스위스 시계업계에 대재앙을 선사할 제품을 출시하게 되는데,(출처 : 세이코 홈페이지)최초의 쿼츠시계 : 아스트론이 그 해 12월에 출시되고제니스건 호이어건 해밀턴이건 전부 쿼츠파동에 회사가 작살나버림 ㅋㅋㅋㅋ세이코가 아스트론 이후 얼마 안되서 쿼츠 크로노 개발까지 성공했던걸 보면애초에 오토매틱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작성자 : 한범부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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