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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번 위스키의 다음 세대(Next Generation)
[시리즈] Whiskey Awards · 2022 베스트 아메리칸 위스키 Top 20 · 미국 버번 유튜버가 뽑은 2022 상반기 어워즈 · 미국 버번 유튜버 백바 라인업 · 버번 위스키 입문하고 싶다면 추천하는 3대장들 · 가격대별 라이 위스키 추천 · 한국에서 과대평가받고 있는 버번 위스키 TOP5 · 사고 나서 후회하는 버번 12가지 · 수입했으면 하는 갓성비 버번 TOP5 · 수입사가 열일해서 데려왔으면 하는 버번 위스키 TOP5 · 미국보다 일본에서 사야할 버번 [시리즈] Whiskey Articles · 트렌드 버번&위스키 2023 (1) · 트렌드 버번&위스키 2023 (2) · 충격적인 커피 시장은 아무것도 아닌 술판 · 버번 위스키에 대한 팩트체크 · 미국 최고의 버번과 라이 위스키 · 현지와의 비교 통해 버번 가격 체감하기 · 버번은 구형이 의미없는 이유 · 버번에 숙성연수와 도수가 전부가 아닌 이유 · 버번 위스키 스태그(Stagg)와 같은 급 정리 · 버번 급에 대해서 · 버번의 맛 차이 · 버번에 보틀 인 본드(Bottled-in-bond)는 왜 있는걸까? · 버번의 토스티드 배럴 · 버번 위스키의 스토어픽이란? · 버번 위스키 고도수 신앙의 기원과 흥행 · 미국의 위스키 용량이 줄어들고 있다? · 와일드터키 12년 평가가 구형과 차이나는 이유 · 부드러움을 표방하는 버번들 · 빈자의 패피 반 윙클을 만들어보자 · 심심해서 쓴 버번 위스키 유튜버들 리뷰 · 짐 빔 마스터 디스틸러의 레딧 Q&A 요약 01 · 짐 빔 마스터 디스틸러의 레딧 Q&A 요약 02 [시리즈] Whiskey Brand Info · ECBP 배치 넘버 정보 · 와일드터키의 숙성창고(rickhouse) · 러셀 리저브 TMI · 리틀 북 TMI · 노아스밀 TMI · 멜로우콘 TMI · 믹터스 TMI · 바렐(Barrell) 크래프트 스피리츠 TMI · 스택 주니어 TMI · BTAC(버팔로 트레이스 앤틱 컬렉션) TMI · 부커스 TMI · 블랑톤 TMI · MGP의 버번과 라이 위스키 · E.H. 테일러 TMI · 위도우 제인 TMI · 잭다니엘 TMI · 포로지스 TMI · 메이커스마크 TMI · 메이커스마크 프라이빗 셀렉션이란? · 디아지오가 보유한 버번 위스키 브랜드 · 페르노리카가 보유한 버번 위스키 브랜드 최근 버번 업계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알다시피 버번 업계는 대다수 대기업에 인수되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증류소는 굉장히 드물다.하지만 조상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인물들도 존재한다.그래서 몇 안되지만 조상을 따라 증류소 곁을 지키는 인물들을 소개하려 한다.대기업에 인수되지 않고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은 대형 증류소는 단 두 곳이다.바로 헤븐 힐(Heaven Hill)과 윌렛(Willett)이다.헤븐 힐은 샤피라 패밀리(The Shapira Family)가 1935년부터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다.지금은 창업주 에드 샤피라(Ed Shapira)의 아들 맥스(Max)가 운영 중이다.초창기부터 짐 빔(Jim Beam)의 빔 가문 일원이 마스터 디스틸러로 활약했으나, 2019년 이후로 그 명맥이 끊겼다.헤븐 힐 내 빔 가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파커 빔(Parker Beam)으로 파커스 헤리티지(Parker’s Heritage)라는 연마다 한정판으로 출시하는 실험적인 위스키를 만들어내게 한 인물이다.1936년에 설립한 윌렛 증류소는 1980년대에 경영 악화로 문을 닫는다.석유 파동 이후 70년대 후반에는 가소홀(가솔린+알코올)을 자동차 연료로 만들어 팔기도 할 정도였다.하지만 이후 1984년에 윌렛 가문인 마사(Martha Harriet Willett)와 그녀의 남편 에반 컬스빈(Even Kulsveen)이 켄터키 버번 디스틸러(KDB)로 이름을 바꾸고 증류소를 부활시킨다.그들의 아들, 드류(Drew)는 2003년에 증류소에 합류한 뒤 마스터 디스틸러로 활약 중이며, 그들의 딸, 브릿(Britt)은 2005년부터 남편과 함께 운영을 맡고 있다.이후 2008년에 ‘윌렛 패밀리 이스테이트’라는 싱글 배럴 버번을 출시하면서 윌렛의 성공은 이어져 오고 있다.증류소가 대기업에 인수되었지만 그럼에도 가문 대대로 마스터 디스틸러를 역임하고 있는 증류소도 단 두 곳이다.바로 짐 빔(Jim Beam)과 와일드 터키(Wild Turkey)다.빔 가문은 제이콥 빔(Jacob Beam)이 1795년에 배럴을 판매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8세대가 짐 빔의 운영을 맡고 있다.부커스(Booker’s)라는 전설적인 버번을 만들어낸 부커 노(Booker Noe)의 아들, 프레드(Fred)는 2007년부터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어 39년 간 제임스 B. 빔 증류소를 관리하고 있다.그의 아들, 프레디(Freddie)는 2013년부터 활동하면서 리틀 북(Little Book) 위스키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큰 활동을 이어갔다.이후 2022년 5월에 프레드 B. 노 증류소가 설립되면서 마스터 디스틸러가 된다.처음으로 짐 빔에서 빔 가문 두 명이 같이 마스터 디스틸러로 활동하게 된다.리틀 북같이 실험적인 위스키를 만들어낸 프레디라서 새로운 증류소에서 새로운 위스키를 출시한다고 한다.(여담으로 아들의 이름이 증조부와 같은 부커(Booker)다.)내년이면 와일드 터키에서 70년 경력을 앞두고 있는 버번 업계의 대부, 지미 러셀(Jimmy Russell)은 현재 와일드 터키의 엠배서더다.그의 45년 경력을 기념하기 위해 출시했던 버번 위스키, 러셀 리저브(Russell’s Reserve)가 무려 2000년에 출시했다.그의 아들, 에디(Eddie)가 2021년에 40년 경력이 된 걸 기념하면서 러셀 리저브 13년이 출시된 걸 생각하면 엄청난 경력이다.2015년이 되서야 에디 러셀이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면서 마스터스 킵(Master’s Keep), 러셀 리저브 1998 등 새로운 브랜드들을 런칭했고 와일드 터키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그리고 이제는 에디의 아들 브루스(Bruce)의 이름이 버번에 쓰여지기 시작한다.브루스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와일드 터키 글로벌 엠버서더로 활동해 이미 13년의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21살 때부터 와일드 터키에서 일을 시작해서 이제는 그의 조부와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한다.그래서 2023년 와일드 터키는 한정판으로 제너레이션즈(Generations)를 출시할 예정이다.9년, 12년, 14년 그리고 15년 숙성 버번을 각기 다른 세대의 3명이 한 팀으로 뭉쳐서 배럴을 골라 블렌딩했다.이 버번을 통해 와일드 터키의 유산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이 밖에도 메이커스 마크(Maker’s Mark) 창업주의 손자, 롭 사무엘(Rob Samuel)은 메이커스 마크의 총괄 디렉터를 맡고 있다.그리고 현대 버번 산업의 아버지라 불리는 E.H. 테일러(Taylor)의 자손이 E.H. 테일러 버번이 만들어지는 버팔로 트레이스의 Warehouse C를 관리하고 있다.이렇게 글을 쓰지만 가족 경영 및 운영은 매우 드물다.당연하게도 사업 상 문제나 이익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잘릴 수 있는 영업사이기 때문이다.그리고 특히 주류업계는 대기업에 인수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그럼에도 한 가족을 통해서 꾸준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버번 위스키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그 유산들이 앞으로도 이어져 오길 기대한다.
작성자 : 블랑톤고정닉
1921년, 무솔리니의 공산당
군중 속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무솔리니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의 일당 민주집중제 따위는 허상입니다.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방법론의 하나일 뿐이지, 결코 공산주의자가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닙니다. "베니토 무솔리니, 1922년 로마 시내 연설에서.1. 창당과 집권 과정 러시아 혁명 이후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크렘린만을 바라보던 그 시절에, 한 사내가 그의 동지들과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탈당해 세운 이탈리아 공산당은 현대공산주의의 시작을 열었다 평해집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 당시 여느 공산주의 정당과 달랐던 점은 다당제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었습니다.당시 서기장 베니토 무솔리니가 주장했던 이러한 신공산주의는 초기에 큰 공격을 받았으나, 북부의 노동자들과보수적이지만 가난한 남부의 농민들의 호응을 얻으며 큰 지지를 얻어 원내 제 3당까지 순식간에 치고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산당의 약진에 큰 위협을 느낀 거대 양당이 극단화하며 공산당은 더욱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고, 결국 다음 선거에서 공산당은 원내 1당을 차지, 코민테른의 압박을 받은 사회당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당이 될 수 있었습니다.2. 공화제 국민투표 전간기 공산당의 집권 동안 가장 큰 화두는 당연하게도, 왕국에서 공화국으로서의 전환 문제였습니다.공산당의 평당원들부터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공산당 밖에서도 이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왕실과 공산당 지도부 양측이 불편한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무솔리니 총리가 국왕을 방문했습니다. 무솔리니 총리와 국왕과의 대화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이 이후로 왕실와 공산당이 타협, 국민투표 결과로 결정하기로 하여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왕실이 폐지되어오늘날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왕실 일가는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화국의 국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세간에 전해지는 바로는, 무솔리니 총리가 국왕을 방문해 한 말 중 이러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폐하도. 이 나라의 한 순간에 있을 사람이지만 인민들은 영원히 여기 있을 겁니다. 그들이 선택하도록 합시다. " 3. 제 2차 세계대전 " 한니발은 아프리카 출신이었지. 저 게르만족은 알프스를 넘지 못할 걸세." - 베니토 무솔리니 공산당의 집권 이후로 가해진 경제 제재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했던 공화국은, 오히려 그것이 호재가 되어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가장 빨리 탈출할 수 있었던 국가 중 하나였고, 그 업적을 바탕으로 공산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은 북쪽에서 대두되고 있었으니,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한 독일이 바로 그 위협이었습니다.공화국은 전쟁 초기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공화국을 수정주의 반동이라며 매도해 국내 단결을 도모했던 소련은그 탓에 내부 단결이 잘 되지 않았고,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 모스크바가 함락, 페름으로 정부를 이전해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결국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공포가 공화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공화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했습니다.그러나 제재 속에 있었던 경제 상태로 독일 상대로 공세를 할 만한 군사력을 갖출 수는 없었기에, 공화국은 해군 전력의 우수함과 지형의 유리함을 믿고방어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가장 위험했던 제 2차 카포레토 전투에서 간신히 독일군을 막아낸 이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에 발맞춰 '카이사르 작전'을 개시, 남부 독일과 발칸의 독일 점령지를 해방합니다. 이후 일본 전역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4. 전후처리와 냉전 2차 세계대전의 승리 후, 이탈리아의 영향권은 오스트리아부터 불가리아까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영웅 티토를 위시로 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결국 아테네를 해방한 그리스 공산당, 무솔리니와 만남 이후 노선을 바꾼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등발칸 전역에서 이탈리아식 '신공산주의'가 집권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끊임없이 공산 국가 사이의 이탈리아의 영향력 확장을 경계해야 했으나,미국 - 소련 - 이탈리아의 1강 - 1중 - 1약 체제에서는 이탈리아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최대한세력의 균형을 맞춰야 했기에 이탈리아에게 우호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미국 또한이탈리아를 끌어들인다면 소련을 압도할 수 있다고 여겨 적극적으로 포섭을 시도했습니다 특이한 점으로, 무솔리니 총리가 방문한 횟수가 가장 많은 신생국은 동아시아의 조선인민공화국이었습니다. ( 은퇴 후를 제외한다면 아랍 연합 공화국 )그가 여운형과 만난 자리에서 어눌하지만 유창한 한국어를 선보인 것은 전 조선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정세를 이용해 아프리카와 아랍의 신생국들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투사,가말 압델 나세르 등의 바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오늘날의 아랍 연합 공화국 성립에 적극 기여한 보상으로저유가를 보장받아, 고도성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됩니다. 무솔리니 총리는 1964년, 공산당 당사에서 혁명 동지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별세하였습니다.5. 찾아오는 위기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공산당의 집권은 얼마 안 있어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소련은 관료주의적 공산주의의 운명이라도 되듯이, 특유의 비효율성 때문에 계속된 경제 침체,중동 지역에서 확대되어가는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무리한 이란 내전 사주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대외정책 실패로 인해 지속적인 부침을 겪으며 점차 쇠퇴하다가,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경제가 완전히 붕괴하게 됩니다. 대 소련 수출이 상당하던 이탈리아 경제는 한 차례 타격을 입어 공산당의 집권에 한 차례위기가 다가왔지만, 새로운 공산당의 수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총리의 리더십에 힘입어 미국과의 관계를 더 강화하며냉전에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1991년의 소련 붕괴로 인한 수출 급감, 베를링구에르 총리의 급사로 인한 공산당내부의 리더십 붕괴로 인해 이탈리아 공화국은 수십 년 간의 성장기를 끝내고 말았습니다.그리고 성장의 종료는, 이탈리아 정치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6. 상상한 적 없던 제3당 시절 베를링구에르 총리의 사망으로 인한 추도 분위기로 인해, 일단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던공산당이었지만, 바로 다음 선거에서 만년 야당 기독교민주당이 제1당 자리를 차지, 경제 위기에 책임을 물고지지율이 크게 하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공산당은 계속해서 침체기를 맞으며 제3당까지 추락하게 됩니다. 제3당까지 추락한 공산당은 이후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무솔리니의 유산 덕에 그나마 힘을 쓸 수있었던 외교부 장관직을 주로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와 중동 내에서 세속주의를 대표하는 아랍연합공화국과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사우디아라비아-이란의 충돌이 가시화되며 벌어진 난민 사태로 인해중도우파-극우계 정당들이 제1,제2당을 차지하며 연정에서마저 쫒겨나게 되었습니다.7. 새로운 리더십과 재집권 그렇게 다시 집권하지 못할 줄 알았던 공산당은 여자 무솔리니라고 불리는 신인 정치인조르자 멜로니의 지도 하에 다시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15세 때 공산당 청년조직에 가입한 그녀는 2006년 라치오 지역구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아직 공산당이 내각에 참여하였을 때 외교부 장관직을 맡아 아랍연합공화국과의난민 사태에 대타협을 하는 것에 공헌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으며, 그 다음 공산당 전국당대회에서서기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은 우파 연정의 핵심 정당 기독교민주당의 당수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부패 사건이 터지며 공산당은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중도 정당들을 끌어들여 연정을 구성하여 재집권에 성공하였습니다.이탈리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나는 무솔리니가 좋은 정치인이라고 믿는다.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탈리아를 위한 것이었다.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그와 같은 정치인을 보지 못했다. - 조르자 멜로니.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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