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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에세이] 프롤로그- 달리기는 늘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운영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202.136) 2007.03.16 14: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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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달리기는 늘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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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다리와 발뿐 아니라 어깨와 팔, 심지어 얼굴의 근육도 마비돼 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이다. 피니쉬 라인. 지금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뛰었던 러너들의 모습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은 나와 피니쉬 라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4시간이 넘는 나와의 싸움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는 지점. 나는 그 곳을 통과하는 순간 또 한번  힘든 여정을 견디고 다시 태어난 나를 만날 것이다.


  “제가 달리기를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이라는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는 단 한 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조지 쉬언)


  이제 800m만 달리면 된다.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다시 눈이 열리고, 조금 전까지 마비되었던 온 몸의 근육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몇 번의 완주 경험을 통해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지 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스타트 라인에서의 긴장감과 설레임이 30km를 지나는 시점에서 무력감으로 돌변했다. 잠시 쉬고 싶었다. 천천히 걷다가 호송차량을 타고 편하게 가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아무리 완주 횟수가 늘어나도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회를 거듭할수록 휴식에 대한 유혹은 더 강렬해진다. 오버페이스를 했다고 변명하면서 그냥 쓰러져 버릴까? 꼭 완주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이 정도까지 달린 게 어디야. 당장 달리기를 그만 둬도 될 백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달리고 있다. 조금만 힘을 내자.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조금만 더 견디자. 포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거리를 달려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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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승점 500m를 앞둔 지점에서 지금까지 뒤에 있었던 러너가 나를 추월해 앞으로 달려 나간다. 저 친구도 마지막 스퍼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4시간이 넘도록 뛰면서 남아 있는 에너지를 다시 끌어낼 수 있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아마 저 사람은 나보다 경험이 더 적을 수도 있다. 훈련을 충분히 못해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사력을 다해 지금의 순간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저토록 전력으로 달려가게 할까? 나는 고통의 대열에 동참한 이들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뛰었다. 아마 상대방도 나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한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 다른 사람을 달리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풀코스의 마지막은 그런 상생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300m만 달리면 골인이다. 조금만 지나면 이번 마라톤은 끝난다. 힘든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은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난 바로 그 순간, 다음 마라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동네 운동장에서의 달리기, 한강변에서의 달리기, 그리고 춘천에서 단풍을 보며 호반의 물안개 속을 달리고 나니 이제는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고 싶다는 욕망도 생기고, 눈 위를 달리고 싶다는 생각, 머리칼을 휘날리며 들판을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작은 갈망으로 움트기 시작한다.


  달리기는 인내와 겸손을 가르쳐 준다. 달린다는 것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완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달리는 것은 곧 그 완주가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알게 한다. 달리면서 나는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달리는 동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된다. 부끄러운 모습도 보게 되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나도 만나게 된다. 달리는 동안 나는 지혜를 얻는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문제들도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직면하게 되면 해결의 길이 보인다. 부족한 나에게 지혜와 큰 마음으로 복잡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간은, 달리는 동안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가난해짐을 느낀다.


  드디어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온 몸의 긴장이 풀렸지만 아직은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얼음물로 머리와 얼굴을 축이고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천천히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 주었다. 지난 번 기록보다는 조금 좋은 기록으로 무사히 완주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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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원 나온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묻는다. “발가락은 좀 어떤가요?” 사실 달리면서 가장 복병이 발가락이었다. 중간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달려가야 하는지 정말 처절하게 고민했던 가장 큰 이유도 발가락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발가락은 고통을 잘 이기고 결승선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지 않았던가.


  “괜찮아요.”나는 내심 발가락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러너들의 모습. 오늘 함께 달린 러너들의 모습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땀범벅에 물을 흠뻑 뒤집어 쓴 그들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지만 얼굴 가득 번지는 환한 미소는 족히 천만불 짜리 쯤은 되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하나 찡그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더 빨리 달리려고 애쓴다. 그러다 더 멀리 달리려고 한다. 하지만 달리다 보면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참 모습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달리기의 진정한 즐거움과 의미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긴 거리를 달리는가가 아니다. 달리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이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존재감을 확인하고 내 자신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늘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인생에서의 ‘성공’이 반드시 많은 부를 쌓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달려가는 동안의 즐거움과 숨쉬는 것의 고마움, 땀 흘리는 것의 기쁨을 알고 있다. 그래서 꿈을 꾸며 다시 길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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