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오름에 살포시 얹힌 초가집 느낌의 호텔, 제주의 하늘이 리듬감 있게 펼쳐지는 금속판의 지붕. 제주 서부 중산간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인 ‘포도호텔’과 노아의 방주를 닮은 방주교회다. 두 작품 모두 세계적인 건축 거장인 이타미준의 작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두 작품뿐 아니라 안덕면 SK핀크스 골프클럽을 가운데 두고 조성된 포도호텔, 방주교회,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수풍석뮤지엄, 생태공원에 이르기까지 근처의 중산간 지역이 모두 이타미준의 건축으로 새롭게 탄생한 곳들이다. ‘지역의 문맥을 피부로 느끼면서 진정한 국제성이라고 할 수 있는 원형을 추구하기 위해 상당히 고심했다’는 건축가의 고뇌를 담아 새롭게 탄생한 공간인 셈이다.
이타미준이 제주의 서쪽 풍경을 바꿨다면 또 다른 세계적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는 제주의 동쪽 풍경을 바꿔놓았다. 섭지코지의 모습이다. 이처럼 제주도엔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이 곳곳에 포진해 있고, 근현대 건축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타미준과 안도 타다오, 두 건축 거장의 작품과 서귀포 근현대 건축을 찾아 테마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서귀포시 안덕면 중산간 지역의 풍경은 이타미준의 건축으로 새로운 풍광이 되었다.
첫 번째 테마는 이타미준으로 더 잘 알려진 재일 한국인 건축가 유동룡의 작품이다.
지난 2022년 12월에는 이타미준(한국명 유동룡)의 컬렉션을 전시한 유동룡미술관이 문을 열어 그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을 직접 만나기에 앞서 유동룡미술관을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① 유동룡미술관, ‘나의 오리지낼리티를 발견하는 곳’
이타미준은 193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2011년 6월 작고할 때까지 평생을 일본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했지만 자신의 본명 ‘유동룡’과 한국 국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경계를 초월하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불렀다 한다. ‘이타미준’이라는 작가명은 국제인으로 살기 위한 것으로, 자신이 처음 이용했던 오사카의 이타미 국제공항과 친한 동료 작곡가인 길옥윤의 예명인 ‘쥰’을 빌려와 지은 것이라 한다.
그의 작품 세계와 철학이 담긴 유동룡미술관(Itami Jun Museum)은 문화예술의 향기가 짙은 마을인 저지예술인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의 설계는 건축가의 딸인 유이화씨(현 유동룡미술관 관장)가 맡았다. ‘내 이름을 딴 문화재단, 기념관, 건축상을 만들어라. 이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설계한 공간이다. 유이화 관장은 유동룡미술관을 ‘이타미준의 집이고, 손님을 환대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제주도의 지형이 타원형에 가까워서인지 이타미준의 스케치에도 타원형이 많았다는데, 유동룡미술관도 제주를 닮은 타원형의 공간으로 설계됐다. 유동룡의 저서와 작품집을 모아 놓은 타원형의 1층 라이브러리와 제주도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2층의 상설 전시관이다.
이타미 준은 당대 필요했던 메시지를 작품으로 꾸준히 전달한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활동하던 1980년대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영향으로 화려한 건물들이 주를 이뤘는데, 유동룡은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사람들이 상실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며 꾸준히 건축과 글로 표현했다 한다. 이처럼 자신만의 철학을 끊임없이 발전시킨 덕에 지역성, 야성미, 자연 등 ‘이타미 준만의 오리지낼리티’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유이화 관장에 따르면 이타미준은 나이 쉰을 넘기고 나서 “건축이 비로소 재밌다”고 했고, 예순이 됐을 때는 “건축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일흔이 지나서 “이제야 내 오리지낼리티가 뭔지 알 거 같다”고 했다 한다.
저지예술인마을에 위치한 유동룡미술관.
유동룡미술관에선 개관 기념으로 열렸던 첫 번째 기획전에 이어 현재 두 번째 기획전인 <손이 따뜻한 예술가들 : 그 온기를 이어가다>가 진행되고 있다. 이타미준, 시게루 반, 박선기, 한원석, 강승철, 조소연, 태싯그룹이 참여한 전시회로, 설치(건축), 사진, 공예, 오디오비주얼 아트, 회화, 영상 등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유동룡미술관을 방문하기 전, 사전 지식을 얻고 싶다면 홈페이지(https://itamijunmuseum.com)에 들어가 오디오 도슨트를 먼저 만나면 된다. 배우 류승룡과 이하늬의 차분한 목소리가 각각의 작품을 나내한다. 오디오 도슨트는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 중국어, 일어 버전으로도 제공된다.
유동룡미술관은 기획전시와 상설전시에 더해 다양한 프로그램도 주기적으로 열고 있다. 지난 12월엔 기획전시와 연계해 <플라스틱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현재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건축 놀이터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10~13세를 대상으로 한 ‘종이건축실험실’을, 5~9세를 대상을 한 ‘제주의 밭, 먹돌의 집 : 바당밭’을 운영 중이다.
<유동룡미술관>
- 운영시간 : 10:00~18:00 (매주 월요일, 1월 1일 휴관)
- 관람 요금 : 통합권 26,000원(성인), 18,000원(초중고 학생) / 사전 예약 우선
- 위치 :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906-10 (월림리)
② 포도호텔, 제주의 전통 초가, 그리고 오름을 닮은 공간
포도호텔은 5성급 호텔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한 송이 포도 같다’라고 해서 포도호텔이란 명칭이 붙었다 한다. 능선이 아름답게 이어지는 제주의 오름을 닮았는데, 호텔 안의 공간은 전통 초가집을 모티브로 해 긴 복도가 마치 제주의 마을 올레처럼 이어지고, 단층으로 지어 천정도 꽤 높다고.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포도호텔의 특징 중 하나는 인공 조명을 줄이고 자연광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이다.
단층으로 지어진 호텔이기에 객실은 26개밖에 되지 않는다. 바다가 보이는 객실은 서양식, 한라산이 보이는 쪽은 전통 한식 온돌로 구성돼 있으며, 호텔 곳곳에 서까래와 격자무늬 창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을 잘 살려냈다.
제주의 전통 초가, 그리고 오름을 닮은
포도호텔에서 SK핀크스 골프장 방향으로 걸어가면 곧바로 SK 핀크스 클럽하우스를 만난다. 이타미준의 연작으로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이 뒤로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과 일치해 마치 한라산을 따라 그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포도호텔과 달리 클럽하우스 앞 정원에서 일본식 정원의 느낌이 난다는 점이다.
마치 한라산을 따라 그린 것 같은 SK핀크스 클럽하우스
<포도호텔>
- 위치 :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 863
③ 방주교회, 리듬감 있게 담긴 제주의 하늘
해발 400m 쯤에 위치한 방주교회는 연못에 살포시 놓인 노아의 ‘방주’처럼 수공간이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다. 살랑살랑 바람이라도 불면 잔잔하게 생기는 물결로 인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방주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착시까지 불러일으킨다.
방주교회는 물, 빛, 나무, 금속 등이 적절히 어우러져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게 특징이다. 지붕선이 살짝 꺾여 있어 지붕을 덮고 있는 금속판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높은 곳에 올라 지붕까지 내려다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주변에 그럴 만한 곳은 없다.
주중과 주말에 실제로 예배가 진행되는 교회라 건물 내부는 예배당으로 꾸며져 있는데, 교회 예배당이라기보다는 성당에 온 듯한 느낌이다. 자연광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돼 촘촘한 나무 벽 사이로 배치된 좁은 창을 통해 빛의 스트라이프가 만들어진다.
예배당의 정면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는데, 40일의 대홍수 이후 땅이 말랐는지 확인하게 위해 성서 속 노아가 비둘기를 날려 보낸 ‘노아의 방주’ 속 그 창에서 가져온 모티브라 한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촘촘한 나무 벽 사이로 배치된 좁은 창을 통해 빛의 스트라이프가 만들어진다.
방주교회는 비오토피아에 거주하던 우진산전 대표인 김영창씨가 ‘평생에 교회 하나를 짓기로 어머니와 약속했다. 제주를 찾아온 여행자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를 설계해 달라’고 부탁해 짓게 된 것이라 한다.
지금은 노아의 방주를 닮은 건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이타미준의 디자인 컨셉은 ‘제주’라는 섬이었다 한다. 섬처럼 물에 떠 있는 교회를 떠올렸고, 수평의 땅에서 수직의 하늘로 향하는 교회가 기본 컨셉으로 프로젝트명도 ‘하늘의 교회’였다는 것. ‘물 위로 튀어나온 물고기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것 같은’ 디자인으로, 교회 건물 한가운데 솟아오른 빛 우물이 바로 그 형상이란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다른 교회들과 달리 방주교회에선 빨간 십자가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교회 외관의 두 곳에 십자가가 건물과 일체화돼 있다.
물 컬렉션인 ‘수(水)뮤지엄’에선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을 담는 물의 반사가 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네모나고 강한 입방체를 타원형으로 도려내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의 움직임이 물 위에 투영된다. 네모의 수변을 따라 놓인 돌 오브제에 앉아 자연 속에서 ‘무심’이 되어보기를 바라는 건축가의 바람이다. 바람 컬렉션인 ‘풍(風)뮤지엄’은 작은 오두막 같은, 다소 심플한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방주교회의 촘촘한 나무 벽이 연상된다. 풍뮤지엄은 건물 자체가 마치 악기와 같아서 강한 바람이 몰아치면 모든 나무 판자와 판자 사이 틈새에서 현을 문지르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울려나오고, 바람이 약할 때는 희미한 ‘바람의 노래’가 연주된다고 한다. 긴 복도를 걷거나 돌 오브제에 앉아 눈을 감고 외부의 나무판 틈새로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돌을 컬렉션한 ‘석(石)뮤지엄’은 순수함과 강인한 기원을 담은 단단한 상자 하나가 전부다. 하지만 암흑 속 의도적으로 작고 동그란 구멍이 열리면, 그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인공의 꽃으로 삼아, 주역으로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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