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타임스=노털카|리뷰어]
윤민석 작사, 작곡 민중가요 ‘헌법 제1조’의 한소절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4월 11일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였고,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와 정부로 역할 하면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를 발전시켰고 독립운동 최고 기관으로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재건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나라’ 입구
전시관은 6개의 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1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2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다. 3 상하이를 떠나 충칭까지 이동하다. 4 충칭에서 연합국과 함께 싸우고 독립을 보장받다. 5 광복, 대한민국을 이어가다. 6 우리가 그려나갈 내일’을 테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중심으로 2022년 9월 17일 재개관한 전시관입니다.

전시관 입구 구조물에 양각으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1.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은 군주가 나라의 주인이었습니다. 1910년 8월 멸망한 대한제국도 군주의 나라였습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주가 주인이었던 역사를 국민이 주인이 되는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세우고 민주공화제 정부인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민족의 역사는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국내외에 수립된 임시정부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수립 과정이나 조직의 실체가 분명한 임시정부는 세 곳이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자치 기구였던 전로 한족 중앙총회가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로 성립을 선포하며 정부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조 계에서는 1919년 4월 11일 국내외에서 모인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국내에서도 13개도 대표자 회의를 통해 4월 23일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국내외 각지의 임시정부 수립도
대한국민회의
1919년 3·1운동 직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정부 성격의 독립운동 단체로, 문창범, 이갑성, 안창호 등이 주도하여 1919년 3월 17일 약 200명의 회원으로 결성되었습니다.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계기로 국민 주권을 강조하며 독립 쟁취와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며, 입법·행정·사법 기능을 겸비한 의회로 운영되었습니다. 주요 활동으로는 미국과 소련에 독립 청원서를 발송하고, 독립군 양성과 학교 설립을 통해 독립 기반을 마련했으며, 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흡수·통합되어 러시아 지청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민 주권 기반 의회로, 연해주 독립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한국민회의 선언서
한성정부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의 여파로 서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조직한 임시정부로, 4월 21일경 정식으로 발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신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승만, 윤치호, 남형우 등 민족주의 계열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으며, 독립선언을 기반으로 국민 주권과 민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한성정부는 독립 청원서 작성, 독립운동 자금 모집,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의 연락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으나, 일제의 강압적 탄압으로 인해 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 수립되면서 한성정부는 이에 흡수되었습니다. 한성정부는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다진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국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임시정부로서 민주주의 이념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한성정부 선포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근거지, 상하이 프랑스 조계
상하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대한국민의회(연해주), 한성정부(서울) 등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출발점으로,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했습니다. 임시 헌장을 제정하고 민주공화제를 지향하며 대통령제를 채택,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주요 활동으로는 외교를 통한 국제적 지지 확보,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지원, 그리고 국내 비밀 결사와의 연계로 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만주 지역의 독립군 활동과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1919년 9월 한성정부와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며 조직을 강화했으나, 내부 이념 갈등(사회주의 vs 민족주의)과 일제의 탄압,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표적 성과로, 국제 사회에 한국 독립 의지를 알렸습니다. 1940년 충칭으로 이전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1945년 광복까지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능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의 통합과 민주공화국 이념의 확립에 이바지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뿌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 미니어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회의는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시작되어 4월 11일 오전 10시에 폐회하며 공식적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회의가 열렸으며, 이 회의는 3·1운동으로 고양된 민족 독립 의지를 조직화하기 위해 소집되었습니다. 안창호, 김구, 이동휘 등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을 선언하고 임시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민주공화국 체제를 목표로 하는 정부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습니다. 회의는 4월 11일 오전 10시에 폐회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출범을 알렸고,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시작점으로서 이후 외교, 군사, 선전 활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 게양되었던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
2.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설립되어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안창호, 김구, 이동휘 등이 참여해 임시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상하이에서는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 사회에 독립 의지를 알리고, 미국과 프랑스 등에 청원서를 제출했으며, 만주 지역과 연계해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독립신문》 발행과 애국공채를 통해 선전과 재정 마련에 힘썼고, 상하이의 외국 조계 지역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일본의 탄압을 피하며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내부 이념 갈등과 일본의 감시로 한계에 부딪혀 1920년대 초반 항저우, 창사, 충칭 등으로 거점을 옮겼으며, 이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등 상하이에서 활동은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국민과의 연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하이에서 설립된 후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지원했습니다. 상하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과 같은 선전물을 국내로 유통시켜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을 지속적으로 확산시켰으며, 국내 비밀 결사와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과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내 지도자들과 서신 및 밀사를 통해 소통하며 독립군 활동을 조율했고, 특히 만주 지역의 무장투쟁 단체와 연계하여 군사 훈련 및 작전 지원을 모색했습니다. 또한 국내 애국지사들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애국공채를 발행하고 모금 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지역이라는 안전한 거점을 활용해 국내로의 연락망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감시와 탄압, 그리고 국내외 통신의 어려움으로 인해 연계 활동은 제약을 받았고, 이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면서도 국내와의 연계는 지속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국내 국민과 연계 활동 모형 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상하이의 국제도시로서의 특성을 활용해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과 접촉했으며,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승만을 비롯한 외교 담당자들은 파리강화회의(1919년)에 대표단을 파견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한국 문제를 국제 무대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의 외국 언론과 교민 사회를 통해 항일 운동의 정당성을 홍보했으며, 《독립신문》과 같은 선전물을 배포해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또한, 중국 및 기타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했고, 특히 중국 국민당과 협력 관계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외교적 압박과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인해 실질적인 지지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면서 외교 활동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도운 외국인과 임시정부 요인과 발행물 모형 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확보를 위한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의 한인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모금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애국공채를 발행하여 국내외 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했으며, 이는 임시정부의 운영과 독립군 지원에 사용되었습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역과 같은 안전한 거점을 활용해 모금 캠페인을 조직하고, 《독립신문》과 같은 선전물을 통해 재정 지원의 필요성을 홍보하며 한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또한, 만주와 국내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하여 자금 전달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해외 교포 사회, 특히 미주 지역의 한인들로부터 송금과 기부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감시와 경제적 탄압, 그리고 한인 사회의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재정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이는 임시정부 활동의 주요 제약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상하이를 떠난 이후에도 재정 확보 노력은 지속되었지만, 상하이 시기의 모금 활동은 임시정부의 초기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 공채를 발행하는 모형 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과 의열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임시정부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 단체들과 연계하여 군사 훈련과 무기 조달을 모색했으며, 광복군의 전신 격인 군사 조직을 구상하고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국내 및 만주 지역의 무장투쟁을 조율하기 위한 연락망을 구축 및 의열단과 같은 비밀 결사 조직과 협력하여 일본 관공서와 친일파를 겨냥한 폭탄 투척과 암살 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이는 일본 식민 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었습니다. 특히,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의열투쟁으로, 일본군 고위 인사들을 겨냥한 의거로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과 의열투쟁을 재현한 모형 전시
3.상하이를 떠나 충칭까지 이동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의 상황이 악화하며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심화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전을 위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창사 등을 거쳐 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충칭으로 거점을 이동했습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는 일본의 체포 작전과 경제적 압박으로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으며, 특히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보복이 강화되면서 주요 요인들의 안전이 위협받았습니다. 충칭으로의 도피는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광복군을 조직하고 외교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추푸청 가족과 같은 중국인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김구 주석 등 요인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충칭에서는 임시정부가 보다 체계적인 군사 및 외교 활동을 전개하며 연합국과의 연대를 모색했고, 이는 광복에 이르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8년간의 대장정 모형 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운 피치 가족
미국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와 그의 아내 게일 피치(Gertrude Fitch)를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 상하이 YMCA(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은신과 도피를 지원한 국제적 지지자들입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김구 주석과 김철 군무부장이 일본의 대대적 탄압을 피해 상하이에서 도망쳤을 때, 피치 가족은 신국권(선궈췐)의 주선으로 그들을 보호하며 은신처를 제공하고 안전한 피신 경로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는 임시정부의 생존과 후속 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조지 피치는 상하이 YMCA의 부국장으로서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네트워크와 깊은 연계를 맺었고, 그의 가족은 이러한 인도적 지원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 속에서 임시정부의 외교적·인적 자원을 보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피치 가족의 도움은 단순한 개인적 친선이 아닌, 국제 사회의 항일 여론 형성과 연대에 이바지한 사례로 평가되며, 이후 김구의 회고록에서도 그들의 헌신이 강조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운 피치 가족을 재현한 모형 디오라마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운 추푸청 가족
추푸청 가족은 중국인 추푸청(Chu Pu-ching)과 그의 가족으로,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본의 대대적 탄압으로 위기에 처한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호하고 피신시킨 국제적 지지자들입니다. 추푸청은 일제의 거액 현상금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의리와 신의로 김구, 김철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은신처로 숨겨주었으며, 5,000km에 달하는 장거리 이동을 지원하여 항저우와 자싱(자싱) 등지로의 안전한 피신을 도왔습니다. 그의 가족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까지 보호하며, 단순한 피난처 제공을 넘어 식량, 의료, 연락망을 통해 독립운동의 지속을 뒷받침했으며, 이는 한중 우의의 상징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추푸청 가족의 헌신은 임시정부가 중국 내에서 활동 기반을 유지하고 광복군 조직 및 외교 활동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김구의 회고록에서 그들의 용기와 두터운 신의가 강조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운 추푸청 가족을 재현한 모형 디오라마
4.충칭에서 연합국과 함께 싸우고 독립을 보장받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으로 거점을 옮긴 후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독립을 위한 군사·외교 활동을 강화하며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기여했고, 이는 전후 한국의 독립 보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충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광복군을 조직하여 중국군과 함께 항일 전선에서 싸웠으며,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에 대한 외교 공세를 펼쳐 국제적 지지를 모았습니다. 특히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한국의 전후 독립을 공식 보장한 것은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로비와 활동의 성과로, 포츠담 선언(1945년)에서도 이를 재확인하며 광복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헌법 개정과 건국 강령 제정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를 준비하며 연합국과의 연대를 통해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을 실현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충칭 정착 재현 디오라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충칭 연화지 청사 디오라마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일전쟁과 일제의 탄압을 피해 충칭으로 거점을 옮긴 후, 양류가, 석판가, 오사야항, 연화지 청사로 네 차례 청사를 이전하며 활동을 이어갔으며, 마지막 청사인 연화지 청사는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 사용되어 광복 직전의 환국 준비와 독립운동의 최종 거점으로 기능했습니다. 충칭 연화지 청사는 중화인민공화국 충칭 시 위중 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위치한 1929년 건립된 원래 호텔 건물로, 장제스의 지원으로 임시정부가 사용하게 되었으며, 총 1,300㎡ 규모의 대지에 1,770㎡의 건축 면적으로 중국 내 보존된 임시정부 청사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이 청사에서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헌법 개정과 건국 강령 제정, 한국광복군 조직화 등의 주요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1945년 11월 환국 직전 요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기념 촬영한 돌계단은 역사적 상징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칭의 습한 기후로 인한 훼손과 1991년 도시 개발 계획으로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한국광복군 유적지 조사단의 노력과 한중 협력으로 1995년 8월 11일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복원·개관되었으며, 중국 국가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2025년 8월 11일에는 개관 30주년 기념식이 주청두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충칭시 공동 주최로 열렸으며, 한·중 공동 사진전과 학술대회가 통해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을 위한 양국 협력이 강조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미니어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주석 집무실 디오라마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창당
194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한국독립당은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임시정부의 이념적 통합과 광복군의 체계적 운영을 목표로 삼아 항일 투쟁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정당은 상하이와 다른 지역에서의 내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위한 건국 강령을 마련하며 연합국에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국독립당의 창당은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이루어진 주요 활동 중 하나로, 1943년 카이로 선언을 통해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광복에 이르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한국독립당 창당 자료 기록 전시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본격화하고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김구 주석의 지도 아래 이범석, 지청천 등이 주도적으로 조직했으며, 임시정부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에 맞선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준비했습니다. 충칭 연화지 청사에서 설립된 광복군은 약 1,000여 명의 병력으로 시작해 중국 전선에서 연합군과 협력하여 정보 수집, 일본군 후방 교란, 국내 진공 작전 등을 계획했으며, 이는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임시정부의 군사적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1945년 광복에 이르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특히 한중 항일 연대의 상징으로 평가됩니다.

한국광복군 창설 자료 기록 전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조례 기록 자료 전시

김구 서명문 태극기
한국광복군과 연합국이 함께한 대일항전
한국광복군은 연합국과 협력하여 대일본 전쟁에 적극 참여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군사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김구 주석과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끈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 정보 수집,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했으며, 연합군의 대일 전략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1942년부터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협력하여 특수 훈련을 받고, 버마와 인도 전선에서 연합군과 합동 작전을 계획했으며,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한중 연대와 연합국과의 협력을 통해 항일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약 1,000여 명의 병력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확장하며 독립운동의 군사적 중심축이 되었다.

한국광복군과 연합국 훈련 및 교류 자료 기록 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본 선전포고문
카이로 선언
카이로 선언은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가 발표한 선언으로, 대일본 전쟁의 목표와 전후 처리 방안을 명시하며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역사적 문서입니다. 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이 점령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영토를 원래 주인에게 반환하며, 한국은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urse)” 독립을 이룰 것임을 공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통해 연합군과 협력하며 외교 활동을 전개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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