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등장한 모든 사건은 허구입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칼바람이 고척돔 외벽을 지나가던 밤이었다.
삼성의 박병호와 기아의 서건창이 마주 앉았다.
붉은색과 푸른색ㅡ
섞으면 버건디네. 건창은 씁쓸하게 웃었다.
화려한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갈 곳 없는 말년이었다. 한 번뿐인 그들의 청춘을 하필 거지 같은 구단에 갈아넣었던 탓이다.
“형, 은퇴한다면서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
“나는… 돌아갈 거야, 건창아.”
"네?"
어디로요?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키움 히어로즈.
변변한 모기업도 없이 그저 선수팔이만 일삼는 팀같새들.
하지만 불혹의 박병호가 돌아갈 곳이라면 거기뿐이었다.
“구단에서 써준대요?”
“코치라면 좋다고 하시더라. 아, 이건 비밀이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거야.”
“아… 네.”
건창은 말문이 막혀 애꿎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잔만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커피보다도 그의 마음이 더 차게 식어갔다.
“건창아. 너도 같이 안 갈래?”
“네? 다시 거기로요? 그 버건디를 입고?”
“응. 내가 말해볼게. 같이 코치로 가서, 열심히 하는 후배들 도와주고… 어때?”
건창이 헛웃음을 삼켰다.
“형, 너무하시네요. 형한텐 거기가 뭐, 막 애틋할지 몰라도 나한텐 아니에요. 내가 거기서 어떻게 나왔는데. 그렇게 나와서, 내가 무슨 말을 들으면서 버텼는지 알기나 해요?”
“알지. 하지만 팬들도, 구단도 널…”
“아뇨. 형은 몰라요.”
그간 수많은 억까를 참아온 건창의 날선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누가 날 반기겠어요?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난 형처럼 자리 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요.”
“건창아…”
병호의 가슴이 옥죄어왔다.
우리는 왜 이런 사이가 된 걸까.
“…줄게.”
“네?”
“내가 반겨줄게. 그러니까 와주라, 건창아.”
건창은 병호의 눈빛을 외면했다.
“형은 항상 그런 식이죠. 뭐라도 되는 양 가식 떨고. 동정하는 거예요? 반지도 없으면서…”
병호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2012년부터 쌓아온 유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건창아. 나는, 난 정말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냥 다시..."
“전요. 거기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건창이 쐐기를 박았다.
히어로즈. 젊었던 두 사람이 힘든 줄도 모르고 콩 한 쪽도 나눠 먹던 안식처.
병호에겐 그리운 곳이었지만, 건창에겐 지우고 싶은 과거였다.
“히어로즈만… 아니면 된다고?”
병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건창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2025년의 겨울은 잔인했다. 건창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홀로 남은 병호는 차 안에서 핸들을 움켜쥐었다.
“거기만 아니면 된다니…”
정적 속에서 병호의 어깨가 떨렸다.
룸메이트 시절 했던 약속들, 서로에게 묻혔던 생크림 케이크, 자신을 지탱했던 건창의 온기.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라 병호를 괴롭혔다.
최형우의 날카로운 타구를 잡지 못했을 때도, 미국에서 돌아와 실패자라며 비난받을 때도 이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 '우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대시보드 위 2014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사진 속 두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병호는 고척돔의 실루엣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버건디의 계절은 끝난 걸까.
히어로즈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건창의 선언이 홀로 남겨진 히어로즈의 심장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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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빠져나온 건창은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
사실, 방금 뱉은 말은 병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였다.
“바보같이… 왜 그런 말을 해, 왜…”
엘지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을 때도, 기아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반지를 끼었던 날에도 히어로즈를, 병호 형을 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머무르지 못하고 깎여 나간 세월은 그를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형의 제안은 구원이 아니었다. 초라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부숴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사실 누구보다 돌아가고 싶었다. 형과 같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겁이 났다. 괜히 형까지 싸잡혀 욕 먹는 건 아닐까. 또 자신이 다 망쳐 버리는 건 아닐까.
FA를 미뤘을 때도, 코시에서 나란히 병살을 친 날도.
건창의 선택은 보통 형편없었으니까.
“형… 나 같은 게 형 옆에 있어도 돼요?”
건창은 병호가 있을 주차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차마 그에게로 달려가지는 못한 채로.
그렇게 빨간불도 파란불도 받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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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호는 울면서도 생각했다.
건창이 정말 진심이라면 그렇게 아픈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을 리 없다고.
병호는 눈물을 닦고 다시 차를 몰았다.
건창의 집 앞 골목. 차를 대놓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건창이 전화를 받았다. 침묵이 흘렀다.
“건창아… 나 너희 집 앞이야.”
“……”
“네가 했던 말, 진심이 아닌 거 알아.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네가 지금 너무 괴로워서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그때도... 사실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거지. 그치?”
병호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여러 구단을 전전했다는 건, 그만큼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는 뜻이야.”
궤변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달콤했다.
“나, 사실 되게 겁 많은 거 알잖아. 넥센에서도, 미국에서도, 키움, 그리고 삼성에서도... 네가 없었으면 진작 무너졌을 거야.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칭찬해 줘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 난... 건창이 네가 필요해.”
문이 열렸다.
슬리퍼도 제대로 못 신은 건창이 뛰어 내려와 운전석 문을 젖혔다.
“형은 진짜... 왜 이렇게 바보 같아요?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왜 날 못 버려요? 내가 뭐라고.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날 버렸는데…”
건창의 목소리도 이미 엉망이었다. 병호가 차에서 내려 건창의 소매를 붙잡았다.
“나 원래 바보야, 건창아.
우리 돌아가자.
네가 있어야 진짜 집에 온 것 같단 말이야.”
건창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병호 형의 마음이라는 걸.
건창이 병호를 꽉 안았다. 뜨거웠던 2018년 가을보다 더 강한 포옹이었다. 그랬더니 건창은 병호의 품에 푹 파묻혔다.
“알았어요. 갈게요. 형 옆에 있을게요.”
“진짜지? 약속했다?”
“네.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누가 보면 내가 형 때린 줄 알겠네.”
병호가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어두운 새벽, 기아와 삼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버건디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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