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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ㄱㄱ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구원의 도래 (스포o,스압)

ㅇㅇ(58.231) 2020.08.07 01:12:29
조회 2168 추천 86 댓글 32

  안녕. 이번엔 얼마 전에 자첫한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의 후기를 써보려고 해. 불과 며칠 전에 보긴 했지만, 기억에 의지해서 쓰는 거라 혹시 극 내용에 대한 설명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거나 본문에서 사용된 개념들에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준다면, 그리고 너그러이 양해해준다면 고마울 거야. 그럼 시작할게.


  1. 엘레나 세르게예브나는 누구인가?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선과 정의를 설파하는 교육의 실패, 그로 인해 탄생한 악인인 발로쟈와 아이들, 그리고 그 실패의 대가로 무자비한 폭력을 견뎌야만 하는 엘레나 선생님의 절망을 보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엘레나의 집에서 있었던 하룻밤과 과연 얼마나 다른지 되짚어보고 악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라는 것일까? 혹은 엘레나를 압박하는 빠샤와 특히 발로쟈의 모순투성이인 논리, 그러나 완력으로 제압하고 들어오기에 그들을 논파함으로써 그들을 쫓아낼 수 없는 엘레나의 상황을 보며, '거대한 악'이라는 것이 하찮고 추한 실상을 폭로하고 그것이 강대한 것은 그저 그것이 폭력과 함께 하기 때문이므로 우리는 악에 맞서는 정교한 반박을 개발하는 것과 별개로 악이 현실에 발현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일까? 나는 이 연극에 대한 이러한 모든 대답이 정당하다고,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닌 무언가가 더 있다고 생각해.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이 연극이 '우리가 어떻게 악을 이겨낼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조심스럽지만 긍정적인 해답, 일견 절망적이고 힘겨운 과정을 거치더라도 진정으로 악에게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치철학적인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는 거야.


  언뜻 생각하기엔 이 연극에서 어떻게 악으로부터 승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지 고민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 의기양양하게 엘레나의 집을 나선 발로쟈와, 마지막에 엘레나 선생님의 앞에 무릎 꿇고 울고 있는 랼랴와 그런 랼랴에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망연히 서있는 엘레나를 보면, 이것이 어딜 봐서 승리의 모습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지. 극의 마지막 장면을 승리의 장면으로 보려면, 냉소적으로 말하면, '정신 승리'로 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할까? 글쎄, 나는 이 후기를 통해서, 사실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악에 대한 선의 초월적인 승리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승리까지 그려내고 있으며, 단지 승리의 한 장면을 그려내는 것을 넘어 선의 대대적인 반격을 예고하고 그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설득할 수 있길 바라고 있어.


  그러기 위해, 먼저 극에서 선과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인물인 '엘레나 세르게예브나'가 어떤 인물인지, 그러니까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말해야 할 것 같아. 아마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미 눈치 챘다면 내가 하는 말이 좀 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엘레나는 우리 대부분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과 상당부분 겹치는 인물이거든.(발로쟈에게는 아쉽게도, 안티고네는 아니야.)


  바로 말하기보다, 극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볼게.


  엘레나는 학생들이 선과 정의의 가치를 깨닫기를 바라는 선생님이었어. 그러나 엘레나 선생님에게 찾아온 학생들, 발로쟈와 빠샤, 비쨔와 랼랴는 엘레나의 그런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기는커녕 그가 가진 시험지 안전 금고의 열쇠만을 바라보며 엘레나를 찾아왔지. 그리고 엘레나는 절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열쇠를 내주려고 하지 않아. 그리고 학생들은 그런 엘레나에게 차분한 대화로 상황을 풀어갈 여유를 주지 않지. 다수의 힘으로, 그리고 완력으로 그들은 엘레나를 그의 집에 구금하고 열쇠를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리지. 그들을 선과 정의의 길로 이끌려는 엘레나를 '이상주의자' 그리고 '안티고네'로 추켜올리는 척 비웃으면서 말이야.


  그런 학생들을 엘레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심지어 발로쟈와 빠샤가 참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그들을 용서하려고 하지. 그런 엘레나의 모습에 랼랴는 도리어 자신이 엘레나에게 자존심도 없냐고 화를 내지만, 엘레나라고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을까? 엘레나는 그저 끝까지 자신의 학생들에게 선한 본성이 있음을 믿으려 했던 거지. 결국 엘레나는 "엘레나는 죽었어."라고 말하며 소파에 웅크려버려. 그렇게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죽은 듯 누워버렸던 엘레나는, 결국 다시 일어나지. 랼랴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어떤 인물이 겹쳐 보이는 걸 알 수 있어.


  죽은 후에 부활한 사람, 부활해서 자신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났으며 그로 인해 인류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알린 사람, 그렇게 죽었다가 되살아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 사람이 누구지? 당시 사회지도층이었던 이들에 의해 극형에 처해졌고 제자의 배신에 의해 붙잡힌 사람, 독립국가라는 세속적인 성취를 원했던 제자들의 간절한 소망과는 반대로 던 높은 차원에서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의 뜻에 따라 선과 정의로서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말한 사람이 누구지?


  맞아.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야. 그러니까, 우리는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이런 엘레나의 모습 외에도,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의 많은 부분이 기독교적인 장면과 겹쳐 볼 수 있는 것 같아.


  발로쟈는 부유하고 권력이 대단한, 아마도 사회지도층에 속한 사람이지. 그렇다고 지배계급이라고 하면 엄밀한 표현은 아닐 것 같아. 소련이라는 나라가 표면적으로는 계급을 철폐하고자 하는 나라니까. 하지만 소련에 정말로 계급이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고, '노멘클라투라'라고 하는 갖은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하고 공산당 간부직을 꿰차고서 그걸 혈족에게 세습하는 식으로 견고한 지위를 쌓아온, 엔간한 귀족 뺨치는 기득권 계급이 분명하게 존재했어. 이런 계급이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중요한데, 이건 뒤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이런 발로쟈는, 로마 제국에서 실질적 지배자인 로마 황제와 로마인들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팔레스타인 식민지 내에서 행정관료 혹은 사제계급으로써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유대 일파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이들은 로마 제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에서 유대인들을 좋은 말로 구슬려가며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인간 평등을 말하는 혁명적 사상가인 예수를 '유대인 독립운동가'로, '유대의 왕을 칭하는 자'로 몰아 사형대에 몰아붙인 사람들이지. 특히 이런 모습은 발로쟈가 엘레나 선생님을 '안티고네 콤플렉스'라고 말하는 장면과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즉 엘레나가 전혀 진실하지 않은, 외면적인 고귀함을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거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 당하게 하는 데 성공했어. 그렇게 자신들의 권력이 또다시 승리했고 또 앞으로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겠지.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승리한 걸까? 예수는 단지 그들에게 도덕적으로만 승리했을 뿐, 현실적으로는 패배한 걸까? 이 때 우리는 '현실'의 범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이것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해 볼게.


  빠샤를 볼까? 빠샤에 대해서는, 발로쟈가 극의 말미에 빠샤를 두고 '너의 유다 콤플렉스'라고 하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 물론 엘레나의 믿음을 배반했다는 점에선 모든 학생이 같지만, 빠샤는 네 학생 중에서 '배신자'의 성격이 가장 강한 인물이야.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랼랴의 최소한의 기대를 배신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런 그의 배신은 결국 엘레나가 열쇠를 내줌으로써 랼랴를 구원하게 되는 계기가 돼. 무엇보다, 마지막에 끝내 열쇠를 두고 심각하게 갈등하다가 열쇠를 챙겨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인간성을 변호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무슨 말로든 변명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의 죽음 이후 겪은 갈등을 연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유다가 무력투쟁으로 유대왕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열성당원이었을 수 있다는 해석과, 열쇠를 빼앗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결심한 빠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기도 하고.


  비쨔. 비쨔는 어느 정도 동정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야. 비록 엘레나 선생님에게 폭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을 권위적으로 지배하던 발로쟈의 충동질에 의한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극 중 빠샤 말마따나 비쨔에게도 머리가 달린 이상, 그가 완전히 무결하다고 볼 순 없어.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악에 쉽게 동조해버린 것에 대해 영원히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겠지. 사실 비쨔를 기독교적인 장면에 겹쳐놓을 정도로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엄밀하게 기독교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은데,(실제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란 걸 뒤에 보면 알게 될 거라 믿어.) 기왕 하는 김에 따져보면, 발로쟈와 빠샤가 집을 빠져나간 후 비쨔는 아침 해가 밝아오는 걸 깨달아. 아침을 알리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정하였다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 사람, 조금 모자라고(예수한테 사탄 같은 놈이라고 욕도 먹고;;) 세속적인 면모를 많이 보이면서도 결국엔 예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게 되는 시몬 베드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랼랴. 랼랴는 마지막에 엘레나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이야. 엘레나가 구원한 인간. 얼마 전에 한 전공생 바발이 쓴 후기에서 랼랴가 흔히 '엘레나'라는 이름의 애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보고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이름에서 나타나는 엘레나와 랼랴의 관계(이름뿐만 아니라 이 둘은 같은 여성이기도 해. 발로쟈가 '동족'이라는 말로도 확인시켰듯이.)가 마치 예수와 인간의 관계와도 유비될 수 있는 것 같아. 기독교 신앙 체계에서, 예수는 인간보다 한 차원 위의 신인 것만은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 중의 하나이기만 한 것도 아니지. '성삼위일체'라는 교리에서 보이듯이,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엘레나와 랼랴 사이에는 거의 유일하게 서로의 마음을 내보이는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현실 속에 살면서도 선과 정의에 대한 추구를 놓지 않는 엘레나와 달리 랼랴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야. 자신이 계산적일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는 랼랴의 논변은 자신의 이기적인 생존을 위해 정론을 무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기독교적인 장면에 비유하자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선동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예수를 처형하라고 소리높인 유대인 민중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또 냉혹한 현실에 유독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저 아이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그리고 랼랴만큼은 아니어도 그와 비슷한 현실주의가 엘레나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야. 발로쟈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포포프 교수를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엘레나는 발로쟈에게 감사를 표하고 어떻게 신세를 갚을 수 있을까 물어봐. 다만, 발로쟈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했을 때 자신의 타협을 철회한다는 점에서 엘레나는 랼랴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긴 하지.


  그 외에도, 극 중에 엘레나 선생님의 아버지의 존재는 아예 드러나지 않고 어머니만이 극 중에 언급된다는 점이 마치 성모 마리아에게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예수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나 부활 전 죽음을 맞기 직전에 두 죄수가 있었고 예수가 그들을 용서하는 장면이 엘레나를 속이기 위해 거짓 참회를 연기하는 발로쟈와 빠샤를 엘레나가 용서하려고 노력한다는 장면과 겹쳐 보인다는 점도 생각해 볼만한 지점인 것 같아.


  자, 그렇다면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단지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을 전도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 혹은 우화로 이해되어야 하는 걸까?


  아니, 난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의 탄생과 죽음이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지금, 인간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엘레나가 그러한 성취로 우리 시대에 새로 나타난 구원자임을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라고 생각해. 이제부터는 여기에 대해 말해볼게.


  2. 인간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도래하다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우화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데, 이 연극을 보고 난 후의 감상으로 어떤 관객이든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나 혹은 기독교의 신 혹은 예수에 대한 신앙심을 새삼스럽게 가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 같기 때문이야. 오히려 이 연극을 보고 나온 관객은 ‘과연 신이 있다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는 절망을 안고 나오면 나왔지 않았을까? 하지만 마냥 절망을 안고 나오기엔, 마지막에 빠샤가 열쇠에 손을 대지 못한 채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간 것, 비쨔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것, 랼랴가 엘레나 앞에서 무너져 내리며 오열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거기서 어떤 작은 희망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왜 이 연극은 이런 작은 희망을 끝에 남기는 것일까? 이 희망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길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나는 답하기 위해 먼저, 왜 엘레나 선생님이 고통 받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이 극의 배경을 통해 들여다보려고 해.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의 장소 배경은 1980년경의 소련 어디인 것 같아. 엘레나 선생님의 집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니까, 극의 배경은 부정부패와 냉전으로 인한 소모적인 체제 경쟁으로 인해 몰락의 기운이 드리운 소련의 일반적인 풍경이라고 봐야겠지.


  여기서 소련이 ‘공산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내세운 국가라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에 의해 건설된 소비에트 연방,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 국가로 이행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를 노선으로 택했고, 스탈린에 이르러서는 스탈린주의라는 일국사회주의 노선으로 나아갔지.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련은 레닌 시절 신경제정책이라는 시장경제를 일부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로써 소련은 공산주의 실현이라는 노선에서 한 번 크게 이탈했어. 그런데 그래서 소련이 그 덕에 승승장구하기라도 했느냐 하면, 부정부패로 인한 관료제의 비효율성과 국가 지도자 한 명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됨으로 인한 국가 정책의 경직성은 자본주의 세계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어.


  이런 상황에서 소련에서는 당연히 ‘나부터 잘 살자’라는 현실주의가 득세할 수밖에 없었겠지. 앞에서 말한, 발로쟈가 속한 ‘노멘클라투라’라는 계급의 발생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어. 그리고 이런 계급의 발생은 소련에 필연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는데, 애초에 소련이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어떤 인간도 소외되지 않는, 모두가 평등하고 해방된 사회’가 바로 소련이라는 점이었기 때문이야. 자본주의 국가보다 잘 살지 못할 수는 있어. 실제로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력의 발전을 극대화하기 위한 체제(그러나 인간을 소외시키고 물신주의로 인해 인간 존엄이 파괴되는 체제)로 보았으니까. 그러나 국가의 생산력이 발전해서 극소수의 자본가만 잘 살고 대다수의 노동자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국가를 만드느니, 생산력 발전은 조금 더디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이고 그러한 사회의 완성형을 ‘공산주의 사회’라고 보았던 거거든. 즉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의 완성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로 되돌아간 것도 아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거야.


  즉,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 엘레나와 대립하는 학생들, 발로쟈와 빠샤, 비쨔와 랼랴가 처음에 그토록 이기적이고 추악한 욕망을 따르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의 원인은 사회주의라고도, 그렇다고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문제는 빠샤가 극 중에 비웃으며 언급하는 그것, 바로 ‘무신론’이야. 정확히 말하면 신이 없다는 믿음으로서의 무신론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문제라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나무랄 수 있겠어? 물론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무라고 또 나무라면서 가르쳐야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해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추악한 욕망에 그토록 쉽게 영합할 지경이 되도록 그 사회를 방기해온 것의 책임은 학생들 자신보다는 그들의 부모와 선생님들의 세대에 더 많이 지워져야 하지 않을까? 즉 엘레나 선생님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자신의 집에 침입한 네 명의 학생과 마주하게 된 것은 단지 우연한 불운이 아닌, 언제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인 거야.


  네 학생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이들의 아노미 상태로 인한 정신적 혼란이 아주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어. 먼저 랼랴를 보면, 물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전략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순간 손익계산으로 현실을 살아갈 순 없어. 이건 도덕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인데, 애초에 손익계산을 하는 것은 자기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수많은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생활에서 완벽한 계산이란 있을 수 없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원칙과 기준도 없다면 더욱 더 그 계산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될 거야. 그런 가운데, 랼랴 자신보다 조금만 계산이 빠른 상대를 만나면 그는 불행의 구렁텅이로 한없이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이건 빠샤에게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비쨔는 알코올 중독자 부모로부터 선천적 장애를 얻었음에도 적절한 사회적 지원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양육 환경에서 자라나기까지 해야 했잖아. 비록 발로쟈의 조종에 따라 폭력을 행사한 것을 오직 발로쟈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토록 비쨔가 누군가의 심리적 지배에 취약한 것이 오로지 그의 책임만은 아닌 거지.


  가장 심각한 것은 발로쟈야. 발로쟈는 이 ‘아노미 상태’를 가장 잘 증언해주고 있는 인물인데, 그 이유는 발로쟈가 ‘안티고네 콤플렉스’라든지 ‘유다 콤플렉스’같은 비-학술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것, 그리고 ‘힘’과 ‘자신의 전지전능성’을 추구한다고 당당히 밝히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나.


  안티고네 콤플렉스, 유다 콤플렉스 같은 단어는 발로쟈가 만들어낸 단어에 가까운데(사실 로리타 콤플렉스니 피터팬 콤플렉스니 하는 것도 딱히 학술용어는 아니라서, 이런 용어를 만드는 것 자체는 자유긴 해.), 이 때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어디서 빌려왔는지는 쉽게 알 수 있어. 바로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에게서 온 용어로, 인간의 무의식에는 한 문화권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원형이 있으며, 이것은 신화와 같은 문화적 요소들을 분석함으로서 파악될 수 있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 특정 원형들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유형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게 칼 융의 분석심리학이지. 그리고 이런 발로쟈의 모습에서 우리는 발로쟈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바로 사람들을 결정짓는 유형, 사람의 정신을 결정하는 의식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욕망이 바로 그것이야.


  발로쟈는 왜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이기주의와 현실영합주의의 극단적 추구를 통해 삶을 꾸려온 노멘클라투라 계급의 일원으로서 그때까지의 모든 삶을 혼란스러운 아노미 상태로 보내면서, 아마 자신의 신화적 원형이 무엇인지 분석해내려는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마 발로쟈는 자신의 신화적 원형을 기독교적인 신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발로쟈는 자신을 전지전능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추구한다고 말하지.


  그러나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신이 아니야. 인간이 반드시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은, 인간 주체 바깥에 그가 어쩔 수 없는 타자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지. 발로쟈는 ‘전지전능’을 추구함으로써 그런 타자 존재를 자신의 하위에 두려고 하는데, 이렇게 타자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아론(唯我論; 오직 나밖에 없음)적 사상은 그저 유치한 궤변에 불과해. 실제로 어떤 철학 사상을 두고 ‘이 철학은 유아론적이다.’고 하는 건, 이 철학은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는 뜻에 가깝거든. 즉 발로쟈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어떤 제대로 된 철학도 가지지 못한 상태인 거야.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완력을 통해 상대를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힘의 기술밖에 없어.


  여기까지 정리하면, 엘레나의 집에 찾아온 학생들의 문제는 어떤 특정한 가치관을 주입한 것 때문이 아닌 가치관의 자체의 완전한 부재에 있는데, 이러한 부재의 원인은 바로 교육의 실패이며 이 교육의 실패의 환경적 원인이 바로 소련 사회의 실패, 즉 소련의 역사적 의의인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에 있다는 거야.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 과연 이게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만약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라는 역사적 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발로쟈를 비롯한 학생들의 악은 그저 소련이라는 한 나라에서 발생한 특수한 환경에서 발생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엘레나 선생님의 시련은 우리와는 먼 일일 거야. 그저 보기에 불쾌한, 그러나 일어날 일이 없는 사건인 거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표적 사회주의 사상인 마르크시즘에서 특히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해 눈여겨보아야 하는 부분을 아주 짤막하게 정리하면,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했어. 그리고 노동가치론(물건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서 정해진다.)을 기본 가정으로 삼아 효용론(물건의 가치는 인간이 물건으로부터 얻는 주관적 효용에 의해 정해진다.)을 기본 가정으로 삼는 자본주의가 노동자가 실제로 한 일에 걸맞은 임금의 일부를 자본가의 이익으로 빼돌리는 구조 위에서 돌아간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이것을 ‘착취’라고 정의했어. 즉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는 기업가(자본가)가 인간 개인이야 아무리 선한 본성을 가졌든 간에, 그 태생 상 기업은 노동자의 정당한 몫을 자신의 것으로 착취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가지지 못하기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몫을 축적하기에 점점 부유해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시장 경제 내에서 자본가들끼리 경쟁하며 서로의 몫을 빼앗기 위해 경쟁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가장 부유한 한 명의 자본가와 그에게 고용되어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만 남게 돼.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 끝에 결국 혁명이 일어나서 소수의 자본가를 다수의 노동자가 타도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전혀 다른 공산주의 사회가 오게 될 것이라고 논증했지.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분파가 생겨나는데,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기다리면 자연스레 혁명이 일어나서 공산주의 사회가 알아서 온다. 그 때까지 버티자.’는 대기주의를 주장했고, 레닌으로 대표되는 혁명파 사람들은 ‘이대로 있다보면 자본가의 선동에 속아넘어가 사람들은 영원히 자신이 처한 부조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리고 여기서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 대한 논쟁으로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등이 생겨났고.


  요점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방법에 대한 생각만 달랐을 뿐, 자본주의 사회에는 당연히 공산주의 사회가 오며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왜냐하면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보다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가 더 우월하고 인간 전체에 이득일 것이며 이런 사회가 더 평화롭고 안정적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것이 수학에 의해 증명되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특히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중에서 가장 실천적으로 합당하다고 여겨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해 건설된 사회가 소련이었어.


  지금에 와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는 실질적으로 실패한 사상으로 여겨지는데, 이건 스탈린의 대숙청과 같은 정치적 만행이 서구 사회로 알려지면서 어느 정도 논쟁이 되었다가 결정적으로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의 승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실한 것이 되었어. 인류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사상 위에 세워진 소련이 아무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을 용인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레닌의 신경제정책 도입이나, 공산당의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대숙청의 충격과 공산당 간부들로 이루어진 특권 계급인 노멘클라투라의 등장 등은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 실험에 완전히 실패했음을 말해준 현상들이야.


  여기까지 살펴보면,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가 어째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에서 출발했어. 상품의 가치는 주관적인 효용이 아닌 노동의 투입량에 의해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는 노동가치론에 근거하여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그 시스템 대신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건설했는데, 그것이 실패한 거야. 그리고 그 체제의 실패 위에 들어선 것은 이기적인 욕망만으로 움직이는 탐욕스러운 기득권 집단의 부정부패와,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경계하고 비판했던 제국주의적 침략(한국전쟁)이었지. 말하자면, 소련의 실패는 인간의 이성이 발견한 법칙을 발판으로 거대한 국가를 투입했음에도 인류의 진보에 실패한 사건인 거야.


  어째서 소련은 실패했을까? 이에 대한 여러 다양한 대답이 있지만, 나는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이 했던 대답을 여기서 다시 되새겨보려고 해. 벤야민은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진정한 ‘혁명’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찾고자했어.


  혁명, 영어로는 revolution이지. 이 단어는 회전, 선회를 뜻하는 라틴어 revolutio에서 온 단어야. 진보를 뜻하는 영어 progress는 라틴어 progredior에서 온 말로, 앞쪽을 뜻하는 pro와 걷는다는 뜻인 gredior가 합쳐진 말이지. 즉, 혁명은 진보와 어원에서부터 다른 뜻을 지닌 말이야. 발터 벤야민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세워진 소련, 소비에트 연방이 결국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에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 혁명을 단순한 진보로 이어 붙이려고 한 것에 있다고 본 것이지.


  그러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벌어진 걸까? 벤야민에 의하면 그 이유는 혁명을 근대의 이성을 통해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야. 이성, 근대의 합리적인 이성은 영어로 ration라고 하는데, 이 ration은 라틴어 ratio에서 온 단어야. 그리고 이 단어가 이성을 뜻하게 된 것은 ratio가 본래 가지고 있던 뜻인 ‘비율’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건 고대 그리스에서 이성의 학문으로 기하학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이지. 이런 합리적 이성, ration에 대한 믿음은 르네상스를 거쳐(황금비율, 다 빈치의 인체비례도 등) 근대에 있어 인간 문명의 발달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로 격상되었고, 이 합리적 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는 과학, 그 중에서도 과학의 언어인 수학인 것으로 여겨졌어.


  그러니까, 벤야민이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의 이성을 통한 진보를 특히 강조하고 기존에 존재하던 도구이며 인간 이성의 결과물인 국가제도를 활용하고자 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던 거야. 물론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은 좋은 도구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혁명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야. 그렇다면 벤야민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이란 어떤 것일까?


  여기서 벤야민이 제시하는 것이 바로 유대교 신학을 정치철학에 가져온 ‘정치신학’이야.


  벤야민이 유대교 신학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 신학 전통에 해박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혁명적 전환’이라는 주제에 집중해왔던 것이 바로 유대교였기 때문이야. 유대교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낙원에 있다가 원죄로 인해 낙원 바깥의 속세로 쫓겨나게 되었어. 이 사건을 ‘실낙원’이라고 부르는데, 유대교는 이 실낙원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다시 낙원으로 불러들여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지. 그래서 유대교에 따르면 구원의 날까지 유대인들이 사는 이 땅은 임시적으로 지속되는 세계일 뿐, 구원의 날이자 종말의 날에 그때까지의 세계는 모조리 멸망하고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게 돼.


  그리고 벤야민은 이런 유대교의 실낙원-구원의 구조가 지금껏 사람들의 삶을 바꿔온 혁명들의 구조와 동일하며,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혁명 또한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혁명의 그날은 마치 종말처럼 찾아오고, 그 순간 이후 이전의 질서는 완전히 잘못되었던 것으로 판명되며 모든 이들이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음을 깨닫게 되지. 정확히 말하면, 깨닫는 것을 넘어서 왜 이전까지 이 당연한 사실을 내가 몰랐는지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는 거야.


  이에 대한 예시 중 우리 현실과 관련된 것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 사회에 있었던 미투 운동, 여러 분야에서 일어난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고발과 그로 인한 많은 사람들의 각성-흔히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이야기되는-을 이와 비슷한 예시로 들고 싶어. 어느 순간 무언가가 확 바뀌었잖아. 그 전에도 물론 페미니즘은 있었고 여성운동은 있었으며 지금의 변화가 과연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까지인지 생각해봐야 하기에 ‘비슷한 예시’라고 할 수밖엔 없지만.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분명 어떠한 조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어. 하지만 막상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난 후, 우린 너무나 많았던 그 조짐들을 우리가 어떻게 놓칠 수 있었는지 얼떨떨해질 지경이 되었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때의 체험, 지금까지도 여러 사건들을 통해 재현되는 그 체험을 두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넘어서, 인식 자체가 돌이킬 수 없이 변화했음을 자각하고 있는 거기도 하고. 그래서 보통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잖아? 이것을 ‘혁명’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기에 그 완성을 알 수 없으므로 조심스럽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혁명으로 완성되어가는 중이고 일정 부분 더디게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이 사회를 돌이킬 수 없이 바꾸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벤야민이 보기에,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바로 혁명의 이런 성격을 놓쳤기 때문이었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은 시작되었어. 그 때 사람들은 사람 그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었지. 마르크스가 역사 연구를 통해 명백하게 밝혀냈듯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야. 무한한 이윤 추구도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올바르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 후에 그걸 올바르다고 교육해온 거지.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혁명으로 인해 무너지면, 사람들은 원시 시대부터 본성으로 간직해오던 ‘공산의 사유’를 되새김으로써 한계가 명확한 근대적인 이성을 현대적인 인간성 총체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의 시작으로 인해 열린 변화의 공간에서, 근대적 이성을 유지하기를 선택했고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낸 통치의 도구들을 그대로 다시 가져오는 실수를 범했고, 결국 그렇게 혁명은 미완으로, 실패로 끝났어.


  자, 이제 엘레나 선생님의 시련에 주목해보자. 극 중 배경인 소련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든 체제는 윤리적으로 파산했어. 모두가 현실에 영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장려하던 사회는, 결국 발로쟈, 빠샤, 비쨔와 랼랴가 엘레나의 집으로 쳐들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 혁명을 끝없이 유보하며 타락한 세계가 자신 앞에서 폭력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앞에서, 엘레나는 유보되었던 그 혁명을 아이들에게 일으켜야 할 절실한 필요가 생긴 거야.


  그래서 엘레나 선생님은 악한 의도를 품고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선, 정의, 인간성과 바람직한 용기를 이야기해. 그리고 더 좋은 인간이 되기를 요청하지. 그러나 학생들을 말로 설득하려는 엘레나 선생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아. 그 이유는, 엘레나는 결코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혁명을 완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지. 선과 정의, 용기라는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엘레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할 것에 호소하기에 그것이 분명 그들 안에 존재할 것이라는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고, 그것은 합리적인 추론이 아닌 일종의 믿음이야. 따라서 이러한 믿음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엘레나 선생님은 처음부터 설득할 수가 없었던 거지.


  학생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점점 궁지에 몰리는 엘레나 선생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중되고 지독해지는 폭력과 모욕에 점점 지쳐가다가 결국 자신의 죽음을 선언하지.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발로쟈가 끝내 랼랴에게 극단적인 폭력을 가하려던 순간, 엘레나는 조용히 일어나, 아주 조용하지만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음성으로, 발로쟈로부터 랼랴를 구해내.


  엘레나 선생님에게서 열쇠를 얻어낸 후 발로쟈는 자신이 이겼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럴까? 처음 엘레나 선생님의 집에 들어왔을 때 발로쟈의 목표는 ‘열쇠를 얻는다.’였을 텐데, 이 때 이 문장을 잘 뜯어봐야 할 것 같아. 왜 발로쟈는 열쇠를 얻어야 했을까? 만약 그냥 순수하게 물건으로서 열쇠가 필요한 거였다면 그냥 열쇠장이에게 하나 사면 됐잖아. 그런데 엘레나 선생님 집에 가야만 했던 이유는, 그 열쇠가 빠샤와 비쨔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열쇠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안전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엘레나 선생님이 열쇠를 내어놓았을 때, 발로쟈는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며 환호하지.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빠샤와 비쨔가 그 열쇠를 챙기지 않았거든. 그리고 엘레나 선생님도 열쇠를 포기했지. 고작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열쇠를 얻은 발로쟈는, 그냥 열쇠장이에게서 아무 열쇠 하나를 구입하는 것(심지어 그걸 챙기지도 않고 버려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얻으려고 밤새 온갖 생난리를 피웠던 거야.


  그리고 애초에 엘레나의 목표는 열쇠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어. 엘레나의 목표는 학생들이 시험지를 보관한 안전금고의 열쇠를 가지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 정직하고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지. 따라서 엘레나를 이기려면 발로쟈의 목표는 단순히 ‘열쇠를 얻어낸다.’가 아닌 ‘엘레나가 학생들이 정직하고 선한 인간이 되길 바라는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든다.’가 되었어야 했어. 그러나 랼랴를 구하기 위해 열쇠를 내어준 엘레나는 여전히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물론 이전처럼 설득으로 학생들을 돌려놓으려고 하지 않아. 대신 열쇠를 내놓음으로써, 랼랴를 향한 폭력을 멈추었고 비쨔와 빠샤가 열쇠를 포기하게 만들었지. 위에서 빠샤를 유다에 비유했는데, 유다의 배신은 너무나 큰 죄여서 이후에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갔다고 묘사되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다는 인간이며 최소한 악마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빠샤는 물론 그에 상응하는 큰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나 어쨌거나 인간의 범주에는 남아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어. 그런 면에서, 엘레나는 열쇠를 내어주면서 비쨔, 빠샤 모두를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구원한 셈이야. 그리고 이러한 말을 하는 게 영 마뜩찮지만, 어쨌거나 발로쟈가 자신이 하고자 했던 랼랴에 대한 성폭행을 멈추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엘레나는 실로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그야말로 메시아적인 구원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발로쟈에게 열쇠를 내어준 후, 엘레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야. 빠샤가 자신 앞에서 열쇠를 두고서 갈등하든 말든, 비쨔가 무어라 중얼거리든 말든, 그리고 랼랴가 자신 앞에서 울면서 참회하는 순간에도 말이야. 이 때 엘레나 선생님의 표정은 절망에 가득 차 있을까?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엘레나 선생님의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동방정교회의 예수의 이콘(icon, 성화)에서 보이는 무표정함, 모든 것을 알고도 다 용서한 이의 무심한 표정이 엿보이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엘레나 선생님이 죽음에서부터 다시 일어났을 때의 무표정은, 절망에 가득한 무표정이라기보다 그 절망을 벌어진 사실 그대로의 것으로서 온전히 자신이 감당하기로 선택한 메시아의 ‘메시아적 응시’ 혹은 종말의 날에 내려와 구원을 알리는 천사의 ‘멀어져가는 속세를 향한 응시’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마치 십자가를 지고 언덕에 올라 못 박히고 매달리는 듯한 시련 끝에, 엘레나라는 이름의 메시아가 도래했어. 이건 분명한 희망의 메시지이지만, 우리는 이 결과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아. 이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 그리고 엘레나 선생님은 발로쟈라는 절망스러운 현실을 뼈저리게 마주해야 했고, 빠샤라는 배신의 민낯을 보았으며, 비쨔를 통해 죄에 휩쓸리고 유혹당하기 쉬운 인간의 나약함을 알았고, 비록 중도에 구원받았다고는 하나 가슴 깊이 상처 입었을 랼랴를 어떻게 치유하고 또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더 크게 남았기 때문이야. 무엇보다 엉망이 된 집안과 인간의 정신으로 메시아의 책임을 감당해낸 엘레나를 보며 과연 우리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연극이 끝난 후에도 짙게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통해 우리는 인간도 메시아가 될 수 있음을,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음을 알았어.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걸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극 중 엘레나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살펴봄으로써 찾아보려고 해.


3.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물론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 발생한 참극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예방할 수도 있어. 가령 학교 선생님들의 신상정보를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다든가, 개인이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다양하고 유용한 수단을 집 안에서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기술 및 치안 시스템을 유지한다든가 하는. 그러나 극 중 아노미 상태에 빠진 소련, 법과 규칙이 힘의 논리에 의해 숱하게 무력화 되는 상황에서 이런 장치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음은 분명하고, 또 이런 상황이 1980년경 소련에만 특수하게 존재했던 상황도 아니지. 따라서 엘레나와 같은 메시아는 우리 삶에서 몇 번이고 다시 도래해야만 할 것 같아.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한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혁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정치신학’을 제시하면서, 실낙원-구원의 구조를 반복할 수 있는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서는 ‘메시아주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해. 메시아주의란 앞에서 설명한 공산주의 분파 중 ‘대기주의’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말세에 메시아가 도래할 때까지 무작정 믿고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만약 메시아가 예수 혹은 어떤 정해진 존재이고 우리가 그 존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면, 대체 현실에 대한 분석이니 미래를 위한 실천이니 하는 것들이 왜 필요하겠어? 혁명의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것부터, 벤야민은 메시아주의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면서 벤야민은 메시아주의 대신 ‘메시아적인 것’을 이야기했어. 이 메시아적인 것은, 정해진 메시아를 말하지 않아. 대신 메시아가 갖는 성격, 메시아란 누구인가 분석하고서 어떻게 해서 어떤 상황 혹은 어떤 사람이 메시아적인 것과 일치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아로 도래할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그렇다면 메시아를 도래하게 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 벤야민의 철학을 이어받아 정치신학을 기반으로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에 대해 분석한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해.


  아감벤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중세에 그려진 한 삽화를 소개하는데, 그 삽화에서는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도시를 향해 오고 있어. 그리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보면, 어떤 사람이 성문을 닫아버리고 있지. 그러면서 아감벤은 이것이 바로 메시아가 도래하는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해. 메시아는 종말을 가져오는 사람이야. 자신이 도래하기 이전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사람이지. 따라서 삽화에서 나귀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메시아는, 도착하고 나면 도시를 무너뜨리고 말 거야. 그리고 첫 번째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시작하겠지. 하지만 만약 성문이 열려있다면, 성문을 부순다는 것, 따라서 도시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의 의미가 없어져. 따라서 메시아가 도래하기 위해 성문은 닫혀져야만 하지.


  그러면서, 아감벤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를 분석하는데, 이 단편에서는 시골에서 올라온 노인이 나와. 이 노인은 억울한 사연을 풀기 위해 법원을 찾아왔는데, 법원의 문이 활짝 열려있고 그 옆에 경비병이 있는 걸 발견해. 그래서 경비병에게 법원에 들어가도 되냐고 묻자 경비원은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지. 그렇다고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냐. ‘들어가고 싶으면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들여보내준 건 아니다.’라고 말하지. 그래서 노인은 경비병에게 따지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경비병은 노인이 법원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아. 결국 노인은 법원의 문 앞에서 기력이 쇠해 죽어가고, 경비병은 ‘이제 들어올 사람이 없으니 문을 닫아야겠다.’고 말해. 아감벤에 의하면, 만약 법원 문이 미리 닫혀 있었다면 법원은 폐쇄된 셈이고 노인은 아마 다른 곳을 찾아갔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노인은 ‘법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이런 노인의 끝은 아주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닌데, 그렇게 함으로 해서 노인은 ‘법원의 문이 닫히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요컨대, 메시아적인 것의 출현을 예비한 셈이지.


  또한 아감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시가 허먼 멜빌의 저 유명한 ‘필경사 바틀비’라는 단편인데,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필경사 바틀비는 어느 날 “하지 않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로 업무를 거부해. 변호사의 해고 통보에도, 급기야 사무실을 나가라는 추방령에도 “하지 않고 싶습니다.”고 대답한 바틀비는 집에도 가지 않고 있다가 결국 경찰에게 잡혀가고, 유치장에 갇혀 식사를 하라는 말에조차 “하지 않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 끝에 바틀비는 끝내 굶어 죽게 돼. 즉 바틀비는 처음엔 자본주의 체제의 고용 관계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다음엔 공간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이라는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권리를 거부했으며, 끝내 인간의 신체를 관리하는 권력(유치장의 식사는 죄수를 대접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수가 죽지 않게 관리하기 위한 것이니까.)을 거부하기에 이른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틀비가 합리적인 설명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고 싶다.’라고 자신의 ‘선호’를 표현했다는 점이야. ‘선호’는 개인의 고유한 성격과 관련되어 있으며,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닌 동의와 공감에 의해 작동하지. 즉 바틀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월스트리트라는 자본주의적 공간이 인간성을 소외시키는 공간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셈이야. 비록 바틀비는 다시 되살아나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잊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되살아온 자이며, 명령에 대한 복종의 여부로 표현되던 세계에 살던 사람들에게 ‘선호의 차원’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그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어.


  그리고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도, 우리는 엘레나 선생님이 ‘메시아적인 것’을 불러일으키는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아.


  엘레나 선생님은 열쇠를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레나 선생님이 열쇠를 내주지 않은 것은 ‘열쇠를 학생에 줄 수 없는 것이 규칙’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냐. 그것보다 열쇠를 학생들에게 줌으로써 학생들이 비겁한 인간,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러면서 학생들을 설득하게 끊임없이 노력해. 비록 앞에서 벤야민의 정치신학적 분석을 끌어오면서 나는 엘레나 선생님의 이러한 설득 시도가 무용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메시아적인 것’을 예비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아감벤의 ‘법 앞에서’ 분석을 참고하면 엘레나 선생님의 그 모든 시도가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게 드러나지. 최소한 엘레나의 끊임없는 설득과 저항은 시간을 끌었으니까. 아침이 거의 다가올 때까지 말이야. 그리고 그건 발로쟈에게 더 지독한 전략을 사용하도록 강요했고, 발로쟈가 랼랴를 이용하는 계략을 세운 순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어. 성벽의 문이 닫히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문이 닫히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은 엘레나, 메시아가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을 보게 돼.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뜨고 일어난 엘레나는 발로쟈에게 열쇠를 주겠다고 말해. 그 순간 엘레나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그 전까지 이어졌던 열쇠를 주느냐 마느냐의 대치가 아니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짓밟히는 랼랴, 그리고 타인을 폭력으로 침해하려 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길로 빠져들 발로쟈와 그를 막지 않거나 못함으로써 선과 정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이 족쇄에 묶이게 될 빠샤와 비쨔. 그들이 바로 엘레나의 관심사이지. 그리고 그것은 엘레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야. 엘레나는 처음부터 항상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 학생들은 엘레나가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라고 말했지만, 엘레나는 학생들의 영혼이 처한 현실에 항상 주목하고 있었어. ‘영혼의 현실’이라는 것, 정의와 윤리에 따르고자 하는 감각이라는 것이 허상이 아니고 실제로 그 감각이 시키는 바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때도 있다는 것을 최소한 마지막에 빠샤와 비쨔, 랼랴 이렇게 셋은 확실히 알게 되었을 거야. 어쨌든 빠샤가 열쇠를 앞에 두고서, 그에게 분명히 유용하고 또 그래서 험난한(!) 과정 끝에 얻어낸 열쇠를 가져가는 것이 그가 그전까지 주장하던 ‘현실을 사는 법’의 논리에는 부합함에도, 갈팡질팡하며 망설이다 그냥 열쇠를 두고 나가기를 택했을 때, 빠샤는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러지 않고 싶다.’는 영역(바틀비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영역)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겠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 그 혁명을 만들어낼 ‘메시아적인 것’을 도래하게 하는 방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첫 번째로, 기다리는 거야. 이 때 기다림은 메시아주의에서처럼 메시아의 강림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인 것이 나에게 도래할 때까지 실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을 뜻해. 두 번째 방법 또한 기다리는 거야. 이때의 기다림은, 결정과 판단의 수단인 합리성에서 벗어나서 빠르게 결정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는 것, 자신의 마음 속 이끌림이 진정으로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충분히 깊게 느껴질 때까지 행동을 멈추는 ‘하지 않기의 실천’으로서의 기다림이야.


  그런데, 이렇게만 놓고 보면 여전히 답답함이 남아. 사실 이건 내 개인적으로 벤야민이나 아감벤을 읽으며 느꼈던 것이기도 한데, 단적으로 말해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에 대한 질문 때문이야.


  우리가 이러한 엘레나의 모습을 닮기 위해, 엘레나가 우리에게 보여준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를 우리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고 또 어디까지 참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감벤이 인용한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서 노인은 죽었고,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 또한 죽음을 맞았어. 과연 우리가 이들처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엘레나 선생님처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벤야민과 아감벤의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를 위한 방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추가적인 원칙을 하나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개인적으로 이 원칙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서는 ‘기다리게 하기’라고 부르고 싶어. 이 때 기다리게 함이란, 자신 바깥의 타인, 도래하려는 메시아에게까지 기다림을 요청하는 거야. 이건 카프카의 ‘법 앞에서’나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와는 달리,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는 메시아적인 인물과 명백하게 대립하는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드러날 수 있었던 영역이야. 생각해보면, 앞의 두 단편들에서도 결국 주요 인물이 기다림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인물과의 충돌 중이기에 어떤 유의미함을 획득하는 것인데도, 실제로는 그러한 구도가 잘 드러나지 않거든. 하지만 이 연극에서는 엘레나 선생님과 학생들의 충돌이 중심에 있기에 내가 말하려는 이 세 번째 원칙이 특히 잘 드러나고 있지.


  내가 말하는 ‘기다리게 하기’는, 말 그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 잠깐 기다리게 하는 거야. 실제로 엘레나 선생님은 노인이나 바틀비처럼 자기 혼자서 기다리지 않았어. 문을 닫고 다른 방에 들어가 버리거나, 때론 호통을 치고 빠르게 말을 뱉어내면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기도 했지. 사실 잘 따져보면 이 모든 행동들은, 학생들을 설득하거나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수단들이야.(엘레나 선생님이 책상을 뒤집어엎고 호통을 칠 때의 모습은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거기서 학생들이 겁을 먹고 진짜 집으로 돌아가리라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거야.) 어쨌거나 이렇게 함으로써 엘레나 선생님은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가 있을 때까지의, 한계로 밀어붙여지는 시점까지 혼자서 그 기다림을 모두 짊어지지 않을 수 있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엘레나가 랼랴를 성폭행하려는 발로쟈를 멈춰 세웠다는 거야. 지금까지는 이 순간을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로 인해 그 순간 메시아로 존재하게 된 엘레나가 자신의 힘으로 랼랴를 구원하는 장면으로만 보았지만, 나는 여기서 힘겹지만 외면해선 안 될 한 가지 가능성을 마주보려고 해.


  만약 엘레나가 발로쟈를 막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끝까지 열쇠를 주지 않았다면, 마치 ‘법 앞에서’의 노인이 기력을 잃고 죽어갔듯이,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가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들어가 굶어 죽기에 이르렀듯이.


  분명 랼랴는 더 큰, 끔찍한 상처를 입었을 테지. 발로쟈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되었을 테고, 빠샤와 비쨔는 동조자와 방관자로서 마찬가지로 죄인이 되었을 거야. 혹은 발로쟈가 열쇠를 얻은 뒤에 밝힌 것처럼(전혀 신용은 안 가지만), “진짜로 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발로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더 끔찍한 행위를 찾아 나섰겠지. 어느 경우든 간에, 완전한 파국이 찾아왔을 거야. 그리고 더 강력한 만큼 더 큰 파장을 가지게 된 그 파국은, 더 커다란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겠지. 이것이 바로 정치신학적 해답이라고 하는 것이 가진 제일 큰 난점이야. 혁명을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요청해야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때,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기다림에 대한 기다림’을 이야기해. 즉,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물음에 대해 묵묵부답인 ‘법 앞에서’나 ‘필경사 바틀비’에 비해, 이 극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을 때까지’라는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는 거야.


  물론 이것은 정말로 중요하고 강력한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를 막는 일일 수도 있어. 그러나 엘레나 선생님은 랼랴라는 한 인간의 상처 앞에서, 도래하려는 메시아를 향해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당신이 기다리라’고 말했지.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던 네 학생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확실하게, 엘레나 선생님은 메시아적인 사람으로 있을 수 있었어. 


  즉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 제시하는 세 번째 기다림, 메시아적인 것 즉 어떤 대단한 혁명이라도 한 인간(여기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의 삶을 존중하기 위한 일 앞에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바로 이러한 원칙 덕분에,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는 우리가 실제 삶에서 실천 가능하고 또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해.


  자, 여기까지 나는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 비록 참으로 절망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엘레나 선생님이 일으키는 변화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와 그로 인한 메시아 엘레나의 출현을 목도할 수 있으며, 그 출현까지의 과정을 곱씹음으로써 엘레나 선생님이 겪어야 했던 시련의 원천인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우리 각자는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세 가지 기다림의 원칙-포기하지 않고 기다림,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림,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대의의 기다림-으로부터 나오는 실천이라고 이야기했어.


  나는 특히 요즘 시대에 이러한 실천이 더욱 간절해졌다고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송두리째 바꿔줄 대의를 꿈꿔왔지. 그러나 그 지나고 나서 그 대의를 꿈꿔온 과정을 살펴보니, 그 과정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무시당한 채 희생되어 왔다는 게 계속해서 보이고 있는 거야. 특히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수단화하면서 그렇게 했어. 그리고 차별에 반대해온 여성 운동조차도 이런 면에서는 성찰할 지점이 없지 않아. 페미니즘의 역사는 어느 한 편으로는 자신 내부의 혐오와 싸워온 역사이기도 하다는 말처럼, 커다란 대의를 위해 움직일수록, 그 안에서 누군가 소외되기도 쉬워지는 것 같거든. 이럴 때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인류 전체보다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옆에 있는 이들을 긴급하게 감싸 안을 수 있는 현실적이고 또 절실한 실천 과제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발견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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