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이한테 전화가 왔다. 샤워를 하려고 벗었던 겉옷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큼 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에 전화를 받았다.
"현민아 왜? 오늘 약속 있어서 못 논다며?"
"네 형 그랬는데, 저는 지금 약속 끝나고... 그 중간, 아니, 끝났으니깐, 전화 건건데요, 잠깐 얘기 좀 해요."
현민이가 목소리가 좀 가라앉아있다. 말도 많이 더듬는다. 분명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나랑 술 먹으면서 위로나 좀 받으려는게 분명하다. 자기 개인적인 일로 형을 중국집 배달 부르듯이 부르다니. 곱게 나가주면 안되지.
"오케이 알았다 너의 그 스탠스는~ ㅎㅎ 가넷 몇 개 줄거야? 한 3개 정도 주면 나갈 용의가 있는데?"
"준석이형 진짜. 정말로 죄송한데요, 저 지금 형 집 앞까지 왔어요. 자세한 얘기는 나와서 하... 했으면 좋겠거든요. 빨리요."
현민이가 좀 급해보인다. 현민이 페북엔 별 거 안 올라왔는데?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 집 앞에서 우산이나 걸쳐쓰고 얘기를 하자니.
"현민아 그러지 말고, 우리집 앞까지 온 김에 그냥 들어와. 뭐 먹을 건 사왔지? ㅎㅎㅎ"
"뭐라도 좀... 사올까요?"
"아냐, 그냥 들어와."
현민이가 비를 쫄딱 맞은 채 옷에서는 빗물을 질질질 흘리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분명 우산을 들고 있는데? 단정한 검은 머리가 흠뻑 젖어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초췌한 모습이 참 안쓰럽게, 먼 거리에서 봤으면 오현민인지도 못 알아볼 뻔했다.
"아후... 현민아 행색이 왜 그러냐? 화장실로 들어가서, 옷 벗고 옷에 물 좀 짜. 필요하면 갈아입을 옷 줄테니깐. 여기 수건."
"고마워요."
현민이가 수건으로 옷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치면서 힘없이 터벅터벅 화장실로 걸어들어갔다. 난 급하게 바닥에 떨어진 물들을 수건으로 닦았다.
'아... 비에 흠뻑 젖은 현민이 모습 찍어둘걸. 올리면 좋아요가 몇 개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럴 수 없었다는걸 잘 알았다. 볼 때마다 밝고 활기찼던 현민이는 지금까지 내가 본 적 없을 정도로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현민이가 다시 화장실에서 나와서, 바닥에 수건을 깔아놓고 그 위에 털썩 앉았다.
"현민아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다 걱정이 되네."
"형 제가..."
현민이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용기를 낸 듯 말했다.
"당분간 미국에 가 있게 됐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왜?"
"개인적인 일 때문에요. 말씀은 못 드리겠어요. 그냥 가기엔 너무 죄송해서, 이렇게 염치불고하고 찾아왔어요."
"어디로? 얼마 동안 있다 와?"
"미국으로요. 6개월 정도..."
"미국..."
"......."
"... 그러면 송별회 같은거 해야지. 경훈이, 동민이형, 연승이형, 유현이... ㅎㅎ 싹 다 불러놓고... 뭐 마지막으로 안 보고 싶어?"
"그렇게 할까 생각도 해봤고, 한 분씩 찾아뵐까 생각은 해봤는데... 그냥 그렇게 하면 또 폐가 될 것 같고 제가 너무 슬플 거 같아서. 준석이형한테만 말씀드리려구요. 다른 분들께는... 형이 전해주실거니깐 ㅎㅎ"
미국이라. 나한테도 익숙한 나라다. 그 덕에 미국 생활에 대한 여러가지를 알려준다는 구실로 현민이가 간다는걸 기어코 붙잡고 긴 시간 동안 대화할 수 있었다. 현민이는 괜히 내가 마중이라도 나올까봐 출국 날짜도 안 알려준다고 했다.
"이제 가볼게요. 형..."
"잘 가고, 가서도 잘 지내라 현민아!"
대견하게도 현민이는 마지막까지 눈물을 안 보였다. 현민이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는걸 난 안다.
'하아...'
현민이가 문 밖으로 나가고 문이 차갑게 닫혔다. 현민이를 보는 거의 마지막 모습일거라고 생각하니 텅 빈 집 안처럼 마음까지도 공허해짐이 느껴진다. 6개월 뒤 현민이가 돌아온 뒤에도 우리의 관계가 그대로일 확률은 정말 적지 않은가.
페북에 들어갈 용기가 안 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화로 현민이가 떠난다는걸 말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그런 모든 것이 두렵고 무기력해진다.
휴대폰에 있는 갤러리를 들어가 현민이와 다정하게 찍었던 사진들을 본다. 보다보니 아차, 했다. 마지막으로 현민이와 사진 한 번 찍을걸. 난 그런 배려도 없는 멍청했던 형으로 현민이의 기억에 남겠지? 다시 만날 때까지의 6개월 동안은.
티비를 튼다. 무언가에 홀린듯이 지니어스 시즌3 전편을 구입했다. 1화부터 12화까지 쭉 현민이가 나오는 화니깐 다행이다. 최소한 열두 시간 정도는 현민이를 보면서 마음 속의 공허함을 달랠 수 있다. 그 열두 시간이 지나도 또 시즌4가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경훈이 진짜 웃기게 떨어지네. ㅋㅋㅋㅋ'
'현민이 무서웠겠다. 티비로 봐도 용석이형님과의 분위기가 냉랭한게 딱 보이네."
'이야.. 여기서부터가 이제 장오연합의 시작인가?'
끊임없이 집중했다. 현민이의 표정, 미세한 떨림, 말하는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자세히 관찰했다. 지니어스 속의 오현민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저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 동안에 현민이와 나눴던 대화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로 분석하고 추측하며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랬다.
현민이의 주변 인물들에 나를 대신 대입해본다. 내가 장동민이었다면 저기서 현민이보고 과연 같이 연합하자고 말했을까? 내가 이종범이었다면 현민이의 전략을 예측하고 현민이를 보기 좋게 이길 수 있었을까?
점점 공허함이 사라졌다. 외로움과 그리움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건 그냥 고의적으로, 내가 일부러 잊는거였다. 생각 자체가 사라진다. 이 집 안에서만, 지니어스를 볼 때만 말이다. 현민이가 없는 사회로 다시 돌아가기 두렵다. 밖에 나갈때마다 미국으로 떠난 현민이가 생각날 것만 같다.
다음 날 아침.
밤을 새서 지니어스를 다 봤다. 정확히는 계속해서 틀어놓고, 잠들었다. 어제 조느라 놓친 회차를 다시 볼 수 있다는게 즐겁다. 그 전에.
현민이가 태어났던 목포로 떠난다. 현민이가 다니는 대학, 카이스트가 있는 대전으로 떠난다. 현민이와 밤을 새우며 술을 먹고 밥을 먹었던 장소. 지니어스 세트장이 있던 곳. 현민이의 행적을, 차근차근 되짚는다. 조급하지 않게.
마지막은 우리집 화장실이었다.
이 좁은 화장실에서, 물 때문에 미끄러운 바닥에서 물에 젖어 뻣뻣한 바지를 어떻게 입고 나왔을까? 어제 저녁에 현민이의 옷에서 흘러나왔을,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만진다. 조심스레 계속해서 현민이를 추억한다.
보다 말았던 지니어스를 튼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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