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후기 로마군의 변화에 정치사적 접근이 많음

군사적인 면에서만 놓고 봐서... 동시다발적인 압력이 많아지니까 제국의 방위 전략이 선방어에서 종심방어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국경이 약해졌다는게 예전 해석이었는데

요즘은 그보다는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황제들이 지역 사령관들을 믿지 못하니까 자기 휘하에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병력 끌어모은게 소위 말하는 기동군의 탄생 아닌가하는 얘기가 많음

사실 현대의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로는 어떤 황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저 시스템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지목할 수가 없는 상태임. 누가 언제 했는지도 모르는데 이러이러한 전략적 발상으로 실시된 개혁이다 같은 말은 어떻게 하냐 이거지

현재 그나마 합리적인 추정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제1, 제3 파르티아 군단은 파르티아 원정 종료 후 전통적인 군단들처럼 동방에 배치했으면서 제2 파르티아 군단은 이탈리아에 주둔시키고 나중엔 브리타니아 원정에도 동원한게 대충 이런 개념의 시작으로 보인다는 것과 2) 아마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를 거치면서 뼈대가 잡혀 3) 짤에 정리된 노티티아 디그니타툼 편제표로 귀결된거 아닌가 하는것임

그래서 국경 수비대랑 기동군의 분리가 그렇게 정교하고 계획적인 무언가가 아니었을거라는건데, 그럼 둘 사이에 또 질적 차이가 있었나? 혹은 없었는데 생겼나?하면 또 골때린다. 국경 수비대가 기동군 대비 훈련도 면에서나 장비 면에서나 약체화 됐다는 근거가 딱히 없음

그럼 처음으로 돌아와서 왜 나라 + 군대가 씹창나고 망했냐?인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건 똑같은 시스템 썼던 동로마는 안망했고 심지어 서로마 망하는거 지켜보면서도 딱히 군제개혁을 안했다. 서로마의 멸망이 군대 시스템의 문제였다면 동로마 사람들이 이걸 보고 허미 쉽펄 바꿔야겠네 하고 바꿨어야했는데 그런 변화가 없다고. 언제 변화가 생기냐면 몇백년 뒤에 아랍애들이 쳐들어와서 씹창낸 다음임. 그때까지도 동로마는 본토에서 기동군 쓰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 유닛 카드의 스탯 같은거에 집중하는 토붕이적 마인드에서 벗어나 정치와 경제 사회를 좀 봐야한다. 서로마는 동로마에 비해 경제력이 후달렸다. 잡음은 많았어도 어떻게 어떻게 안정 비스무리한건 성취한 동로마랑 달리 정치가 자주 파국으로 치달았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 형제는 둘 다 병신이긴 했는데 형 아르카디우스쪽이 하드 트롤링은 안했고 의외로 죽기 전에 교통정리도 잘해놔서 서로마가 딱 치명타 맞던 시기에 동로마는 어영부영 살았다. 호노리우스도 100% 본인 잘못만은 아닌게 서로마는 기초체력도 약한 상태에서 호노리우스가 물려 받기 직전 내전에서 서로마가 너무 심하게 박살이 나있었다. 물론 이후에 벌어진 모든 일은 그새끼 잘못이 큼. 왜냐면 호노리우스 등극 이후로도 극히 파괴적인 내전들이 있었기 때문

게다가 서로마는 동로마랑 달리 방어에도 불리했다. 기록을 보면 설령 동로마군이 패배해서 야만족들이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다가도 콘스탄티노플 성벽 앞에서 꼬무룩하고, 바다 건널 능력은 없어서 아시아쪽은 손을 못대니 돌아가버리는 일의 반복이다. 스틸리코의 군대가 로마인들의 폭동에 일가족을 잃고 돌아서기 몇년 전에 동로마에서도 고트족 군대가 로마인들의 폭동에 살상되고 남은 군대가 로마에 반기를 드는 일이 있었다. 차이점은 알라릭한테 붙은 서로마 반란군은 로마를 털었지만 동로마에 반기 든 고트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은 건들 수 없었고 아시아로 넘어가보려다가 해군한테 일망타진 당했다는거임. 그놈의 알라릭도 원래 동로마 들쑤시다가 안되서 서쪽으로 왔고 아틸라도 똑같다.

그리고 경제력의 차이가 단순 턴골의 차이 정도로 퉁칠 것도 아닌것이 당시 동로마는 탄탄한 중산층이 생겨나고 있었던 반면 서로마는 무거운 세금과 전쟁 약탈 콤보를 쳐맞은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지역 권력자들의 예속민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는거임. 단순 인구로 치면 서로마도 동로마에 못지 않았거나 분할선이 어디에 그어졌느냐에 따라서는 오히려 많았을 수도 있는 시대가 있었다. 단지 평균적으로 가난했을뿐이라면 바득바득 버텨볼 여지가 없진 않았단건데 진짜 문제는 그 뭐랄까 특정 시점에 끓는점을 넘어버려서 나라에서 통제할 수 있는 인구가 급격히 줄었다는거임. 농민들은 감당할 수 없는 세금에 뒤지거나 나라가 못 막은 야만족한테 뒤지거나 양자택일이 되니까 안전한 곳에선 지방 권력자에게 의탁했고 갈리아처럼 혼란스러웠던 곳에선 폭도화해서 나름의 자강을 꾀했으니 후자의 폭도들이 어째선지 아토워 프랑크족의 유닛으로 나오는 바가우다이(Bagaudae)들이다.

그럼 이렇게 힘이 강해진 지방 귀족들은 뭘 하는가? 사실 어지간하면 얘들도 나랏님한테 협조하는게 좋은건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마가 아토워마냥 호노리우스 말기나 대충 그 직후에 폭삭 망하진 않았다. 근데 니가 농노들 부리면서 나온 산출량을 나라에 제공하는게 그 농노들이 모두 자영농으로 살면서 각각 나라에 제공했을 산출량의 총합보단 당연히 적을 것이고 나라가 결국 망해간다. 서로마는 여전히 지중해 세계 절반에서 몇군데만 뺀 지역을 다스리고 있음에도 주력 군대가 몇만을 겨우 찍을까말까한다. 그래서 국경선이 쫙 밀리고 니 땅이 있는 지역에 야만족 왕이 눌러앉으면? 니가 현금 장사하는 토사장도 아니고 재산에서 동산보단 부동산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건데 땅이랑 저택 들고 튈거냐? 물론 불가능하지. 그럼 니 선택지는 셋 중 하나가 될건데 1) 다 놓고 튄다 2) 사비 털어서 의병 조직한다 3) 정복자랑 좆을 비벼본다 이렇지

생각보다 1번이랑 2번의 사례도 꽤 있었지만 3번이 더 많았다. 왜냐면 이때 밀고 들어온 게르만족 왕들이 전통적인 대중문화에서 묘사되는, 살육을 즐기고 도시는 보이는대로 부수고 하는 그런 인간 말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마 귀족들이 이 왕들 보고 자기 기준에 안차서 불평불만한 기록들은 나오지만(머리에서 썩은내가 나서 못참겠다 시발 뭐 이런 편지들이 전해온다) 어쨌든 게르만 왕들은 로마 귀족들을 포섭하고 나름의 인센티브를 제공할 의도가 있었고 이런 야합덕에 서유럽에 빠르게 게르만 왕국들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가 길었는데 결국 요약하자면

1) 편제 바뀐건 전략보단 정치적 변화의 결과

2) 그것 자체만으론 전력 약화 아님

3) 경제와 정치등의 요소로 망함

4) 그리고 그 망함은 완전한 군사적 파괴와 교체 같은게 아니라 정치의 산물이었기에 서유럽은 이 시기 기묘한 게르만-로마 혼종 사회를 겪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