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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불완전 단편] 바람이 사랑한 소녀

H.Pro.O.D.G.A.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1.19 23: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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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참 동안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달려 도착한 곳은 보레안 일족의 농경지, 노베리트였다.


그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내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비옥한 농토 노베리트는 검붉고 끈적한 피, 보레안 일족의 전사들과 아렌델 왕국 군인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뒤엉켜 끔찍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끔찍한 참상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기를 지나칠 수 없었다. 나를 부르던 그 소리, 내 살갗을 타고 흘러온 그 소리는 바로 여기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시신들 사이에서 나를 부르던 그 소리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시신들은 서로 전투 중에 사망한 것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시신들의 상처는 인간들의 날붙이에 의한 것이 아닌, 4정령들의 공격에 의해 입은 상처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 상처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릿함을 느꼈다.


나는 찬찬히 시신들을 살피며 이동했다. 혹시라도, 나를 부르던 그 소리의 주인을 지나칠까 걱정되어서였다. 시신 아래에 깔려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나는 조심스레 그 틈새도 샅샅이 살펴보았다.


"실프!"


갑자기 내 귓가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나를 부르던 소리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내가 지금 가장 걱정하며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단박에 달음박질쳤다. 빠른 속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흩날렸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더 빠르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머리가 살짝 구불구불하고 약간은 소년처럼 보이는 10대 정도의 소녀가 자신과 비슷한 나의 또래의 소년의 머리를 무릎에 앉혀 놓은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찾던 소녀, 이두나였다.


"실프!"


나의 모습,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상징이라고 이두나가 준 단풍잎을 본 이두나가 외쳤다.


나는 이두나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이두나의 남주석 빛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살짝 햇빛에 그을린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으며, 가녀린 두 손과 무릎은 피투성이였다.


"와줬구나! 다행이야!"


내가 어떤 상황인지, 묻기도, 알기도 전에 이두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덕택에 나는 이두나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두나의 두 손과 무릎에 묻은 피는 이두나의 무릎을 베고 누운 창백한 얼굴의 소년 것임을 늦게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실프! 왕자님이… 왕자님이 위험해! 도와줘!"


이두나가 절박하게 외쳤다. 나는 일단 이두나가 왕자님이라고 부른 소년, 아렌델 왕국의 아그나르 왕자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그나르 왕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이두나가 불완전한 힘으로 상처를 막은 덕에 출혈은 멈춘 듯 보였지만, 이전에 피를 많이 흘린 모양인지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물론, 죽지는 않았고, 인간의 의사를 만난다면야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지금 아그나르 왕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실프! 제발, 도와줘! 왕자님, 이대로 두면 돌아가셔! 제발, 부탁이야!"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이두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두나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방법을 몰라서는 아니었다.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일단 이두나가 불완전하게나마 응급처치를 한 만큼, 아그나르 왕자는 의사를 만날 시간은 어느 정도 벌어둔 상태였다. 이 노베리트 평야를 나가 아렌델 왕국의 의사를 만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두나든 아그나르 왕자든, 인간은 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정령들의 성역인 노벨린 지역이 싸움으로 유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4정령들 중나를 제외한 정령의 왕이자 땅의 정령인 노딘을 비롯한 3정령은 격노하여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고, 마법 결계(아마 인간들 눈에는 안개로 보일 것이다.)로 노벨린 지역을 단단히 막아 어느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어느 인간이든, 밖으로 나가면 이 세계 전체를 박살낼 것이다."


결계를 치고 돌아오면서 나를 본 노딘은 나에게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격노하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노딘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런 사정 때문에, 이두나든 아그나르 왕자든, 둘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마법 결계는 3정령이 쳐서 만든 것인 만큼, 정령이 아니면 풀 수 없었다. 아무리 이두나가 정령과 인간을 잇는 5번째 정령인 아넬란이라고 하여도, 아넬란은 각성해도 정령의 힘의 4분의 3에 미치지 못하는 데다가, 아직 각성 전인 이두나의 힘은 더 미약하였기에 이두나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다.


"실프, 내가 여자 같은 이름 붙여줘서 화난 거면 사과할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려는 찰나, 이두나가 말했다. 나는 이두나를 바라보았다. 이두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네가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부드러운 이름인 실프로 붙인 거지만, 그게 화나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라면 사과할게. 널 사람들 앞에서 놀린 것도 사과할게. 그리고 내가 한 모든 잘못들 다 사과할게. 그러니까…."


이두나가 말을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이두나를 바라보았다. 이두나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창백한 아그나르 왕자의 뺨 위로 떨어져 천천히 흘러내렸다.


"… 그러니까 제발… 아그나르 왕자님만 살 수 있게 해줘…. 부탁이야…."


이두나가 슬픈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고개를 든 이두나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마음 한 켠을 칼로 후비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제 아무리 인간을 좋아했어도 나는 정령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른 3정령들처럼 나서 인간들을 살육하진 않았어도, 두 번이나 정령들의 성역을 유린한 인간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노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인간들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이두나가 말했을 때, 아그나르 왕자 역시 이 싸움을 일으킨 원흉 루나드 대왕과 하르텐베르크 소장과 관계 있는 사람이기에 이두나의 부탁이 있어도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두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마음은 무너졌다. 이두나는 너무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나랑 놀면서, 짓궂게 내가 장난치느라 이따금 심하게 다쳐도 한 번도 울지 않던 이두나가, 지금은 굉장히 서럽게 울고 있었다.


"실프… 아니 게일…. 부탁할게…. 제발…."


이두나가 울면서 애원했다. 그와 동시에, 아그나르 왕자의 얼굴도 점점 더 창백해져갔다.


내가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2]]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나와 이두나가 도착한 곳은 마법 결계가 쳐진 곳이었다.


"여긴…."


이두나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이두나 옆에 내려 섰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쪽이 아렌델 왕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일거야."


인간의 모습이 되어 내가 말했다. 이두나의 표정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이두나는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이두나, 지금은 시간이 없어.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해."


내 말에, 이두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두나에게 조금 미안한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이 안개를 걷으면 나갈 수 있어. 하지만 이 안개는 인간이 나갈 수 없어. 정령들이 합의해서 친 결계니까."

"그러면…."


이두나가 걱정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도 같이 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인간이 나갈 수 없는 거지, 정령은 나갈 수 있고, 결계를 해제할 수 있어."

"하지만 게일, 그러면…."

"걱정하지마. 아예 없애는 것은 정령들이 모두 힘을 합해야 하지만, 잠깐 틈을 내는 것 정도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너를 나가는 데 충분한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거야."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두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이두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조용히 말했다.


"이두나, 걱정하지마. 충분히 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게일. 그 말은… 나를 도와주면… 너는…."


이두나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두나의 두 눈에 눈물이 다시 고였다.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너를 도와줬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내가 황급히 이두나의 말을 막았다. 조금은 미안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이두나는 조용히, 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레 이두나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힘을 모아서 결계를 열거야. 하지만 결계를 한꺼번에 열 수 없어. 그러니까 열면서 지나가야 해. 그러니까 내 앞에 서, 알겠지?"


이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조금 놓았다.


"그러면, 준비하고 있어. 내가… 힘을 모으고 있을테니까."

"응."


이두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힘으로 조금이나마 상태가 나아진 아그나르 왕자를 업었다.


나는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령들의 힘이 강한 만큼, 내가 써야 할 힘도 많았고, 그만큼 내 힘이 헤르톤들에게 감지될 가능성도 높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최대한 모았다.


나의 주변으로 거친 돌풍이 모여들었다. 갑작스레 강하게 불어드는 돌풍에 이두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으나,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씩 웃으며 힘을 모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어느 정도 결계를 열 수 있는 힘이 모였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이두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이두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내가 손을 쭉 뻗었다. 바람의 힘이 부딪히자, 안개가 옆으로 밀려났다. 이두나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뛰어!"


내 말에, 이두나가 놀란 표정으로 안개를 향해 뛰어들어갔다. 나는 이두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급히 바람의 힘을 분출해 안개를 흩어뜨리며 이두나의 뒤를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에 비례해서, 내가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발휘해야 할 힘도 점점 강해졌다. 조금이라도 힘이 약해지면, 나와 이두나는 그 안개 한 가운데서 꼼짝없이 갇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일…."

"신경쓰지마, 어서 뛰어!"


내가 외쳤다. 출구까지 어느 정도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힘이 급격히 빠지고 있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안개를 걷어내며 출구가 나올 때까지 안개를 헤쳤다.


이윽고, 안개의 마력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출구가 가까워진 것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느끼며 정말 내 모든 힘을 모아서 안개를 헤쳤다.


그렇게 한참 후, 안개가 완전히 흩어지며 아렌델 왕국으로 향하는 아렌델 왕국 무장경찰부대 북부관구의 영내지가 드러났다.


"어서 나가, 이두나!"


내가 갑자기 닫히려는 안개의 끝을 붙잡으며 외쳤다. 이두나는 후다닥 빠져나가 평평한 바닥에 아그나르 왕자를 눕히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게일…."

"이두나, 아마 조금만 더 가면 아렌델 무장경찰부대 북부관구 군단 영내가 나올거야. 거기 가서… 부탁하면… 돼…."


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내 힘은 모두 빠져나가서, 이제 안개를 붙잡는 것조차 불가능 할 정도였다.


나는 이두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힘이 소진된 나에게는 머릿속에 이두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조차 꺼낼 힘이 없었다.


나는 결국 살짝 웃었다. 그것이 내가 이두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이두나… 어서…."


내 말은 끝나지 못했다. 이두나가 갑자기 내게 와락 안긴 것이었다. 조그마한 체구가 내 품 속에 안길 때, 나는 순간적으로 안개를 붙잡지 못할 뻔 했으나, 가까스로 아주 가까스로 안개를 붙잡았다.


"게일… 항상 짓궂게 굴어도… 항상 힘들게 해도… 항상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두나가 내 품에 안긴 채 속삭였다. 이두나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두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둘 모두 꼼짝없이 안개에 갇힐 판이었기에 그렇게는 하지 못한 채, 속삭였다.


"내가 더 미안해."


이두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꼭 안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두나 특유의 풀꽃 냄새가 은은히 퍼졌다.


그 순간 만큼은 나는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너무도.


[[3]]


이두나를 보내고 안개에 갇혀 있던 내가 선 곳은 4정령들 중 3정령이 모여 있는 대회의실이자 대심정인 하엘루덴이었다.


나는 높이 솟은 법대를 올려다 보았다. 중앙에는 적갈색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인 땅의 정령이자 정령의 왕인 노딘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연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10대 초반의 소년인 불의 정령 브루니가 있었고, 왼쪽에는 흰 머리에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인 물의 정령 노크가 있었다.


"포박을 풀어줘라."


노딘이 날카롭게 말했다. 노딘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나를 비롯한 하엘루덴의 모든 존재들은 그 목소리 속에 깔린 분노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노딘의 부하인 헤르톤들이 부랴부랴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아무런 표정 없이 하엘루덴의 노딘을 올려다 보았다.


"게일."


노딘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예를 갖춰 대답했다.


"예, 노딘이시여."

"자네가 왜 여기에 잡혀 왔는지는, 알겠지?"


노딘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정령들의 법률을 심각하게 위반한, 중죄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노딘이 다시 물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게일, 그렇게 가볍게 대답하는 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노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노크를 바라보았다. 누구든지 그 본모습을 본다면 완전히 홀릴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의 노크는 차가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당신이 정령들의 법률을 위반한 건수는 벌써 여럿입니다. 다 처벌 받아 마땅하지만, 다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작은 것으로 온 것도 아님에도, 굉장히 사소한 법률 위반을 한 것처럼 대답하는 군요."


나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마치 내 마음 속을 훤히 들여다 본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화가 났다. 나는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대심정에서 소란을 피우는 순간, 어렵게 탈출시킨 이두나와 아그나르 왕자가 위험할 수 있었기에 나는 내 화를 강하게 억누른 채 조심스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바람의 정령 게일, 그대가 저지른 이전 죄도 충분히 처벌감이지만, 이 자리는 그것을 뒤늦게나마 벌하려는 자리가 아니다. 이번에 벌하려는 것은 이전의 죄들을 모두 합해도 더 중하고 무거운 죄다, 그건 알고 있나?"


노딘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처벌을 받을 준비는 되었나?"


소년의 모습이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중후한 목소리의 브루니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이유건 간에 제가 저지른 것은 4정령 합의하에 결정된 결정을 단독으로 뒤집었으니, 그에 대한 처벌은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끝났군."


노딘이 말했다. 노딘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게일, 그대를 아토할란 최하층에 15년간 유폐시키도록 하겠다. 그 기간 동안, 반성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검은 바다의 외로운 섬, 아토할란 최하층 감옥에 15년간 들어가 있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끝이다, 헤르톤들은 저 자를 데려가 유폐하도록."


노딘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브루니와 노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대심정을 빠져나가려 했다. 나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헤르톤들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나 잊었군."


갑자기, 밖으로 거의 다 나간 노딘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노딘을 바라보았다.


"헤르톤들이여, 저 자를 유폐시킨 후, 아렌델 왕국으로 가 아렌델 왕국을 파괴하고 이두나와 아그나르 왕자를 잡아 오도록 하라."

"뭐라고?"


내가 외쳤다. 강한 마법력에 헤르톤들은 포박당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심정 법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노딘이시여, 지금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한 자 한 자 분노를 담아 내뱉듯 물었다.


"자네를 유폐시키고, 아렌델 왕국을 파괴하고, 아넬란 이두나와 아그나르 왕자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노딘은 그런 나를 무시하듯 내뱉었다. 나는 분노하여 물었다.


"그것은, 4정령 합의를 통한 결정이, 아닐 텐데요?"


내 목소리엔 분노가 깊게 서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심정 내부도 아직까진 잔잔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노크와 브루니는 그것을 느낀 듯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노딘은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깔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 독자적인 결정이다."

"노벨린 지역 외의 일은 아무리 정령의 왕인 당신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텐데요?"


내가 물었다. 나를 중심으로 바람이 조금씩 거세졌다. 주위 정령들과 헤르톤들은 대비 태세를 보였지만, 노딘은 여전히 나를 깔보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인간은 우리 성역을 더럽혔다."

"그들은 소수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 성역을 더럽혔다."

"인간들의 일에, 특히 인간들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건 절대적으로 4정령 합의를 통해서 해야할 일입니다."

"자네는 지금부터 죄인의 신분이니 합의에 의견을 낼 수 없다."

"아직 형이 집행되지도 않았습니다!"

"닥쳐라!"


내 말에 노딘이 법대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엄청난 완력에 법대 탁자가 우그러들었다. 노딘은 대노하여 내게 외쳤다.


"죄인 주제에 말이 아주 많구나! 헤르톤! 당장 저 자를 감옥에 집어 처넣고 당장 가서 아렌델을 파괴하라!"


노딘의 목소리가 대심정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말에 헤르톤들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헤르톤들을 바라보며 사납게 말했다.


"오지 마라."


내 말에 헤르톤들은 다시 움찔하여 멈췄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헤르톤들을 무시하고 노딘을 바라보며 살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면, 너희들도 다 죽여 버리겠다."


나와 노딘의 눈이 마주쳤다. 노딘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는 어지간한 존재가 본다면 아무 말도 못하고 타 죽어버릴 정도로 강렬했지만, 나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채 노딘을 쏘아보았다.


"죄가 더, 추가되고 싶은 모양이로군."


노딘이 차갑게 말했다. 그 차가운 어조에는 극도의 분노조차도 넘어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저, 불합리한 과정에 아직까지 하엘루덴의 한 구성원으로서, 의문을 제기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차갑게 응수했다. 그 모습을 본 노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노딘의 공격이 곧 닥쳐올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는 대비를 했다.


"좋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가라앉고 거친 크레이터가 패인 그 자리에는 위압적인 자세를 한 노딘이 중무장을 한 거대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4]]


"예나 지금이나, 바람의 정령들은 말썽이군. 네 놈 다음에 태어날 바람의 정령은 제발 정상적인 사고가 박혀있길 바란다."


노딘이 자신의 창, 벨랑게르트를 내 심장에 깊이 꽂아넣고는 말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벨랑게르트가 내 몸에서 빠졌다. 검붉은 피가 입에서 울컥 쏟아졌다. 노딘은 벨랑게르트를 포함한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는 차분한 어조로 헤르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뒷처리를 하라, 헤르톤들이여."

"잠깐, 아직, 안 끝났어."


내 말에 노딘이 나를 바라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손에는 4정령들의 힘의 근원인 아벨게르크가 들려 있었다.


"그걸 언제…!"

"게일!"


노딘을 비롯한 정령들이 외쳤다. 아벨게르크는 모든 정령들의 힘이 깃든 물건으로,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정령들의 힘의 근원은 모두 사라져 현세의 정령이 소멸하는 것은 당연했고, 다음의 정령들도 태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했지만,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3대 1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정령들이 소멸하더라도 그것 뿐이었다.


나는 과감하게 아벨게르크를 부쉈다.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벨게르크는 내 힘으로도 충분히 부술 수 있었다.


아벨게르크가 부서지자, 정령들의 힘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힘이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자, 노딘을 비롯한 정령들의 몸이 급격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이, 이 망할 놈…!"


몸이 붕괴하던 노딘은 독기에 찬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흐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노딘은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 노딘의 몸은 그 틈조차 주지 않고 급격히 부서져 버렸다.


나는 브루니와 노크를 바라보았다. 둘 모두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그다지 당황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브루니는 눈을 차분히 감은 채, 소멸을 기다리고 있었고, 노크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정도로, 아넬란을 사랑했나 보군요."


노크의 목소리에는 예전처럼 차가운 감정이 없었다. 나는 씁쓸히 웃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태어날 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 아넬란의 기억은 사라질 것이고, 그 아넬란의 기억에도 우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은건가요?"


노크가 차분히 물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인간들처럼 정령도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곤 했다. 그 주기가 인간보다 길 뿐이지, 정령들 역시 수명이 존재했고, 다시 태어난 정령은 아주 극히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전 정령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곤 했다.


평상시의 상태도 그럴진대, 아벨게르크를 파괴하여 다음 정령이 태어나는 것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 다음에 태어날 바람의 정령은 이두나에 대한 기억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괜찮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혹시라도 노크가 다음 말을 기다릴 거라 생각했지만, 노크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만 말했다.


"당신 입장에선 다행이겠군요."


노크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소멸했다.


나는 손을 천천히 들었다. 손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이두나의 마지막 모습이 보였다. 눈물 어린 표정으로 나를 꼭 끌어안아 주던 이두나의 모습과 이두나의 체온이 사라져가는 몸의 요소 하나 하나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두나, 미안해. 약속… 못 지키겠구나…. 부디…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길 바랄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두나가 준 단풍잎을 어디론가로 날렸다. 그것이 과연 이두나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식이… 사라졌다….


원래 예밤 참가하려고 했는데, 퀄이 너무 개판이라서 그냥 문학으로만 올려야겠다.


설정은 그냥 간단해. 게일(이두나가 붙여준 이름은 실프)이 이두나 짝사랑했다는 설정이야.


모티브는 바람의 나라라는 만화에서 여기저기 긁어왔어.


오늘 너무 힘드네. 아후 ㅠㅠ;;


뭔가 구상은 존나 멋있게 했는데, 쓰다보니 거의 욘존 작가 작품급의 혼돈이 펼쳐지며 망작 터짐 ㅋㅋㅋㅋ


결국은 초고를 그대로 옮겨적기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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