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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얼음꽃 (8)

서리나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0.28 19: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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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링크] 얼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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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꽃






(8)





13. 카산드라 / 발데로스(Vardaros)



세상이 모두 멈춘 순간 오로지 기쁨에 크게 오르내리는 숨소리만 노란 방 한가운데에서 작은 파동을 만들고 있었다. 오감을 바짝 긴장시키는 그 파동에 카산드라는 도무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어둑한 창문에 발갛게 상기된 노오란 얼굴이 비쳤으나 활짝 열린 동공은 그저 허망하게 허공을 헤집을 뿐이었다. 떨떠름하게, 그렇게 소녀의 포옹을 한참 받아 주며, 제 품에 안긴 소녀를 차마 안아 줄 생각조차 않고 카산드라는 그저 바보처럼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 한가운데 박힌 회녹색 동공은 그 여느 때보다도 컸으나 탁한 황무지처럼 꽉 닫혀 있었다.



“캐스.”



부서져라 자신을 꼭 끌어안았던 소녀가 품에서 몸을 떼고 그녀의 부연 동공을 들여다본다. 소녀의 녹안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닦아내는 것만 같아 카산드라는 그저 말간 얼굴 위로 초점 잃은 시선만을 멍하니 옮길 뿐이었다. 주근깨가 박힌 샛노란 뺨과 세상 모든 감정으로 풍부하게 꽉 찬 미간, 5년의 그리움을 담아 발개진 눈시울이 공허한 가슴에 스미었다. 소녀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했으나 카산드라에겐 그저 종소리처럼 귓가에 커다란 울림으로만 남을 뿐이었다.



“보고 싶었어.”



소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고요한 방을 타고 유달리 크게 퍼졌다. 소녀의 옷에서는 건조한 햇살 냄새가 났다. 카산드라는 자신의 코아래 닿는 소녀의 갈색 머리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다른 일행들로 눈길을 하나씩 옮겼다. 유진, 크리스토프, 퀘이드 단장과 심지어 바리안과 카탈리나까지 일동 식사를 멈추고 서서 숙연하게 그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입을 열어 무어라 답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묵직한 말은 차마 목울대를 넘지 못했다.



“여태 어디 있었던 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환희에 잠긴 눈망울이 시큰해지도록 라푼젤은 카산드라를 샅샅이 훑었다. 차마 눈을 깜박일 생각도 않고 카산드라는 오래된 친구의 눈길만 가만히 받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나는 한 번쯤은 연락이 올 줄 알았어. 현상금 사냥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후로 갑자기 소식이 끊어져서 어디 잘못된 건 아닌가,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닌가 걱정이 안 된 날이 없었다고.”



주근깨가 감정의 흐름을 따라 부드럽게 물결친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수억 가지 말을 삼키다 입꼬리를 올려 라푼젤은 애써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아버지의 말이 맞았어.”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카산드라는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짙은 그늘이 드리운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다 라푼젤은 물러서서 식탁 앞 빈자리에 앉았다. 텅 빈 마음을 끌어안고 한참 그렇게 가만히 서서 머뭇거리다 카산드라 역시 자리에 앉았다. 거대한 새장이 길쭉한 발톱을 들어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속내를, 이를테면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 의미를 잃고 돌아다니는 말들, 혹은 예의상으로라도 내뱉어야 하는 말들, 그 모든 것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촘촘한 기둥을 세워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공허가 커다란 발을 들어 이에 가세했다. 자신을 짓누르는 공허가 단지 자신의 상에 지나지 않음을 이젠 카산드라도 알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 만든 잔상을 지우지 못해 자신 속에 갇혀 한심한 몸부림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회의는 잘 돼가는 거지? 유진이 회의를 잘 이끌고 있었다고 믿겠어.”


“햇살아, 이제 막 회의 시작했던 참이야.”



유진이 곤란해 하며 대답했다. 하몽 수십 조각을 입에 우걱우걱 밀어 넣으며 조용히 대화를 듣던 카탈리나가 문득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언니, 코로나에도 일이 많다면서요. ‘퀸 아리아나호’ 침몰 사고는 어떻게 하고 여기 온 거예요?”


“그렇잖아도 그거 때문에 온종일 골머리 썩히다 여기 못 올뻔 했지 뭐야. 나이젤이 업무 처리 관해서 얼마나 들들 볶아대는지. 그래도 내가 누구야, 노련한 여왕 라푼젤 아니겠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라푼젤은 문득 카산드라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니 왠지 머리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 카산드라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수색팀을 황급히 꾸렸어. 솔스타드와 위즐튼에도 전갈을 보냈고. 위즐튼은 묵묵부답인데, 솔스타드는 즉각 협력하겠다는 답을 보내면서 이미 선박을 출항시켰다고 하더라고. 사절단은 내일 오후 비행선으로 코로나에 미리 도착한다고 했고, 선박은 모레쯤 도착한다고 했으니....... 보상 방안도 대략 마련했고, 이쯤 되면 그쪽 일은 어느 정도 갈무리가 됐다고 볼 수 있지!”


“역시 우리 햇살이야.”


“그래서, 선박 침몰 사고는 안타깝게 됐고,”



크리스토프가 짜증스레 말허리를 잘랐다.



“유감스럽지만 이렇게 모인 이상 우리는 우리 일에 조금 더 집중해야겠어.”



뺨을 경련하듯 구기는 그의 표정은 조급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금이 간 인내심으로 분노의 물살을 겨우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오, 아, 그래, 맞아. 내가 여기 온 이유도 그거랑 깊이 관련돼 있으니까. 말 잘 했어, 크리스토프.”



퀘이드가 가져다 준 오렌지 주스를 감사히 받으며 라푼젤은 말문을 열었다.



“그럼....... 누가 먼저 이야기할래? 우리 코로나 왕국 측에서 조사한 것도 있고, 캐스나 크리스토프가 조사한 것도 있겠지. 우리 측도 준비를 광범위하게 했지만, 뭐, 아렌델은 워낙 신비로운 곳이니까 마법이라면 아렌델 쪽이 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크리스토프,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대답이라면 카산드라가........아니, 카산드라 누님이 더 잘 하실 텐데.”



하며 그는 퉁명스레 카산드라 쪽으로 턱짓해 보였다. 못마땅하게 눈을 부라리는 카산드라와 의식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크리스토프를 번갈아 바라보는 라푼젤의 얼굴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



“엘사 언니를 찾아다니면서 발견한 거 뭐라도 말해줘. 작은 단서라도 좋아. 사소한 것에서 뭐든 시작되는 거니까.”


“글쎄, 그 마법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 됐다는 거?”



크리스토프는 비딱하게 걸터 앉아 류트를 조율하며 아무렇게나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코로나도 마법과 관련된 부정적인 이슈가 많이 터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너희 쪽에는 그래도 선역과 악역이 나뉘어 있어서 긍정적인 시각 또한 있었겠지. 난 그저 엘사를 뒤쫓았을 뿐이라서, 별다른 정보는 못 주겠네.”



류트의 줄감개가 현을 감으며 이는 불협화음이 불쾌하게 귓가를 긁었다. 라푼젤은 자연스럽게 다음 차례라는 듯 카산드라를 향해 돌아앉았다. 홍채 가득 들어찬 녹음을 금방이라도 그 속에 빨려들어갈 기세로 노려보다 카산드라는 괜히 식사를 깨작이는 척 눈길을 흘렸다.



“그 일기장, 누님이 갖고 있다면서. 그거 내용이라도 한 번 말해 보지 그래?”



그렇잖아도 심란한 와중 눈치 없이 툭툭 끼어드는 크리스토프가 얄미워 카산드라는 고리눈을 뜨고 그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혼자만의 분노에 심취하여 뺨을 일그러뜨릴 뿐 타인의 시선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일기장?”



크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라푼젤을 쳐다보지도 않고 카산드라는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엘사는 그저 국민들의 시선이 두려워 아렌델에서 도망친 게 아니었어. 자신이 가진 정령의 힘이, 세계에 있는 힘을 독점하고 운명을 조작하는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며 오히려 우려했지.”



하고 말을 마치곤 흘러내리는 흑단발 아래로 카산드라는 라푼젤을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 계속하라는 의미에서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엘사는 평생토록 자신이 가진 마법을 두려워했어. 정령이 된 이후에도 그런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겠지. 그렇잖아, 어릴 적 입은 상처는 너무도 그 뿌리가 깊어, 웬만한 일로는 잘 잊혀지지 않는다고-”



문득 말을 멎고 카산드라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틈새에서 순간 거미처럼 길쭉한 여인의 검은 인영이 일렁이는 착각이 일었던 것이다.



“코로나에 있는 웬 헌책방에서.......”



간드러지는 음성으로 그녀를 한껏 조롱하는 뾰족한 쇳소리가 관자놀이를 뚫고 머리를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사랑이 묻어야 할 자리에 증오만 고인 그런 육성이었다. 역겨운 기시감이 등허리를 훑고 일순 현기증이 일어 카산드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정을 모르는 라푼젤로서는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나도 알음알음 듣긴 했었어. 왜 갑자기 예전 일을 갖고 그런 여론이 조성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아킴이 그 피해자였다면서.”


“누나는 호아킴이 그런 아이인 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음, 조금은? 아렌델에서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뭐, 굳이 짚자면 발데마르의 사주를 받았다는 건 몰랐으니, 그건 내 실책이라 할 수 있겠네.”



라푼젤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바리안은 조금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사실 이곳에 오게 된 것도 표면상으로는 발데마르 때문이야.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일전 대관식에서 잠깐 만났을 때부터 어딘가 무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담하게 남의 나라 영토에서 남의 나라 상왕을, 그것도 그 나라 국서와 타국 경비대장 앞에서 납치할 줄이야.”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건-”


“-표면적인 일도 해결해야지, 물론. 나도 서던 제도 왕이 우리 코로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니까. 그것도 직접 타국에 강림하셔서 일을 처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그 야욕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는 거 아니겠어? 다른 나라는 모두 제 발 아래 복속할 수밖에 없다는 무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라푼젤은 힘주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여기 앉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 그리고 우리 코로나 왕국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좇아 왔던 문제. 마력의 잔흔과 정령석 문제 말이야.”


“정령석?”


“정령이 완전히 소멸하며 남긴 잔해를 우리는 정령석이라고 불러.”



상체를 앞으로 깊숙이 숙이고 관심을 보이는 크리스토프에게 라푼젤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태양과 달의 눈물이라는 선드랍과 문스톤도, 사실 전설과는 다르게 태양과 달에서 바로 떨어져 나온 게 아니었던 거야. 태양의 힘을 가진 불새(Sunbird)와 달의 힘을 가진 서리사슴(Moondeer)이 소멸하며 생긴 잔여물이지.”


“그럼 브루니가 스스로 불타 죽으며 남긴 그 주황 보석도-”


“-불의 정령석일 거야. 듣자하니 한스가 그걸 가져갔다며?”


“놈들이 코로나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것조차도 이젠 확실하지 않아, 유진. 거듭 강조하지만, 난 서던 제도 놈들 안 믿어.”



크리스토프의 날카로운 투에 어깨를 으쓱하여 유진은 이해한다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어쨌든 놈들이 어디 있건 그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 햇살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팀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


“팀을 나누자고? 어떻게?”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유진은 열정적으로 작전을 읊어나갔다.



“한 팀은 코로나 왕국으로 돌아가. 코로나에는 우리가 여태 정령석에 대해 연구해오던 자료들이 잔뜩 쌓여 있어. 최근에 우리 자기가 주목해 오던 것에 따르면 솔스타드에 ‘얼음꽃’이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엘사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그 얼음꽃?”


“아마 맞을 거야. 도대체 꽃이 정령이나 정령석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듣자하니 솔스타드 놈들이 원체 꽁꽁 싸매고 있는 꽃인지라 어떻게 얻는 건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뭐 캐스 네가 말했던 이슈마엘이라는 작자도 얼음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알아볼 수 있겠지.”



조바심이 일어 조금 성마르다 싶을 정도로 카산드라는 급히 캐물었다.



“다른 팀은?”


“다른 팀은 비행선을 타고 서던으로 가. 잠입에 능하고 익숙한 사람이 좋겠지. 엘사가 있는 곳을 알아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엘사를 빼내는 거야.”


“그 다음엔?”


“.......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게 좋을까? 유진, 어떻게 하면 구출팀이 엘사를 무사히 빼내 돌아올 수 있을까?”


“무역용 쾌속선을 이용하는 건 어때?”



미간을 찡그리고 라푼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능성이 불확실해. ‘퀸 아리아나호’가 침몰한 원인도 채 밝혀내지 못했는데, 북해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비행선으로 쫓아온다면 달아날 방법이 없어.”


“열차를 이용하는 건?”



이건 크리스토프의 의견이었다. 라푼젤은 그 의견에도 난색을 표했다.



“열차 시간을 맞추기 힘들지도 몰라. 더군다나 엘사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일면 검문이 강화될 가능성도 높고.”


“그럼 라푼젤, 네 생각은 뭔데?”



장난스런 웃음을 샐쭉 머금고 그녀는 포크로 식탁을 콕콕 두드렸다.



“음, 생각해 둔 방식은 있는데 여러모로 위험 요소가 커서 섣불리 입에 담기는 좀 그렇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나이젤이 결사반대할 게 눈에 선하기도 하고. 게다가 운이 좋아 타이밍이 들어맞아야 성립하는 작전이라 이걸 계획으로 치는 건 무리가 있겠다.”


“위험하다는 건 무슨 소리야?”



포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휘휘 돌리며 라푼젤은 말을 맺었다.



“성공한다면야 발데마르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이거든. 아, 시간이 없으니 이건 이따 마저 논의하자. 우선 팀을 나눠야 해.”



일동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가운데 유진이 대담하게 나서 말문을 열었다.



“일국의 경비대장이라는 사람이 다른 나라에 숨어들었다는 소식이 잘못 퍼지면 곤란하니, 나는 첫 번째 팀에 들어야겠지?”



순간 무언가 외치려 고개를 들다 카산드라는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쳤다. 뾰족한 눈빛이 허공에 얽히고, 둘은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앞 다투어 외쳤다.



“난 두 번째 팀에 속하겠어.”


“아니, 서던 제도로 가는 건 나야.”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다 카산드라는 먼저 선수를 쳤다.



“크리스토프, 넌 이런 쪽에 경험이 전무하잖아. 덩치가 커서 발각되기도 쉽고.”


“서던은 아렌델과 바로 한 정거장 차이야. 시간상 내가 엘사를 데리고 바로 아렌델로 향하는 쪽이 빨라.”


“크리스토프, 미안한데 머리를 좀 써. 네 부상 상태도 좀 신경 쓰고.”


“누님 상태도 만만치 않으시거든요?”


“둘 다 진정해.”



결국 라푼젤이 중재하고서야 그들은 씩씩대며 싸우기를 멈췄다. 옥구슬 구르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부상이 좀 더 심한 크리스토프가 코로나에 남는 쪽으로, 카산드라가 서던에 가는 쪽으로 의견이 굳혀졌다. 여왕의 결정에 별 수 없이 따르면서도 크리스토프는 내심 불만스러워했고 라푼젤 역시 카산드라가 바로 코로나를 떠나는 데 섭섭한 기색이었으므로 이 결정에 만족해하는 사람은 카산드라 혼자밖에 없었다.



“그럼 누나, 저는요?”


“넌 캐스를 따라 서던으로 가는 게 낫겠어.”


“제가요?”



당연히 코로나에 남을 줄 알았던 그는 삽시간에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다.



“제가 코로나에서 일을 마저 진행할 줄 알았는데요.”


“서던에서 탈출할 때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넌 연구뿐 아니라 실전에서도 기계를 잘 만지니까, 비행선이든 열기구든 뭐든 탈출에 도움이 되겠지. 정 안 되면 ‘흑요석 프로젝트’를-”



'흑요석'이라는 단어에서 순간 '아차!' 싶어 멈칫하다 라푼젤은 조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져가도 되겠지. 퀘이사리움을 가진 발데마르를 막을 수단으로 말이야. 퀴린 아저씨한테 듣자하니 최근에 ‘흑요석 프로젝트’를 권총 수준으로 최소화시켰다며?”



종양처럼 자라난 과거가 자꾸만 그들 사이에서 거치적거린다. 바리안은 라푼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가, 카산드라의 눈치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슬쩍 고개를 주억이며 물러났다.



“그럼 나는? 언니, 나는 어떡해?”



퀘이드는 발데로스를 지켜야 하니 이곳에서 역할을 부여받지 않은 자는 카탈리나뿐이었다. 붉은 입술 가득 미소를 함빡 담으며 라푼젤은 대답했다.



“카탈리나, 너는 우리의 비밀병기잖아. 넌 코로나에 있어야 해.”


“왜요? 차라리 카탈리나를 서던으로 보내고 제가 코로나에 있는 편이 낫지 않아요?”



바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안한 감정이 듬뿍 묻은 미소로 시작하여 라푼젤이 그를 달래려는데, 느닷없이 카탈리나가 불쑥 끼어들어 야살스레 한 마디 톡 쏘아붙이는 게 아닌가.



“그거야 내가 오직 이 날을 위해 솔스타드에서 2년간 공부했으니까 그렇지. 이슈마엘이며 얼음꽃에 대해 여기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

“뭐?”



이슈마엘, 얼음꽃, 그리고 솔스타드에서 막 발데로스로 건너왔다는 카탈리나. 꼬이고 꼬여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던 실타래가 제게 꼭 맞는 바늘과 골무를 만나 순식간에 풀려버린 기분에, 희망에 굶주린 걸인처럼 카산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탈리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여 묵묵히 이야기만 듣던 그녀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매를 세우고 걸어오자 카탈리나는 퍽 당혹스러워하며 어물거렸다.



“이슈마엘이라고 했어?”


“캐스 언니, 갑자기 왜 그래?”


“다시 말해 봐. 이슈마엘이라고 했냐고!”



죄 지은 사람처럼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던 카탈리나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 고개만 열심히 주억여댔다.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고 카산드라는 날 선 말투로 거듭 채근했다.



“아까 내가 이슈마엘이라고 했을 땐 아무 얘기 없었잖아. 그 때 얘기하면 좋았을 걸 왜 라푼젤이 오고서야 얘길 꺼내는 거야?”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억울한 시선을 떨구다 카탈리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그야 언니랑 크리스토프 오빠가 갑자기 닥치래서 그랬던 거지!”


“허?”



탁자 위에 잠시 내려놓은 얼음팩을 만지작거리는 크리스토프와 눈을 한 번 마주하다 카산드라는 다른 일행들로 고개를 돌렸다. 강한 외풍이 계곡 전체를 깊숙이 할퀴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집 전체가 우르르 울렸다. 벽과 공명하여 흔들리는 등불이 마치 자신을 꾸짖는 또 다른 초상인 것 같아 성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카산드라는 슬그머니 자리로 가 앉았다. 일행의 얼굴에는 하나 같이 크고 작은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잠깐 고민에 잠기다 카산드라는 슬며시 말을 꺼냈다.



“카탈리나가 이미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면, 구태여 이슈마엘을 찾기보다는 얼음꽃과 정령석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카탈리나, 네가 가진 정보를 최대한 축약해서 들려줄 수 있겠어?”



한결 누그러진 카산드라의 투에 카탈리나도 금세 마음이 풀렸는지 어느새 평소처럼 종달새처럼 종알대기 시작했다. 회의는 밤이 늦도록 지속되었고, 진주처럼 청아한 달이 휘영청 하늘 높이 걸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끝을 맺었다. 고된 하루에 지친 바리안과 카탈리나가 잠에 든 사이 퀘이드가 밤 순찰을 간다며 나서는 틈을 타 카산드라도 뒤를 따랐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협곡에는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이 대기를 꽉 메우고 있어 등불을 비춘대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고래기름을 꽉 채운 랜턴을 들고 카산드라는 호젓한 거리를 걸었다. 도시를 지배하던 남작이 사라진 이후에도 왕국에서 치안이 가장 좋지 않은 발데로스에는 이른 저녁부터 거리에 발걸음이 뚝 끊긴 게 다반사였다. 창백한 달빛이 날을 세우고 협곡을 노렸으나 두꺼운 모래바람을 뚫지는 못했다. 뜨뜻한 안개가 자욱한 골목을 카산드라는 걷고 또 걸었다. 탁한 공기를, 어둠과 자신이 하나가 되도록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며 걷노라니 어느새 발걸음은 경쾌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어둠이 포근한 품을 벌려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를 지배하는 여왕이 된 것 같아 문득 겪어본 적 있는 외로움이 사무쳤다. 불협화음처럼 요동치는 제 마음을 카산드라는 저조차 한 단어로 정의내리지 못해 카산드라는 오늘도 혼란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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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a노래 소개 하나 더 할게.





I've got this


부모님 프레드릭 왕과 아리아나 왕비가 여행을 떠났을 때, 대리로 임시 국왕 업무를 보는 라푼젤의 좌충우돌 일상을 담은 그런 곡이야.


이번 화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가져와 봄!



9화는 금요일에 올릴게. 어제 문학 관련으로 갤이 시끄러워서 올리기가 좀 그렇더라. 혹시 기다린 사람 있다면, 늦어서 미안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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