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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도 떼법과 악성민원, 그리고 시체팔이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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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통치 이념의 근간으로 삼아,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신원을 군주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로 규정했음
국가는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상언,격쟁, 신문고등 다양한 소통 채널을 제도적으로 보장했고,
지방관들에게는 송사를 엄정하게 처리하여 민원을 해소할 것을 시스템적으로 끊임없이 요구했음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개방성과 억울함이 없는 세상이라는,
너무나 이상주의적 목표는
역설적으로 소송의 범람과 악성 민원의 일상화를 초래했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조선을 호송지국(소송을 좋아하는 나라)이라 한탄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백성들의 권리 의식이 신장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음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가장 기피했던 민원은 다름 아닌 변사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음
유교 사회에서 시신은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였으나
이를 이용해 송사 과정에서는 상대방을 압박하고 관아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물리적 무기로 전락했음
이를 시체 투쟁이라 할수 있을정도며 이는 단순한 항의를 넘어선 고도의 심리전이자 경제적 갈취 수단이 된거임
조선의 검시 지침서인 『무원록(無冤錄)』,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에 따르면,
살인 사건이나 원인 불명의 변사체가 발생할 경우
해당 고을의 수령은 반드시 현장에 출동하여 시신을 검시(검험)해야 했음
검시는 보통 1차(초검)와 2차(복검)로 이루어지며, 의문점이 남을 경우
3차, 4차 검시까지 진행되었음
그리고 민원인들은 이러한 행정적 의무와 절차의 복잡성을 악용하였음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혹은 이를 사주한 잡놈들)들은 관아의 검시 결과에 불복하거나,
아예 검시 자체를 거부하며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버티는 전술을 구사했음
이들은 시신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집 앞이나 관아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방치해버렸지
여름철의 경우 시신은 빠르게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하게 되는데,
이는 수령과 아전들의 업무를 마비시키고, 가해자 집안을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뜨리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음
억울함을 호소하는 측에서는 관아의 검시관이 도착해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막거나,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타살 등)이 나올 때까지 시신 인수를 거부하기도 했음 사실상 일종의 인질극이었음
직접적인 살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X어 시체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겠다는 협박은
채무 관계나 원한 관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음
조선시대에는 남의 집 대문 앞에서 X살하거나 변사체가 발견되면,
집주인이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거나
최소한 검시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고초를 겪어야 했거든
이를 악용하여 "돈을 갚으라고 압박하면 네 집 앞에서 X을 매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채무자가 채권자를, 혹은 약자가 강자를 압박하는 비대칭 전력이었음
조선 후기, 특히 정조 시대에 이르러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언과 격쟁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음
본래 격쟁은 사형에 해당하는 억울한 죄, 부자 관계의 윤리, 적첩의 구분, 양천의 신분 문제 등
4가지 중대 사안(사건)에 한해서만 허용된 최후의 수단이었으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제도는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사소한 민사 분쟁 해결이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한 악성 민원 창구로 변질되었음
정조 재위 24년 동안 접수된 상언과 격쟁은 총 4,427건에 달했음(상언 3,092건, 격쟁 1,335건)
이는 영조 시대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로, 정조의 적극적인 소통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의 남용이 극심해졌음을 보여줌
문제는 격쟁의 내용이 국가적 중대사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해관계에 집중되었다는 점이었음
오늘날로 치면 이혼, 채무 불이행, 재산 상속, 묘지 다툼 등 지방 법원(관아)에서 해결해야 할
민사 사건을 왕에게 직접 들고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음
돈을 못 받았다
아내가 도망갔다
나무 값을 떼였다
등의 이유로 왕의 행차 길을 막고 징을 치는 행위는
국왕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행정력을 낭비시키는 대표적인 악성 민원들이었음
예시들을 보자
경기도 양근에 사는 80세 노인 이광홍은 인제에서 매입한 나무 600여 주를 총융청 장교와 서리가 빼앗아 갔다며,
그 대금을 받기 위해 격쟁을 벌였음
사실 그는 이미 관아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 판결을 받은 상태였는데 미지급분이 있다며 만족하지 못하고,
정식 절차인 사송 제도를 무시한 채 왕에게 직소한거임
이는 명백한 처벌 대상이었음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나이가 80이 넘었다는 이유로 노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죄를 묻지 않기로 결정했음
이러한 온정주의적 처분은 법의 형평성을 무너뜨리고,
유사한 악성 민원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건 당연지사
백성들 사이에서는 "일단 왕 앞에 나가서 드러누우면 해결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된거임
한성부에 빚 문제로 잡혀 있던 남편 이정수를 구하기 위해,
그의 아내는 재판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격쟁을 벌였음
상대방인 정도형이 이미 소송을 제기하여 심리가 진행 중이었고,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것임
이는 사법 절차를 무시하고 왕권으로 재판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어,
외월지죄( 분수에 넘치게 절차를 건너뛴 죄)가 적용되어 처벌받았다.
이는 급한 마음에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백성들의 조급증과 법 경시 풍조를 보여주는 예시임
또한 가정 내부의 문제, 특히 이혼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까지 왕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음
17세기 홍가신은 사위인 이길이 역모에 연루되어 죽자, 자신의 딸을 이혼시켜 달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음
이는 역모 연루자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생존 전략이기도 하고 이해는 되나
제도의 취지(국가적 억울함 해소)와는 거리가 먼 개인적 신분 세탁을 위한 민원이었음
원래 조선에서 이혼은 국가가 장려하지 않았을뿐더러, 하더라도 양가 합의나 관아 선에서 끝내야 할 문제였는데
내 딸이 역적의 아내로 죽게 생겼으니 이혼 허락 도장을 찍어달라고 왕에게 직접 다이렉트 민원(상언)을 넣은거임
조선의 격쟁 제도가 악성 민원의 온상이 된 배경에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 문화가 있었음.
동시대 일본 에도 막부의 경우, 쇼군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직소(직소)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이를 시도하는 즉시 참수되거나 가문이 멸절되는 등 가혹한 처벌이 따랐음
백성이 쇼군의 행차를 가로막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음
반면 조선은 격쟁을 하면 형식적으로 곤장을 치기는 했으나(보통 곤장 100대, 유배 3000리 규정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감형되거나 형식적 집행에 그침),
사연을 들어주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았음
"맞을 때 맞더라도 할 말은 하겠다"는 조선 백성들의 기질과,
이를 용인하는 유교적 민본주의가 결합하여 독특한 떼법 문화를 형성한거지
이는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긍정적 측면과 행정력 낭비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
신분을 드러내고 하는 격쟁이 양지의 악성 민원이라면,
이름을 숨기고 특정인을 모함하거나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투서와 괘서는 음지의 악성 민원이었음
조선시대에는 익명으로 고발하는 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익명서는 내용을 보지 않고 불태워버리도록 규정했으나,
실제로는 정적을 제거하거나 지방관을 쫓아내기 위해,
혹은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투서와 괘서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음
괘서는 대중이 많이 모이는 장터, 성문, 관아 벽 등에 몰래 붙이는 벽보로,
여론을 조작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데 효과적이었음
가장 대표적인 악용 사례는 명종 대의 정미사화임
당시 권력을 장악한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는 정적인 대윤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여자(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들이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
라는 내용의 익명 벽서를 날조하거나,
누군가 붙인 벽서를 크게 키워서 역모 사건으로 조작했음.
이는 권력층이 악성 민원을 정치적 숙청의 도구로 활용하여 사법 살인을 저지른 대표적인 케이스임
민원이 아래로부터의 호소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탄압 수단으로 악용된 것임
19세기 세도정치기에는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면서 괘서가 더욱 빈번해졌음
그중에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하며 사실은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개같은 자작극?
당연히 있었지
1801년, 경상도 창원의 소작농 전지효는
"천하의 지모와 힘이 있는 자는 모두 북소리에 맞추어 뒤를 따르라. 능력에 따라 관직을 주겠다"
는 내용의 반역 괘서를 스스로 작성하여 붙인뒤, 이를 자신이 발견하여 관아에 신고하는 쇼를 벌임.
그의 목적은 역모 고변에 따른 막대한 포상금과 관직을 받는 것이었음
그는 이 과정에서 평소 원한이 있던 부유한 진사 정양선 등을 공범으로 몰아 무고했음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파견하여 조사한 끝에 전지효의 자작극임을 밝혀내고 그를 처형했음
이 사건은 악성 민원이 단순히 억울함을 호소하는 차원을 넘어,
타인을 해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기획 범죄로까지 진화했음을 보여줌
지방 사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수령이 부임하면 집단적인 투서 공세를 펼쳤음
수령의 비리를 조작하거나 과장하여 감영(관찰사)이나 중앙 사헌부에 투서를 보냄으로써
수령을 파직시키거나 길들이려 했다. 이를 구축이라 불렀음
세종 대에 제정된 부민고소금지법은
다들 알지?
지방의 아전이나 백성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을 금지한 법임
표면적으로는 위계질서 확립을 위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방 토호(향리)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수령을 무고하여 쫓아내는 폐단을 막기 위한 나름의 의도도 있긴 했는데....
문제는 이 법은 수령의 탐학을 견제할 수단을 없애버리는 부작용도 낳았음
법적 고소로가 막히자 백성들과 토호들은 더 음성적이고 악의적인 수단을 찾게 된거지
직접 고소 대신, 익명의 투서를 활용하거나,
왕의 행차에 뛰어드는 격쟁을 통해 우회적으로 수령을 공격하는 방식을 택하게 됨
즉, 법적 통제가 오히려 악성 민원을 음지화하고 과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거임
조선시대에 이처럼 다양한 악성 민원이 창궐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것이 현대 사회에 주는 의미는 뭘까?
조선은 "원통함이 없게 하라"는 유교적 이상을 강조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공정하고 신속한 사법 행정 시스템은 부족했음
지방관은 행정과 사법을 겸임하여 업무 과부하 상태였고,
아전들의 농간은 끊이지 않았음
이에 백성들은 정식 절차보다는 충격 요법(시체 시위, 격쟁)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학습하게 된거지
거기에 개인의 잘못이 가문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연좌제 사회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모나 강상죄로 엮어 넣는 무고였고
이는 민원의 내용을 극단적으로 과격하게 만드는 원인중 하나였음
또한 법대로만 처리하지 않고 정상을 참작해주는 국왕의 온정주의적 판결(예: 80세 노인 처벌 면제)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무리한 민원들을 양산하는 토양이 되어주었음
조선시대의 시체 투쟁, 격쟁 남발, 투서질은 오늘날의 떼법, 신상 털기, 악성 댓글, 반복 민원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짐
자신의 권리 구제를 위해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전술은 전근대나 현대나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혹은 악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비대칭 전력이기 때문임
특히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속설은 조선시대 격쟁의 성공 경험에서 유래한거 일지도 모름
조선의 사례는 소통 창구를 열어두되, 원칙 없는 관용은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줌
정조가 격쟁을 활성화했지만 결국 사소한 민원의 홍수에 시달렸던 것처럼,
명확한 기준 없는 민원 해결은 사람들이 악용하게 되기 마련이고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게 되어있음
또한, 익명성에 기댄 무고가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향전, 괘서 사건)는
현대의 익명 인터넷 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봄
조선시대의 악성 민원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나 도덕적 해이가 아니었음
억울함을 양산할수 밖에 없는 경직된 신분제 사회 그러나
모든 백성의 소리를 듣고 억울함을 해결해야 한다는 유교적 명분론..
그리고 불완전한 사법 시스템.....
맞지 않고 삐극대는 톱니바퀴들 사이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사회 현상이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시스템의 빈틈을 잔머리를 굴려가며 악용했고
이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도 이어지고 있음
오늘날의 떼법, 좌표 찍기, 신상 털기, 청원 게시판 도배 등도
결국 법치 시스템이 완벽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대중이 찾아낸 현대판 격쟁이자 투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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