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할지어다, 죄 지은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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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갑옷의 기사는 그의 발치에 엎드러진 자를 굽어보고 있었다. 붉은색의 파워아머는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원래는 검은빛을 띄고 있던 견갑조차도 상처에서 흘려나온 혈흔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전사는 팔목부터 잘려나간 오른손을 들어 기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사가 전사의 아래턱을 베어내지 않았으면 전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신-황제 폐하를 위하여,일까.

구역질이 치미는 역겨운 자들이로다. 절박한 상황을 마주해서 이성을 포기하고  광신으로 눈을 돌린 우매한 자로다. 참회할 지어다. 기사는 그의 파워소드를 전사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들려왔다. 전사는 그럼에도 움직였다. 전사는 기사가 검을 잡은 손의 손목을 비틀어서 전사의 몸을 헤집은 뒤에야 손을 떨어트렸다.

기사는 검을 뽑아들며 고개를 들었다. 시체와 시체가 될 자들이 가득한 전장이었다. 병사는 그런 곳에서 여전히 서있었다. 병사는, 기사의 적수는 전사가 기사를 가로막기 직전에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병사의 왼쪽 다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지면을 밟고 서있었다. 그의 사라진 오른쪽 다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이제 근처에 있지도 않았지만 그의 몸통에 묶여서 지면에 굳건히 고정된 깃대가 그의 새로운 다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깃대에 매달린 카디아 연대의 군기는 화염에 그슬리고 파편에 찢겼지만 결코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당당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병사와 깃대는 서로에게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쓰러진다면 다른 쪽도 쓰러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병사는 무너지지 않았다. 병사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기에. 깃발에 적힌 구호대로 병사는 여전히 서있는 것이다. 기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공포와 절망이 가득하고 비참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음에도 그는 고결했다.

거짓된 세뇌를 통해 교육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 또한 결국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고결한 충성심이다. 촛대가 마지막 순간까지 불을 피우듯이 필멸의 영혼이 위태롭지만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는 저 모습은 굳건한 정신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기사는 병사를 그의 적수로 인정했다.

기사는 검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기사는 그의 검을 검집에 넣었다. 기사의 양손이 그의 투구를 향했다. 기사는 투구를 벗었다. 높이 떠오른 해의 햇살이 기사의 눈쌀을 일순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기사는 이내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사는 그의 적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폴른 엔젤의  챔피언, 워마스터 라이온 엘 존슨의 초즌이며, 대검의 심문관. 본관 베네딕트가 귀관에게 경의를 표한다. 본관에게 귀관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
"•••"
병사의 표정은 다채롭게 변화했다. 기사 베네딕트는 병사의 답변을 차분하게 기달렸다. 시간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보다는 자신이 병사의 목숨을 거두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는 병사에게 관대히 시간을 주었다. 고통. 당황. 일말의 희망. 그리고 각성. 병사는 피가 가득 섞인 침을 뱉은 뒤에 뇌까렸다.

"카디아는 굳건하다, 이 개자식아."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충심은 분명 고결한 것이로다. 강대한 적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저항하는 이 영혼이야말로 위대하다고 칭송받기에 마땅한 자로다. 그렇지만 광신에 눈이 멀어 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둔함이 모든 찬란한 사실을 뒤엎게 만들었구나. 작은 그릇에 미처 담기지 못한 위대한 내용물에게 속죄할 지어다, 눈이 먼 자여.

베네딕트는 눈을 한 차례 감은 뒤에 뜨며 판결을 내렸다.  카디아 217연대의 마지막 생존자, 에이반 데시마는 마침내 쓰러졌다. 그렇지만 행성의 마지막 카디안이었던 데시마가 쓰러직기 직전 행성의 반대편에 카디아 335연대를 비롯한 아스트라 밀리타룸의 지원군이 지면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카디아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워존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기사 + 타락 = 정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