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글 찾아서 내용 조금씩 수정하는데 환상 2편을 안 올렸더라고.
2편은 쉬어가는 편이고 3편부터 진지해질 예정인데 애샛키인 하나의 애정이 깊어지는 모습 써내려가기가 힘들닼ㅋㅋㅋㅋㅋ큐ㅠㅠ
오메가버스랑 환상이랑 쓰는 중인데 쓰다가 막혀서 버리고 새로 쓰고 또 쓰다가 막혀서 버리고의 반복 중임 ㅠㅜ
절대로 내버려둔 채로 나몰라라 하는 게 아님ㅜㅜ 기다려주는 갤럼들 미안하고 고마워…
환상 1부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537933. Angela
디바와 술을 마시고 모텔에 갔던 날, 앙겔라는 술에 취해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다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디바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19년 동안이나 저를 위로해주었던 디바가 실은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앙겔라의 마음을 짓눌렀다. 머리로는 18살이나 어린 아이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성보다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디바를 위로해주는 것이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디바를 제지하던 손에 힘을 풀었고… 그렇게 잠자리를 같이 했다.
관계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침대 위에서의 디바는 놀라우리만치 능숙했다. 디바의 리드에 따라 가쁜 숨을 밭으면서 앙겔라는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연신 얼굴을 가렸고, 디바는 그 때마다 손을 치우며 예쁘다고 속삭여주었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의 밑에 깔려서 오랜 시간 끙끙대다가 가까스로 풀려나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앙겔라는 잠결에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는 디바의 목소리를 듣고 서서히 의식이 부상했다. 디바는 자다 말고서 옷을 꿰어 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딜 가냐고 묻자, 약속이 생겼다며 자고 있으라고 가슴께를 도닥여줬다. 앙겔라는 희미한 불안감을 안고 다시 잠에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묻히고 온 디바가 제 품에 파고 들고 있었다. 디바에게서는 술 냄새, 그리고 톡 쏘는 듯한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 앙겔라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뭐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제 등을 쓰다듬으며 '자요, 언니.'하고 잠에 겨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디바를 붙잡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연하의 애인보다 18살이나 더 먹어서는 꼬치꼬치 따져묻는 게 주책맞다 생각된 탓이었다. 결국,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난 디바는 앙겔라를 데리고 제가 자주 간다는 해장국집으로 데려갔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에 낯설어하는 앙겔라를 위해 뼈다귀에서 살점을 발라주며 디바가 말했다.
“언니, 우리 규칙 정해요.”
“규칙이요? 웬 규칙이에요?”
“간단해요.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거예요. 언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어때요?”
“…그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친구들이랑 놀러 가는 걸 막는다거나, 술이나 담배를 못하게 한다거나 하는 거요.”
“그런 거라면 물론 터치하지 않을 거예요. 전 하나 양을 구속할 생각은 없어요.”
“흐응, 생각보다 프리하시네. 저야 좋죠.”
뉘앙스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에 대해 되묻기도 전에 디바가 앙겔라의 앞으로 뚝배기를 내미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처음 먹어보죠? 뼈다귀 해장국이라는 건데, 술 마신 다음날엔 이게 최고거든요. 속는 셈 치고 먹어봐요. 별로면 다른 곳으로 가게요.”
“아니에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뭘요.”
그렇게 처음 먹어본 뼈다귀 해장국은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속이 따끈따끈해지는 기분으로 식사를 마친 후, 디바는 앙겔라를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매장 입구에 앙겔라를 세워두고 점원과 한국어로 무어라 말을 나누더니, 몇 벌의 옷을 가져와서 앙겔라에게 이리저리 대보는 게 아닌가. 앙겔라는 당황해서 물었다.
"아, 이거 괜찮네. 이걸로 입어 봐요.”
“하나 양, 하나 양의 옷을 사러 온 게 아니었나요? 전 별로 쇼핑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요.”
그러나 디바는 막무가내로 엷은 장미색 투피스를 쥐어주고 앙겔라의 등을 꾹꾹 밀어 탈의실로 향하게 했다.
“언니가 너무 수도원 사람처럼 옷을 입는 바람에 내가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서 그래요. 갈아입어 봐요."
그리고는 대꾸할 틈도 없이 탈의실로 앙겔라를 밀어 넣었다. 앙겔라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섰다. 디바가 흐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앙겔라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선 등이 너무 파진 게 아닌가 신경 쓰이는 앙겔라에게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더니 점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잠깐만요, 하나 양. 제가 계산할게요.”
앙겔라가 놀라서 말리자 디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앙겔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왜요?”
"왜냐뇨... 제가 입을 옷이잖아요. 당연히 제가 사야죠."
디바는 그런 앙겔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 핸드백을 여는 앙겔라의 손을 제지했다.
“아, 됐어요. 선물이니깐 그냥 받아요.”
“어떻게 그래요. 하나 양은 저보다 한참 어린데다, 아직 학생이잖아요. 돈이 어디 있다고……. 너무 부담스럽네요."
가격표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앙겔라에게 디바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백만원 도 안 하는 옷 가지고 무슨 부담 운운이에요? 저희 집이 졸부 집안이거든요. 돈은 썩어날 만큼 많으니깐 신경 쓰지 말고, 다음 옷 사러 가요.”
“아니,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러나 디바는 앙겔라의 말을 들을 깊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제 손을 잡은 디바에게 이끌려 여러 매장을 돌았다. 쉴틈없이 이것저것 들이미는 디바에 휘말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대여섯 벌의 옷을 산 뒤였다.
갑자기 한 벌에 몇 십 만원이나 하는 옷들을 선물 받은 앙겔라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꼭, 옷들이 마치… 화대를 포장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스스로가 한 생각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애인 간에 선물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저도 디바에게 선물을 해주면 될 일이었다. 앙겔라가 마음을 고쳐먹고 디바에게 말을 건네려 했을 때, 디바의 휴대폰이 울렸다.
디바는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한국어로 뭐라고 하더니 한차례 웃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선 앙겔라에게 물었다.
“언니, 뭐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아뇨, 제 옷은 이제 됐고 하나 양의 옷을 사러 가죠.”
그러자 디바가 픽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골라주게요? 됐어요. 저 마침 약속도 잡혔고, 그럼 이제 가요. 바래다줄게요.”
이게 데이트가 맞긴 맞나? 앙겔라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문화 차이 혹은 디바와의 나이차로 인한 세대차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용건만 간단히 보고 헤어지는 건가……. 어찌 됐든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는데 헤어지게 되다니. 그러나 약속이 잡혔다니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디바에게 선물을 해주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디바는 앙겔라가 사는 오피스텔 앞까지 운전한 뒤, 나중에 보자며 손을 흔들고선 떠나갔다.
앙겔라는 꼭 여우에게 홀린 듯한 느낌으로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하룻밤 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진 느낌이었다. 동시에 뭔가 잘못됐단 생각이 들었으나 말로 콕 집어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첫 데이트라는 설레임과 상이한 마음 속을 맴도는 찜찜한 기분과 불쾌함이 함께하는 데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처음 얼굴을 본 날 사귀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두 번째로 얼굴을 본 날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이 앙겔라는 몹시도 신경 쓰였다.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이토록 빠르게 진도를 나가본 적이 없었기에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디바와는 이틀에 한번 혹은 삼일에 한 번 꼴로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의 순서는 언제나 같았다. 영화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본 뒤 식사를 했고, 그 뒤 드라이브를 한 다음 모텔에 들렀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잠자리로 이끄는 디바의 모습을 보고 앙겔라는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앙겔라가 관계를 꺼려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디바는 항상 버림받은 듯한 표정으로 앙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난 언니가 좋아요, 언니는 내가 싫어요? 하는 말을 꺼냈다. 울먹이눈 눈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두어 번 그런 행동이 반복되는 동안에 앙겔라는 디바가 영악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막상 울먹거리는 눈을 마주하게 되면 디바의 의도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날이 자그마치 2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앙겔라와 사귀면서도 디바는 계속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러 다녔고, 클럽에도 드나들었다.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디바는 영화를 보던 도중 자꾸만 하품을 하더니 기어코 잠이 들고 말았다. 피곤한 일이 있었나보다 싶어 깨우지 않고 내버려뒀더니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고 있길래 그때서야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디바는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란 하품을 했다. 앙겔라가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하나 양? 많이 피곤해보이네요.”
“어제 클럽에 새로 온 DJ가 음악 취향이 저랑 완전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늦게까지 춤을 췄더니 좀 피곤하네요.”
“…클럽이요?”
앙겔라는 놀란 눈으로 디바를 보았다. 비록 복잡한 마음으로 사귀고 있긴 하지만 일단 앙겔라는 디바의 애인이었고, 제 상식으로서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 클럽을 드나든다는 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 챈 디바가 입을 열었다.
“언니, 우리 규칙 정했잖아요. 벌써 잊은 건 아니죠?”
“규칙이라니… 설마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겠단 그거 말하는 거예요?”
앙겔라가 황당해하는 기색으로 묻자 디바는 잔망스런 눈빛을 보내오며 말했다.
“당연하죠.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정말 친구들이랑 건전하게 술 마시고 춤만 춘 거니까. 바람 같은 거 안 피워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궤변인 것을 알았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는 한편, 18살이나 어린 한창 청춘일 디바가 저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디바가 샐샐 눈웃음을 치며 앙겔라에게 몸을 기대왔다.
“그냥 친구들이랑 놀기만 하는 거예요. 언니, 나 못 믿어요?”
그렇게 물으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앙겔라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믿어요.”
“그래요, 애인 사이엔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요.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이끄는 디바에게, 클럽에 드나드는 일 자체가 그 믿음을 깨는 일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앙겔라는 복잡한 속을 감추며 디바의 뒤를 따라 걸었다.
***
디바와 사귄 지 3주가 되던 어느 날, 매일 아침 날아오던 문자가 뚝 끊겼다. 앙겔라는 시험 때문에 바쁘겠거니 하며 연구소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디바에게서 연락 한 통 없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시험 기간 동안에는 연락을 삼가자고 생각해, 주말이 된 토요일 오전에서야 디바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에 그냥 전화를 끊을까 생각하는 찰나에 디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잔뜩 쉰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앙겔라는 놀라 물었다.
“하나 양? 하나 양 맞아요?”
- 어… 아, 언니네. 네, 맞아요. 저예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 네…… 저 지금 엄청 아파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디바는 정말로 아픈 것처럼 생각되었다. 앙겔라는 휴대폰을 고쳐 쥐고 물었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병원은 다녀왔어요?”
- 병원 가봤자예요… 나 술병 났어요.
디바와 몇 번 술을 마셔본 경험이 있는 앙겔라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토록 술을 잘 마시는 디바가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술병이 다 난 걸까?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럼 잘 쉬어야죠. 누구 돌봐주는 사람은 있고요?”
- 그런 거 없어요. 으으, 언니 나 너무 아파요……. 언니가 나 좀 봐주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될 일 따윈 없었다. 앙겔라는 즉시 그러겠다고 했고, 디바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제가 사는 아파트 주소와 도어락 비밀번호를 말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 직후 전화가 끊겼다.
차를 몰아 디바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서자 보이는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집 여기저기에 책이나 옷가지가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디바의 이미지 때문에 순간 강도가 든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게 아니라는 것은 식탁 위에 쌓인 인스턴트 용기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전혀 정리가 안 된 집안 꼴에 한숨을 내쉬며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하나 양, 저 왔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앙겔라는 혼자 살기에는 커보이는 집을 둘러보며 여기저기 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침실 문을 열었을 때, 훅 풍기는 알코올 냄새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손등으로 코를 막으며 벽을 더듬어 어두운 침실에 불을 켜자, 널찍한 침대 위에 디바가 나시에 반바지만 입은 채로 엎드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 양?”
가까이 다가가 불러보니 디바는 가슴께를 쥔 채로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앙겔라는 디바를 살살 굴려 똑바로 눕힌 후, 상태를 확인했다. 그저 잠에 든 것 같았다.
앙겔라는 화장실로 가서 세숫대야를 찾았다. 그러나 디바의 집에는 그 흔한 바가지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그릇에다 물을 담아 땀을 닦을 수건을 가지고 침실로 향했다. 눈도 못 뜨고 신음만 흘리는 디바의 얼굴과 목 주변을 꼼꼼한 손길로 깨끗이 닦아준 후, 베개를 정돈해주자 찡그려졌던 디바의 미간이 살짝 펴졌다. 검지로 눈썹 사이를 살살 문질러주자 디바의 표정이 순해졌다. 앙겔라는 그 모습을 살풋 미소지으며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순하게 자고 있으니 꿈속에서 보아온 디바와 정말 많이 겹쳐져 보였다. 앞으로 적어도 오륙년은 더 있어야 제가 아는 디바에 가까워지겠지 싶어 앙겔라는 작게 웃었다. 그때가 되면 제 나이는 40대니, 한창 꽃피울 나이인 디바와는 헤어진 상태일 터였다. 그때가 되어서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좋을 텐데……. 앙겔라는 땀에 젖은 디바의 앞머리를 가만가만 치워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엉망인 디바의 집을 정리하고, 환자식이라도 만들어주려 냉장고를 열었더니 들어 있는 건 온통 맥주뿐이었다. 수입 맥주가 종류별로 잔뜩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쉰 앙겔라는 아파트 단지에 딸려 있는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본 다음 다시 디바의 집으로 돌아왔다. 닭고기 스프가 거의 다 완성되었을 즈음에 열린 침실 문 너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물 컵을 들고 침실에 들어서자 디바가 끙끙대며 침대 머리맡을 더듬고 있었다.
“목마르죠? 이거 마셔요.”
디바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허겁지겁 물을 삼켰다. 그러다 사레들리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쿨럭 대며 물을 흘려댔다. 앙겔라는 디바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맡에 놓인 수건으로 디바가 흘린 물을 닦았다. 한차례 기침을 토한 디바가 어벙한 얼굴로 앙겔라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여길… 언니가 왜 여기 있어요?”
“왜냐뇨……. 하나 양이 와달라고 했잖아요.”
“네? 제가 언제요?”
“요 며칠 연락이 없길래 전화했더니, 하나 양이 아프다면서 간호해달라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디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곧 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았던 모양이었다. 핼쑥해진 얼굴을 다시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주며 앙겔라가 물었다.
“혼자 사는 거예요? 어머니는요?”
“엄마 이야긴 하고 싶지 않아요.”
날카로운 하이톤의 목소리에 상당한 분노가 묻어 있었다. 앙겔라는 부드러운 어조로 미안하다 사과했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머니에 대한 것이 디바의 역린인 것 같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디바가 불쑥 말했다.
“어젯밤에 시험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술집 갔다가 옆 테이블이랑 말을 트게 됐거든요. 그리고 가볍게 술게임을 하게 됐는데, 그러다가 누가 주량이 더 세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진 사람이 술값 내기로 이야기가 오가게 되서 조금 많이 마시게 된 거예요.”
주량 내기라니, 참 어리다 싶어 한숨을 내쉬는데 디바가 그런 앙겔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이겼어요.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저랑 내기했던 애가 입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던 건 생각나거든요. 게임을 하면 이겨야죠.”
“대체 집에는 어떻게 온 거예요? 설마 그 상태로 운전한 건 아니죠?”
“아우, 그 상태론 운전 못하죠. 대리 운전기사 불렀어요. 잘했죠?”
제 딴에는 애교 피운답시고 웃는데 안색이 파리해서 안쓰러워보였다. 앙겔라가 말이 없자 디바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작게 말했다.
“…돌봐주러 와줘서 고마워요.”
“고마우면 앞으로 술은 조금만 먹도록 해요.”
“생각해볼게요.”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하나 양이 아직 덜 아팠나보네요.”
“나 진짜 아프거든요? 머리도 아프고 땀도 나고 속도 쓰리고…….”
“일단 물 좀 더 마셔요. 아니면 이온 음료 줄까요?”
“음료수 마실게요.”
앙겔라는 디바를 부축해 베드에 기대어 앉게 했다. 컵에 따라진 이온 음료를 홀짝이며 디바가 침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가 방도 치워준 거예요?”
“알아주니 고맙네요. 집이 엉망이던걸요. 냉장고엔 온통 술이고, 요리 도구라고는 냄비 하나에, 드레스 룸과 침실엔 옷가지가 널려있고, 식탁 위엔 인스턴트 용기가 산더미에, 그 외엔 먼지투성이. 여태껏 잘도 혼자 살았네요.”
“바빠서 청소를 못한 것뿐이에요. 계절 바뀌면 사람 불러서 청소할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평소에 스스로 할 생각은 없고요?”
“네, 없어요.”
앙겔라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디바가 내민 빈 컵을 받아들였다.
“샤워할 힘은 있어요? 시트가 축축해서 좀 갈아야겠는데.”
“힘없으면 언니가 씻겨주게요?”
“…어른 놀리는 거 아니에요.”
장난인 걸 아는데도 얼굴에 열이 조금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디바는 빙긋 웃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간 비틀거리는 디바를 부축해 샤워실에 데려다주고, 앙겔라는 침대 시트를 갈았다. 그리고는 주엌으로 향해 인덕션에 전원을 넣어 스프를 다시 데웠다.
잠시 후 잠옷으로 갈아입은 디바가 윗배를 쓰다듬으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속이 쓰린 모양이었다.
“하나 양, 식사 좀 할 수 있겠어요?”
“밖에 나가기 귀찮은데요…… 시켜먹는 건 별로 먹고 싶지 않고.”
“닭고기 스프 해놨으니 이거 먹어요.”
“어? 집에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요?”
“그래서 마트에서 사왔어요.”
디바가 쪼르르 식탁으로 다가오더니 그릇에 담긴 스프를 보고선 오, 하며 냉큼 자리에 앉았다.
“찾아보니 콩나물 해장국이라는 게 좋다고 하는데, 제가 아직 한국 음식에 서툴러서…….”
“아니에요, 나 이거 좋아해요.”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더니, 그 다음엔 허겁지겁 스프를 먹기 시작하는 디바를 앙겔라가 말렸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체하면 큰일 나요.”
“네, 네. 근데 언니 음식 되게 잘하네요? 어디서 배웠어요?”
“따로 배운 건 아니에요. 그냥 혼자 산 지 오래 되어서 손에 익었나 봐요.”
“와, 진짜 맛있다. 언니 나중에 식당 차려도 되겠어요.”
앙겔라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휴일 오전부터 달려와 디바를 보살핀 보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디바는 스프를 먹으며 묘한 눈빛으로 앙겔라를 보았다. 어쩐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길래 왜 그러나 싶어 하는데, 디바가 입을 열었다.
“누구랑 집 식탁에 앉아서 밥 먹는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래요?”
“네. 누가 차려주는 음식 먹는 것도 그렇고요.”
앙겔라는 디바의 말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느꼈다. 어딘지 쓸쓸하고 울적해 보이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디바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선 말없이 조용히 스프를 비워냈다.
앙겔라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디바는 양치질을 끝내고 거실로 나왔다. 눈에 잠이 묻어있기에 앙겔라는 그런 디바를 다시 침실로 이끌었다. 침대 위에 몸을 눕히며 디바가 물었다
“언니, 이제 뭐 할 거예요?”
“하나 양이 괜찮아진 것 같으니 슬슬 가보려고요.”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돼요? 나 혼자 있는 거 싫은데.”
“그럼 잠들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그러지 말고 같이 누워줘요. 네?”
디바가 칭얼거리듯 앙겔라의 소매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혼자는 외롭단 말이에요. 네? 얌전히 있을게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앙겔라를 바라보는데, 몇 년 만에 누가 해주는 식사를 했다던 디바의 말이 떠올랐다. 아프니까 어리광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이불 속으로 조심히 몸을 누이자, 디바가 앙겔라의 품속으로 답삭 안겨들었다. 그리고는 앙겔라의 셔츠 단추를 툭툭 풀어냈다. 앙겔라가 당황해서 그런 디바의 손을 붙잡았다.
“하나 양, 얌전히 있겠다면서요.”
“언니 심장소리 듣고 싶단 말이에요. 듣게 해주면 정말로 얌전히 있을게요.”
다시 한 번 처량한 눈동자를 하고서 그렇게 말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 앙겔라는 디바를 붙잡은 손아귀 힘을 느슨하게 했다. 결국 디바는 원하는 대로 앙겔라의 품을 파고들어 가슴께에 귀를 가져다 댔다. 간지러운 감각에 앙겔라가 몸을 살짝 비틀자 디바가 앙겔라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언니 심장이 좀 빨리 뛰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부끄러워서 그래요?”
“부탁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디바가 말을 할 때마다 숨결이 가슴에 닿아서 간질간질했다. 한동안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디바가 입을 열었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언니. 내가 다 사줄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병간호 해줬잖아요. 답례로 사줄테니까 뭐든 말해요.”
“…전 딱히 뭘 받고 싶어서 하나 양을 돌본 게 아니에요.”
“흐응. 언니는 좀 이상한 사람이네요.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닌데. 이런 때를 잘 이용해야죠.”
디바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앙겔라가 조용조용 대꾸했다.
“이용이라뇨. 하나 양의 그 사고방식이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하나 양이랑 사귀고… 있으니까 이런 일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도 있는 거죠.”
“사귀든 사귀지 않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give & take는 당연한 거잖아요.”
“그럼 나중에 제가 혹시라도 아프면 하나 양이 절 돌봐주면 되겠네요.”
“아, 나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대신 간병인 붙여줄게요.”
황금만능주의적인 발언에 앙겔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고민한 결과,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사귀는 사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른으로서도 이런 디바를 그대로 두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을 한다고 해서 고분고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바꾸어가야할지 좀 막막하기도 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정성을 쏟으면 태도가 바뀌지 않을까……. 자신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꿈속 디바와는 상이한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고 마음 먹으며 앙겔라는 천천히 디바의 등을 다독였다.
속이 복잡했다.
***
“언니 돈 많아요?”
“네? 무슨 말이에요?”
“아까 그 고양이 말이에요. 치료비가 120만원이나 나왔던데, 길고양이를 그 돈을 들여 치료할 필요가 있어요? 언니는 다친 동물들 보면 다 자기 돈 들여서 치료해줄 거예요?”
드라이브 도중 다친 고양이를 발견한 것은 앙겔라였다. 잠깐만 차를 세워달라는 말에 디바가 차를 세웠고, 앙겔라는 차에서 내려 다리를 절뚝이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 품에 안았다. 사람이 기르다 버린 것으로 보이는 품종묘를 안고 근처 병원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은 뒤 치료를 맡긴 것이었다. 디바는 그 일로 인해서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언니가 무슨 자선업자예요? 모든 생명을 다 구하겠다, 세계 평화가 꿈이다, 뭐 이런 거예요?”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내뱉은 날 선 질문에 앙겔라는 의아했다. 다친 동물을 치료하는 게 불쾌한 일이던가? 속으로 의문을 남겨둔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모든 생명을 다 구할 수는 없지만, 아까 그 고양이는 제 눈에 들어왔잖아요. 구할 수 있는 생명을 외면하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하나 양은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화가 난 게 아니라, 납득이 안 갈 뿐이에요.”
“그런 것 치고는 기분이 나빠보이는 걸요.”
“…아는 사람 중에 언니처럼 다친 동물들 보고 제 돈 들여서 고치는 사람이 있거든요. 지 새끼는 돌보지도 않는 주제에 말이에요.”
순간 앙겔라는 디바가 말하는 '아는 사람'이 혹시 디바의 어머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간호를 했던 날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했을 때 디바가 보였던 반응이 지금과 비슷했고, 똑같이 분노가 깃든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 전 지은 불쾌한 표정이 이해가 갔다. 상당히 복잡한 사정이 있겠구나 하고 짐작하는 앙겔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데요?”
“젊은 남자랑 바람나서 이혼한 뒤에 버림받고 자식 새끼한테 돈 뜯어가며 살더라고요.”
짐작대로 보통 사연이 아니었다.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하는 얼굴에는 냉소가 어려 있었다. 얼핏 보인 감정의 틈에서 깊고 깊은 분노를 느낀 앙겔라는 난감한 속내를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길이 험난할 것 같다는 생각에 터져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주제에 동물은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요. 그런 걸 보고 애니멀 호더라고 하죠? 언니도 그런 거예요? 사람보다 동물이 더 중요하고 그래요?”
디바의 불신 어린 눈빛을 받은 앙겔라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하나 양. 그저 제가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도운 것일 뿐이에요. 그리고 사람과 동물 중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더 중요하죠.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흐응.”
디바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앙겔라를 한차례 살피더니 물었다.
“그럼 언니는 내가 중요하단 거죠? 다친 고양이보다?”
“당연한 소리를 하네요, 하나 양. 당연히 하나 양이 더 소중하죠.”
사근사근한 앙겔라의 말을 듣고서야 부정적이었던 디바의 반응이 녹아들었다. 정말 아직 애구나 싶은 마음에 앙겔라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려다 마음을 바꿔먹었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던 디바가 병간호 이후로 조금씩 속내를 비추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로 했다. 종잡을 수 없이 구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상태였다.
기분이 나아진 디바가 휴대폰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그만 영화나 보러가요. 액션영화 고르길 잘했네요.”
“…그러게요.”
제게 팔을 뻗는 디바의 손을 잡아주며 앙겔라가 대답했다.
*
다행히도 영화는 재미있었다. 영화를 본 후의 디바는 기분이 훨씬 좋아져서 생각보다 더 영화가 좋았다며 빙긋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앙겔라도 따라 미소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굵은 빗방울이 한두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소나기가 내렸다. 아침에 나올 때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겼기에 앙겔라는 백에서 작은 접이식 우산을 꺼냈다. 디바 역시 백팩에서 3단 우산을 꺼내들었다.
“요새 비가 너무 제멋대로 내리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언니?”
“그래요. 꼭 스콜 같네요.”
“아, 하필 차를 멀리 대놔서. 빨리 가요.”
디바의 재촉에 앙겔라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곧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새 비를 맞아 쫄딱 젖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전화부스 안에서 처량한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언니 안 가요?”
“잠깐만요.”
앙겔라는 전화부스로 다가섰다. 작은 아이가 제게 다가오는 낯선 외국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앙겔라는 최근 틈틈이 배우고 있는 한국어를 떠올리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 안녕하세요?”
아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해왔다. 앙겔라는 빙긋 웃으며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고 말했다.
“이거 써요.”
“네?”
“비가 오고 있어요.”
비가 오고 있으니 우산 쓰고 가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짧은 문장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멀리서 보고 있던 디바가 앙겔라의 뒤로 다가와 우산을 씌어주며 말했다.
“꼬마야, 여기 있는 착한 언니가 너 우산 쓰고 가래. 잘 가.”
“아… 저기, 감사합니다.”
아이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앙겔라는 빙긋 미소를 돌려주었다. 비 때문에 바짝 다가선 디바가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언니는 애들 좋아해요?”
“네, 좋아하는 편이에요. 하나 양은요?”
“전 별로요. 시끄럽고, 버릇없고, 멋대로 굴고.”
앙겔라가 보기엔 디바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차마 말은 못해서 그저 웃기만 했다. 디바가 그런 앙겔라를 눈치채곤 입을 삐쭉였다.
“그 웃음은 뭐예요? 너도 애다, 뭐 그런 의미에요?”
“아니에요, 하나 양이 귀여워서 웃은 거예요.”
“그런 것 치곤 뭔가 기분이 구린데…….”
말로는 궁시렁거리면서 우산을 제 쪽으로 기울이는 디바를 보며 앙겔라는 우산 끝을 살짝 밀었다.
“우산 똑바로 들어요. 하나 양 어깨가 다 젖잖아요.”
“똑바로 들면 둘 다 젖거든요? 됐고, 주차장까지 얼른 걸어요. 그게 내가 덜 젖는 길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죠. 하, 내가 진짜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언니 정말 운 좋은 줄 알아요. 병간호 때문에 괜히 빚진 기분이야.”
투덜투덜 말을 잇는 디바의 목소리를 들으며 앙겔라는 빙그레 웃었다.
계속 이런 일만 일어나면 디바도 점점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 같은데. 별 일 없이 좋은 날만 계속되기를. 앙겔라는 그런 소망을 가슴에 안고 발길을 서둘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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