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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환상 3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3.06 18:10:35
조회 1123 추천 27 댓글 13
														

4. Hana



또 이러네.
하나는 잠결에 제 앞머리를 가만가만 치우는 손길을 느끼고는 깨어나지 않은 척 일부러 숨을 느리게 쉬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끼고서 가늘게 실눈을 떴다. 어깨를 덮는 금발이 조용히 침실을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언니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등을 돌려 누웠다.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면서, 하나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을 겪을 수 있었다. 레즈비언인 척 속이고서 하나에게서 원하는 걸 얻어가던 사람과, 진짜 레즈비언이어서 하나와 즐기며 원하는 걸 얻어가던 사람. 앙겔라는 그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레즈비언인 척 하는 사람은 티가 나게 되어 있다. 데이트 때는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침대 위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거부감이 드러나고는 했다. 그러나 앙겔라는 관계를 할 때마다 어색해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지언정, 하나를 꺼려하는 기색은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후자의 부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침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거니와 하나가 옷이나 시계, 목걸이 등을 사 줄 때마다 몹시도 부담스러워하며 거듭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왜 내 선물을 안 받으려 할까? 하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트 때마다 번번이 카드를 꺼내는 것도 이상했다. 물론 가진 것이라곤 넘치는 돈뿐인 하나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막무가내로 계산을 하곤 했지만, 앙겔라는 그럴 때마다 정말로 불편해하는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가끔은 몰래 하나의 가방에 데이트 때 썼던 금액의 돈을 넣어둔 적도 있었다. 선물을 하면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상대해 온 하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거기에다 같이 밤을 보낸 다음날,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매번 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앙겔라가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을 눈치챈 것은 술병이 낫고 나서 잠자리를 한 이튿날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제 외모가 너무나도 취향이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몇 번 그러다 말겠지, 하고서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갔다. 어차피, 아무리 제 얼굴이 취향이라고 한들 몇 번 보면 질리게 되는 것이 사람의 습성 아니던가.

그러나 두 달이 넘게 사귀어 오며 두 손과 두 발을 다 동원해도 셀 수 없을 만큼 같은 많은 날을 함께 보내는 동안, 하나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언젠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가늘게 실눈을 떠서 앙겔라의 두 눈을 마주보았을 때 그녀는 어쩐지 깊은 애정과 그리움을 담은 눈빛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어쩐지 가슴이 꾹 죄이는 듯한 감각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하나는 잠버릇에 뒤척이는 척 하며 몸을 돌렸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저런 눈빛으로 저를 본 사람은 여태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체 왜 저런 눈으로 저를 보는 것일까. 대체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언니야.
하나는 앙겔라의 체취가 묻은 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앙겔라는 하나가 여태 사귀어왔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부친 빼고는 다른 사람의 눈치라곤 본 적이 없던 하나가 자꾸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그랬고, 듣기 싫어하는 티를 매번 내도 굴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것도 그랬다. 성격도 취향도 다 다른데도 이토록 오래-어디까지나 하나의 기준에서- 사귀는 게 참 신기했다.

이번 '언니'와는 대체 어디까지 가게 될까?
머릿속 한켠에 떠오른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귀찮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하나에게 요즘 들어 신경쓰이는 존재가 생겼다. 아니, 정확히는 그간 별 생각이 없었던 존재가 어느새 눈치채고 보니 상당한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일상이던 하나에게 있어 이번 연인은 꽤나 까다로운 존재였다. 나이 차도 많이 나고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사귀기 시작했는데, 돌아오는 애정이 한없이 무거워서 처음에는 조금 싫었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앙겔라와 만난 지 한 달이 되기 조금 전에 하나는 헤어질 작정을 하고 시험 기간을 핑계로 잠수를 탄 적이 있었다. 앙겔라의 진지한 태도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 주말에 술내기를 하다 술병을 얻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병간호를 받은 이후 괜히 혼자 캥기는 바람에,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하고 사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럽에 드나드는 일을 줄이게 됐다.

질리면 헤어져야지, 헤어져야지 하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만남은 어영부영 두 달이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이 많고 차분한 성격의 애인과 사귀려니 전처럼 마음대로 놀아재낄 수가 없어서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였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으면 클럽에 가서 한바탕 춤을 추곤 했는데, 그조차도 주에 한 번 갈까 말까했다. 덕분에 클럽을 같이 드나들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소원해졌다.

그러다 보니 앙겔라와 보내는 시간만 늘어났다. 그야말로 바른생활 샌님 그 자체인 연인을 따라 책을 읽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느라-물론 끝은 언제나 침대 위에서였지만- 하나는 전에 없이 반 강제적으로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대학에 다니는 내내 입으로는 지루하다, 심심하다 말을 달고 다니지만 앙겔라의 앞에만 서면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정한 눈빛을 하고 저를 이것저것 챙겨주는 연인 앞에서 그런 소릴 할 정도로 생각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런 따스한 눈길을 받을 때면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불편하단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연인과 보내는 반 강제적인 바른생활이 싫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스트레스는 쌓이지만 그거야 침대 위에서 풀 수 있었고, 이것저것 해박한 연인 덕에 교양에서 나온 과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어 놀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매일 이런 나날이 계속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할 즈음에, 하나의 휴대폰에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또 무슨 스팸 문자려나, 하고 메시지를 확인하던 하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하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저를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금고 속에 넣어두었던 비상금의 대부분을 꺼내들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향한 곳은 은행이었다. 익숙한 계좌로 돈을 부친 후, 하나는 지긋지긋하단 생각에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습관처럼 통화버튼을 찾아 눌렀다. 평소 통화를 걸면 받지도 않던 전화는 이런 때에만 금방 신호를 받았다. 하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돈 보냈어요.”
- 고마워, 딸.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
- 이만 끊을게. 잘 지내고. 알았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가 끊겼다. 하나는 냉한 시선으로 점멸하는 액정을 바라보았다. '돈 독'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모친과의 대화가 하나의 기분을 한없이 가라앉게 만들었다.

“병신.”

하나는 제 스스로에게 욕지기를 내뱉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이 몹시도 당겼다.

***

모친의 외도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에어컨을 하도 많이 쐰 나머지 냉방병으로 오한을 얻은 하나는 그 날 조퇴를 했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 처음 보는 구두를 보고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집 안쪽에서 짐승이 내는 듯한 헐떡이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소리죽인 발걸음으로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열려진 안방 문 사이로 낯선 남자와 엉켜있는 모친을 목격했다. 하나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

어려서부터 냉한 집안에서 자랐던 하나는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여러 교과목의 성적 우수상은 물론이고 피아노 콩쿠르에서 상도 받았고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부친은 일로 바빴고 모친은 다친 동물들을 데려다 치료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았다. 하나에게 관심이 돌아오는 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계속 노력했다. 언젠가는 저를 돌아보고 혼자서도 잘 했다고 칭찬해줄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달리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하나에게 모친의 외도는 충격이었다.

그날부로 하나는 매일같이 밤거리를 헤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질이 나쁜 무리들과 어울리게 됐고, 그네들과 함께 술집에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처음 먹는 술은 쓰고 맛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마시자 그 다음부터는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술을 마시러 다니는 날이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하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담임교사만이 하나에게 이유를 물었고, 하나는 학원을 다닌다는 말 한마디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기쁘지 않은 자유를 누리며 하나는 술에 취해 밤거리를 헤맸다.

그렇게 네 달여를 방황하던 중에 아멜리를 만났다. 아멜리는 첫눈에 하나가 아직 학생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곤, 직원에게 말해서 하나를 내쫓게 했다. 대학생처럼 꾸미고서 한창 주목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던 하나가 씩씩대며 항의하자 아멜리가 담배를 길게 뿜으며 말했다.

“발정 난 수컷들 사이에서 그렇게 관심이 받고 싶었니, 아가야?”

그리고는 아가라는 말에 발끈해서 방방 뛰어대는 하나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누르며 나른하게 웃었다.

“성인이 되거든 찾아오렴. 술 한 잔 사줄게.”

그때의 푸르스름한 조명에 비치던 아멜리의 모습은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웠고, 하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밤거리를 배회한 이후, 다들 하나를 어떻게 해보려고만 했지 이런 식으로 관심을 준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부터 하나는 아멜리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멜리는 성인이 되면 찾아오라는 말만 할 뿐 하나를 전혀 상대해주지 않았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공부나 하라는 말을 듣고 울컥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하나는 근 반 년만의 방황을 접고 학교로 돌아왔다.

하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때때로 아멜리를 찾아갔다. 아멜리는 그런 하나에게 라임주스 한 잔을 사주곤 했다. 애 취급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하나는 매번 주스 잔을 말끔히 비워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능을 보고 원서를 내고, 다음해 1월 1일이 되자마자 아멜리에게 달려가 술을 사달라고 했다. 아멜리는 피식 웃고서 하나에게 라임 모히토를 한 잔 사줬고, 하나는 칵테일을 원샷한 직후에 아멜리에게 고백을 했다. 아멜리는 그런 하나를 어린애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애 취급하는 아멜리에 대한 반항으로, 하나는 제게 대시해오는 사람들과 무턱대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헤어질 때마다 아멜리에게 위로주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멜리는 그 때마다 하나에게 모히토를 사주었다. 하나는 그런 아멜리가 좋았지만, 그녀는 결코 하나의 고백을 받아들여주는 법이 없었다.

제 돈이나 외모만을 보고 가볍게 접근하는 사람들만 만났으니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봤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식으로 아무하고나 잠깐 잠깐씩 만나고 헤어지던 날들을 반복하는 도중에 앙겔라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

“난 동물이 싫어!”

하나는 술에 취해 꼬이는 혀로 똑똑히 발음하려 애쓰며 말했다.

“먹고 싸기만 하는 주제에 엄마의 사랑을 잔뜩 받았거든. 나랑은 다르게.”
“흐음.”
“존나 할 줄 아는 게 왈, 왈왈! 짖는 것밖에 없는 주제에! 야옹, 야옹하고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알아? 그런데도 맨날 오냐오냐, 우쭈쭈해주고. 시발, 나도 그딴 개소리 할 줄 아는데. 왈! 왈왈! 멍멍!”

아멜리가 담배를 피우며 픽 웃었다.

“잘 하네.”
“그치? 내가 원래 뭐든 잘 해. 근데 엄마도 아빠도 이상하게 나를 봐주질 않더라고. 왜일까?”
“글쎄.”
“존나 궁금해, 시발. 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진짜 너무해.”

하나는 중얼거리면서 테이블에 고개를 쿵쿵거리며 박았다. 아멜리가 혀를 쯧쯧 차며 그런 하나의 이마 밑에 손수건을 넣어주었다. 하나가 아멜리를 보며 말했다.

“언니도 진짜 너무한 거 알아? 성인 되면 술 사준다며. 술 사줬으니까 어른 취급도 해줘야지! 나 성인 된 지가 언젠데 맨날 애 취급만 해?”
“애처럼 행동하면서 왜 어른 취급을 바라니.”
“뭐가 애 같은 행동인데? 술 마시면 성인 아닌가? 성인이니까 술집에 와 있는 거지.”

아멜리는 대답하는 대신 뜻 모를 웃음만 지었다. 하나가 고백했을 때도 아멜리는 저런 웃음을 지으며 거절의 답을 했었더랬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하나는 울컥해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발, 어릴 땐 사랑한단 말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주제에 돈 보낼 때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게 얼마나 화나고 비참한 일인 줄 알아?”
“내가 어찌 알겠니.”
“언니야 겪어본 적 없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근데 더 화나는 건,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거야. 진짜 너무 짜증나. 애새끼도 아니고.”

아멜리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하나는 보라색 조명에 비친 아멜리를 몽롱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4년 전 그때와 변함없이 아름답게 보이는 아멜리를 보고 있자니 안 그래도 엉망인 속이 더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모친 일로 화가 나서 혼자 술을 퍼마시고 있을 때 아멜리가 바에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합석을 하게 됐다. 이미 여러 번 같이 술을 마시며 속내를 줄줄 털어놓은 적이 있는지라 아멜리는 하나의 집안 사정에 대해 대강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아멜리가 아니었으면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하나는 울분을 토해냈다. 아멜리는 특유의 그 건조한 태도를 유지하며 듣는 둥 마는 둥 하나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있었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주제에 힘이 들 때면 조용히 다가와 곁에 있어주는 아멜리에 대한 하나의 감정은 한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잘도 만나면서 왜 저와는 만나주지 않는 건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 속에 남은 감정을 미련이라 생각하며 추스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애인'이라고 뜬 액정화면을 보며 하나가 전화를 받았다.

“어- 언니네. 언니! 웬 일이에요.”
- 퇴근했다는 문자에 연락이 없어서요. 하나 양,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혀가 꼬였네요. 또 술병나면 어떻게 해요.
“잔소리하지 말아요. 나 오늘 진짜 술 마실 일 있어서 마신 거니까. 완전 기분 더럽고 나빠서 어쩔 수 없이 마신 거라고요.”
- 안 좋은 일 있던 거예요?”
“네에-. 진짜 엄청 안 좋은 일이었어요. 아 진짜 너무 힘들다. 언니가 와서 나 좀 데려가면 안 돼요? 움직일 힘도 없는데.”
- 그래요. 거기가 어디예요?

하나는 바 위치를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 술병이 나서 병간호를 받은 이후, 하나는 어쩐지 앙겔라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병간호를 해준 답례로 선물을 사주려 할 때마다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계속 빚진 마음을 안게 된 것이다.

하나를 거쳐 갔던 많은 애인들처럼, 선물해줄 때 기뻐하며 받으면 받은 사람도 좋고, 선물한 하나의 마음도 좋을 텐데 앙겔라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아멜리조차 하나의 선물은 별 말 없이 받아주는데 말이다. 그런 점이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주는 대로 선물을 받으면 하나의 속이 편해질 텐데, 그렇지 않으니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앙겔라의 그런 성격이 어딘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웬 일이니, 허세쟁이인 네가 투정을 다 부리고.”
“누구더러 허세쟁이라는 거야? 참나.”
“지금 사귀는 사람이야?”
“응.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이번 언니한테는 말이 좀 편하게 나오네.”
“흐음.”
“이 언니 되게 이상한 언니야. 데이트 할 때마다 카드 꺼낸다? 매번 말리고서 내 카드로 긁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아? 나 돈 많다고 몇 번을 설명해도 못 알아듣나 보더라고. 박사학위까지 땄으니까 머리도 좋을 텐데 왜 그러나 몰라.”
“연상이라며? 자존심 세우는 모양이지.”
“돈 앞에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야? 돈만 있으면 사랑도 살 수 있는데.”

테이블 위에 엎드려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주위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하나는 제 어깨를 조심스레 흔드는 손길에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바에 도착했는지, 앙겔라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앙겔라는 하나를 볼 때면 꼭 저런, 염려 섞인 눈빛을 보내고는 했다. 하나는 그 때마다 속이 엉키는 느낌이었다. 부모에게서도 받은 적 없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참 낯설게만 느껴졌다. 정작 저런 눈으로 저를 쳐다봐주길 바랐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하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흔들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 언니 왔어요?”
“속은 괜찮아요? 메스껍진 않고요?”
“네, 괜찮아요. 그냥 졸려요.”
“팔 잡아요. 부축해줄게요.”

하나는 앙겔라의 부축을 받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옆자리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아멜리를 발견했다. 이미 자리를 떴을 줄 알았는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외의 모습에 하나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언니가 웬 일이야? 평소 땐 나 버리고 잘만 가더니.”
“다음부터는 반드시 그렇게 할게.”
“아, 농담이지. 고마워. 내가 나중에 술 살게. 아, 술은 언니가 사주니까 다른 거 사줘야겠네. 갖고 싶은 거 생각해 놔. 그럼 나 간다.”

대충 손을 흔들며 앙겔라에게 몸을 기대자, 앙겔라가 어색한 표정으로 아멜리에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따뜻하게 전해져오는 체온에 기대어 비틀비틀 걷는 하나에게 앙겔라가 물었다.

“저 분은 누구예요?”
“응? 아멜리 언니 말이에요? 내 술친구. 친한 언니예요.”
“아멜리…….”

앙겔라가 작게 이름을 되뇌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려하는 표정을 보고 하나는 괜히 속이 뜨끔해서 아멜리에 대해 설명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를 할까 걱정이 된 것이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좋아해왔던 사람이라는 소리는 아무리 취해있는 하나라도 해선 안 될 말이라는 걸 알았다. 하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오늘은 우연히 만난 거예요. 언니, 택시 잡아놓은 거예요?”
“아뇨, 차 몰고 왔어요. 이쪽이에요. 발 밑 조심해요.”

앙겔라는 하나를 부축한 채로 천천히 도로가에 세워놓은 차로 이끌었다. 택시를 타고 온 줄 알았던 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앙겔라가 열어준 검은 벤츠의 보조석에 앉았다. 차에 타자 앙겔라가 평소에 쓰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언니, 차 있었어요?”
“한국에 있는 동안 리스한 거예요. 아무래도 차가 없이는 불편할 것 같아서.”
“아, 그렇구나.”
“숙취해소제 마실래요? 사올까요?”
“아뇨… 그거 맛없어서 먹기 싫어요. 술에 취해 있고 싶은 기분이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어요?”

하나는 잠시 망설였다. 남에게 말하기에는 수치스러운 집안 사정이었다. 방황하던 시절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어른처럼 보였던 아멜리에게는 종종 털어놓은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던 이야기. 늦은 시간에 저를 데리러 와 준 앙겔라가 고맙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제 치부를 드러내 보이기에는 망설여졌다. 딱 보기에도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을 것 같은 앙겔라가 제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은 탓이 컸다.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요.”
“그래요. 가는 동안 눈 좀 붙이고 있어요.”

앙겔라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고 하나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더니 좌석을 뒤로 눕혀 기대기 편하게 해주었다. 저를 배려하는 다정한 태도에 하나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사귀었던 그 어떤 애인도 술에 취한 하나를 데리러 온 적도, 속상한 일이 있었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다들 하나가 기분이 안 좋으면 기분전환 하러 가자며 술집으로 이끌곤 했다. 딱 그 정도의 인연들뿐이었고, 하나 역시 그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멜리와 사귀지 못할 바에야 그냥 아무하고나 만나서 즐기자는 마음으로 만나는 사이에 그런 배려 따위는 기대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앙겔라는 하나가 만나왔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처음에는 제 잘난 외모에 홀린 외국인 A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녀가 보여주는 애정의 깊이는 그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하나는 그 점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3개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앙겔라는 일관되게 하나에게 애정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런 대가 없이. 주고받는 인간관계가 익숙한 하나로서는 이 관계가 내심 불편했다.

예전의 저 같으면 이렇게 마음 쓰고 눈치를 보느니 진작 성질내고서 헤어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앙겔라에게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부채감 때문일까.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양심이 있었다고……. 하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감았다.

***

하나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서 학부모 참관일이 열렸다. 하나는 바쁜 부모님을 하루 종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집에서 귀가할 부모님을 기다렸다. 몇 번이고 꾸벅꾸벅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다, 자정이 거의 다 된 시간이 되어서야 귀가한 모친을 맞이하러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꾸벅 배꼽인사를 하고 두 손으로 곱게 접은 참관일 통지서를 내밀자, 모친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에 얼른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잠시 후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모친이 말했다.

“이거 꼭 가야 하는 거니?”
“그게… 선생님이… 꼭 부모님 전해드리라고…….”

꼭 전해드리라고 했지, 반드시 부모님이 참석해하셔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생님이 말했지만 하나는 일부러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매일같이 자식을 마중하러 나오는 어머니를 둔 친구들이 부러웠던 참이다. 참관일을 핑계 삼아 저도 예쁜 어머니가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친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큰 한숨소리와 함께 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알았다.”
“저기, 참관일은 다음 주 수요일이래요.”
“알았다니까.”

어쩐지 못 미더운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수락이 떨어지자 하나는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다시 꾸벅 배꼽인사를 한 후에 잠을 자러 갔다. 일주일 후에 있을 참관일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제 방 책상 위의 달력에 하루하루 X표를 쳐가며 참관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하나는 아침 외출을 준비하는 모친 옆에서 얼쩡대다가 눈치를 보며 참관일이 있는 날이라는 말을 가까스로 건넸다. 모친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며 그래그래, 하고 대답했다. 대충 대답하는 모양이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외출 준비를 하는 모친을 믿고 하나는 집을 나섰다.

학교에 바래다준 기사 아저씨에게, 오늘은 엄마랑 같이 집에 갈 테니 기다리지 말아달라고 말하고서 하나는 교실로 뛰어갔다. 평소보다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담임 선생님이 그런 하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나는 웃음을 입가에 조롱조롱 매단 채로 수업을 들었다.

3교시가 시작될 즈음에, 교실 뒷문이 열리더니 한껏 차려입은 부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들어오는 어른들의 얼굴을 확인했고, 제 부모를 확인한 애는 신이 나서 손을 흔들어댔다. 하나 역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뒤를 돌아보며 모친을 찾았다.

그러나 5분이 가고, 10분이 가고, 30분이 가고 3교시가 끝나가는 동안에도 모친의 얼굴을 교실에서 볼 수는 없었다. 언제나 기운차게 손을 들어 발표하던 하나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교실 뒤에 부모를 둔 아이들은 자신감에 넘쳐 손을 들어 발표를 해대고 있었다. 하나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3교시가 끝나고 4교시마저 끝나, 수업이 모두 마칠 때까지도 모친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 부모에게 달려가 안기는 아이들 속에서 하나는 입을 꾹 다물고 책가방을 챙겼다. 주위에는 다들 어른들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친구들뿐이었다. 눈물이 절로 핑 돌아서 얼른 고개를 떨구고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약속했으면서! 일주일 전부터 매일 꼬박꼬박 아침마다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오지 않은 모친에 대한 야속함과 서러움이 몰려들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혼자 있는 것도 서러운데 울기까지 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에게로 쏟아졌다. 하나는 소매로 대충 얼굴을 쓱 닦고 교사 입구로 향했다.

재수 없게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둥그런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하나는 실망으로 얼룩진 마음으로 혹시나 해서 우산 아래로 보이는 어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나 그중 아는 얼굴은 한사람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마중오지 말라고 했으니 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참관일에 오겠다고 약속했었던, 그러나 오지 않은 모친 외에 있을 리가 없었다.

헛된 희망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입구 근처에 서서 모친을 기다렸다. 하나를 알아본 친구들이 같이 우산을 쓰자고 했지만, 그 옆에 있는 친구 부모님이 부럽고 혼자 있는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고 둘러댔다. 북적이던 교사 입구는 금세 한가해졌다. 그럼에도 하나는 계속해서 모친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에도 비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기다리다 지친 마음에 쏟아지는 비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젖어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질척질척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는 내내, 하나는 땅만 보고 걸었다.

20여분을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하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현관에 모친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바쁜 일이 생긴 것일 거라고, 그래서 참관일에 못 온 거라고 필사적으로 되뇌었던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하나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친이 하나가 우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양말까지 다 젖어 찰박이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모친이 의자에 앉아 침대 위에 놓인 고양이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고양이는 복부에 붕대를 빙빙 감고 있었다. 아마도 다친 길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제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친의 애정 어린 시선에 하나의 눈꼬리에서 기어코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하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엄마…….”
“어, 왔니?”

모친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대꾸했다. 하나는 작은 가슴 속에 맴도는 여러 말들 중에서 모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오늘… 학부모 참관일이었는데…….”

서러움을 담아 그렇게 중얼거리자, 모친은 침대 위의 고양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로 여상스레 대답했다.

“아, 그거? 알아보니 안 가도 된다더라. 그리고 넌 애가 어쩜 그렇게 정이 없니? 고양이가 다친 걸 봤으면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물어봐야지! 하여튼 애가 제 아비 닮아서 삭막하기 그지없다니깐. 그리고 꼴이 그게 뭐니? 바닥에 물 떨어지잖아! 어서 가서 씻기나 해.”

하나는 제게는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은 모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선 샤워실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물소리가 요란한 샤워실 가운데서 웅크려 앉자 절로 끅, 끅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숨죽인 울음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나 양, 하나 양. 눈 좀 떠봐요”

어깨를 잡고 흔드는 느낌에 하나는 끙,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부연 시야 한가운데에 금발의 연상 애인이 저를 지척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기증이 몰려들어 순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기분이다. 무력한 느낌에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앙겔라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하나의 눈가를 닦아냈다. 그제야 하나는 제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요,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예요?”

다정스레 제 볼을 손등으로 쓸어주는 따스한 체온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안 그래도 모친 때문에 속이 상해있었는데, 어릴 적 겪었던 서러운 기억이 꿈으로 되살아나는 바람에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하나는 추하다는 생각에 손으로 쓱 눈물을 훔쳐내고선 보조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몸을 앙겔라가 붙잡아주었다.

“괜찮겠어요? 힘들면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가도 돼요.”
“아뇨, 그냥… 그냥, 집에 갈래요.”
“그러면 그렇게 해요.”

앙겔라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하나의 속은 계속 헝클어졌다. 웬 일로 몇 개월 동안 연락이 없나 했더니 간만에 전화를 해와서는 꽤나 큰 액수의 금액을 요구하는 모친의 존재가 제 속을 잡아 쥐어뜯는 것 같았다. 덧없는 사랑한다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지갑을 자처하는 스스로가 비참하기도 하고 비웃음이 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 대충 씻고 양치를 하는 동안, 앙겔라는 어지럽혀진 방을 치워주었다. 제 개인적인 공간에 사람을 들이는 것이 싫어 가사도우미조차 부르지 않는 하나였지만, 병간호를 받은 이래로 어쩐지 앙겔라만은 별 거부감 없이 집안에 들이게 됐다. 이럴 땐 보면 편한 것 같고, 어쩔 때는 불편한 것도 같고.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제 마음에서 눈을 돌린 하나가 앙겔라를 보며 졸랐다.

“언니, 나 잠들 때까지 안아주면 안 돼요? 혼자 있기 싫은데……”
“그래요, 그럴게요.”

울어서 눈가가 발간 하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보던 앙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쓰러움 밑바닥에 깔린 애정을 눈치 채고 하나는 더 속이 복잡해졌다. 침대에 마주보고 누워 저를 안아주는 연인에게 자꾸 받기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친에게서도 받아 본 적 없는 포옹을 이제는 익숙해진 듯 쉽게 해주는 연인의 품에서 한참을 꼼지락 대던 하나가 툭하니 입을 열었다.

“아까 차 안에서 어릴 때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이었어요?”
“학부모 참관일 때 오기로 했던 엄마가 안 오는 꿈이요. 하루 종일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결국 안 왔죠. 그런데 하필 그 날 비가 와가지고……. 우산도 없이 쫄딱 비에 젖어서 집에 갔는데 웬 길고양이를 데려다가 침대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 보살피고 있더라고요. 나한테는 한 번도 그렇게 따뜻한 눈길을 줘 본 적 없으면서…….”
“저런… 많이 서운했겠어요.”
“서운하다 뿐이겠어요? 마음 같아선 그깟 고양이, 길거리에 내다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간 완전 미움 받을 걸 아니까 그러지도 못하고 진짜 너무너무 싫었죠. 엄마한테 미움 받는 게 뭐라고. 애초에 사랑받은 적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앙겔라가 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다정한 온기 속에서 하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커서도 여전히 엄마한테 미움 받는 게 꺼려진다는 거예요. 아무런 뜻도 없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들으려고 애를 쓰게 되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면 참 돈이란 게 대단해요. 안 그래요? 돈이면 평생 듣지도 못했던 사랑한단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니…….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네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세상엔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게 많이 있어요, 하나 양.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흔히들 건강, 가족, 친구, 사랑… 뭐 이런 것들은 돈으로 못 산다고 하는데 그거 다 뻥이에요. 돈이 있어야 건강을 유지하고, 돈이 있어야 가족이 있어주고, 뭐 친구도 마찬가지고요. 사랑은 말할 것도 없죠.”
“그럼 저도 돈 때문에 하나 양 옆에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아니지만.”

제 등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손길에 하나가 작게 부정했다.
지금껏 하나가 겪어왔던 세계는 give & take의 법칙이 지켜져 왔었다. 침대 위에서 상대를 괴롭히며 욕구를 채우고 온기를 느끼면서 정신적인 욕구를 채우는 대신, 하나는 카드를 긁어 상대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하나가 취하는 태도는 똑같았다. 앙겔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연상의 연인은 하나가 돈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데도, 물질적인 것들을 매번 거절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아무런 급부 없이 제게 애정을 보냈다. 처음에는 침대 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인가 싶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유 없는 애정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가도, 막상 이렇게 와 닿을 때면 그런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하나는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앙겔라와 눈을 마주쳤다. 미등에 비친 연인의 얼굴은 서른일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푸른 눈동자 속에는 다정함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 눈길을 받은 하나는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둡고 추운 곳에서 비참하게 서 있다가 따뜻하게 덮혀진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은 불안감도 조금 생겼다. 부모에게서도, 그리고 그토록 사랑을 갈구했던 아멜리에게서도 받아본 적 없는 다정함을 한참이고 곱씹던 하나가 물었다.

“언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데 이유가 필요하나요?”

왜 나를 좋아하는데요? 그 물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묻기가 민망하기도 하고,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시 앙겔라의 품에 파고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돈과는 상관없이 날 대하는 건 언니가 두 번째예요.”
“그런가요? 첫 번째는 누구예요?”
“아멜…리 언니요.”

무심코 대답하다가 저 혼자 찔려서 잠깐 말이 끊겼지만, 하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앙겔라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분이랑 많이 친한가 봐요.”
“많이랄 것까지야… 그냥, 오래된 사이죠.”
“……그래요?”
“네……. 언니, 나 졸려요. 오늘 자고 갈 거죠?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시간도 늦었으니 그냥 자고 가요. 네?”
“…그렇게 할게요. 이제 자요, 하나 양.”

혹시라도 아멜리에 대해 물어볼까봐 얼버무리듯 칭얼대자 앙겔라가 하나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기대 하나는 눈을 감았다. 아멜리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누구를 사귀든 간에 아멜리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한순간 심장이 욱신거릴 정도로 죄책감을 느꼈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온기에 녹아들며 하나는 생각했다. 이번 언니는 정말로 다른 것 같다고. 속에 있던 말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다거나,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거나……. 처음과는 다르게,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마음정리를 해야 할 텐데… 하나는 가물거리는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다 천천히 잠에 빠져 들었다.

“아멜리…….”

귓가에 얼핏,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끝.







덧)
뭔가 하나가 너무 착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서 아쉽다.
원래 진짜 나쁜 ㅆㅑㅇ뇬이었는데……
그 설정으로 가면 뒷수습이 안 되어서 머리 싸매다가 포기함.

반년 간 묵혀뒀던 조각글들을 모아서 이으려니까 내용이 부드럽게 이어지지가 않네. 좌절스럽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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