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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집 5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3.30 17:46:05
조회 2020 추천 58 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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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님, 오늘도 늦게 들어오세요?]

하나는 완성된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입 밖으로 내어 물을 수는 없어 아침에도 입안에서 맴돌다 삼킨 말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박사인데 보채는 것처럼 들릴까 봐 걱정되었다. 글을 지우고 다시 입력했다.

[박사님, 저녁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박사님, 이번에 새로 개봉한 영화가 재밌다던데 혹시 들어보셨어요?]
[박사님, 오늘 날이 좋던데 이따 저녁에 산책하러 가실래요?]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사의 성격 상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휴대폰을 보고 답장을 주겠지만, 그래도 일하는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꺼려졌다. 멍하니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입력한 글을 보고 하나는 흠칫했다.

[박사님, 보고 싶어요]

깜짝 놀란 와중에도, 잘못 눌러서 보내기 버튼이라도 누르면 큰일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들어 신중하게 X 버튼을 터치했다.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요 며칠 하나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문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곧 까맣게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허탈감에 사로잡혀 앉아있는데, 반 친구가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으며 말을 걸었다.

“야, 송하나. 남친 연락 기다리냐?”
“…남친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아직도 고백 못 했어? 와, 징하다 진짜. 내가 너였으면 진작 고백하고도 남았다니까?”

수학여행에서 같은 방을 쓴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러 차례 해명했으나,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하나는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도 못 하고 바라만 보는 순정파'가 되어 있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상대가 남학생이 아닌, 무려 18살이나 많은 여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사실이었으니까.

“야, 그렇게 하루 종일 핸드폰만 쳐다보지 말고 네가 연락해봐. 그쪽도 너처럼 연락 기다리고 있을 줄 어떻게 아냐?”

친구가 시무룩한 하나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직 3시 50분, 박사가 퇴근하려면 앞으로도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게다가 여름 휴가를 다녀온 이후 박사의 귀가 시간이 부쩍 늦어져서, 어떤 날은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퇴근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어? 송하나 왜 이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얘 어디 아파?”

다른 친구가 의아한 듯 다가오자,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말을 받았다.

“응, 아픈 것 같아.”
“조퇴하지 그럼.”
“상사병이라 안 시켜줄 듯.”
“상사병? 아, 그 짝사랑남? 아직도 고백 못 했어?”

도돌이표처럼 시작되려는 고백 운운에 하나는 인상을 팍 썼다. 말이 쉽지, 고백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 줄 아나. 아이들의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며 하나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여름 휴가 마지막 날, 하나는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박사가 너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하듯 볼 뽀뽀를 할 수도 있다고 말은 했지만, 자꾸만 그 일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한숨, 한숨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온갖 상상에 시달렸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심란함을 더했다. 그저 제가 귀여운 동생처럼 보여서 볼 뽀뽀를 했다는 생각과 아주 낮은 가능성이지만, 박사가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한참을 갈팡질팡했다. 머리는 전자라고, 가슴은 후자라고 치열하게 다퉜는데 결국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아침이 되었다.

박사의 휴대폰 알람 소리를 듣고 그제야 일어난 척하며 몸을 일으키던 하나는, 박사의 얼굴을 보고 서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사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하나는 그 표정을 보고서야 밤새 끝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던, 박사가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게를 둘 수 있었다. 그저 어린 동생의 볼에 한 뽀뽀 때문에 밤을 지새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사 역시 예외가 아닐 터였다.

그러나 박사는 다음 순간, 표정을 관리하고서는 평소의 박사로 돌아왔다. 다정스레 잘 잤냐고 인사를 건네기에 하나도 웃으며 잘 잤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하나는 속으로 헬륨 가스를 집어넣은 풍선이 들뜨는 것처럼 마음이 팔랑거리는 것을 참느라 큰일이었다.

태풍으로 인한 비 때문에 오전 내내 호텔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박사는 태연스레 행동하려 했지만 전날과 비교하면 태도가 묘하게 달랐다. 하나와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했고, 때때로 얼굴이 약간씩 붉어졌으며,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하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당장이라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고백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수순이어야만 했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부터, 하나는 박사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박사에게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표정관리도 하고 웃는 것도 자제하고 했으나 박사가 제게 마음이 있는 것 같자 더이상 마음을 억누를 필요가 없어졌다. 전보다 더 자주, 밝게 웃었고 박사를 향한 마음을 담아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러나 하나의 간접적인 애정 공세는 휴가 이후 부쩍 바빠진 박사 때문에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는 연이은 야근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동안에는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연일 야근을 하는 일이 없었다. 아무래도 박사가 저를 피하는 듯했다.

하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박사를 살폈다. 아침저녁으로 잠깐잠깐씩 마주할 때의 박사는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러웠고, 하나를 보는 눈동자 역시 따스한 온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박사의 마음이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를 왜 피하는 걸까. 짧게 고민한 끝에 결론이 나왔다. 박사가 마음을 접으려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하나는 속이 몹시 상했다. 박사의 그런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를 맡고 있는 보호자 입장이나, 18살이란 나이 차나, 같은 성별이나, 뭐 그런 것들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갔다. 하나 역시 그 문제로 몇 개월 동안 마음고생을 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에게 있어서는 결국 부가적인 문제였다.

박사는 하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아무런 속셈 없이 끝없는 호의를 베풀어준 따뜻한 사람이었다. 박사와 함께 있으면 하나는 안정감을 느꼈고,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해지며 마음 끝자락까지 따뜻하게 덥혀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조금의 가능성만 있다면 꼭, 어떻게 해서든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욕심의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제게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하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최대한 빨리, 박사와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박사의 지친 얼굴을 보면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번 주말에는 아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에 안고서 하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

학교를 마친 후, 하나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놀이터에 들렀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봤자 혼자일 게 뻔하니 가을볕이나 쬐고 들어가자는 마음에서였다.

가방에서 얇은 수필 책을 꺼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었다. 도서관 사서를 맡고 있는 아이에게 아무거나 추천해달라고 해서 받아온 책이었는데, 하필 내용이 짝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냥 덮을까 하다가 이왕 빌렸으니 읽기로 하고 책을 펼쳤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를 배경으로 한참 독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야.”

들은 적 있는 목소리에 하나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눈에 익은 근처 여고 교복이 보였다. 그 끝에 있는 얼굴 역시 눈에 익었다. 하나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뭐.”
“여기서 뭐 하냐?”
“뭔 상관인데. 꺼져.”

새엄마의 딸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여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으나,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척하고 지나갔었다. 그러던 것이 남자의 집을 나온 지 9개월 만에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이다. 같은 집에 살 때도 서로를 공기 취급하며 말 한마디 섞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하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잘 사는 것 같더라? 그 여자네 집에서.”

박사를 무례하게 지칭하는 말에 하나의 오른 눈썹이 들썩였다. 어조를 보아 시비 거는 게 목적인 듯했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박사를 언급했다는 점이 신경 쓰여서 하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남 이사 잘 살든 말든 뭔 상관인데?”
“근데 그 집에서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길래. 그냥, 다음 갈 곳은 정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말 걸어봤지.”
“…무슨 개소리야?”

박사는 하나가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 같이 살아도 된다고 말을 했었다.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여태 단 한 번도 말을 허투루 한 적 없는 박사였기에 하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내려놓고 지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음 갈 곳이라니. 짜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자, 새엄마 딸이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여자 요즘 맨날 데려다주는 남자 있던데, 조만간에 결혼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럼 너 갈 곳 없어지잖아. 한때 같은 지붕 아래에 살았던 사이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남자라고?”
“어. 벤츠 타고 다니는 남자던데? 꼬박꼬박 아파트 현관까지 데려다주더라고.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더라.”

안 그래도 밉상인데 말 하나하나가 신경을 거슬리는 것들뿐이었다. 이 성질머리 나쁜 계집애는 하나의 속을 들쑤시려고 일부러 말을 건 것이 분명했다. 하나는 짜증으로 열이 나는 와중에도 감정과 정보를 분리하려 애썼다. 남자와 차. 남자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차에 대해서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요 근래 박사가 차 키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불길한 기운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무시하며 하나가 대꾸했다.

“남 일에 관심 되게 많네. 네가 신경 안 써도 될 일이니까, 그만 꺼져.”
“남 일이 아니지. 혹시라도 니가 '우리 집'에 다시 들어오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럼 내 공부방 뺏기는 꼴이잖아.”

'우리 집'에 강세를 두는 점이 정말로 얄미웠다. 하나는 이를 뿌득 갈고 말했다.

“그럴 일 없으니까 관심 꺼. 그리고 뭐? 공부방? 네 성적에 공부방이라니, 가당키나 해? 반에서 10등은 하냐? 이번 10월 모의고사는 잘 봤고?”

같이 살 적에 하나가 전교 1등을 했던 것을 알고 있는 새엄마 딸은 표정을 일그러뜨렸으나, 다음 순간 얼굴을 펴고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네가 성적 운운할 때야? 너 대학은 어쩌니? '아버지'가 너 대학 등록금은 꿈도 꾸지 말라던데.”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남의 인생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길이나 걱정해.”
“아니이~, 난 그냥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조만간에 집도 돈도 없이 길바닥에 나앉을 텐데 날도 추워질 거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으로 올 생각은 하지 마라? 아버지가 문도 열어주지 말랬거든.”
“그딴 지랄 맞은 집구석엔 죽어도 안 들어가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반응하면 지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화가 훅 뻗치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상대는 하나의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입가를 비틀어 조소를 지었다.

“찔리니까 화내는 것 좀 봐. 성질머리하고는. 그러니까 네가 그 모양이지.”

하나는 순간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상대가 마지막에 덧붙인 한마디는 남자가 하나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절로 올라가려는 손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눌러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 이 밉살맞은 계집애가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남자 혹은 새엄마를 끌어들여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인 것 같았다.
하나는 깊게 호흡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낮게 으르렁댔다.

“…아까부터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는데, 수준 낮은 도발 따윈 상대 안 할 거니까 이제 그만 꺼져.”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빛에 새엄마의 딸이 흠칫했다. 살벌한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가는데, 놀이터 한켠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던 애 엄마들이 이쪽을 살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도 그 눈길들을 알아챘는지 재미없단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오랜만에 재미있는 꼴 보나 했더니, 아쉽게. 너 없으니까 좀 심심하더라고. 뭐, 조만간에 재밌는 꼴 나겠지만. 어쨌든 나 간다! 안녕!”

마지막 인사는 흡사 친구에게 하는 듯 친근했다. 하나는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절로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며 거친 손길로 책과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정말 기분이 거지 같았다.

*

9개월 만에 마주한 새엄마의 딸은 하나의 기분을 완벽하게 망쳐놓았다. 하나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로 집에 돌아와 헤드폰을 낀 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음량을 키우고 음악을 들었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하나의 심장도 격하게 뛰었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풀 겸 시끄러운 음악을 듣다가 잔잔한 곡으로 바꿔 틀고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꾸만 박사를 바래다주었다는 '남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박사가 매일 늦는 이유가 혹시 그 남자를 만나기 때문이었을까. 저를 향한 마음을 접기 위해서 남자를 만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러지 말라고, 저도 박사를 좋아하니 솔직해지라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하나는 곧 제가 놓인 입장이 평범치 않음을 깨닫고 고개를 수그렸다. 저는 어디까지나 박사의 호의에 기대어 얹혀사는 처지였고, 그렇기에 떳떳하게 마음을 밝힐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박사는 적령기의 여성이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저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아마도 사회적 지위도 있고 재력도 있을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이익일 터. 게다가 사회적 지위가 있는 박사가 한참이나 어린, 심지어는 같은 성별인 하나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간절히 바라는 일이더라도,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하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집에서 살았던 것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였으므로. 오랜만에 지독한 무력감이 하나를 짓눌렀다.

참고 버티는 것은 하나의 특기였다. 골프채로 맞아서 이마가 찢어졌을 때도 늑골에 금이 갔을 때도 하나는 버텼다. 스무 살, 독립하는 그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박사의 포근한 보호와 따스한 배려 아래에서 하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말랑말랑해졌다. 품고 있던 독기가 빠져나가고 그사이를 박사에 관한 호의와 연모가 채워나갔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감정은 여름 휴가 때 절정을 이뤘고, 더욱 깊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참고 버틸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단하게 마음의 벽을 치고 있던 저를 이토록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 피하기 시작한 박사에 대한 원망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하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박사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생각인지.

박사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다가 불안해지다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가 자책했다가를 반복하게 됐다. 자꾸만 속이 엉키며 마음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하나는 공부도, 게임 제작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 10시가 지나 있었다. 어느새 창밖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하나는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설정해놓았던 휴대폰에 여러 메시지와 SNS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박사가 보낸, 늦겠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지는 이유가 일이 아니라 남자 때문이었다니…….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이 다시금 속을 흩트려놓는 바람에 더이상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카디건을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박사를 매일 바래다준다는 남자가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았다. 아파트 입구를 서성이며 하나는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폈다. 박사는 요새 차를 몰고 다니지 않는 것 같고, 새엄마 딸의 말에 의하면 남자의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했으니 벤츠 차량을 살펴봐야 할 텐데 하나는 차에 대해 무지한 터라 눈에 들어오는 차마다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박사의 차는 어디에 있는 걸까. 병원에 주차해놓고서 남자의 차를 얻어타고 다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초조한 마음을 안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는데, 저 멀리에서 검은 차량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차량 뒷좌석 문이 열리며 키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고개를 떨구며 휴대폰을 살폈다. 밤 11시가 넘어가는데 아직도 박사는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많이 늦느냐는 물음에 답이 없는 휴대폰을 꼭 쥔 채로 한숨을 내쉬는데, 익숙한 단어가 하나의 귀에 꽂혀 들어왔다.

“치글러 과장님, 제게 기대시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보자, 차에서 내린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고 허리를 숙인 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빠른 걸음으로 벤츠로 추정되는 차량에 다가가며 박사를 불렀다.

“박사님.”

그 목소리에 남자가 하나를 돌아보았다. 하나는 몸을 비튼 남자와 벤츠 문 사이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사를 볼 수 있었다. 박사는 뒷좌석에 몸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저렇게 취한 박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나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어, 너 전에 치글러 과장님 따라서 같이 병원에 왔던 애 아니야?”

남자가 알은체했다. 하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가로등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누군지 떠올리려 노력하기도 전에 생각이 났다. 박사와 여름 휴가 때 쓸 수영복을 사러 간 날, 병원에서 박사에게 끈질기게 식사 제안을 하던 남자였다.

“잘 됐다. 치글러 과장님이 한사코 혼자 가실 수 있다고 하셔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과장님 집 알지? 내가 부축할 테니 넌 앞장 서.”
“아뇨, 제가 모셔갈 수 있어요.”
“여자애가 어떻게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해?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말고…….”

하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벤츠 뒷좌석으로 몸을 반쯤 밀어 넣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훅 끼치는 알코올 냄새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뭐 술독에 빠졌다 나온 것도 아니고, 옷차림은 멀쩡한데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신 건지. 속상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박사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박사님, 정신 차려 보세요, 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박사가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에 은은한 웃음꽃이 피었다. 좀처럼, 특히 이번 달 들어서는 거의 본 적 없는 밝은 미소였다.

“어어… 하나… 하나 양이네요.”
“네, 저예요. 집에 다 왔는데, 저 잡으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물론이죠.”

박사가 느릿느릿 그렇게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가녀린 몸을 하나가 얼른 옆에서 부축했다. 순간 휘청일 뻔했지만 남자가 쳐다보고 있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확실히 술 취한 사람이라 중심을 가누지 못해 버거웠다. 그러나 두손 두발 다 멀쩡한데 박사를 남자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 아니, 무리하지 말고 내가…….”
“안녕히 가세요.”

일단 박사의 지인이었으니 인사는 해야 했기에 예의만 갖추고 박사를 부축하며 돌아섰다. 살짝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박사가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도 제 발로 걸으려 했기 때문에 부축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공동현관까지 걸어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슬쩍 뒤돌아보자 다시 조수석에 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운전석에 있는 건 대리운전기사 같았다.

“어딜 보는 거예요, 하나 양. 저 여기 있잖아요.”

박사가 하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오싹,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박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주한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어딘가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박사의 모습에 하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박사가 그런 하나를 보더니 눈꼬리를 살짝 휘고는 살며시 몸을 기대왔다. 지탱하는 무게는 변함이 없는데 제 가슴께에 와닿는 박사의 온기가 늘어나자 하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하나를 찬찬히 눈에 담던 박사가 살며시 웃더니 미성으로 허밍을 했다. 하나도 몇 번인가 들은 적 있는, 박사가 기분이 아주 좋을 때 흥얼거리는 멜로디였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하나는 내심 의아해하면서 박사를 부축해서 집으로 향했다. 박사의 허밍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하나에게 전해지는 온기가 점점 무게를 더해갔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집 현관에 들어섰을 즈음엔 하나는 반쯤 박사를 안아 세우고 있을 정도였다. 가슴이 설레서 기분 좋기는 좋은데 솔직히 힘들었다.

“박사님, 신발장 좀 짚어보실래요?”

박사는 고분고분 신발장에 기대어 섰다. 하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서 박사의 신발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이윽고 두 다리가 가벼워진 박사가 비틀비틀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제 신발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일어선 하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하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마워요, 힘들었죠?”
“네? 아뇨, 아니에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거짓말.”

미안해할까 봐 한 소리에, 박사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나직하게 그리 말했다.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하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곧이어 빠르게 박동하며 제 존재를 알리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니에요. 박사님 가벼우신걸요. ”
“그래요?”
“네, 그래요.”
“그러면 그렇다고 해요.”

박사가 웃음 짓고는 비틀비틀 화장실로 향했다. 하나는 그런 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방으로 돌아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거실로 나온 하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벽에 기대어 선 박사의 모습이었다. 세수하고 양치하는 동안에 기력을 다 써버린 건지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고 있기에 얼른 다가가서 박사의 팔을 붙잡았다.

“침실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그래 줄래요?”
“네. 저 잡으세요.”

하나는 박사를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침대에 천천히 박사를 눕히려는데, 박사가 그런 하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박사의 침대에 나란히 눕게 된 하나가 당황해서 박사를 보자, 그녀는 장난스러운 눈동자로 입가에 작은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어… 박사님…….”
“하나 양에게서 좋은 향이 나요.”
“아, 그게, 바디워시 새로 바꿨거든요. 쓰던 게 다 떨어져서, 기왕 사는 김에 새로 나온 제품 한 번 써보려고…… 헉.”

박사가 좋아할 법한 플로럴 향을 고르기 위해 마트를 몇 번이나 빙빙 돌았다고 실토하지는 못하고 횡설수설 말을 잇던 하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박사가 하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탓이었다. 심장이 폭발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쿵쾅대기 시작했다. 하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달싹댔다. 박사가 취하긴 정말 취한 모양이었다. 박사와 함께 살아온 9개월 동안, 이토록 긴밀한 접촉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하나는 제 목덜미에 와닿는 박사의 숨결에 심장이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취한 사람의 주정이겠거니 하며 편히 누우라고 하고서 침실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찰나에 불과했다.

박사가 술을 마셔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직후, 벤츠를 타고 박사를 바래다준 남자에게도 이렇게 접촉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둥둥 떠올랐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벤츠남에 대한 분노와 부러움, 시기 등의 감정이 하나의 가슴을 마구 휘저었다.

하나는 헝클어진 마음을 다스리며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잠이 든 건지 미동도 없는 박사에게 오만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가운데, 이 자세가 박사에게 불편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정쩡하게 허공을 맴돌던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박사의 어깨를 잡아 천천히 제게서 박사를 떼어냈다. 박사는 선선히 밀려났다. 그리고 하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잠이 든 줄 알았던 박사가 고요한 눈으로 하나를 보고 있었다.

“자… 잠이 안 오세요?”

얼결에 나온 소리는 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미등만 켜진 어둑한 침실 안, 얼굴이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박사를 마주 보는 일은 생각보다 더한 압박감을 수반했다. 무슨 말이라도 내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궁금해요?”

박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어왔다. 그 말이 하나의 귀에는 지금 이 순간에 그런 무의미한 것이 궁금하냐는 소리로 들렸다. 평소의 박사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묘한 뉘앙스였다.

“아뇨…….”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꾸한 하나는 입안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끼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박사는 그런 하나를 깜박이지도 않고 눈에 담고 있었다. 짙푸른 심해와 같은 눈동자에 오롯이 들어찬 제 얼굴을 보고 있자 자꾸만 마른 침이 넘어갔다. 하나는 조금 더 의미 있는 질문을 생각하려 애를 썼다.

한순간 하나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은 벤츠남에 대한 것이었다. 박사의 차는 어디에 두고 벤츠남의 차를 타고 다니는지, 매일 저녁 늦은 것은 벤츠남과 시간을 보내서인지, 이대로 벤츠남과 사귈 마음이 있는 건지. 만약 박사가 저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고 벤츠남과 사귀기로 했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하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그러자 절로 입이 열렸다.

“저 언제까지 박사님 옆에 있을 수 있어요?”

박사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말을 내어놓은 하나는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 다짜고짜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하나는 혹시라도 박사가 부담스럽다 생각할까 두려워 천천히 말을 고르며 덧대었다.

“제가 예전에 저를 내보낼 일 있으면 미리 말씀 주시라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하나가 말을 이었다.

“혹시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바뀐 거면… 부담 없이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박사는 하나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하나는 제 입으로 그런 소릴 해놓고서 박사가 제 말을 부정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깨닫고는 혐오감을 느꼈다. 오후에 읽었던 수필에서 그랬다. 진실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야 한다고. 박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저보다는 벤츠남이 박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박사가 저를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스스로가 미우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서글펐다.

침묵이 이어졌다. 하나는 이렇다 할 말이 없는 박사에 초조함을 느끼고는 입안 여린 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 말에 답이 없는 것이 꼭, 박사가 벤츠남을 선택한 것에 대한 반증처럼 느껴졌다. 제게 미안해서 차마 말을 못 하는 걸까.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수능이고, 수능 끝나고부터는 자율 등교니까 아르바이트라 구해서 고시원이라도 들어가면 되니까요. 그리고 수능 끝나면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여차하면 청소년 쉼터라도 입소하면 될 것 같아요. 알아보니까 한 달 정도는 웬만하면 받아들여 준다고 하고,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한 하나는 말을 그러니까, 하고 자꾸만 말을 먹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하나의 목소리는 어느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 박사의 곁을 떠나야 할 생각을 하니 절로 코가 시큰해지며 눈이 부옇게 번지기 시작했다. 울면 안 되는데… 박사님이 부담스러워하실 텐데. 그런 생각에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박사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언제까지인가요?”

하나는 눈을 깜박이며 의연한 체하려 했으나 볼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저도 모르게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박사가 엄지손가락으로 다정하게 하나의 눈 밑을 닦았다. 그 손길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다행히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는데 하나의 볼을 매만지던 박사의 손끝이 천천히 하나의 입술을 더듬었다.

따뜻한 손가락이 하나의 입술 윤곽을 천천히 따라 그렸다. 살살 입술을 매만지는 감촉에 하나는 조금 전까지 입술을 깨물던 일도 잊었고, 제 가슴을 가득 메우던 서러운 감정도 잊었다. 입술 살결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매만지는 촉감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박사의 두 눈은 하나의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고, 하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한참을 그렇게 어루만지던 박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쁜 입으로 왜 그런 소릴 해요.”
“…….”
“속상한 소리 계속할 거예요?”
“하지만 박사님은…….”

웅얼거리며 말을 잇던 하나는 문득 박사의 눈에 비친 제 얼굴이 커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직후, 말랑한 감촉이 하나의 입술에 전해졌다. 부드러운 온기가 하나의 입술을 살짝 머금다가 떨어져 나갔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이해하지 못한 하나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박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다른 말 해봐요.”
“…네? 어떤…….”
“예쁜 말.”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나는 맞닿은 입술에서 두근거리는 맥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아, 하고 내뱉은 미약한 감탄사를 박사가 부드럽게 삼켰다.

촉, 촉, 젖은 소리가 들리며 쪼는 듯한 버드키스가 이어지더니 박사가 하나의 아랫입술을 물고 살살 핥는 것이 느껴졌다. 친구들과 장난삼아 뽀뽀해 본 적도 없는 하나에게 있어서는 너무 큰 자극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죄다 입술로 쏠리는 것 같은 기분에 하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눈을 꼭 감았다.

책에서나 영화에서는 첫 키스가 레몬 맛이 난다느니 딸기 맛이 난다느니 하더니만 순 거짓말이었다. 머리가 온통 새하얘지는 바람에 하나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꼭 감은 눈꺼풀 너머로 벤츠남에 대한 일이나, 박사가 만취했다는 사실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비록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박사는 박사였다. 말짱한 정신이었으면 절대 제게 키스하지 않을 박사를 알아서 하나는 박사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놓고 싶지 않았다.

박사가 그런 하나의 볼을 쓰다듬고 입술을 떼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어서 눈두덩이, 코, 볼을 지나 다시 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와닿은 후, 네? 하고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에 하나는 눈을 떴다. 박사가 가는 호선을 입가에 그리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박사의 그윽한 눈동자에 담겨 일렁이는 것을 보자 하나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사와 단둘이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에, 지난 몇 개월 동안 내내 제 안을 온통 채워왔던 감정을 박사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내어놓은 한 마디에 박사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하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맞닿은 온기에 용기를 얻은 하나가 말을 이었다.

“박사님이 좋아요…. 나이 차도 있고 성별도 같고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박사님이 좋아요…….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좋아한다 말할 때마다 쪼듯이 키스해오는 박사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더니 박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계속해줘요.”

녹아내릴 것 같은 박사의 속삭임에 절로 입이 열렸다. 하나는 떨리는 가슴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마다 잘 잘잤냐고 인사해주는 것도 좋고 밤에는 잘 자라고 말해주는 것도 좋고, 매일 별일 없었냐고 물어봐 주는 것도 좋고, 바쁘신 와중에도 없는 시간 쪼개서 저랑 이야기할 틈을 내어주는 것도 좋고, 눈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 지어주는 것도 좋고, 제가 말할 때마다 눈 마주치면서 귀 기울여주는 것도 좋고, 박사님이 박사님이라서… 그래서 너무 좋아요.”

말 사이 사이에 이어진 일곱 번의 입맞춤이 모두 꿈결 같았다. 좋아해요, 다시금 심장을 내어놓자 박사가 부드럽게 입술을 쪼았다. 와닿는 감촉은 부드럽기 그지없는데, 하나는 좋아한다고 말을 할 때마다 점점 가슴 한켠이 아파왔다. 저는 한없이 진지한데 박사가 제 마음을 너무 가볍게 듣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박사가 마음에도 없는 키스를 할 리가 없다고 여기려 했지만, 곧 제게는 의미 깊은 이 입맞춤이 박사에게 있어서는 그저 술주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저며오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도는데, 박사가 그다음을 재촉하듯 하나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살짝 눌렀다 떼며 말했다.

“그리고요?”

하나는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제 고백에 어떠한 대답도 주지 않은 채 장난스럽게 구는 박사 때문이었다. 저 혼자 애가 닳고 저 혼자만 좋아하는 것 같단 생각에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사가 제게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는데, 이 일주일 사이에 변해버릴 만큼 박사의 마음은 가벼웠던 걸까. 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박사에게서 받은 따스함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박사는 그렇지 않은 건지. 하나는 애써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동경 같은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박사님이 더 멋져 보이고, 근사해 보이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거기에 박사님을 보면 가슴이 떨리고,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안기고 싶고, 닿아도 보고 싶고… 자꾸 그런 마음이 드니까 박사님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 박사님한테는 제가 그냥 애로 보인다는 거 아는데… 그래서 제 마음이 가볍게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좋아해요.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저를 멀리하지만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눈가에 한계까지 모여있던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하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하는 마음 뿐으로는 벤츠남을 그 무엇하나 이길 수 없다는 분한 마음과, 제 애달픈 고백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박사의 장난스러운 입맞춤에 대한 서러운 마음 때문에 눈물이 멎질 않았다. 울면서 고백이라니, 부담스러울 거라거나 찌질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하는 생각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사라졌다. 뿌옇게 변한 시야에선 모든 것이 일렁이는 바람에 박사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애써 피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매트리스가 약간 흔들리는 진동이 나더니 몸 전체를 따뜻한 체온이 감싸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옅어진 알코올 냄새 가운데 박사 특유의 체향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에, 하나는 제가 박사의 품에 안겨있음을 깨달았다. 박사가 하나를 온몸으로 보듬고 있었다.

“울지 말아요,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정한 목소리에 괜히 눈물이 더 났다. 무엇이 미안한 건지,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어서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박사가 하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저도 하나 양이 좋아요. 아주 많이요.”
“…그런 거 말고요. 그렇게 좋아하는 거 말고, 진짜로…….”
“사랑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하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박사가 그런 하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손끝으로 조심스레 눈물을 닦았다. 하나는 박사가 한 말을 곱씹다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 남자분보다 더요?”
“이 선생 이야기가 왜 나와요. 이 선생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
“저한테 집중해줘요.”

나긋나긋한 말에 하나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박사가 작게 웃더니 이를 세워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간지럽히듯 이로 살살 긁듯이 잘근잘근댔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감각에 하나가 멍하니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러운 살덩이가 하나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농밀한 키스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박사가 긴장을 풀라는 듯, 그런 하나의 귓바퀴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태어나 처음 하는 제대로 된 키스에 하나는 어쩔줄을 모르고 박사를 받아들이기만 했다. 한없이 가라앉았던 마음이 붕 떠오르더니 둥실거리며 한없이 치솟았다. 감정변화가 너무 격해서 심장이 다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한차례 부드럽게 입안을 헤집은 박사가 눈을 꼭 감은 하나의 콧잔등에 한차례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처음부터 하나 양에게 마음이 갔어요. 상처를 치료해주고 웃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죠.”
“아…….”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단지 하나 양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게 제 옆이었으면 해요. …그래 줄 수 있어요?”
“…언제까지요?”
“하나 양이 원할 때까지요.”
“제가 박사님 곁에서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하면요?”
“바라는 바예요.”
“앞으로도 쭉?”
“앞으로도 쭉.”
“영원히?”
“영원히.”

계속해서 물어오는 하나의 말에 박사가 눈꼬리를 휘어가며 웃더니 다시 입을 맞춰왔다. 사랑스러운 듯 가볍게 쪼아대는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하나의 가슴이 크게 울렸다.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데 가슴은 이미 환희로 젖어 들고 있었다. 하나는 제 볼을 쓰다듬는 박사의 손가락 위로 제 손을 겹치며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꿈 아니잖아요.”
“내일 일어나서 박사님이 하나도 기억 못 하거나 술에 취해서 한 말이었다고 하면…… 죽고 싶을 것 같아요.”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요, 하나 양. 저 안 취했어요.”
“술 냄새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도요?”
“그렇게 심한가요?”

의심하는 하나의 말에 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는 살짝 제게서 몸을 떨어뜨리는 박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박사의 따뜻한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냥 해본 말이었을 뿐, 알코올 냄새는 더이상 하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박사가 호흡할 때마다 부드럽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하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남자분…….”
“또 이 선생 이야기예요? 이 선생은 정말 직장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럼 왜 요새 박사님 차가 아니라 그분 차 타고 다니셨던 거예요?”
“아…….”

박사가 조금 곤란한 듯한 소리를 냈다. 하나는 고개를 들어 그런 박사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말없이 쏟아지는 눈빛에 박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일주일 전 아침, 병원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하나 양 생각하다가 출발을 못 해서 뒷차가 제 차를 받은 일이 있었어요.”

처음 듣는 소리에 하나가 깜짝 놀라 말했다.

“네? 왜 그런 말씀 안 하신 거예요?!”
“하나 양이 괜히 걱정할까 봐… 딱히 다친 곳도 없고요.”
“그래도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괜찮아요. 범퍼만 망가진 거예요. 아무튼, 뒷차 주인이 이 선생이었는데, 본인이 뒤에서 박은 거니까 미안하다면서 기어코 바래다주겠다고 우겨서 며칠 얻어타고 다녔어요.”

그래서 차 키를 안 가지고 다니셨구나……. 의문이 해소됨과 동시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고, 하나는 그 의문을 입에 올렸다.

“그럼 그 사람 차는 멀쩡했어요?”
“아니요. 이 선생 차도 수리 맡겼죠. 하지만 차가 두 대라고 하더라고요.”
“…얻어탄 걸로 끝이에요? 그럼 오늘 술은 왜 같이 드신 거예요?”
“그건 내일 차를 찾으러 가면 되어서, 그동안에 신세 진 것 갚을 겸 술을 산 거예요.”
“저녁 식사가 아니라요?”
“저녁 식사는 이 선생이 먼저 계산해버려서…….”

하나의 볼이 절로 부풀어 올랐다. 박사는 벤츠남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 해도, 상대방은 흑심이 가득한 것이 눈에 훤했다. 차오르는 질투심에 입술을 잘근잘근대던 하나는 박사의 손을 붙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하얗고 반듯한 손바닥에 입술을 묻자 박사가 눈을 한순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반달처럼 휘며 미소했다. 하나는 그런 박사에게 조르듯 말했다.

“앞으로 그 사람 차 타지 말아요. 저녁도 같이 먹지 마요. 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정말이죠?”
“정말이에요. 어차피 차 수리 완료됐으니까 더이상 이 선생의 차를 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저녁 식사는 하나 양이랑 함께 해야죠.”

웃으며 하는 박사의 그 말에 하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저녁이라는 말에 그동안 흔들렸던 박사와의 일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박사의 품으로 파고드는 하나의 뒷머리를 따스한 손길이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렇게 안온한 기분으로 박사의 품에 안겨있자니, 불안과 초조와 짜증으로 휘몰아쳤던 오늘 오후가 마치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바로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박사와 함께한 이후 다시 없을 정도로 최악인 하루였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눈꺼풀이 절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박사님, 저 여기에서 자도 돼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내일도 그래도 돼요? 모레도, 글피도…….”
“하나 양이 그러고 싶다면, 얼마든지요.”

왜인지 시원스레 나오는 대답이 왠지 술기운을 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없던 말이 술김에 생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면 박사님은 평소보다 더 솔직해지는 걸까.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서 성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이런 박사님을 다시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하나는 눈을 감았다. 등을 토닥이는 박사의 손길이 느껴졌다.

“잘 자요, 하나 양.”
“박사님도요…….”

이마에 와닿는 말랑한 감촉에 하나는 설핏 웃었다. 그리고는 아늑한 꿈결로 빠져들었다.





끝.



예쁜 말 = 신음을 기대한 갤럼이 있었으면 미안해!

징그럽게도 안 써지던 집5를 반년이나 기다려준, 읽어주는 모든 갤럼들에게 감사해.ㅠㅠ
갤럼들 없었으면 쓰다가 던졌을 거야. 정말 막막했어서…
짧은 내용 안에 감정이 너무 왔다 갔다 해서 불만족스러운데 당장 손을 볼 여력이 없다 ㅠㅠ
아마 집 시리즈는 다음 편이 마지막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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