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앙기 쌤. 언젠가는 앙기 쌤에게 딱 맞는, 정말 앙기 쌤만을 보고 위해줄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글쎄요…… 그게 언제일까요.”
“2년하고 2개월 후에요.”
“…묘하게 구체적인 시간이네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딱 믿고 기다려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제 말대로 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의 울림에는 묘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앙겔라는 회의적이었다. 지금까지 만나 온 남자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 그러나 그들과 깊은 관계가 될 수는 없었다. 아이와는 이렇게 편한 접촉이, 전 남자친구들과는 뭔가 어색하고 꺼려졌다. 어쩌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면 해결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앙겔라의 유달리 느린 시간을 인내하고 기다려달라고 하기에는, 앙겔라도 상대방도 이제는 서로 나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럴 수 없었다. 앙겔라는 여전히 회의감을 품고 말했다.
“글쎄요, 그런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요.”
“전 반드시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아요, 앙기 쌤.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제가 책임질게요.”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의 말에 실소가 새어나왔다. 앙겔라는 어떻게든 저를 위로해주려는 아이가 대견하게 느껴지는 한편 장난스러운 마음도 고개를 들어서 슬쩍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책임져주게요?”
“앙기 쌤을 제가 데려가야죠, 별 수 있나요.”
“앞 길 창창한 사람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하나 양.”
“앙기 쌤도 충분히 창창하니까 꼭 그렇게 나이차 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요.”
아이가 투덜거리듯 말하며 앙겔라를 한 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언제까지나 같이 있어 줄게요. 그러니까 우울해하지 말아요.”
“……말은 고맙네요.”
때로는 동생 같다가도 때로는 친구처럼 구는 아이의 위로에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그런 아이를 마주 안으며 등을 도닥였다. 제 품에 쏙 들어오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 저를 위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월이 유수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아이와 계속 이렇게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4-2. 고등학생 편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한참 논문을 읽고 있는데, 벨이 한번 울리더니 곧바로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앙겔라는 고개만 들어서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현관으로 들어선 아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앙겔라에게 인사했다.
“앙기 쌤, 저 왔어요.”
“어서 와요. 밖에 비 안 오던가요?”
“제가 올 때는 그쳐 있더라고요. 앙기 쌤, 우리 사흘 만에 보죠?”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아이가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는 바람에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3일 만이었다. 그 동안 하도 아이가 문자며 전화를 자주 하는 바람에 앙겔라에게는 별로 그 시간이 와 닿지가 않았지만 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곧바로 팔을 벌리고 총총 다가오기에 앙겔라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이를 마주 안아주었다. 아이가 앙겔라의 오른쪽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앙겔라를 꼭 안았다.
“앙기 쌤,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전 앙기 쌤 엄청 보고 싶었는데.”
“글쎄요, 하나 양이 하도 전화를 자주 해서 그다지…….”
“그다지?”
“음, 그래요. 조금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되묻는 아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두 톤은 낮게 들렸기 때문에 앙겔라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귓전에 아이의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3일 만에 봐서 그런지 아이는 쉽게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앙겔라를 마주 안고서 좌우로 몸을 가볍게 흔들어댔다. 따뜻한 온기가 익숙한 듯 하면서도 어쩐지 낯설었다. 슬슬 떼어낼까 싶은 찰나에 아이가 말했다.
“앙기 쌤, 살 좀 빠졌죠? 어째 허리가 얇아진 것 같은데.”
“음, 그런가요?”
“네. 확실해요. 또 저 없다고 식사 거르고 그런 거죠? 꼬박꼬박 식사 하셔야죠. 저한테는 밥 거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앙겔라의 허리춤을 슬슬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옷 속을 파고드는 손길에 깜짝 놀랐는데 그렇다고 막 밀쳐내기도 뭐해서 앙겔라는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요즘 들어서 아이의 스킨십이 농도 짙다고 생각될 때가 잦았다. 그래봤자 상대는 다섯 살 때부터 알고 지내온 한참이나 어린 여자아이인데 뭐 어떠냐 싶다가도, 가끔씩은 등골을 타고 찌르르 올라오는 낯선 감각 때문에 흠칫흠칫 놀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욕구불만이 아닐까 의심되었는데 하필 지금도 그러했다. 이만 떨어지라고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자 아이가 만족한 듯한 콧소리를 내고서 앙겔라의 볼에 약간 긴 뽀뽀를 한 후 몸을 떨어뜨렸다.
“아, 충전되고 좋다. 앙기 쌤, 저 없는 동안 별 일 없었어요?”
“네, 없었어요.”
“사흘 전에 동네 한의사 아저씨가 앙기 쌤한테 추근거리고 그랬잖아요. 그 뒤로는 괜찮아요?”
원래부터 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아이였지만, 최근 들어서 아이는 앙겔라의 이성 관계에 대해 아주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앙겔라는 아이가 '추근거린다'고 평을 한 30대 중반 남성을 떠올렸다. 머리가 조금 벗어진 한의사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고3 수험생이 된 아이가 걱정되어 보약을 지었을 때 아주 진지하게 상담해주더니 그 뒤로도 종종 얼굴을 볼 때면 수험생에게 좋은 보양음식에 대해 말해주곤 했다. 아이를 위해 그렇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낮게 평가받는 게 왠지 미안해서 앙겔라는 한번 정도 편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추근거린 게 아니라 수험생에게 좋은 음식 같은 걸 알려주고 있던 거예요, 하나 양.”
“전 오렌지 주스만 먹어도 힘이 넘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거 귀담아 듣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만 씩씩대요.”
2박 3일로 여행을 다녀왔으면서 피곤하지도 않은지 두 주먹을 꼭 쥐고 반박하는 아이를 다독였다. 아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말했다.
“…앙기, 1년 6개월 후에 앙기의 짝이 나타날 거라고 했던 제 말 잊지 말아요.”
“요즘 슬슬 저를 막 부르네요, 하나 양?”
“알았어요, 앙기 쌤. 아무튼 잊지 말아요, 네?”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안겨드는 통에 앙겔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들어서 자꾸 아이가 저를 부를 때 애칭으로만 부르는 통에 마음이 조금 심란했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한 게 혼자 지낸 지 오래되어서 그런 듯 했다. 그런데 막상 남자친구를 사귀자니 얼마 못 가 헤어질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또 상대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결국 앙겔라는 아이가 바라는 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안 잊을게요. 그러니까 이제 좀 앉아요.”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빙긋 웃고 자리에 앉았다. 앙겔라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이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가슴 한켠에서 따뜻한 물결이 잔잔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앙기, 제가 선물 사왔어요. 이것 좀 보세요.”
또 애칭만 부르기에 뭐라고 하려다가 즐거워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그냥 그만두었다. 아이가 향초를 여럿 꺼내들었다.
“젤향초라는 건데 되게 예쁘죠? 이거 입고되자마자 품절되는 인기 상품이래요. 기념품 사라고 자유 시간 줬는데 앙기가 향초 좋아하는 거 생각나서 제가 제일 먼저 뛰어가서 사온 거예요.”
“예뻐요. 바닷속을 재현했네요?”
“네, 장식용으로 둬도 좋고 향을 피워도 좋대요. 그리고 이건 앙기 먹을 감귤차. 맨날 커피만 드시지 마시고 몸에 좋은 차도 마시고 그래요. 그리고 이건…….”
아이가 이것저것 꺼내들며 하나하나 설명을 늘어놓았다. 돌하르방이나 감굴 초콜릿 같은 걸 사올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다채로운 것들을 사오는 바람에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선물 공세에 앙겔라는 결국 웃고 말았다.
“가게를 털어온 거예요? 무슨 선물이 이리 많아요.”
“마음 같아선 진짜 털어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가짓수가 적더라고요. 아, 아쉬워라.”
그리고는 앙겔라에게 답삭 안겨왔다. 습관처럼 등을 다독여주는데 아이는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싶어서 살피자 아이의 두 눈에 잠이 가득했다. 따뜻한 품에 안겨있자 졸린 모양이었다.
“하나 양, 침실 가서 자요. 이러고 자면 나중에 허리 아프단 말이에요.”
“음… 이대로 자고 싶어요.”
“가서 자요.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요.”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거짓말처럼 잠이 싹 가신 눈으로 방긋 웃었다. 벌떡 일어나서 손을 당기는 모습이 전혀 졸린 사람 같지 않아서 앙겔라도 따라 웃어버렸다.
“지금 자고 가려고 연기한 거예요?”
“아니에요. 진짜 졸렸단 말이에요. 침대에 누우면 다시 졸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세요.”
“애도 아니고…….”
“맨날 애 취급하면서 이럴 때만 애 아니래.”
귀엽게 투덜거리는 아이를 다독여서 침실로 갔다. 이전에도 몇 번씩 자고 간 적이 있어서 아이는 익숙하게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앙기, 팔베개도 해줘요.”
“오늘은 어리광을 많이 부리네요.”
“사흘 만에 봐서 그래요. 그만큼 앙기분을 충전해야한단 말이에요.”
앙기분은 또 뭔지.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아무튼 아이가 해달라는대로 팔베개를 해줬다. 그러나 아이는 곧바로 잠에 들지 않고 또랑또랑한 눈으로 앙겔라를 보며 말을 걸었다.
“앙기랑 나중에 제주도 갔으면 좋겠어요. 주말 껴서나 아니면 앙기 방학 때요. 바다가 아직 차서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앙기랑 같이 헤엄도 치고 놀았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우리 재작년에 워터 파크 가보고 그 뒤로 같이 수영도 못 해봤잖아요. 그러니까 저 대학생 되면 같이 갔으면 해요.”
“대학생 되서도 저랑 놀려고요? 그땐 미팅이니 소개팅이니 해서 바쁠 건데. 친구들이랑 놀러도 다녀야죠.”
“저한테는 앙기뿐인데 왜 다른 사람이랑 놀아요? 그리고 앙기랑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단 말이에요.”
이런 부분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구나 싶어 앙겔라는 아이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손바닥 감촉이 기분 좋은지 아이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저 낚시도 배워보고 싶어요. 앙기도 저번에 낚시 프로그램 보면서 한번 배워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같이 가서 배워보게요. 스쿠버다이빙도 배워보고 싶어요. 아 맞다. 제주도에 해녀 학교라는 곳이 있대요. 나중에 같이 다녀봐요. 분명 재미있을 거예요.”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그렇게 한참이나 앙겔라와 함께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학여행이 그만큼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그런 아이의 종알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4-3. 고등학생 편.
“앙기! 아, 오늘 대박 힘들었어요. 9월 모의고사 봤는데 진짜 엄청 어려웠던 거 있죠. 완전 집중하느라 진짜 진이 다 빠졌어요. 너무 피곤해요.”
문을 열어주자마자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앙겔라에게 안겨들었다. 고생했다는 의미로 등을 쓰다듬어주자 아이도 똑같이 앙겔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 일인데, 등골을 슬슬 쓰다듬는 아이의 손길에 앙겔라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무언가 노골적인 듯한 느낌에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어느새 아이가 말간 눈동자로 앙겔라를 마주보고 있었다. 앙겔라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아이에게 대체 무슨 감각을 느꼈던 건지. 아무래도 정말 욕구불만이 맞는 것 같았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헬스를 끊어야겠다 생각하며 앙겔라가 말했다.
“고생했어요. 오렌지 주스 마실래요, 하나 양?”
“네, 마시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입맛이 변하지 않은 아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은 후에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냈다. 아이가 개수대에서 제가 항상 쓰는 토끼가 그려진 머그컵을 꺼내와 공손히 내밀었다. 어릴 때 앙겔라에게서 오렌지맛 사탕을 받아가던 모습이 겹쳐 보여 앙겔라는 웃음을 머금은 채 음료수를 따라주었다.
“아, 앙기 집에서 마시는 오렌지 주스가 제일 맛있어요.”
“오렌즈 주스가 다 똑같죠, 뭐. 그리고 또 경칭이 빠져있네요.”
“세세한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앙기. 아무튼 앙기가 주는 음료수가 훨씬 더 달고 맛있다니깐요? 진짠데. 보통 오렌지 주스가 5의 맛이라면 앙기 집에서 마시는 주스는 8이란 말이에요.”
“기준은 10이고요?”
“네. 10을 채우려면 몇 가지 조건이 더 있어야 하죠.”
“그 조건이란 게 궁금하네요. 뭔가요?”
그 질문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띤 채 앙겔라에게 시선을 주다가 음료수를 마셨다. 캐물으면 대답해줄 것 같았지만, 어쩐지 이 이상 물으면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앙겔라는 입을 다물었다.
거실 소파로 돌아오자 아이가 가방에서 모의고사 시험지를 꺼내고 휴대폰을 켜서 답안을 화면에 띄웠다. 거실 앞 테이블에 앉아 능숙하게 채점해가는 모습을 앙겔라는 흥미진진하게 쳐다보았다. 어렵다고 징징댔던 것 치고는 틀린 문제가 거의 없었다. 아이도 그것을 알아챘는지 곧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봐요, 앙기 쌤. 이 정도면 올 1등급 나오겠는데요?”
오랜만에 아이에게서 듣는 '앙기 쌤'이란 단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는 그게 맞는 호칭인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틈만 나면 애칭으로만 불러댔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좋은 점수를 낸 아이가 기특해서 앙겔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네요, 잘 했어요. 처음에 B고 간다고 했을 땐 걱정 많이 했었는데, 정말 기우였네요.”
“앙기 집에서 계속 공부했고, 또 앙기가 어려운 문제는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그랬잖아요. 다 앙기 덕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가 앙겔라의 무릎에 얼굴을 부볐다. 앙겔라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C대 경영대 가고 싶다고 했었죠? 내신도 그렇고, 수능도 이 정도로 잘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릴 때는 법에 관심 있어 하던 것 같은데, 경영대를 가려는 이유가 있어요?”
“네. 애인 먹여 살려야 해서요.”
처음 듣는 소리에 앙겔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하나 양, 남자친구 생겼어요? 어쩜 저한테 말 한 마디도 안 해주고…….”
“아뇨, 아뇨! 그런 거 없어요! 미래의 애인 말이에요! 남자친구라니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아이가 대경실색해서 손까지 휘저으며 부정했다. 말도 없이 남자친구를 사귄 줄 알고 섭섭해 했던 앙겔라는 그런 아이의 모습에 설핏 웃고 말았다.
“애인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먹여 살릴 걱정을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그래요? 누군데요?”
아이가 앙겔라와 눈을 마주치고 싱긋 웃었다.
“스무 살 되면 알려드릴게요.”
“언제부터 좋아했는데요?”
“그것도 스무 살 되면 알려드릴게요.”
무슨 말을 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앙겔라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 작디작던 아이가 어느새 커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어쩐지 마음이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참 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잘 되면 나중에 소개시켜줘요.”
“네, 앙기한테 가장 먼저 소개해줄게요.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눈동자를 빛내며 그리 말하는 아이에게 앙겔라는 애써 웃어주었다. 저와는 달리 아이에게는 꽃길이 펼쳐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될 경우 퍽 외로워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앙겔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시험도 잘 봤으니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사줄게요. 뭐든 말해 봐요.”
“앙기가 해주는 파스타 먹고 싶어요. 크림 잔뜩 들어간 걸로.”
“그건 주말에 가끔 해주는 거잖아요. 초밥이라든지 스테이크라든지 먹고 싶은 거 따로 없어요?”
“말했잖아요, 크림 파스타 먹고 싶다고.”
재료가 있으니 굳이 집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참 소원 한번 소박하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어요, 해줄게요. 잠깐만 앉아 있어요.”
“같이 해요. 제가 양파 썰게요.”
“그래요, 그럼.”
아이가 신이 나서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앙겔라는 웃었다. 뭐든 같이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니 나중에 애인이 생겨도 참 잘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쓰레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요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파스타를 해먹은 후, 아이와 TV를 보면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되어버렸다. 앙겔라가 씻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먼저 씻은 아이가 잠깐만 누워있겠다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수분크림을 다 바른 후에 침대에 몸을 뉘였더니 아이가 불쑥 물어왔다.
“앙기, 저 수능 끝나면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요?”
“글쎄요… 방학 때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그럼 내년 1월은 어때요? 해외여행까진 아니더라도 가볍게 겨울바다 같은 거 보고 오게요.”
“속초 가자는 거예요?”
“아니면 부산이요.”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앙겔라에게 가까이 붙었다. 잠깐만 누워있겠다더니 오늘도 자고 갈 속셈인 모양이었다. 돌려보낼까 하다가 어느덧 탁상시계에 표시된 시각이 새벽 1시가 넘은 것을 보고 포기하고 말았다. 앙겔라는 한쪽 팔을 뻗어 아이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수능 끝난 후에 말해요. 어디든 데려다 줄 테니.”
“우리 술도 마실까요? 저 칵테일 먹어보는 게 소원인데.”
“술도 마시게요? 안 될 것 같은데요. 하나 양은 수능이 끝나봤자 아직 성인도 아니잖아요.”
“앙기 쌤이 보호자로 데려가주면 안 돼요?”
“안 돼요. 설령 부모님이 사준다 해도 법으로는 안 되는 일인 걸요.”
“아, 아쉽다. 그러면 저 12월 31일에 술 사주세요. 한 잔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네?”
“1월 1일 되면 사줄게요.”
“31일에 종각으로 종소리 들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잔 사주시면 되겠네요. 그죠?”
“음… 그래요, 그렇게 해요.”
아이가 이렇게 원하는데 그깟 술 한 잔 정도야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키득대며 웃더니 앙겔라의 품을 파고들었다. 등에 깍지를 낀 아이가 앙겔라의 가슴골에 훅 바람을 불어넣었다. 순간 전기가 통하는 듯한 찌릿한 감각에 앙겔라는 내심 놀랐다. 장난으로 하는 짓일 텐데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 게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가장하며 앙겔라는 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이제 슬슬 자야죠. 밤이 늦었어요.”
“알았어요, 앙기. 잘 자요, 내 꿈꾸고요.”
아이가 귀엽게 윙크하며 앙겔라의 볼에 입을 맞췄다. 볼보다는 입에 가까운 쪽이라 움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웃는 아이를 보니 뭐라 하기도 좀 그래서 앙겔라는 팔을 뻗어 스탠드 불을 껐다. 아늑한 어둠이 내려앉자 아이가 앙겔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붙었다.
익숙하게 허리를 껴안는 아이의 팔이 살짝 뜨거운 것 같아 이마를 짚어보니 열도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앙겔라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려 아이를 꼼꼼히 덮어주었다.
“열이 좀 있네요, 하나 양.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요.”
“네, 그럴게요. 그래도 감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앙기.”
묘하게 확신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아이가 팔에 힘을 주어 앙겔라를 안았다. 또 애칭만 부르기에 뭐라고 하려다가 아이의 눈에 잠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고 그냥 가슴만 도닥여주었다. 아이의 입가에 슬쩍 호선이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순한 얼굴은 어려서부터 참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도 눈을 감았다.
# 5. 성인 편
“아, 눈 온다.”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앙겔라도 고개를 들었다. 팔랑거리는 눈송이가 천천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종각에서 새해 종소리가 듣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옷을 단단히 껴입은 후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에 들러서 술을 한잔씩 했기 때문에 앙겔라나 아이나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어릴 때 하나 양이 눈 오면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나니곤 했던 게 생각나네요.”
감상에 잠긴 앙겔라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가 작게 웃었다. 앙겔라는 새삼 아이와 보내온 시간이 정말 길구나 싶었다. 아이가 만 다섯 살 때 알게 되어 만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무려 14년 동안 알고 지내온 것이었다. 이쯤 되면 아이의 성장에 1/10쯤은 자신이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이가 깍지 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어릴 때 느꼈던 것들이나 했던 생각들은 자랄수록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바뀌는데요?”
“예를 들어 지금 내리는 눈도 어릴 적엔 마냥 기뻤지만 지금은 앙기 쌤 내일 출근할 때 귀찮겠구나 싶고.”
“그런 사회에 찌든 어른 같은 감상은 벌써부터 안 가졌으면 했는데요.”
“어릴 땐 12월 말이랑 1월, 2월도 싫어했어요. 아, 7월 8월도.”
“왜요? 그 때는 방학 아니에요? 보통 다들 좋아할 때인데.”
“앙기랑 못 만나잖아요. 중학교 올라가서야 방학 때도 앙기와 만날 수 있어서 그때부턴 별로 상관없어지긴 했지만, 어릴 땐 많이 싫어했죠. 맨날 앙기가 보고 싶다고 울어서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께서 많이 곤란해 하셨는데.”
어릴 적부터 저를 유난히 따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앙겔라는 그렇게 말하는 아이가 귀여워서 빈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입매가 자동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라면서 바뀌는 것들이 많죠. 그건 당연한 거예요.”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제가 앙기를 좋아한다는 거요.”
아이가 빙긋 웃더니 얼굴을 가까이 했다. 또 볼 뽀뽀겠거니 하고 앙겔라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입술에 와 닿을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입술에 느껴지자, 앙겔라는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아이의 갈색 눈동자가 앙겔라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시선이 몹시도 강렬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앙겔라의 머리는 쉽사리 따라잡지 못했다. 어릴 때야 입에다 뽀뽀도 자주 하고 그랬지만, 초등학교 올라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아이가 하는 짧은 입맞춤이라고 하기엔 맞닿은 시간은 실시간으로 길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가 빈 손으로 앙겔라의 허리를 껴안더니 제 품으로 끌어당기고 허리춤을 살살 매만졌다. 옷 너머로도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앙겔라의 입이 절로 벌려졌다. 말캉하고 따뜻한 살덩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앙겔라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의 혀는 앙겔라의 잇몸을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가 다시 쓸어 올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절로 벌려졌다. 그러자 이번엔 볼 안쪽 살을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몸이 절로 바르르 떨려와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아이의 팔이 앙겔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다른 한 팔은 등을 받치고 있었다. 어느새 안정적인 자세가 되어 열렬히 입을 맞춰오는 아이에 놀라 앙겔라는 정신이 달아나는 걸 같았다.
머리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아이가 거칠게 숨을 토해니더니 고개를 틀면서 야릇한 느낌으로 앙겔라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동시에 허리를 두르고 있던 팔이 셔츠 안으로 불쑥 파고 들었다. 눈까지 내리는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손은 뜨거웠다. 이윽고 열을 지닌 손이 거침없이 위로 올라오더니 브래지어 너머로 앙겔라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몸이 절로 움찔했다.
“으읍, 잠…….”
깐만요, 라는 말 역시 아이의 입에 삼켜져 나오지 못했다. 아이의 혀가 앙겔라의 입천장을 꾹꾹 누르더니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위로는 입술을 집어 삼킬 듯 몰아치고, 아래로는 손가락에 힘을 달리 주며 가슴 주위를 쓰다듬는 손길에 앙겔라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밤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는데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아이의 손이 브래지어 속으로 파고들자, 앙겔라는 정말 깜짝 놀라서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붙잡았다. 잠깐의 애무로 단단해진 여린 살 끝에 아이의 말랑하고 뜨거운 손바닥에 닿아 있는 것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아… 후우… 앙기, 앙겔라. 미안, 미안해요. 내가 너무 흥분했어요.”
입을 뗀 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속삭이더니 천천히 가슴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앙겔라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기 시작했다. 앙겔라 역시 거친 숨을 내쉬며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아이와 옛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고 집 근처까지 온 상황에서 갑자기 일들은 앙겔라의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는 일들이었다. 패닉을 일으킨 듯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려는데 옷매무시를 끝낸 아이가 앙겔라를 한차례 꼭 안더니 팔을 단단히 잡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앙겔라는 본능적으로 멈춰 서려 했지만 아이의 거센 힘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끌려가듯 따라 걸었다. 그제야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이게 무슨……. 하, 하나 양. 방금 대체 무슨 짓…….”
“앙기, 지금 밖이에요.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해요.”
그러나 지금 아이와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거부하려 했지만 몸은 어느새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앙겔라는 정신없는 와중에 침착하려 애를 썼다. 장난… 장난이라고 여기려고 했으나 아이의 행동은 명백하게 도를 넘어서 있었다. 혼비백산한 정신을 가까스로 끌어 모았을 때는 어느새 현관 앞에 다다라 있었다.
“으, 읍…….”
도어락을 해제하고 현관을 넘어서자마자 아이가 저돌적인 키스를 해왔다. 아이의 두 팔이 앙겔라의 목을 감쌌다. 현란한 혀놀림으로 앙겔라의 입안을 훑어 내렸다가 쓸어 올렸다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어가며 자극을 주었다.
정신차려보니 어느 새인가 코트는 벗겨져 있었고, 몸은 침실 문지방을 막 넘어서는 찰나였다. 아이는 폭풍같이 몰아치며 앙겔라를 계속 밀어붙였다. 아까부터 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앙겔라는 엉거주춤 밀려나며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눕게 됐다. 아이가 그런 앙겔라의 허리춤을 두 손으로 지분거리며 갈급하게 속삭였다.
“앙기, 사랑해요. 사랑해, 앙겔라.”
아이는 애타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다시 깊게 입을 맞춰왔다. 귓바퀴를 매만지는 손길에 절로 몸이 튀어 올랐다. 그러자 아이가 반대쪽 귓등을 입술로 물더니 잘근잘근 깨물며 귓불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짜르르한 느낌에 몸이 들썩거렸지만 아이의 몸이 앙겔라를 붙잡고 있어서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았지만, 셔츠를 파고드는 손길에 놀라 결국 소리가 새어나왔다.
귓불을 살짝 아프게 깨문 뒤, 아이는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들이더니 점점이 표식을 남기듯 키스 자국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말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쇄골로 내려온 아이의 입술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
앙겔라는 아이를 밀쳐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어느새 아랫배로 파고든 아이의 손이 치골에 닿아 슬슬 그 주위에 원을 그리듯 쓰다듬기 시작하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 역시 그것을 눈치 채는지 집중적으로 치골을 쓸어 올리고 매만졌다. 앙겔라는 사력을 다해 점점 중심을 향해 내려가는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이 이상은 정말로 안 될 것 같았다.
“앙기, 앙겔라…….”
갈라진 아이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붉었다. 아이가 손을 뻗어 앙겔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눈빛 속에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넘실대고 있었다.
“앙겔라, 사랑해요. 계속 사랑해왔어요.”
아이가 애타는 목소리로 귓가에서 속삭였다. 붉게 물든 아이의 눈매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달아오른 몸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으나 아이는 꼼짝도 할 수 없게 앙겔라를 제 품 안에 가둬놓고 있었다.
보일러가 아직 외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침대 위에 가득한 후끈한 열기 탓에 등골에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앙겔라는 가쁜 호흡 때문에 생각을 잘 할 수 없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이의 혀가 앙겔라의 숨을 모조리 긁어갔고, 숨이 막힐 때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딱 숨 쉴 만큼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헐떡이는 호흡을 진정하려 애를 쓸 때마다 마주치는 아이의 갈색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가슴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한 손으로는 집요하게 가슴을 자극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살살 매만지듯 살결을 매만지는 동안에 앙겔라는 몇 차례 작은 전율을 느꼈다. 찌르르한 자극에 점점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이의 입술이 계속해서 가슴 주변만을 맴돌고 있었다. 애타는 느낌에 자꾸 몸이 뒤틀렸지만 그 때마다 아이는 눈치 빠르게 앙겔라의 허리를 꽉 붙들고 못 움직이게끔 막았다. 덕분에 풀리지 못한 어떤 욕구 같은 것이 자꾸만 속을 채워갔다.
“앙겔라, 응? 허락해줘요. 응?”
허리께를 매만지던 손이 슬슬 내려가더니 허벅지 안쪽을 길게 쓸어내렸다. 두 손가락이 다리 한 가운데까지 올라왔다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스치며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바르작거리는 다리는 아이의 얄쌍한 허벅지에 갇혀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자꾸만 움직임을 제한하는 아이 때문에 점점 더 뜨거운 게 속에서 끓어올랐다.
“앙기, 하게 해줘요. 네?”
아이가 귓가에 쪼듯이 키스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귓가에 감겨드는 목소리에 그만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몸은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후였고, 해갈되지 못한 어떤 붉은 욕구 같은 것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마침내 어서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앙겔라의 이성을 꺾었다. 천천히, 떨리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허벅지 깊은 안쪽에서 빙빙 원을 그리고 있던 아이의 손이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
“앙기, 몸이 아직 뜨거워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하나 양.”
“한번만 더 하면 안 돼요? 이번엔 더 잘 할 수 있는데.”
학습능력이 뛰어난 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듯 했다. 아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오늘은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앙겔라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이가 아쉬운 듯한 소리를 내고서 앙겔라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앙겔라를 이불로 둘둘 감았다.
“잘 자요, 앙겔라.”
가슴께를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면서 노곤 노곤한 앙겔라의 의식이 점점 가라앉았다.
*
앙겔라는 푹신한 이불에 휩싸인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어쩐지 나른한 아침이었다. 몸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느릿하게 눈만 깜박이며 누워있는데 시야 가장자리에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이가 또 집에 안 가고 앙겔라의 집에서 잔 모양이었다. 다음엔 침대를 큰 걸 사든지 해야지 매번 딱 붙어서 자니 참…하고 생각하던 앙겔라의 뇌리에 어젯밤의 일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아이와 종각에 종소리를 들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셨고, 집 근처에 거의 다 왔을 때 아이가 갑자기 키스를 해왔고, 그대로 집에 끌려와서…… 끌려와서 그대로…….
앙겔라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탄식의 숨을 내뱉었다. 미쳤지, 미쳤어. 어쩌다가 이 어린 애랑……. 심지어 14년 동안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처럼 아껴온 애랑. 앙겔라는 진짜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아이의 얼굴을 봐야할지 태산 같은 걱정이 밀려들어와 한숨만 푹푹 쉬는데, 따뜻한 온기가 앙겔라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어느새 눈을 뜬 아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앙겔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앙겔라, 잘 잤어요? 몸은 좀 어때요?”
……만의 하나 어젯밤의 일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은 아이의 자연스러운 호칭으로 인해 물 건너 가버렸다. 앙겔라는 할 말을 잃고 떨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배회시켰다. 뭐라고 해야 하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었다. 정신 못 차리게 몰아쳤던 건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앙겔라는 마치 제가 18살이나 어린 아이를 덮친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이가 그런 앙겔라의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하듯 손등으로 앙겔라의 보드라운 볼을 살살 매만지며 말했다.
“난 아주 잘 잤어요. 앙겔라도 그랬으면 좋을 텐데. 잠깐만 있어요, 아침 차려줄게요.”
그리고는 앙겔라의 볼에 입술을 꾹 누르고는 폴짝 일어서서 침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앙겔라는 촉촉한 감촉이 남아있는 볼을 두어 번 쓸어내린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아래로 내려가자 시선이 절로 아래로 향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쇄골에 붉게 남은 흐릿한 이빨 자국이었다. 앙겔라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어젯밤 입었던 코트에 니트에 바지 등이 고이 접혀 있었다. 제가 잠이 든 후 아이가 개어놓은 모양이었다. 또다시 소리 없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앙겔라는 느릿느릿한 몸동작으로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벽걸이에 걸려있는 셔츠와 슬랙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세면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밤새 이어졌던 진한 키스로 인해 입술이 부르터 있어서 살짝 아팠다.
침실 문 앞에 선 앙겔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대로 방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무슨 얼굴로 아이를 보아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아이를 가리켜 똘끼가 있다고 할 때마다 그토록 착한 아이한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반박했던 과거의 제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뭘 모른다며 딱하다는 듯이 저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침실 문 너머에서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겨올 때까지 앙겔라는 그렇게 서 있었다. 얼마 있지도 않았건만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듯한 느낌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정하지도 못한 채로 문을 열었다. 어떻게든 결말을 지어야했다.
“앙겔라, 세수했어요? 얼굴이 반짝반짝해요.”
정작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건 앙겔라가 아닌 아이의 얼굴이었다. 식탁 위에 토스트와 커피를 차려놓은, 세상 행복한 표정인 만 열아홉 살의 아이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앙겔라는 그 얼굴을 보고 어제의 일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음을 깊이 실감했다. 입술만 달싹이는 앙겔라에게 아이가 다가와서 꼭 끌어안았다. 앙겔라는 14년 동안 몸에 익은 습관에 의해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즐거운 듯한 아이의 웃는 소리가 울림이 되어 가슴에 전해졌다.
“배고프죠? 일단 식사해요.”
“하나 양…….”
“그 다음에 이야기하게요. 빈 속에 하기엔 좀 그렇잖아요.”
아이는 앙겔라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발언을 하더니 손을 잡아 이끌어 식탁에 앉혔다. 앙겔라는 식탁 의자에 앉아 말없이 알맞게 구워진 토스트를 잘라 천천히 입에 넣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식사 중에 앙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앙겔라는 틀림없이 체했을 터였다.
그렇게 조용한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앙겔라가 커피잔을 다 비웠을 때쯤을 노려 아이가 입을 열었다.
“14년 전부터 좋아했어요.”
14년 전이면 아이는 겨우 다섯 살일 때였다. 앙겔라가 할 말을 잃은 사이에 아이가 계속 말했다.
“어릴 땐 마냥 좋기만 했어요. 매일 보고 싶고, 안기고 싶고, 같이 놀고 싶고……. 그러다가 초등학교 올라갈 때쯤에 앙기한테 작업 걸던 남선생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 때부터 그 사람들이 정말 끔찍하게 싫더라고요. 앙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직장 내 연애를 기피했기에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앙겔라는 고민하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괜히 그 사람들이 앙기한테 말 걸 때마다 배 아프다고 거짓말도 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끼어 들어서 놀아달라고도 하고 그랬어요. 앙기도 알긴 알았죠? 꾀병이었던 거.”
물론 알았다. 그러나 그게 곤란해 하는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아이의 서툰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던 것이었는데.
“어른이랍시고 제가 끼어들지 못하게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런 사람들보다 앙기랑 더 잘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앙기가 자랄 무렵에 들었을 노래도 찾아듣고, 보았을 법한 영화도 찾아보고, 좋아하는 관심사를 찾아서 공부도 하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이 좋아지더라고요.”
나이차가 많이 나는데도 아이와 취향이 잘 맞아 떨어졌던 이유가 밝혀졌다. 앙겔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순간의 충동이었으면 차라리 어떻게든 무마했을 텐데, 그렇다고 하기엔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아이의 품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저 졸업하면 누가 앙기를 그 사람들한테서 막아주나 막 걱정이 되는 거예요. 상상하면 미칠 것 같고 화도 엄청 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잠도 못 자고……. 저 없으면 데이트 거절도 못할 앙기가 너무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 정도로 앞가림 못하지는 않아요.”
“네, 물론 그렇죠. 그런데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이 됐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죠. 앙기를 평범하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잠시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앙겔라는 속이 복잡했고 아이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었다. 잘근잘근 입술만 깨무는데 아이가 그런 앙겔라의 입술에 손가락을 뻗어 그런 행동을 막았다.
“입술 상해요, 앙기. 그러지 말아요.”
맞는 말이라서 고분고분 입술을 깨물던 힘을 풀자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저 중학교 올라간 사이에 앙기한테 남자친구가 생긴 거예요. 이름도 기억나요. 변이훈. 맞죠? 은행원이었던.”
앙겔라는 이제 기억도 잘 안 나는 남자친구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아이의 두 눈이 형형했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직장을 가진 이후로는 처음 사귄 남자친구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별 거 없었다. 그저 6학년 주임이었던 말 많은 중년 여선생이 한번만 만나보라고 하도 성화여서 소개로 잠시 만났을 뿐이었다.
“앙기한테 남자친구가 생겼지만 제가 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때 진짜 눈 뒤집히는 줄 알았어요. 수많은 고민 끝에 삐뚤어지면 나한테 관심가져줄까 생각도 했는데, 그러면 너무 애 같잖아요. 그런 관심이 오래갈 리도 없고. 그래서 앙기한테 더 잘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별 사이는 아니었더라도 앙기랑 알고 지낸 지가 무려 9년이니, 앙기 취향 정도는 빠삭했거든요. 남자친구보다 더 잘해주고 더 잘 맞춰주면 남자친구가 필요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죠.”
우습게도 당시 만 열네 살짜리 아이의 생각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겨우 중학생에 불과한 아이와는 대화도 잘 통했고 취향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데에 비해 애초에 그리 좋아하지도 않던 남자친구는 앙겔라에 대해 잘 몰라 모든 게 서툴렀으니 정이 붙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 안 가 헤어졌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앙기한테 남자친구가 생겼었죠. 그 때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할 수 있는 게 달리 없었어요. 그저 앙기의 곁을 더 오래 맴돌면서 기다리는 것 밖에는…….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그 말만 되뇌면서 참고 참았어요.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릴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앙겔라의 손을 잡아왔다.
“앙기, 앙겔라. 내가 정말 잘 할게요.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정말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앙겔라한테 잘 할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날 밀어내지 말아요. 네?”
아이가 간절한 눈으로 앙겔라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앙겔라는 그런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은 채 떨리는 눈동자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조용한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
며칠이 지났다.
앙겔라는 아이에게 잠시 동안 얼굴을 보지 말자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그 말을 들은 직후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고집부리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앙겔라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방학이었기에 시간은 많았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한잔 한 후 책장에서 앨범들을 꺼내와 펼쳐놓고 보기 시작했다.
한국에 온 직후 찍은 사진 첫머리에부터 아이가 찍혀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이 인상적인 다섯 살의 아이가 앙겔라의 품에 안겨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천천히 다음 장으로 넘겼다. 유치원 학예회 때 공주 분장을 했던 사진, 초등학교 입학식 때 앙겔라를 찾아와 교문 앞에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운동회 때 달리기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 어릴 때부터 아이와의 추억이 가득했다. 앙겔라의 앨범인데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짐이거나 아이의 사진이거나 했다. 새삼 제 인생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지분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한참 동안이나 사진을 들여다 본 다음에는 음악을 틀었다. 아이와 같이 가서 샀던 음반이 대다수라서 어쩔 수 없이 아이 생각이 또 났다. 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나이에 맞지도 않은 음악이나 영화, 그리고 전시전 같은 것들을 찾아서 익혔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애잔했다. 그 어린 시절부터 저만 보고 자랐다는 아이에 대해 떠올릴수록 한숨만 새어나왔다.
냉장고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를 위한 식재가 들어 있었고, 거실 바닥에 깔린 러그도, 발코니에 드리워진 커튼도 아이와 골랐던 것이었다. 집안 구석구석 아이가 스미지 않은 공간이 없었다. 앙겔라는 결국 거실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아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제 만 19세가 된, 한참이나 어린 아이가 구구절절이 제게 고백했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젊고 예쁘고 착한 아이가 저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다니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렬한 배덕감이 몰려들어왔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였으면 거부감이 훨씬 덜했을 것이었다. 거의 키우다시피 한 아이를 어떻게 연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앙겔라는 깊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앙겔라는 마트라도 들를 겸 산책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씻은 후에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아이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아이의 당황한 표정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갸름해진 볼살이었다. 며칠 못 봤기로서니 얼굴이 반쪽이 되어버린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앙겔라… 아니, 앙기.”
아이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침묵했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찾아왔으니 찔리는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대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바깥 공기가 찼다.
현관에 들어선 아이는 천천히 앙겔라의 집을 둘러보았다. 고등학교에 들어서고 나서부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들렀던 집인데도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아이를 소파로 이끌었다. 겉옷을 벗은 아이가 소파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포기 안 해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이의 첫마디는 맹랑했다. 앙겔라는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앙기한테는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미성년자 딱지 떼는 것만 생각해서 앙기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했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미안한 거 없어요. 앙기가 나를 밀어낸다고 해도, 싫어해서 미워한다고 해도 나 포기 안 해요. 안 할 거예요.”
단단히 마음먹고 온 듯, 아이의 어조는 확고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에 야위기까지 했으면서 아이의 두 눈동자는 형형했다.
“앙기, 앙겔라. 난 정말 앙겔라가 아니면 안 돼요. 한번 생각해서 안 된다면 몇 번이든 좋으니까 다시 생각해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14년을 기다렸는데 앙겔라가 고민하는 그 얼마를 못 기다릴까요? 그러니까 마냥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난 죽어도 포기 못해요. 된다고 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아이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거의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앙겔라의 앞에서는 웃는 얼굴만 보여주던 아이였음을 앙겔라는 깨달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써왔던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앙겔라는 천천히 아이의 파리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앙겔라는 피하지 않았다.
“Ich liebe Sie.”
사랑해요.
입술이 맞닿기 직전에 아이가 그렇게 속삭이더니 앙겔라의 볼을 감싸 쥐고 키스를 해왔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독일어를 배우겠다며 발음을 물어보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때 아이는 앙겔라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지금과 똑같이 말했었다.
“Du bist wunderschön, du machst mich glücklich.”
그대는 너무 아름다워요, 그대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죠.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대면서 몇 년 동안 앙겔라에게서 배웠던 유창한 발음으로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앙겔라는 말없이 아이의 야윈 볼을 쓰다듬었다.
“Du bist das Wichtigste in meinem Leben. Ich hab dich wirklich sehr gern, liebe dich für immer.”
그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해요. 항상 함께하고 싶어요, 영원히 그대만을 사랑해요.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고백에 앙겔라는 아이의 볼을 감싸 살며시 떼어냈다. 아이의 일렁이는 눈동자에 앙겔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앙겔라는 한참동안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절절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아이의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함께하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침묵의 끝에 나온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웃었다.
“여기까지 오는 일은 제게 있어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어요, 앙겔라.”
“후회할지도 모르고요.”
“이 순간을 놓친다면 그거야말로 후회할 일일 거예요.”
“하나 양, 전 하나 양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그리고 현명하고 성숙하고 능력도 있으시죠. 전 그에 비해 이뤄놓은 것도 없고 가진 건 오로지 젊음뿐이잖아요. 여러모로 앙겔라가 손해인 거 알아요. 그래도 한번만 믿어줄 수 없을까요? 제 인생의 80%에 가까운 세월을 앙겔라만 보고 살았어요. 앙겔라랑 함께 할 나날을 꿈꾸면서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대학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 잡아서 내가 앙겔라를 먹여 살릴 수 있어요. 내겐 앙겔라뿐이에요.”
그 말대로 아이의 인생에 앙겔라밖에 없다면, 그래서 아이가 저를 며칠 못 본 것만으로 이렇게 야위어버릴 정도라면 애써 밀어내느니 차라리 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만큼 아이의 존재는 앙겔라에게 있어 소중했다.
“앙겔라에 비하면 아직 어리지만… 그래도 나 이제 성인이에요, 앙겔라. 그러니까 이제 내게도 좀 기대줘요. 잘 할 수 있어요. 나 뭐든 잘 배우잖아요, 안 그래요?”
물기 어린 눈동자로 그렇게 말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앙겔라는 말없이 아이를 천천히 품에 끌어당겼다. 아이가 어릴 적처럼, 그러나 그때와는 다르게 앙겔라를 마주 안아왔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하나 양이 겪어야 할 세상은 제 세상보다 훨씬 넓을 텐데…….”
“어릴 적부터 14년 동안 제 세상은 앙겔라였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열이 깃들어 있었다.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좋아요. 전 놓치지 않을 거고, 앙겔라가 후회하지 않게 할 자신도 있어요. 앙겔라가 확신을 못하겠으면 내게 맡기고 따라와요. 여태 날 이끌어준 건 앙겔라였으니 이젠 내가 앙겔라를 끌어줄게요.”
조용조용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우습게도 정말 그래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아이를 내치지 못할 테니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말이 없는 앙겔라의 등을 몇 차례 쓰다듬던 아이의 손이 슬슬 허리께로 내려왔다. 앙겔라가 픽 웃고는 그 손을 붙잡았다.
“잘 나가다가 이건 또 무슨 전개예요.”
“확신시켜주려는 거죠. 저번엔 처음이라 너무 서툴렀어요. 재도전 할 기회를 줘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맞대고서 앙겔라의 상체를 뒤로 슬슬 밀었다. 순식간에 소파에 눕혀져 아이를 올려다보게 된 앙겔라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앙겔라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두 눈동자가 애정으로 일렁였다.
“할 수만 있으면 도장이라도 찍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앙겔라라는 걸 알리고 싶어요.”
그리고는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앙겔라의 볼과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뜨거운 체온이 앙겔라에게 옮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쇄골을 더듬는 손바닥에서 아이의 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앙겔라의 입술에 소중히 입을 맞추는 아이에게서는 더 이상 어릴 적에 맡았던 우유향이 맡아지지 않았다. 대신 아찔한 살 내음만이 느껴졌다. 앙겔라는 손을 뻗어 그런 아이의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요, 그럼.”
그 말에 아이가 싱긋 웃었고, 앙겔라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이끌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끝.
5.1만자 120KBㅋㅋㅋㅋㅋ 난 그냥 귀여운 하나가 커서 메르시를 잡아먹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인데…….
뿅뿅씬을 쓰고 싶은 나머지 개연성은 날려버림. 더 길게 쓰고 싶은데 글자수 제한 때문에 못 씀ㅠㅠ
*** 부분에 생략된 건 그냥 내 PC에 봉인하기로 함.
길고 긴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마워!
written_by_bl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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