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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바이케틀] Skin (4)

바이케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1.26 21: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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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4


그것은, 시도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었다. 케이틀린은 온 힘을 다해 바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녀의 머리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지배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저지르고 있는 짓은 그녀를 안에서부터 말라 죽게 만들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단 30분이라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케이틀린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을 감고 어둠이 자신을 삼키게끔 놔둘 때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덧없는 파란 눈동자였다.


대리석 욕조에 기대 앉은 채, 케이틀린이 물 아래에서 두 팔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감싸 안았다. 밤하늘과 같은 색을 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투명한 수면 위로 퍼져 그녀의 몸을 거의 다 가리다시피 했다. 물에 닿지 않은 머리카락 일부는 그녀의 어깨 위를 흐르고 있었다.


뚜렷한 서글픔이 터키색 눈동자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있었음에도, 그녀의 눈은 말없이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거대한 슬픔에 짓눌린 케이틀린은 자신이 한번도 가본적 없는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이었다. 제이스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케이틀린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케이틀린을 본다면, 바이는 도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한 마디 할 터였다. 이 생각은 슬픔에 잠긴 보안관에겐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바이가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의 마음에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불을 놓았다. 그녀의 머리는 말도 안 되는 가설들을 나열하는 데에 집중했고, 그녀의 가슴은 도로 봉합하기엔 너무 심하게 산산조각 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녀를 속에서부터 갉아먹는 병의 정체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두 손을 모아 물을 조금 떠 얼굴에 끼얹은 바람에, 잔잔했던 수면이 흔들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느릿하게 그녀의 살갗을 따라 떨어졌다. 그녀가 두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왜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케이틀린이 일그러진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속삭였다.


답은 명백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 대답을 알았다. 지금껏 그녀가 생각해온 것처럼, 그녀가 조금만 더 빨리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더라면. 바이의 마음을 수도 없이 거절했던 기억은 그녀의 아릿한 가슴의 통증을 끔찍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가끔 바이는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 아주 가깝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할 정도로 가까이. 그러나 최소한 바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전직 범죄자는 투명할 정도로 솔직해, 처음 케이틀린을 보았을 때 절대로 순수하지만은 않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까지 순순히 인정했다. 그때 그들은 케이틀린의 사무실에 있었다. 바이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서류를 몇 개인가 가져왔었고,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렀다.


바이는 처음엔 그저 케이틀린과 한 번 자보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만약 보안관이 그녀와 우정을 쌓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섹슈얼한 이득을 생각해 기꺼이 그러겠다고 마음먹은 것까지도. 케이틀린은 지금껏 아무에게도 육체적 이끌림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파트너로부터 이토록 노골적인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나마 예외를 두는 것에 대해 고려했다. 미안한 마음에 무언가 한마디 덧붙인 바이가 확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수습하기 위해, 멋쩍게 웃었다. 그녀가 케이틀린에게 보인 미소는 수줍지만 동시에 아주 눈부신 것이었다.


“내가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너한테.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했는데.”


바이가 겸연쩍게 웃으며 자신의 상관에게 말을 건넸다.


“바이.”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겐 당신의 그 바보 같은 장난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어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바이는 대답대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알아, 컵케이크. 안다고.”


바이가 조용히 자신이 뜻한 바를 알아들은 것을 본 케이틀린은 고개를 젓고 몸을 틀었다. 그녀는 바이와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의 서류에 몰두했다. 이 기억을 떠올린 케이틀린은 이미 돌덩이처럼 그녀를 짓누르던 후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케이틀린은 감히 두 번째 기회를 바랄 수 없었다.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이는 처음 그녀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그 태도가 바뀐 순간을 케이틀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어찌 보면 ‘양치기 소년’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둘 모두는 실수를 했다. 하지만 케이틀린은 더 빨리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스스로를 혐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녀에게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폐해진 채 스스로를 끝없이 학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제이스 또한 그것을 알았다. 아니, 진보의 도시에 사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자신이 불이 붙은 채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느껴졌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꽃이 그녀를 예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불이 그녀를 태우며 만들어낸 그림자는 눈 아래 검은 그늘로 나타나 있었다. 그녀가 꼼꼼하게 관리해왔던 모든 것을 놔버리고 완전히 주저앉은 이후로, 그 그늘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케이틀린은 마침내 욕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평소 입던 옷을 걸친 뒤 소총을 갈무리하고 집을 나섰다. 그녀는 경찰서에 갈 생각이 아니었다. 가봤자 그녀와 제이스의 날카로운 말다툼만 부를 터였다. 바이의 시신을 찾고자 하는 한, 그녀는 친구를 믿고 자신의 좋지 못한 상태를 회복해야 했다.


케이틀린은 전쟁학회로 이어지는 특별한 기차역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자동차를 운전해 공영 주차장에 그것을 주차한 뒤 기차를 탄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제껏 그녀가 스스로에게 해왔던 짓을 생각해보면, 아주 약간의 운동이라도 지금의 그녀에겐 필요한 것이었다.


케이틀린은 전쟁학회의 상임 의회에 리그에서 물러날 수 있을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챔피언십은 몇 달이나 남아있었고, 매일매일 경기가 열리긴 하였으나 그리 의미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영웅들은 급박한 이유로 인한 소환이 아닌 이상 경기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그녀에게 협곡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경기를 치를 여력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만약 그녀가 억지로 경기에 나가게 된다면, 그녀는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그녀의 팀에게 경기에서 패배해도 괜찮은지 물어봐야 할 터였다. 케이틀린은 이 이상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와 골칫거리를 짊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녀는 필트오버의 시민 몇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다가오는 경기에서 그녀의 무운을 기원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그녀가 리그의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만약 그들이, 향후 벌어질 경기에서 그녀가 물러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 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시민들에게 억지 미소조차 지어주지 못했다. 입가를 아주 약간이라도 끌어올리려는 그녀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 그녀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민들에게 무례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케이틀린은 즉시 열차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의 왼쪽으로는 두 개의 빈자리가, 마주본 좌석에는 세 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열차는 기관부와 연결된 차량이 두 개뿐이었다. 필트오버의 영웅들을 전쟁학회로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열차엔 그리 많은 공간이 필요치 않았다.


보안관은 필트오버의 다른 영웅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입구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 한 가지를 뜻했다. 그녀가 학회까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


“케이틀린!” 그녀의 왼편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보안관님.” 보다 차분하고 정중한 두 번째 목소리에선 기계음이 났다.


이 사회적 교류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틀린이 심호흡했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짧은 여행길에 찾아온 새로운 동료를 마주했다. 금속 내음과 희미한 코롱의 냄새가 났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즈리얼이 케이틀린의 왼쪽 자리에 앉았고, 오리아나는 태연한 얼굴을 한 하이머딩거가 맞은편 의자에 올라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오리아나가 친구처럼 대하며 무기로 사용하곤 하는 놋쇠 공은 객실 입구 근처에서 떠돌고 있었다. 케이틀린이 맡은 금속 냄새는 저기서 나는 것이었다. 하이머딩거의 옆에 오리아나가 앉고 나서야 네 명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보안관,” 하이머딩거가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고 앉아 말을 꺼냈다. “지난번 마주쳤을 때 보단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요.”


이즈리얼은 하이머딩거가 장님은 아닌지 의심하며 쳐다보았다. 무표정하게 조금 고개를 끄덕인 케이틀린은 그의 기준으로는 전혀 ‘좋아’보이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대화를 망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대화 주제를 리그에 대한 것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그래서, 어, 경기에 참가하러 가는 거야?”


“아뇨.”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래,” 이즈리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을만한 다른 질문을 떠올리려 애썼다. “뭐, 오리아나하고 딩거는 경기에 참가하러 간다더라고.”


“맞아요.” 하이머딩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 요들은 내심, 그들의 세 번째 동행자가 그들이 애초에 전쟁학회로 향하는 이유를 발설하지 않기를 바랐다.


“보안관님,” 부드럽지만 동시에 기계적인 음성이 조용한 객실 안을 울렸다.


하이머딩거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도 오리아나를 말릴 수는 없을 터였다. 만약 그가 오리아나의 입을 막는다 해도, 케이틀린이 그들에게서 진실을 캐낼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즈리얼은 왜 상임 의회가 그와 오리아나를 함께 불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여행의 원래 목적을 감추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리아나의 부름에 케이틀린은 대답 대신 멍한 표정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의 현재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상관없이, 상임 의회는 우리에게 특별한 일을 수행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이 일은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네요.”


하이머딩거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결심한 반면, 이즈리얼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즈리얼의 곁에서 케이틀린 또한 눈을 가늘게 뜨고 오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질 말이 중요한 것임을 짐작한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오리아나 쪽으로 아주 조금 몸을 기울였다.


“어떤 일이죠, 오리아나?”


“상임 의회는,” 오리아나는 자신이 할 말이 케이틀린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하이머딩거와 제게, 필트오버의 집행자가 방에 남긴 유품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뭐라구요?” 그것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케이틀린의 시선은 조금 부드러워졌으나, 눈은 여전히 가늘게 뜬 상태였다. 그녀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에헴, 에, 그 말대로예요.” 하이머딩거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꾸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오리아나가 말하도록 내버려뒀다간, 그녀는 케이틀린의 불안정한 마음 속 깊은 곳의 방아쇠를 당겨버릴지도 몰랐다. “콜미녜 상임 의원이 우리에게 학회에 남아있는 바이의 짐을 치워줄 수 있겠냐고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들이 당신에게 ‘치워달라고’ 했나요?”


“우린 바이 경관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필트오버로 돌아와 그걸 당신에게 전하려 했어요. 하지만, 뭐…” 하이머딩거가 잠시 오리아나에게 시선을 준 뒤 덧붙였다. “…오리아나가 먼저 말해버렸군요.”


처음에 이즈리얼은 이 분위기를 어색하고 긴장된 것으로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오리아나가 입을 열자, 그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상황은 나쁘게 흘러갔다. 숨막히는 분위기 속 그는 하이머딩거가 말없이 자신에게 보내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오리아나의 말이 맞아.” 이즈리얼이 케이틀린에게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이가 늘 놀리곤 하던 인상적인 모자를 쓰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은 옷차림을 한 케이틀린의 모습은, 이즈리얼의 눈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넌 바이의 파트너잖아. 바이도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주는 게 너라면 정말 기뻐할 거야.”


케이틀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에 온전히 맞설 기회를 준 것이다. 바이가 전쟁학회에 남겨둔 것들을 모두 정리하는 것은 그녀에게 지독한 감정적 고통을 줄 터였다. 특히나 그것이 그녀가 바이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떠올릴만한 물건들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 일이 그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라도, 그녀는 이것이 그녀가 이겨내야 할 애달픈 일임을 알았다.


“혼자…있고 싶어요.” 케이틀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저편으로 향했다. 그녀가 작은 객실의 입구로 가자, 오리아나의 둥근 구체는 그것의 주인이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도착하면 상임 의회에 말해둘게요.” 하이머딩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케이틀린이 어깨 너머로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른 객실로 건너가버렸다. 조용한 탁 소리와 함께 객실 문을 닫은 그녀가 다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필트오버의 친구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세 영웅이 그녀가 원하는 고독을 존중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케이틀린은, 그들이 자신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케이틀린이 소리가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버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즈리얼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 앞에 앉은 두 명의 동행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의 얼굴은 평소의 낙천적인 성격과는 달리 매우 낙담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걱정돼.” 이즈리얼이 중얼거렸다. “케이트가 바이의 죽음에 이 정도로 영향을 받을 줄은 몰랐어.”


“우리 모두 침통해하고 있죠.” 놀랍게도,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오리아나였다.


“오리아나, 너도 정말 슬픈 거야?”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모두가 슬퍼하고 있죠.” 오리아나와 이즈리얼의 대화가 다툼으로 번지기 전 하이머딩거가 끼어들었다. 그는 특히나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이즈리얼이 불러올 말다툼이 걱정되었다. “우린 바이를 친구로 여겼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위해 애도하고 있을 뿐이에요.”


콧방귀를 뀌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이즈리얼이 시선을 돌렸다. “그냥 걱정돼서 그래. 케이트가 저렇게 행동하는 건 처음 본단 말이야.”


“그녀의 반응은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리아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이즈리얼을 짜증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상적’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가 기대고 있던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고 케이틀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삿대질했다. “지금껏 케이틀린이 어떤 상태였는지 제이스한테 다 들었어. 오리아나, 그녀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고!”


“그건 그녀가 함께하길 갈망했던 사람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죠.”


이즈리얼이 다시 한번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그는 바이가 언제나 케이틀린을 데이트에 불러내는 것에 실패했다고 얘기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예전엔 가능했는데.”


오리아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에는 가능했다니요?”


“손을 뻗어 바이를 붙잡는 것이 가능했단 말이야.” 그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다. “케이틀린은 그저, 바이가 그곳에 있었을 때엔 그녀를 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처음부터 그녀가 바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건가요?”


“오리아나,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겁니다.” 하이머딩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곧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지 못하죠.”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하이머딩거가 말하려 한 건,” 이즈리얼은 하이머딩거의 말을 보다 간결하게 전하기로 결심했다. “케이틀린은 단 한 번도 바이를 원한 적 없다는 뜻이야. 그녀에겐 바이가 필요했어. 그저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지만.”


“그리고 때때로,” 하이머딩거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회하기엔 때가 너무 늦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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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겐 자신의 뜻을 상임 의회에 전할 기회조차 없었다. 케이틀린이 전쟁학회에 도착해 콜미녜 상원 의원을 만나자마자, 검은 머리카락을 한 그 의원은 바이의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한 뒤 케이틀린에게 어떠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콜미녜는 케이틀린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리그의 영웅들의 상태를 돌보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었다. 특히나 그것이 그들의 안녕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케이틀린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본인의 생각을 말할 틈도 없이, 마치 독심술사라도 되는 것처럼 콜미녜는 그녀에게 이젠 비어버린 바이의 방에 있는 유품을 정리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케이틀린은 하이머딩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먼저 콜미녜 의원을 만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최소한 지난 며칠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녀 뜻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열쇠를 받아 든 케이틀린이 한 때 바이가 썼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꽤 넓은 방으로 들어가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있지는 않았으나, 케이틀린은 바이의 물건 대부분이 침실 쪽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녀는 숙소에 딸린 비좁은 거실 겸 주방을 지나 작은 침실 쪽으로 향했다.


침대 위 이불이 흐트러져 있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얇게 먼지가 쌓인 방의 상태는 그 주인이 얼마나 오래 자리를 비웠는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는 케이틀린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고개를 저은 그녀가 고통스러운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밀어내고 본래 하려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바이는 방에 가방 몇 개에 전부 들어갈 만큼의 옷가지들만 놓아두었다. 그래서 케이틀린이 옷장에서 꺼낸 두 개의 더플 백에 짐을 모조리 집어넣기까지는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방들을 거실의 2인용 소파에 올려둔 뒤, 그녀는 남은 잡동사니를 수습하기 위해 침실로 돌아왔다.


나머지 가방 하나에 잡다한 물건들을 모두 집어넣던 케이틀린이 침대 밑에 놓여있던 검은 비닐 가방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 비닐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비닐 안에는 보라색 포장지와 금색 리본으로 장식된 얇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선물이었다.


케이틀린은 포장을 뜯기 전 조금 망설였다. 그녀의 심장이 속도를 높여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선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케이틀린이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개를 들어 방 한 켠에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한 뒤, 상자의 겉모습을 살폈다. 그녀가 선물을 짧게 살펴보는 동안, 마구 뛰어댔던 그녀의 심장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편지도, 카드도, 아무것도 없었다. 보라색 상자엔 오직 리본만이 매어져 있었다.


케이틀린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리본을 풀어낸 뒤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이가 찢기는 소리, 그리고 그것이 옆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방을 메웠다. 포장을 완전히 뜯어낸 케이틀린이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의 덮개를 들어올렸다.


천천히 옆으로 치워진 덮개 아래에 자리한 물건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보라색 가죽 재킷이었다.


옷 위에는 접힌 종이가 한 장 놓여있었다.


편지였다.


케이틀린이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그녀는 눈물 젖은 눈으로 휘갈겨 써진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안녕, 컵케이크! 아마 넌 기억 못하겠지만, 오늘은 네가 몇 년 전 날 거리에서 구해준 날이야. 그래, 난 기억하고 있다구! 놀랐지? 어쨌든, 내가 재킷을 샀던 곳에서 운 좋게 이걸 발견했어. 너도 아는, 내가 매일 입는 그 재킷 말이야. 보안관님, 뭐 짐작되는 거 없어? 이 재킷을 본 순간, 문득 네가 떠올랐어. 네가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건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니지만. 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테지. 내 두 팔로 널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게 되기 전 까지는, 이 옷이 널 따뜻하게 해 줄 거야. (이걸 읽고 나서 날 해고하지는 말아줘)

-바이(엄청 강하고 멋진 파트너)로부터.


편지의 마지막 줄까지 읽어내린 케이틀린이 가쁜 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녀의 눈이 죽어버린 파트너의 난잡한 서명에 머물렀다. 편지를 읽는 동안 그녀는 편지의 내용을 읽어주는 바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케이틀린은 바이가 만약 곁에 있었다면, 특유의 삐딱한 미소, 혹은 쑥스러운 웃음과 함께 편지의 내용을 말해주었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편지의 중간까지 읽었을 즈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쯤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도로 편지를 접어 재킷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상자를 다시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달 전 바이가 그녀에게 주려 했던 선물을 더플 백 옆에 놓은 뒤, 케이틀린은 남은 한 시간 동안 바이의 나머지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바이가 머물렀던 곳을 치우고 짐을 싸는 모든 순간이 그녀에게는 깊은 슬픔이자 부드러운 달콤함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다시 열차에 몸을 싣기 위해 학회 밖으로 향했다. 바이의 잡동사니를 담은 가방을 든 케이틀린을 도와 나머지 더플 백을 손에 든 전쟁학회의 경비병이 그녀를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건물 밖의 풍경을 보며, 케이틀린은 역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아까 지났던 곳을 다시 걷던 그녀는 안타까운 얼굴을 한 소라카와 소나가 그녀에게 말없이 조의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외에는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고, 인사조차 나눌 일이 없었다.


열차에 자리잡고 앉은 케이틀린이 조용히 한숨을 쉬고 가죽 옷에 덮인 팔을 짧게 문질렀다. 그녀는 바이가 건네고자 했던 선물인 재킷을 입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것은 바이의 팔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이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맑은 미소가 케이틀린의 입가에 머물렀다.


“고마워요,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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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관과 떨어져 있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그를 속부터 갉아먹기 시작한 욕망은 압도적이었다. 새 재킷을 입은 케이틀린이 집으로 돌아가는 광경은 그 관찰자에게 있어서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다.


회색 후드를 쓴 자가 멀리서 흠모가 담긴 눈으로 케이틀린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 속 욕구는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자신 아래에서 떠는 아름다운 보안관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아주 황홀한 욕망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과 불규칙한 호흡, 그리고 은밀한 신음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입술…


정말이지 볼만한 광경일 터였다.


“케이트, 금방 돌아올 거라 약속할게.”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그가 근처 골목의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 본래 있던 곳으로 향하는 그는 자신이 흠뻑 빠진 한 여인과의 미래를 그리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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