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 씨, 잠깐 나 좀 볼까?"

이제 막 점심시간이 끝나 안 그래도 피로가 최고조에 다한 때에 자신을 부르는 상사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짜증이 서려 있었기에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 안의 시선들이 잠시 그녀에게 쏠렸다가 괜한 불똥이 튈세라 금방 흩어졌다. 화이팅. 옆자리의 입사 동기만이 입 모양으로 응원을 건넬 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니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항상 나긋하고 인자한 태도와 천사표 미소로 세인트 유은이라는 다소 민망한 별명을 가진 마케팅 3부의 성유은 팀장이 부하 직원을, 그것도 한 명만을 작정한 듯 갈구는 모습은 여전히 모두에게 신선하고도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찡그린 눈가를 애써 눈웃음으로 둔갑시킨 다음 복도로 나서자 시연의 눈엔 팔짱을 낀 채 돌아선 유은의 모습이 보였다. 최근 들어 너무 익숙해진 감정표현.

"저, 팀장님?"

조심스럽게 유은을 부르며 한 발짝 다가섰으나 그녀는 계단을 한 칸 올라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유은이 계단 두 칸을 오르자 그제야 둘의 머리가 비슷한 높이에 놓였다. 그녀는 이런 둘의 키 차이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눈을 마주칠 때 시연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는 게 싫다나. 하아. 시연이 이번에는 조금 더 큰 한숨 소리를 냈다.

"이번엔 뭐 땜에 그러는데."

그 귀찮아하는 말투와 목소리가 유은의 화를 돋군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걸까. 유은은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뒤에 선 시연을 욕하며 눈을 흘겼다. 그사이 시연은 그 길쭉한 다리를 뽐내듯 성큼성큼 다가와 유은의 뒤에 섰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숨결은 조금 전의 한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에 삐쭉거리던 유은의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 손길에 굳게 잠겨있던 팔짱 역시 금세 풀려버렸다.

시연과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번만큼은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한들 시연은 힘도 들이지 않고 유은의 굳은 의지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누군가 복도로 나오면 어쩌려고 하는지 시연은 유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래서, 왜 삐졌던 거야?"

삐진 거 아니거든, 이라는 무의미한 반박은 그저 답을 미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간파한 시연이 목덜미에 집요하게 뜨거운 바람을 불자 유은은 순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커플링."
"뭐?"
"션, 벌써 며칠째 커플링 안 입고 있으니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유치하게 느껴졌는지 유은이 말끝을 흐렸다.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귓불을 보며 시연은 피식 웃었고, 그 소리에 유은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회사에서는 비밀로 하자고 먼저 말했던 건 윤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안 할 테니까 션이 끼워줬으면 했단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눈독 들일지도 모르는걸. 단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얘기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유은을 보며 시연은 황당함에 코웃음을 쳤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빛은 유은이 사랑스러워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잘하고 다닐게. 내일 가져다줘."

끝에 덧붙인 시연의 부탁에 유은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유은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내 커플링, 윤네 집에 있잖아. 침대 옆에."

조금 진정됐던 유은의 귓볼이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