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다

똑같이 생긴 수십명의 까만머리 여아들의 건강상태와 정신적 안정성을 점검하고 전투기능을 저해하는 변이가 일어났거나 호전성이 부족하거나 이사회의 기대치보다 지나치게 자의식이 발달한 불량품 여아들은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검사실로 보내버리는게 일인 만성 수면부족 인텔리 박사님이 보고싶다

근데 몸은 좀 동급에 비해 비실비실한데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좋아서 항상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여아 773-359번이 정기검진을 받다가 제 자매들이 절 기억해버리기 전에 어서 처분해달라고 부탁하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검사를 멈추고는 검사실로 간다고 해서 꼭 처분당하는게 아닌건 둘째치고 우리 훈련생은 왜 그런 부탁을 하는거냐고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채로 질문하는 근무 초기의 신입 박사님이 보고싶다

영혼없는 새까만 눈으로 다른 훈련생들은 죄다 엄마나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박사를 올려다보면서 제가 하루라도 더 자매들과 함께하면 제가 쓰던 침대를 볼때마다, 제 번호가 달려있는 유니폼을 다른 자매가 입은걸 볼때마다 가슴아파할 자매가 많아질거라고 말하면서 처분된 후에도 누군가의 머릿속에 머물며 폐를 끼치고 싶진 않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 가엾은 모습에 감봉될것을 감수하고 차트에 장난질을 좀 쳐서 정상처리 시켜준다음에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고는 박사님이 기회를 한번 준거니까 멋지게 살아남아서 당당하게 모두에게 기억되라고 말해주는게 보고싶다

대략 8년쯤 지나자 자기보다 키 크고 근육질에 지능적이고 유능한 이사회의 최선임 살인기계로 성장해버린 꼬마의 전속 의무담당으로 픽업당해버린 박사님이 보고싶다

옛날의 앳되고 철학적이기까지 했던 음울한 그림자따윈 싹 날아가버리고 조증수준의 쾌활함으로 넘쳐나는 강하병이 전주인의 팔뚝째로 예쁜 컴링크를 노획해온다던가 등짝과 전용 아머에 형광 나노필라멘트로 강습병과 문신을 박아넣는다던가 하는 정신나간 짓을 벌일때마다 탄탄하고 육감적인 등짝을 팡팡 갈기면서 그때 확 검사실로 보내버렸어야 했다고 타박을 해대는 박사님과 저도 박사님이 좋다고 맞받아치는 강습병 여아쟝이 보고싶다

둘이서 격하게 몸을 섞고 난 후에 축 늘어진 알몸으로 나란히 누워서 강하병의 복근에 새겨진 오래묵은 흉터를 어루만지며 내가 네 나이였을 적에는 스테이션 안에 있는 실내공원에서 아무 걱정 없이 인라인 스케이트나 타곤 했었는데 넌 신경링크 강하복으로 온몸을 감싼채로 곰만한 갑충들에게 총을 갈기고 연방 전함 함교를 뚫고 들어가서 연방 보안요원들과 주먹다짐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감상에 젖어있는데 가만히 눈을 감고있던 강하병이 혹시 지금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는 거냐고 물어보는거지

박사가 대충 그런게 아닐까 하고 대꾸하자 킥킥 웃으면서 당신 지금 주먹질 한방으로 당신 머리를 박살내놓을수 있는 유전공학 흉물한테 미안해하는 거냐고 놀려먹으면서 박사님의 가슴에 고개를 콕 파묻고는 거진 십년만에 선생님을 올려다보면서 난 당신이 듣기만 해도 질색을 할 일을 위해서 만들어진 몸이라고, 당신과 스테이션 사람들이 쓸 전기와 물과 식량과 광물을 지키려고 한 짓 중에 내가 후회하는 일은 없다고 속삭이는 강하병이 보고싶다

분위기가 착 내려앉자 이불을 돌돌 말아 자기가 홀라당 뺏어가면서 게다가 난 당신한테 목숨빚도 진 몸이니 빚을 갚으려면 모두의 기억 속에 존나 강렬하게 빛나는 섹시한 미친년으로 남아줘야 한다고 해맑게 외치고는 뭐라고 하기도 전에 코까지 골며 숙면하는 강하병과 이불 뺏어갈거면 하다못해 실내 난방이라도 틀어달라면서 탄탄한 맨궁둥이를 찰싹찰싹 때려대다가 발게진 빵댕이보다 때리는 자기 손이 더 아파지자 결국 포기하고 외투 한장 걸친채로 오들오들 떨면서 썅련 저거 어릴땐 나름 귀여웠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면서 긴긴 밤을 지새는 박사님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