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초조함과 절망감에 짓눌려 이성을 잃고 돌진한 사요는, 당연히 튕겨나갈 줄 알았던 자신의 칼이 히나의 배를 관통하자 크게 당황해.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히나의

"...언...니?"

미약한 목소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겠지. 분명 테이머의 말대로라면 히나는 세뇌에 걸려 기억은 물론이고 인격까지 빼앗겼을 텐데. 어째서 날 알아보는 거야? 머릿속의 의문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히나는 사요의 눈앞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사요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지. 이 아이가 히나이든 아니든 일단 살려야 하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포션은 한 병도 보이지 않고, 지금 밖으로 나가 힐러를 불러오자니 히나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상황에 힐러를 데려올 시간은 없는 거야. 물론 사요도 회복마법을 어께너머로 몇번 보긴 했지만, 회복마법은 마법들 중에서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고위 마법이라서 제대로 영창하지 못하면 시전자의 마력 낭비가 엄청나거든.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고민하던 사요는 이내 자신의 품 안에서 위태롭게 숨을 쉬는 히나의 얼굴을 봐. 그리곤 마음을 굳게 먹고 히나를 바닥에 눕힌 뒤 위험을 무릅쓰고 회복마법을 영창하지. 불완전한 영창이라 중간중간 고비가 있었지만 사요는 자기 몸 안의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겨우 히나의 출혈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지. 하지만 이미 흘린 피까지 회복시키는 건 무리였어. 일단 급한 고비는 넘겼으니 회복술사를 찾으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사요는 지친 몸을 일으키는데 막 깨어난 히나가 희미한 목소리로 사요를 불러.

"...언니..."

사요가 뒤를 돌아보니 히나가 사요를 바라보며 손을 뻗고 있겠지. 사요는 주저없이 히나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아줘.

"말하지 말고 쉬어. 피를 많이 흘렸어."

"...언니...맞아? 정말, 언니야?"

"...그래, 맞아. 네 언니 사요야."

"아..."

히나는 눈물을 글썽이다 사요의 품에 안겨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

"언니. 언니. 나...언니가 기억이 안 나. 아무것도...기억나지 않아."

"히나."

"하지만...그래도...보고 싶었어. 언니..."

자신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 사요는 조금 당황하지만, 이내 모든 것을 깨달아. 

세뇌가 제대로 걸리지 않은 거구나. 이따금 실력 없는 아법사가 어설픈 세뇌마법을 시전했다가 불안정한 세뇌가 걸리는 경우가 있거든. 그런 사람들은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거나, 없어져야 할 과거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거나 하지. 하지만 사요는 알 수 있었어. 히나에게 시전된 세뇌마법은 결코 어설픈 것이 아니었다는 걸. 

끝까지 싸운 거구나, 히나. 날 위해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거구나. 그래서 기억이 없어도 날 알아봐준 거구나.

고마워. 히나. 정말 사랑해.

마음속의 여러 감정을 담아 사요는 품 안의 히나를 꼭 안아주고,

히나의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검은 전류를 보게 되겠지.

"...히나?!"

그리고 다음 순간 히나의 몸이 펄쩍 뛰어오르고 히나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 사요는 크게 당황하지. 마법 자체는 사요도 아는 저주였어. 흑마술사가 잘 쓰는, 생명력을 엄청난 고통과 함께 흡수하는 저주 '드레인'이었지. 하지만 누가 저주를 걸고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던 사요는 감옥의 창살 너머에서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는 테이머를 발견해. 머리끝까지 분노한 사요는 검을 고쳐잡지만 히나의 목숨이 저 작자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물론 단번에 죽여버리면 마법도 끊기겠지만, 그럼 히나의 기억은 영영 사라지고 말 거야. 사요가 히나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고 있던 테이머는 거기까지 계산하고 히나에게 몰래 저주를 걸었던 거지. 

테이머는 사요에게 다른 기사들이 오기 전에 자신을 성 밖으로 데려가라고 해. 그러지 않고 도움을 청하려 하면 단번에 히나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들일 거라고 협박하겠지. 사요는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다가 체념한 표정으로 감옥으로 다가가겠지. 그리고 감옥 문을 열고 망설임 없이 단칼에 테이머의 심장을 꿰뚫어버려.

공격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테이머는 고통 때문에 집중력이 흩어지고, 저주는 깨지게 되지. 죽어가는 테이머는 마지막 발악으로 사요에게 자신이 죽으면 과거의 히나도 같이 죽는 것이라고 소리지르지만, 사요는 동요하지 않고 맞받아치겠지.

"상관 없어. 날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조금 달라졌다 해도. 히나는 언제나 내 동생이야."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러 테이머의 목숨을 끊어버리겠지.

여러모로 완전히 지쳐버린 사요는 힐러를 불러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비틀비틀 히나의 곁에 돌아와 쓰러지지. 그리고 어느새 다시 기절한 히나의 얼굴을 쓰다듬고 의식을 잃어. 다음날 아침이 되서야 소꿉친구인 유키나를 찾아다니던 힐러 견습생 이마이 리사가 감옥에 널브러져 있는 세 사람과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하지. 그리고 기겁하고선 기사단의 고위 마법사인 시로카네 린코를 불러와. 린코의 회복마법으로 세 사람은 완전히 치유되고, 테이머에 대해선 탈옥을 시도하던 테이머를 사요가 발견해 즉결처형했다는 식으로 공표하지. 사실대로 말하면 히나에게 암살자라는 낙인이 찍힐 게 분명해서 유키나가 특별히 히나와 사요를 배려해준 거야. 

자신을 꺾은 히나의 엄청난 실력을 눈여겨본 유키나는 히나에게 청장미 기사단에 들어오길 권유해. 하지만 히나는 고민 끝에 거절하지. 기사들을 공격한 전적이 있는 자신이 기사단에 들어가긴 조금 그렇고, 무엇보다 갚을 빛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유키나에 의해 강제 휴가 상태가 된 사요와 히나는 정말 오랜만에-기억이 없는 히나에겐 처음으로-자매로서 평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게 되지. 자신이 기억도 없고 인격도 예전의 히나와는 조금은 다르다는 걸 아는 히나는 자신이 사요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건지 불안해하지만, 사요는 그런 히나를 매번 안심시키겠지.

"괜찮아, 히나. 비록 예전의 추억은 사라졌지만, 둘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나가자. 그러면 되는 거잖니?"

그렇게 한 달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히나는 다시 떠나.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었던 포핀 파티의 모험가들, 대장장이 마야와 무사 이브에게 감사인사를 하며 왕국을 돌아다니겠지. 그 후엔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다니며 밤마다 산길에서 마물의 습격을 받는 여행객들, 모험가들, 아이들을 구출하고 마물을 사냥하며 다닐 거야. 그리고 한 달의 한 번, 그 달의 마지막 날마다 몰래 성에 들어와 사요의 방을 찾아가겠지. 사요는 언제나 웃으며 히나를 반겨 주고, 두 자매는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밤을 세워 하겠지. 그리고 왕국엔 이제 암살자의 소문 대신, 밤마다 마물을 사냥하고 민간인을 구출하는 한 모험가의 소문이 퍼져나갈 거야.

새드엔딩을 기대하셨나요? 아쉽군요! 해피해피한 엔딩이었습니다!

여지껏 읽어주신 분들 감사해요(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