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우우우우 -
누가 들어도 영락없는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공주와 여인의 고막을 울려댔다. 이방인에게 폭 안겨있던 것이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로, 공주는 왼쪽발을 지렛대 삼아 최대한 날렵하게 바위에 기댄 체 일어서서 그 자리에서 주변을 살폈다. 저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 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황소의 뿔을 깎아서 만든 뿔피리. 몽골의 아이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갖고 노는 친숙한 물건이지만, 백 리 바깥까지 울리는 이 낮고 묵직한 소리는 목표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의미, 또는 전투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황실 기병대만이 쓸 수 있는 뿔피리 소리였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고작 하루만에 날 찾아내다니. 공주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기대조차 안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에 옆에서 천이 펄럭대며 인기척을 냈다. 공주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순간 잊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자신을 어젯 밤 내내 품어주던 다정한 여인의 존재를.
공주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자 역시나 여인이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놀란 얼굴로 공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놀랐다기보다는 황망한 얼굴에 가까웠다. 활을 들이대는 와중에도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추며 공주를 치료해 주고 평정심을 유지하던 여인의 얼굴이 가여울 정도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두려운 것일까. 자신에겐 기쁨과 안도감을 주는 저 소리가 여인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동정심인지, 안쓰러움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공주의 마음 한 구석이 이상하게 싸르르했다.
알 수는 없으나 여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랬다. 그녀의 그런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겁먹을 것 없다고,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의미가 통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을지.
잠깐 고민하다, 공주의 작은 손이 여인의 떨리는 어깨로 천천히 다가갔다. 손바닥이 거의 그녀의 어깨에 닿을랑 말랑 하는 순간, 왠 검은 물체가 쏜살같이 뛰어나와 그 둘을 덮쳤다.
*
“검은화살! 너였구나.”
검은 말이 푸르르- 하고 대답하듯 소리를 내며 얼굴을 공주에게로 들이밀었다.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다시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설마 제 발로 황궁까지 찾아갔다가 날 찾으러 다시 돌아와 준 걸까.
말의 커다란 두 눈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 바라보자 공주는 자신의 눈에도 왠지 물기가 맺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사와 애정의 마음을 담아서 공주가 말의 옆 얼굴을 쓰다듬는데, 가죽 갑옷과 활로 무장한 몇십명의 기마병들이 그 뒤를 따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황실 정예 기병대의 상징인 붉은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거렸다.
“공주님! 괜찮으신 거에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사람들의 선봉에 바드마가 있었다.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리자마자 공주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얼굴에 말라 붙은 눈물 줄기 같은 것이 보였다. 자신을 찾느라 밤새 울면서 돌아다녔을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공주는 반가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공주님, 다리는 왜 또 이 모양이구요. 머리에 이 말라붙은 건 뭐...”
바드마가 울먹거리며 달려와 공주의 얼굴과 온 몸을 만지며 말을 쏟아냈다. 그리운 얼굴 중 하나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찡함에 공주가 멈칫거리며 나 괜찮아, 별로 안 다쳤어. 라고 말하며 괜히 두 손을 멀쩡한 듯 양 옆으로 살짝 펼쳤다. 걱정하지 말란 뜻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눈물이 그렁거리던 바드마의 눈빛이 점점 살벌해지자 정작 공주는 눈물이 쏙, 들어가버렸다.
“뭐가 괜찮다는 거에요! 이것 봐요. 제가 그렇게 멀리 나가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머리엔 피로 까치집을 짓고 오른쪽 다리는... 설마 부러지신 거에요?”
바드마가 상태를 확인하듯 다리를 예고없이 만지자, 공주가 참지 못하고 아윽! 하고 신음을 냈다. 아픈 사람은 저인데 지금 당장 숨 넘어갈 듯 보이는 사람은 공주가 세상의 전부인 가엾은 시종이었다. 또 호들갑을 떨 것이 분명하여 공주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조금 더 가려던 게 길을 잘못 들어서 절벽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근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았어? 검은화살을 타고 거의 반나절을 꼬박 달렸는데. 그것도 이렇게 깊은 산중턱까지?”
“그 검은 화살이 이곳으로 안내했어요. 해가 지는데도 공주님이 나타나질 않으니 황궁이 발칵 뒤집혀서... 못찾으면 다들 참수형에 처한다며 칸께서 어찌나 노발대발 하셨는지 몰라요. 그러는 와중에 검은 화살이 안장도 주인도 잃어버린 채로 떡하니 와서는... 소매만 자꾸 잡아끄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가자는 데로 따라왔더니...”
바드마가 다시 울먹거렸다. 주변을 빙 둘러싼 기병대의 얼굴에도 피로가 묻어났다. 밤새 달려서 검은 화살이 이끄는 대로 와준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말에 대한 애정이 샘솟아 고개를 말 쪽으로 돌리는 와중에 기병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 여기 색목인이 있다! 잡아라! ”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살짝 돋는 것을 느끼며 공주가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면서.
*
낭패다.
앙겔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이가 깨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이곳을 떴어야 했다. 밤새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아이를 위해 불 옆을 꺼지지 않게 지켰던 것이 푹 잠들어버리는 통에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밋밋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어딘지 살짝 화려한 전통옷을 받쳐입고 있더라니, 평범한 타타르족 아이가 아닐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 몇년 간, 의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살짝 무지했던 앙겔라조차도 그들이 떨친 악명을 잘 알고 있었다.
골든 호드, 황금 제국이라 불리우는 동쪽의 야만인들. 또 다른 그들을 칭하는 말로 서방국가들은 타타르족(몽골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침략을 직접 겪어본 키에프 공국의 탈영병 출신 부랑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내려온 악마들’ 이라고 했다.
그의 겁에 질린 눈동자는 결코 잊혀지지 않고 이곳을 지나가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라 그녀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폴란드의 그 유명한 튜튼 기사단마저 그들에게 대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녀의 국가와 그 주변 나라들까지도 한동안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그 나라.
결코 지나가고 싶지 않은 나라였지만 동쪽의 대국인 세레스(중국)로 가기 위해서는 가로질러 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해상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피할 수 없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보단 육지로 가는 방법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기에 앙겔라는 주저없이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동안은 나름 잘 처신해왔다고 할 수 있었다. 최대한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고 물자가 떨어지거나 꼭 필요할 때에만 의사로서의 의술과 지식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며 위험을 피해왔다. 새로운 사람과 문화를 접하는 것이 이 여행의 또다른 목적이기도 하였지만 그 때문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앙겔라는 자신이 살아온 삼십년이 넘는 세월 중 바로 지금이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확신했다.
‘그들’을 상징하는 공포의 붉은 깃발. 황금 제국의 기병대를 뒤로 하고 당당히 그들을 맞이하고 선 저 아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딘가 피곤에 쩔어있는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저 아이 하나만을 추적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이 나라의 귀족이나 왕족같은 존재일까. 앙겔라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다행스럽게도, 저들도 아이를 방금 찾은 순간에 자신이 깬 모양이었다. 나름의 전열이 늘어서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것이 그 증거였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망토를 재빨리 뒤집어쓰고 뒷편으로 살짝 빠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몇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어젯밤 기대어 잠을 청했던 나무 뒤로 빠져나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숨을 죽이고 천천히, 발을 옮기는 데 어제 자른 나뭇가지 중 하나를 잘 못 밟았는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 기병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앙겔라는 온 몸의 힘을 다해 몸을 돌려 도망쳤다. 두건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잿빛색 황금 머리카락이 허공에 사라락 흩날렸다.
“энд хэн байна! бариарай! (여기 색목인이 있다! 잡아라!)”
기병의 외침이 등 바로 뒤에서 들렸다. 필사적으로 도망갔지만, 말을 탄 무장 병사들에게는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서늘한 기운이 바로 등 뒤로 다가오는 듯하더니, 그녀는 금방 억센 손길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윽!”
앙겔라가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짐과 동시에 병사들 두 어명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자객으로 오해받았는지 뭔지는 몰라도 그녀를 다루는 병사들의 손길이 아주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퍼억-
병사의 발이 앙겔라의 등을 짓밟았다. 생각보다 엄청난 고통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림과 동시에 다른 병사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몸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높이 올라가는 걸 보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하는 거야! 지금 내 명령도 없이 이 자를 때리는 거야?”
구타가 딱 멈췄다. 숨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천천히 눈을 뜨자, 아이가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볼 수 있었다. 왜 저렇게 화를 내고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그녀의 고함 덕분에 생명을 건진 것만은 확실해보였다. 지금까지는.
“공주님 바로 옆에서 몸을 숨겨서 무슨 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투르크들의 첩자일까요?”
“아, 첩자는 무슨! 이 자는 투르크족도 아니라고!”
“예? 하지만 머리색이나 눈 같은게 영락없는 투르크인인데...”
“이 자의 언어는 투르크인들이랑 전혀 달라. 머리색이랑 눈 가지고 같은 자들로 몰고 가다니. 남쪽의 일 칸국이나 동쪽의 원이랑 우리가 같아? 그들도 우리랑 똑같은 머리색이랑 눈을 가지고 있는데?”
공주가 흥분하여 삿대질을 하며 병사를 다그쳤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도 하고, 공주에게 더 이상 대들수도 없어서 병사의 단단한 어깨가 안쓰럽게 축 쳐져가고 있었다.
“만약 투르크인이 아니라면, 비잔티움 제국(동유럽) 쪽에서 흘러온 사절일 수도 있잖아. 함부로 손 댔다가 난리날 수도 있는 일-”
“...그리고 투르크인 일수도 있는 법이죠.”
병사보다 한척은 더 큰, 장골의 사내가 공주의 앞에 떡하니 섰다. 머리에 쓴 발립 중앙에 달린 커다란 매의 깃털과 흉터가 자리잡은 그의 두 눈에서 굳센 의지와 완고한 고집 같은 것이 보였다. 그 많은 기병대 중에 하필 이자의 군대였다니. 공주의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뛰어난 용맹과 무용으로 어머니가 특별히 아끼는 장군 중 하나였다. 이름이 아르크였나, 아크나르였나. 알게 뭐람.
공주가 티나지 않게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녀가 일부러 이름도 외우지 않을 정도로 이 자를 특히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강인한 전사였지만, 그만큼 지나치게 완고한 사람이었다. 원리 원칙에 맞춰 명령받은 대로 칼같이 진행하는,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칸의 명령이라 할 지라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 자.
그야말로 제 멋대로 사는 걸 좋아하는 공주에겐 천적과도 같은 성향이었다. 몇 번 어머니께 고자질하듯 항소를 올리긴 했지만 그때마다 충실한 자이니 곁에 두고 다니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이나 들었다. 물론 공주가 어머니의 말을 들을리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 자는 몸을 숨기려고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얼 믿고 그렇게 아니라 확신하시는지요? 처음보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저 위 절벽에서 낙마했었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다리는 부러졌는지 꼼짝도 못하고 있었지. 그때 저 사람이 나타나서 치료해줬어. 고통이 사라지는 신기한 가루도 주고...”
절벽에서 낙마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대목에서 바드마가 또 숨을 헉, 허고 들이쉬며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공주는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 가루를 먹고 잠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저 사람이 날... 어... ‘재워주고’ 있었어. 확실한 건 저 색목인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거야.”
차마 여인의 품속에 안겨서 하룻밤을 보낸 덕분, 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공주는 ‘재워줬다’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오늘 아침에 깨어났을 땐 단순히 기분좋단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니 얼굴이 살짝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이들이 좀 더 늦게 왔으면 그 품을 좀 더 즐기면서 누워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공주였다. 그녀의 딴 생각을 자르며 장군이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공주님. 우리 대국이 세워진 이래 사절단으로 방문하지 않고서 이렇게 황성 가까이 혼자 접근한 이방인은 없었습니다. 특히 투르크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닐 경우 접근 시 목숨을 뺏어도 좋다는 황명까지 있지 않습니까. 치료를 해준 것도 모자라 보살펴주기까지 하다니. 공주님께서도 처음 본 자인데, 무슨 꿍꿍이로 그랬는 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공주가 여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제로 무릎꿇은 채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의 지친 얼굴이 보였다. 병사들과 몸싸움을 하며 바닥에 쓸렸는지 입술에서 살짝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공주로서는 그녀의 관용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역시 이 여인은 공주에게는 은인이었다. 괜히 나를 도와줬기에 저 사람이 이런 꼴까지 당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이젠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 자는 제가 따로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습니다. 공주님은 이만 황궁으로 모셔드리지요.”
“뭐?”
예상치 못한 장군의 반응에 공주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조사라니. 여인이 귀한 대국은 예로부터 모계사회를 받들어 여인을 존중했지만 그건 단, 대국안에서의 여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특히 패전한 나라의 여인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을 대지 않았다. 처음 투르크족의 나라들을 하나하나 함락시켰을 때 병사들 대부분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공주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신비로운 외모에 중독되어 그 쪽 여인들만을 노리는 병사 또한 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지금도 그녀를 바라보는 병사 몇몇의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여인인 것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 들통나게 될 것이었고, 그녀에게 그런 고통들을 준다는 것을 생각하니 공주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가긴 가겠는데, 나 혼자는 안 돌아갈거야.”
“예?”
“저 색목인 없이는 안 돌아갈거니까 그렇게 알아! 어머니께서도 못 찾아오면 목을 벤다고만 했지, 날 끌고 오란 소린 안하셨겠지. 그렇다고 강제로 끌고 가면 돌아가서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죄를 물을거야. 온갖 죄목을 붙여서 칸께 낱낱이 고할거니까.”
공주가 소리를 빽 질렀다. 무뚝뚝한 장군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도 모르게 나온 최후의 발악이었다. 절대로 여인을 그가 끌고가게 놔둘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권한을 써서라도 막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장군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공주님, 저는 오로지 공주님의 안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이건 명령이기도 해.”
공주의 눈이 흔들림없이 장군의 눈과 마주쳐오고, 마침내 장군은 두손을 굳게 맞잡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지금 당장 공주님을 모시고 황궁으로 돌아간다! 저 자는 도망 못가게 단단히 포박하고.”
병사 몇 명이 단단한 포승줄을 들고 여인의 몸을 손과 같이 묶었다. 체념한 듯 여인은 더 이상 도망가려는 행동도 취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이 행하는 대로 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공주는 마음이 아려왔다. 줄로 동여메는 것 또한 마음에 안들었지만 여기서 포승줄까지 풀라 명령하는 것은 장군의 걱정을 아예 무시하는 것이 되기에 공주는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공주의 걱정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눈을 들어 맞춰왔다.
그녀의 푸른 눈안에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자신의 처우에 대한 막연한 공포, 간절함, 그리고 의문까지. 날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냐며 물어오는 것만 같아 공주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과 바드마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할 때에도 공주는 여인이 황궁에 가기 전까지 무사하기만을 바랬다.
*
앙겔라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였지만, 그녀는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최소한의 짚더미만 깔려있는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창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허술해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두 손이 꽁꽁 묶여있는 상태에서는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건 이곳이 그들의 왕궁같은 곳 어딘가에 위치한 감옥이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반나절을 훌쩍 넘는 시간동안 달리는 말 위에 짐짝처럼 실려서 이동하는 건 엄청난 고역이었다. 딱 한번 말을 쉬게 해주기 위해 멈춰 세웠을 때 빼고는 단 한번도 멈추지 않은 채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듯 달렸다. 황금 군대의 악명은 괜히 떠도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만하면 딱 정신을 잃겠다 싶을 쯤에, 그녀는 병사들의 손에 끌려 이곳에 던져지듯 갇혔고 체력이 한계에 달해 있었던 앙겔라는 그대로 기절하듯 골아떨어졌다. 그 뒤로 정신이 들고보니 이 상황이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병사들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는 듯 발걸음 소리와 함께 횃불에 비친 사람의 형태가 바닥에 아른거렸다.
앞으론 어떻게 될까. 한기에 살짝 몸을 움츠리며 앙겔라는 생각했다. 아직은 한 두번 얻어맞고 끌려온 정도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주쳐온 그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역정을 내는 것처럼 보일 땐 그녀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란 기대도 살짝 품었었는데. 어딘지 걱정스러운 듯 보이던 그 눈빛이 사실은 착각이었던 걸까.
시선을 내리깔자 올리브 나무를 깎아서 만든 묵주 목걸이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어릴 때 자신의 손으로 처음 만들었던 소중한 것이었다. 최근 칸이 이슬람쪽 문화에 매력을 느낀 후 많은 자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타타르족이 유목 민족답게 다양한 종교에 관대하다고는 들었지만,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이교도일 뿐이겠지. 해꼬지를 당할 이유들은 차고도 넘쳤다.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에 잠식당하고 싶지 않아 앙겔라는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로 했다.
얼마 전, 그 아이를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산 속의 해는 예상치 못하게 빨리 저물곤 했고 그 날이 유독 더 그랬다. 완전 깜깜해지면 이도저도 움직일 수 없기에 그녀는 최대한 안전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한참을 헤맨 끝에 수풀이 숨겨주듯 감싸고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고, 그 곳에 그 아이가 있었다. 첫 만남부터 활을 날려대며 낮은 목소리로 저를 위협하던 검은 눈의 여자아이. 자칫하면 정통으로 맞았을 뻔한 것을 떠올리며 앙겔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관찰하니 머리나 다리에 꽤 심각한 상처들이 있었다. 의사로서의 직감으로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기에 머리로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자신을 향한 경계심과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왠지 아이가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녀의 확신은 맞았다. 딱 반 정도만.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양귀비즙 말린 가루를 준 것이었는데 어찌나 잘 들던지 아이는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차피 야영도 해야 했으니 앙겔라는 아이와 같이 잠에 들 채비를 했다. 그런데 어찌나 잠꼬대가 심한지.
수녀로 봉사하며 많은 아이들을 돌보아왔던 그녀였지만 그렇게 지독한 잠꾸러기는 처음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덮어주면 걷어차고, 덮어주면 걷어차고... 한참을 실랑이 하다 지쳐서 그냥 내버려두니, 추운지 온 몸을 동그랗게 감싸며 달달 떨기 시작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타타르족 아이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찌됐든 아이는 환자였다. 안 그래도 꽤 많은 피를 흘린 와중에 맨몸으로 산 속의 밤을 지새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이여도 타타르족의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활이나 칼잡는 법부터 배운다는 민족. 아무리 앙겔라였지만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남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지만 아이는 여전히 추웠는지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 한번도 안깬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혼자 궁시렁 궁시렁대는 아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름 모를 타국의 아이도 잘 때는 천사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결국 아이를 살짝 당겨 품에 안았다. 이렇게 뒤에서 감싸안은 채로 있으면 몸부림치며 덮어준 것들을 걷어차지는 못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더 심하게 몸부림을 쳐버리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지만, 예상외로 아이는 잠잠했다. 따뜻한 온기같은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히려 앙겔라의 품을 파고 들어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문제였지만. 아이의 몸은 예상보다 부드럽고 뜨거운 편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체온이 낮은 앙겔라는 그 점이 맘에 들었다. 여기저기 상처 때문에 꾀죄죄하긴 했지만 아이는 그동안 마주쳐왔던 타타르족들보다 피부가 좀더 뽀얀 편이었고, 오밀조밀 모여있는 이목구비가 이뻤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아이가 또렷하게 잠꼬대를 해왔다.
“...өлсөж үхлээ... ( 배고파 죽겠어...) ”
자그마한 손이 앙겔라의 왼쪽 가슴을 살살 주물러와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잠깐 하다 말줄 알았지만 아이는 소중한 무언가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살짝살짝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앙겔라의 귓가가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잠버릇이긴 했지만 묘한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몸을 그런 식으로 만져온 사람은 단 한 사람, 소꿉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그녀말곤 없었다.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얼굴이 떠올라서인지, 아이의 행동 때문인지는 몰라도 앙겔라는 꼼짝할 수 없었다. 순간 정말 자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되어 아이의 표정을 확인하려 그녀는 슬쩍 아이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치웠다.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침 같은 것이 그녀와 맞닿아 있는 옷부분을 적시고 있었다. 왜 이제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아이의 입이 쉼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입꼬리는 슬쩍 올라간 채로. 앙겔라는 어이가 없었다.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려고 애쓰며 그녀는 아이의 손을 슬쩍 아래로 치웠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더 이상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피부로 와닿는 미세한 꼼지락거림들이 주는 안정감을 느끼며 그녀의 눈이 점점 내려앉았다. 회상이 끝나고 앙겔라는 자신이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았다.
그 아이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른 곳,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 하더라도, 앙겔라는 어찌 됐든 아이를 치료해주러 다가갔을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모든 건 다 그분의 뜻이리라.
“Босоорой. Хоцорлоо шүү дээ.( 어서 일어나. 늦었다.)”
복도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병사 두 명이 문을 열고 앙겔라의 두 팔을 잡았다. 올 것이 온 걸까. 앙겔라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숨겨져 있던 묵주 목걸이가 품에서 살짝 빠져나와 아주 잠깐 반짝였다.
딱히 궁금한 사람 없겠지만... 시대적 배경 궁금한사람 있음 보라구 백과사전링크 넣었엉..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783761&cid=55573&categoryId=55573
12-13세기 몽골 국가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됑. 그리고 칸은 몽골이 모계사회라고 하길래 성별을 바꾸면 재밌을거 같아서 아버지->어머니로 바꿈.
그리고 메르시가 수녀출신으로 나오는데 내가 무교라서 틀릴수도 있을거야. 혹시나 이상하다 싶으면 말해줘 고칠게! ( 그외에 많은 설정도 얼마든지 지적좀 )
두줄씩 쓰고 30분 한시간 멍때리고 이러고있으니 진도가 너무안나간다 ㅋㅋㅋㅋㅋ ㅜ 소재제공해준 갤럼한테 미안하네 ㅜㅜ
깝치고 삽질하는 댕댕이같은 하나 얼른 보고싶어... ㅋㅋㅋㅋㅋㅋ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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