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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뱅드림) 아리사, 미나토 유키나가 되기로 결심하다. #5 (完)

Aris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6.07 23: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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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사, 미나토 유키나가 되기로 결심하다.


#1화 : [링크]

#2화 : [링크]

#3화 : [링크]

#4화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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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사…맞지?”

“응…속여서 미안해….”

“어떻게 된 거야.”


사아야는 아리사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리사는 사아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아야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까지 계속 사아야를 속여 왔으니까. 사아야가 얼마나 크게 화를 낼 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사아야는 화를 내는 대신. 아리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함께 누웠다.


“사, 사아야…?!”

“나…무서웠어. 아리사를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게…내가 아리사가 그렇게 되는 걸 막지 못했다는 게…아리사, 나. …나 정말 미안해….”

“사아야….”


사아야는 아리사를 안은 채, 아리사의 가슴에 안겨 소리 죽여 울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자. 아리사는 천천히, 사아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공원의 벤치. 옷 여기저기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면서, 아리사는 사아야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아야는 손수건으로 빨갛게 충혈되어버린 눈가를 계속 찍어내고 있었다. 붉게 물든 사아야의 눈가를 보자, 사아야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솟았다. 아리사는 양 손을 깍지 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숨겨서 미안.”

“아까도 속여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다시 한 번 사과하고 싶었어.”

“그럼 나도 다시 한 번 물을게.”


사아야는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언제부터 유키나 선배였던 거고.”

“모르겠어. 그냥…. 계단에서 미끄러진 날, 유키나 선배가 되어 있었어.”

“그러면 병원에서도….”


아리사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빵 만들던 손이라 그런지, 손 힘이 장난이 아니더라.”

“미, 미안. 아리사. 난….”

“목 졸릴 만한 짓을 했잖아. 신경 안 써. 그리고…사아야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말했던 거고. 나는 내가 포피파에 있어서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속 좁고, 자신의 감정조차 친구들에게까지 꽁꽁 숨기고.”

“카스미와 유키나 선배가 사귀는 게 싫다고 생각했지?”

“…그것도 알고 있었어?”

“아리사는 거짓말 하는 데 재능 없잖아.”


사아야는 웃었다.


“아리사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지 알려고 노력하니까.”

“…따, 딱히. 그렇게까지 날 지켜봐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또 츤데레 모드?”

“시꺼!”

“아하하. 유키나 선배 모습으로 그러는 거, 되게 웃긴 거 알지?”

“뭐 내가 유키나 선배가 되려고 해서 된 건 아니잖냐.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카스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

“….”


아리사는 사아야를 돌아보았다. 정말 전부 다 알고 있었구나. 사아야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리사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데, 아리사가 카스미를 좋아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난 입을 다물고 있었어. 세 달 동안이나. …나도 참 비겁하지? 어쩌면 나도 아리사가 카스미를 좋아하는 데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사아야….”

“그래서 아리사 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괴로웠어. 내가 아리사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들어주고, 아리사가 혼자 힘들지 않게 해 주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까.”

“고마워. 내 생각해 줘서.”


아리사는 수줍게 웃었다.


“그냥, 사아야가 나는 절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줬던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짐은 많이 덜어주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병원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다시는 사아야와 만나 이야기 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사아야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기뻤고.”

“…마지막이라고?”


사아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째서 내가 유키나 선배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생각해봤거든. 나는 유키나 선배를 대신하고 싶었던 거야. 카스미의 옆자리에 선배가 아닌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말이야, 나는 ‘이치가야 아리사’지 유키나 선배가 아니잖아. 내가 아무리 연기하더라도 나는 유키나 선배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카스미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카스미를 향한 감정을 포기한다면. 내가 ‘유키나 선배를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더는 먹지 않게 된다면…. 나는 다시 원래 내 몸으로 돌아가고….”


“그런 거 싫어!”


사아야가 일어나며 소리쳤다. 놀란 아리사가 사아야를 올려다보았다.


“아리사가 유키나 선배가 될 수 없다든지, 그런 건 상관없어. 지금 아리사는…어찌 되었던 내 앞에서 살아 있잖아.”


사아야는 아리사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방금 전까지 손수건으로 닦았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사아야는 아리사의 양 손을 붙잡아, 억지로 아리사의 몸을 앞으로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사, 사아야?!”

“나는 아리사랑 만나지 못하는 게 싫어…! 아리사랑 헤어지기 싫어. 가짜 몸이라도 좋아. 나는 아리사와 보내는, 이 시간을 멈추고 싶지 않단 말이야….”


사아야의 양쪽 뺨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닦이지 않은 눈물이 뺨 아래,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사아야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어차피 아리사가 유키나 선배의 몸에 있다는 건 우리만 알고 있잖아. 그냥 계속 연기하자. 모두 절대 눈치 못 챌 거야. 그러니까… 평소에는 유키나 선배인 척 하다가…가끔씩만 따로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 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아리사, 나를 두고 가지 마. 제발….”

“하, 하지만 사아야. 내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유키나 선배는…!”

“유키나 선배는 포피파가 아니잖아!”


사아야의 목소리는 거의 오열하듯 변했다. 사아야는 자신이 아리사를 향해 소리를 쳤다는 것에 놀란 듯. 맞잡은 손을 놓았다. 사아야는 눈가를 닦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나 이기적이었지? 아리사를 살리기 위해 유키나 선배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자니….”


사아야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정말 이 시간을 끝내기 싫어…. 이렇게 아리사랑 다시 만났는데….”


아리사도 사아야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리사도 이 시간을 끝내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냥 유키나 선배인 것처럼 연기를 계속한다면 이 시간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런 욕망이 타오르는 횃불의 불길처럼 여전히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울고 있는 사아야를 보자 더욱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아리사는 정한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다잡으며 사아야를 위로하기로 했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리사는 한쪽 무릎을 굽혀 사아야와 눈을 맞췄다.


“아리사?”

“병원에 누워 있는 내 몸으로 내가 돌아간다고 해도, 언젠가 내가 깨어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유키나 선배는 유키나 선배의 몸으로 살아가고. 깨어난 나는 내 몸으로 되돌아가고.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반드시 너희들 곁으로 돌아갈 테니까.”


아리사는 웃었다.


“기다려 줄 거지, 사아야?”

“아리사…나….”


사아야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된 거야. 아리사는 다시 우는 사아야를 토닥였다.


그 때.





“…무리일지도 몰라.”


카스미가 나타났다.



***



노란색 스티커를 보고 찾아가 발견한 전당포 유성당. 그 안쪽 창고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랜덤스타의 기타 케이스. 그리고 기타와 함께 만난 소녀, 이치가야 아리사.


한 사람은 손에 가위를 들고 초범이냐고 소리치고, 다른 한 명은 양 손을 들고 전 도둑이 아니에요! 하고 외치는, 따져보면 별로 어디 가서 자랑하기 어려운 첫 만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만남, 그 순간이 카스미에게는 기뻤다.


랜덤스타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아니, 랜덤스타보다도 소중한 사람. 아리사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함께 SPACE의 무대에 서고, 함께 창고에서 연습하고, 함께 합숙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함께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고. 폭죽이 아름답게 터지는 여름날 밤에 함께 모여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감상할 수 있는 친구.


아리사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카스미는 믿었다.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카, 카스미? 너 언제부터 여기….”


미나토 유키나, 의 모습을 한 아리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당황한 아리사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튀었다. 유키나 선배의 모습이지만, 지금의 목소리 톤만으로도 아리사라는 걸 한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카스미는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걸었다.


“사아야가 아리사를 안고 바닥에 누워서 울기 시작했을 때?”

“실화냐. 아니, 그것보다…그러면 다 들었어?”

“응. 아리사가 왜 유키나 선배가 되었는지도.”


카스미는 강하게 아리사를 끌어안았다. 카스미의 온기가. 카스미의 향기가. 카스미의 모든 것이 아리사의 품에 안겼다.


“…미안. 내가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카, 카스미….”

“아리사가 유키나 선배가 되었다는 데 너무 놀라서 나올 틈을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는…게다가 아리사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미, 미안해 할 거 없어. 나는…. 이게 다 내 잘못인 걸.”

사아야가 나즈막히 말했다. “그것보다. 무리라니, 무슨 말이야?”


카스미는 천천히 아리사에게서 떨어졌다. 카스미의 온기가 멀어진다는 생각에 아리사는 작은 아쉬움을 느꼈다. 카스미는 지친 얼굴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의 밝은 모습과는 다른, 축 쳐진 모습이었다.


“오늘 아침 유성당에 갔다가 들었어. …아리사의 뇌사 판정 심사를 하기로 한 이야기.”

“뇌사라고?”


아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학교에서도 우등생이었으니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식물인간이랑 다른 거야?” 사아야가 끼어들었다.

“그래.”


아리사가 덤덤히 말했다. 식물인간이라면 몇 년, 아니 몇 십년이 지난 이후 언제라도 깨어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몸은 죽었어도 정신이 담긴 뇌는 살아 있는 상태니까. 하지만 뇌사라면. 생명유지장치로 억지로 목숨을 이어나가려고 해도 얼마 더 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만약 뇌사라면, 아마 이번 달을 못 넘기고 죽을 거야.”

“카스미, 오늘 학교에서는 그런 이야기 안 해 줬잖아!”


아리사의 말에 견딜 수 없어진 사아야가 카스미가 앉은 벤치를 향해 다가가며 고함쳤다. 그와 동시에, 카스미가 주먹을 쥔 채 일어났다. 카스미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카스미는 사아야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걸 어떻게 말해!”


카스미는 팔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카스미의 목소리가,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떨려왔다.


“아리사가 깨어날 때까지,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더라도 반드시 기다리자고…. 아리사가 돌아올 자리를 지켜나가자고…, 오타에가 새 악기까지 배워가면서 포피파를 계속 하자고 말해 줬는데…근데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포피파의 모두에게 어떻게 하냐고…그런 거 너무 잔인하잖아…. 너무하잖아….”

“카스미….” 사아야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최종 판정은 났어?”


아리사가 물었다. 카스미는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오후에 난다고 했어.”

“그러면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겠네.”

“응. 근데 아리사 할머니가…아마 뇌사가 나올 것 같다고…그러면 아리사는 백 퍼센트 죽는 거니까…장기기증을 하기로 했어.”

“…좋아. 뭐, 이거로 우리 셋이 다 공평해졌네. 나는 카스미를 사랑한다는 걸 숨겼고. 사아야는 내가 카스미를 사랑한다는 걸 아는 걸 숨겼고. 카스미는 지금 내 몸이 병원 수술실에서 장기들을 뽑히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걸 숨겼고.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거잖아.”


아리사는 얼굴을 가린 카스미의 팔을 내리곤, 눈물범벅이 된 카스미의 눈가를 손가락 검지로 천천히 닦아 주었다. 카스미는 훌쩍이면서 아리사를 올려다보았다.


“야, 카스미. 울지 마.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카스미는, 반짝반짝하고 두근두근한 걸 언제나 찾던 내가 아는 카스미는…이런 패배자 같은 표정 같은 거 안 지어. 이렇게 우는 건 나한테나 더 어울리지.”

“아리사….”

“카스미. 우리는 신이 아니야. 모두 부족한 점을 가진 인간이라고. 그러니까….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니까, 가장 소중한 친구들에게도 비밀을 만들고, 또 실수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하지만, 아무리 결점투성이인 우리들이라고 해도. 정말 소중한 서로가 있으니까…서로가 서로의 결점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밴드라는 게, 포피파가 원래 그런 장소잖아?”


아리사는 천천히 카스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눈물에 젖은 카스미의 눈동자가 아리사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이 얼굴을 다시는 못 볼 가능성이 한 두 배 정도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제기랄. 아리사는 자기 이마를 주먹으로 눌렀다 놓기를 반복했다.


정말, 죽고 싶지 않았다.


아리사는 카스미의 손을 잡았다.


“카스미. 사랑해.”

“아리사….”

“하지만, 카스미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 유키나 선배지?”


아리사는 카스미의 잡은 손을 펼쳐, 손바닥에 검지로 작은 별을 그려 넣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카스미랑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나 행복했어. 만약…내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카스미의 라이브는 계속 지켜볼 테니까. 포피파를 관두거나 하는 건 절대 생각하지 마.”

“아리사, 나는…나는 어떻게….” 카스미가 거칠게 심호흡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뭐, 뇌사 확정이 됐는지도 모르는 거잖냐? 그냥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너희들이 내 눈 앞에 있을 지도 모르는 거고. 그러니까 울지 마. 모두 괜찮을 거야. 앞으로의 카스미는 당분간 유키나 선배에게 맡길 게. …그러니까, 나는 유키나 선배가 되는 걸―”


포기할게.


그 순간. 옆에 있던 사아야가 갑자기 이쪽을 향해 뛰어들었다.


“싫어!!!”


사아야가 아리사와 카스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아야에 떠밀려, 두 사람의 몸이 모래밭 위로 기울었다. 정말로 미안해, 사아야. 아리사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맞닿은 카스미의 온기와, 사아야의 온기가 뒤섞여 흘렀다.

그 속에서,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깨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무거운 잠이 아리사를 덮쳤다.



아리사는 눈을 감았다.












***












천천히 눈이 뜨였다. 흐릿한 시야.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양 팔에 연결된 무수히 많은 기계장치들. 그리고 입을 가리고 있는 인공호흡기. 손가락 끝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흐릿한 인간의 형체가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 형체. 그 형체를 향해, 힘겹게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뻗으려 움직였다.


그 형체는, 잠시 움직이는 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더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지, 지금 깨어난 거야?! 의식 있는 거 맞지? 나 보여?”


고개를 끄덕였다. 형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행이야, 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의사, 아니 간호사…아무나 좋으니까 와 주세요! 유키나가, 유키나가 깨어났어요!”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알아볼 수 없던 형체가, 점점 울고 있는 이마이 리사의 모습으로 변해 동공에 비쳤다. 리사를 향해, 달려오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향해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힘이 빠진 유키나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



“유키나가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으면, 아리사 장례식에도 못 갈 뻔 했어. 다행히 일찍 깨어나는 바람에 망정이지, 아리사처럼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장례식장으로 가는 택시 뒷좌석. 유키나의 옆자리에 앉은 리사는 유키나의 손을 매만지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 …이치가야 씨, 죽었구나.”

“그 날 연습하러 먼저 가 있으라고 해 놓고 오지 않기에 연락해봤는데, 카스미랑 사아야 앞에서 쓰러졌다면서. 공원에는 왜 갔던 거야?”

“…………모르겠어.”


유키나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의 풍경을 돌아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유키나, 꽤 피곤한 모양이네. 리사는 당분간 유키나가 쓰러진 순간에 대한 것은 묻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는 들어야 할 이야기였지만.



***



조의금 봉투에 1만엔 지폐를 두 장 넣어 영전(ご霊前), 미나토 유키나라는 문구를 적어 넣는다. 아리사의 얼굴 사진이 든 영정이 하얀 꽃들로 장식된 제단 위에 올라가 있다. 유키나는 리사의 옆에 선 채, 지그시 아리사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언제 찍은 사진인 걸까. 사진 속 아리사는 밝은 모습으로 웃고 있다. 엄숙한 장례식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진. 뭐. 영정 사진을 찍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나이였으니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장례식장. 영정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포피파의 다섯 멤버-카스미, 롯카, 리미, 타에, 사아야-들이 보였다. 유키나는 포피파 멤버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아가, 아리사의 조부모에게 인사한 후 아리사의 영정 사진이 올라간 제단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일 먼저 카스미가 아리사의 영정을 향해 인사하고, 제단에 올라간 향가루를 한 움큼 쥐어 떨리는 손으로 향로에 뿌렸다.


카스미의 볼을 따라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경련하듯 떨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린 향가루가, 향로 바깥으로도 조금 흘러 바닥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누구 한 명도 카스미에게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키나는 장례식 회식에 참가하지 않고 나왔다. 지쳤으니까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 리사에게는 그렇게만 말해두었다. 물론 돌아갈 작정이기는 했지만. 유키나에게는 그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장례식장 건물 뒤쪽. 아무도 없는 소나무 아래. 유키나는 그곳에 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 부르셨나요?”


유키나는 돌아섰다. 검은 옷을 입은 사아야가 긴장한 표정을 한 채 유키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아야의 이런 긴장한 표정을 보는 건 오래간만이네. 유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아야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사아야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 ‘유키나’는 사아야의 이마를 검지로 찔렀다.


“아얏!”

“야. 얼굴 펴. 뭐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아리사?” 사아야가 눈을 깜빡였다. “아리사야? 귀신 아니야?”

“귀신 아니거든! 100% 확실한 이치가야 아리사라고!”

“그, 그러면 유키나 선배는….”

“아마 영혼만 내 몸 속에 갇힌 채 화장장에서 타고 있겠지. …아니, 아직 화장은 안 했나?”


유키나, 아니. 아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나무에 등을 기댔다. 사아야는 지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나, 나는…분명 아리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키나 선배가 되지 않겠다는 말. 카스미 앞에서 끝까지 마치지 못했잖아. …네가 옆에서 밀쳐버리느라. 아마 그래서 내 영혼과 유키나 선배의 영혼이 다시 뒤바뀌지 못하고 헤매다가…그냥 그대로 돌아온 것 같아. 적어도 며칠동안 혼수 상태였던 건 확실하니까.”


아리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젠장. …카스미에게 유키나 선배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결국 이러면 모조품인 채로 끝나게 되는 거잖아. 유키나 선배를 죽여가면서까지 살아야 할 필요가 있어?”

“……있어.”


사아야는 아리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당황은 벌써 사라진 후였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기만 한다고 해도 많은 걸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아리사.”


사아야는 갑자기 아리사를 끌어안았다.


“자, 잠깐. 사아야…숨 막혀!”

“…살아 줘서 고마워. 아리사.”


유키나 선배를 죽이고 말았다. 결국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모조품인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수한 고민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사아야의 말만은 아리사의 영혼을 울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카스미에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게 될 지, 다른 포피파 멤버들에게 알리게 될 지. Roselia 멤버들에게 언제까지 가짜 유키나 선배 행세를 계속해야 할 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아리사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아리사는 살아있다. 자신을 기다리던 사아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포피파의 모두와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다. 카스미와 헤어지는 일도 없다. 비록 미나토 유키나라는 신원이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포피파의 모두와 맺은 유대는.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사아야가 느끼는 감정만은 진짜다.


그러니까.



아리사는, 미나토 유키나가 되기로 결심했다.



---

3


「아리사, 미나토 유키나가 되기로 결심하다」를 따라와 주신 모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연중하지 않고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장례식 묘사에 대해서는 사전조사를 좀 하기는 했는데 일부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다른 작품의 2차창작 팬픽을 써 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저는 엉성한 글이라고 생각했고, 글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작품을 좋아해 주셔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쓰시는 방도리 팬픽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중간은 간 방도리 팬픽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글이 된 것 같아 다행이었습니다.


새로운 방도리 팬픽으로 언젠가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언제가 될 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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