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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유키리사 단편] 너를 위한 콘체르토모바일에서 작성

로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7.22 21:10:50
조회 987 추천 23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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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http://posty.pe/935zuy


* 사요 이야기인 http://posty.pe/2hf5cb 와 같은 세계관



* 오케스트라 단원 컨셉의 뱅드림 캐릭터들



* 살짝 캐붕 있어요(????)







너를 위한 콘체르토


안 돼.... 이렇게 보낼순 없어.... 방과후 하네오카 예술 고등학교 음악관은 기말고사 실기 연습으로 바쁜 학생들 때문에 만실이었다. 연습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여러 종류 악기의 소리들은 한 데 어우러져서 어떤 곡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종의 소음처럼 교정에 울려 퍼진다. 와중에 1학년생 이마이 리사는 소중한 첼로 가방의 지퍼를 잠그다가 이 시간마저 아깝단 생각에 의자에 내동댕이 치듯 내려놓고 서둘러 연습실 문을 열고 뛰쳐 나왔다.



「옥상에서 보자.」



폴더폰을 열어 소꿉친구 유키나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다. 친구가 된지 10년도 훨씬 넘은, 심지어 옆 집에 살고 있는 가까운 사이인데 유키나가 유학을 간다는 사실을 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오늘 아침 등교하려는 리사에게 “유키나짱, 출국 전에 송별회라도 할까?”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리사가 받은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유학...? 같이 등교하는 동안 유키나는 리사에게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 서운했다. 여름방학 기간에 떠나기로 했다면서 어떻게 자신에게 솔직히 알려주지 않는지....



‘나는 유키나한테 어떤 존재야...?’



나만 유키나를 소중히 여기는거야?

사춘기에 접어든 후, 친구에게 품는 이 깊은 감정은 단순히 우정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리사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유키나에게 품은 감정이 연애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조용하고 감정표현에 서툰 유키나의 곁에 친한 또래는 리사 밖에 없었다. 사실 리사의 첼로 전공 동기들은 종종 왜 유키나와 리사가 친하는지 신기해하곤 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랑받고, 다정다감한 리사와 냉랭한 이미지의 유키나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리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유키나가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얼굴을 자신에게만 보여줄 때가 있었으니까.



미나토 유키나는 쿨한 이미지지만 실은 달달한 것을 좋아하고, 내가 만든 쿠키를 좋아하고 쓴 커피를 잘 마시지 못해서 항상 커피에 설탕을 가득 담아 주어야 한다. 멋있는 것, 정적인 것만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고양이를 굉장히 좋아해서 휴대폰 사진첩엔 고양이 사진이 한 가득인 사람, 길 고양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면 세상 가장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짓는 귀여운 면도 있다는 것....



무심한 것 같지만 리사가 아프거나, 연습으로 고생할 때마다 뒤에서 조용히 챙겨주는 사람이 유키나였다.



“나는 리사의 소리를 좋아해.”



또래 전공생 중 그럭저럭 평범한 실력이라는걸 알면서도 유키나는 늘 리사의 연주를 좋아해주었다. 고고한 유키나의 높은 목표와 이상을 아는 리사이기에 그 칭찬이 결코 남들에겐 해주지 않을 칭찬이란걸 알아 늘 기뻤다. 진심이건 아닌건 유키나가 자신을 특별히 여겨주는 것이니까.



그래서 리사는 때론 생각했다. 2차 성징이 시작되고, 사춘기에 접어든 자신이 유키나에게 연애감정을 품은 것처럼 유키나도 나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다른 친구들이 인근 고등학교 남학생들과의 미팅이나 소개팅 이야기로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늘 유키나만 바라본 리사인 것처럼, 유키나도 어쩌면 자신에게 비슷한 감정을 품은 것은 아닐까 하고....



“유키나!”



음악관 옥상 문을 열자 혼자 난간에 기대어 석양을 바라보는 유키나의 뒷 모습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는 리사의 인기척에 그 미나토 유키나는 뒤를 돌아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중하고 무표정한, 그러나 깊은 금색의 눈동자로 리사를 응시한다.



저 눈빛만 보아도 심장이 쿵쿵 뛴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직 유키나와 나란히 걷는 음악가가 되고 싶단 마음만으로 첼로를 하는 자신인데. 유키나가 일본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에 능숙한 유키나지만 그건 지휘자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단계의 하나라고 말해왔다. 이번 유학은 본격적으로 작곡과 지휘를 배우기 위함이라 들었다. 유키나는 재능 있으니까, 분명히 잘 해내겠지만 문제는 10대 후반에 결정된 이 유학이 몇 년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 알 수 없다는 것.



지금 떠나면 최소 10년.... 아니, 어쩌면 15년은 떨어져 지내야 할지도 몰라.

유키나의 목표는 높으니까, 일본에 돌아오지 않으려 할거야. 유망주가 되어 유럽과 세계를 향해 걸을테니까.

그럼 나는....? 유키나가 없으면 나는 누굴 바라보고 연주하지?



“유키나, 좋아해.”



충동적인 고백이었다.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난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약해져 단 한 번이라도 숨겨온 진심을 드러내고 싶었다.



“나도 리사를 좋아해.”



아니, 그 좋아함과 달라. 나의 좋아함은 그것과 다르단 말이야. 리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은다.



“그 좋아함은 무슨 의미야? 유키나의 좋아함이 나의 좋아함과 같았으면 하지만.... 아마 다를거라 생각해.”



아니야. 실은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리사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유키나의 표정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입술을 꼭 다문채, 웃지도 기분나빠 하지도 않는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는 그녀 앞에서 리사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간다.



“나는... 유키나를 사랑해... 연애감정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리사의 볼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언제 처음 유키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우리가 처음 만난 어린시절부터 나는 항상 너를 가장 좋아했지. 그 좋아함이 조금씩 연애감정으로 커져간건 중학교 2학년 즈음 이었던가... 이마이 리사의 사춘기가 시작된 그 시점에, 더 이상 유키나와 손을 잡거나 껴안는 등의 스킨십을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없게 되었던 그 때.



한 번은 리사가 인근 공터에서 묵직한 야구공에 손을 맞을 뻔 했을 때, 유키나가 몸을 날려 공을 대신 맞았다. 응급조치 후 눈을 뜬 유키나는 리사가 다치지 않았단 사실에 안심하며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리사의 손은 첼로를 하는 손이니까... 항상 조심해야해.” 너무나 유키나 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표현은 유키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는걸 알기에 리사는 누워 있는 유키나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의 첫사랑은 너라고.... 리사는 그렇게 말했다.



“미안해. 나는 리사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저 나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메세지로 와 닿았을 뿐. 혹시 유키나도 나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그런 막연한 기대심리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붉은 노을을 뒤로 한채,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유키나의 옆 얼굴을 보면서 리사는 숨 죽여 울었다.



“잘 다녀와, 유키나...”



“고마워. 리사도, 꼭 훌륭한 첼리스트가 될 수 있을거야.”



음악. 연주. 너의 머리 속엔 오직 그것 뿐이었니, 유키나.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유키나가 그 어떤 여자도, 남자도 좋아하지 않기를. 다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나의 첫사랑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나는 가장 친한 소꿉친구의 존재로 너의 마음 한 곳을 가질 수 있을테니.



유키나는 출국하는 그 날까지 특별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서로 옆 집에 살았으니 부모님들과 함께 의례적인 식사를 했고, 리사는 공항에 나가 그녀를 배웅했다.

이후 종종 이메일로 근황을 보내주는 유키나였지만 리사가 음대 입시로 바빠지면서 그 연락도 뜸해졌다. 가끔 유키나가 자신이 참여하는 연주회 등의 티켓을 보내며 여행겸 보러 오지 않겠냐 했지만 리사는 단 한 번도 그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이마이 리사가 일본에 남아 평범한 음악 전공자로서 성장하는 동안, 미나토 유키나는 더 큰 무대인 유럽에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20대 초반이 되었을 땐 전통 있는 지휘 콩쿨에서 입상하며 뉴스와 각종 잡지에 출연하는 유명인이 되어 세계를 오가며 성장하는 젊은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 리사는....?

첼로를 계속하는 것은 맞으나 ‘할 수 있는게 첼로 뿐이니까’ 한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젊은 날 지휘자를 꿈 꾸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평범한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꿈을 이루겠다던 유키나를 만난 뒤로, 그 유키나와 나란히 걷고 싶어 시작한 악기가 첼로였다. 유키나 때문에 시작한 첼로가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 예중, 예고에서 음악을 계속 했지만 일정 선 이상으로 성장하긴 어려웠다.



리사가 음악 대신 집중하기 시작한건 연애였다. 실패한 첫사랑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성인이 된 다음부터 정말 미친듯이 연애에 매달렸다. 남자를 사귀고, 여자를 사귀고, 그러다 자신은 역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정체성을 확립한 다음부턴 취향의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사귀었다. 대체로 그 취향의 여자들이 묘하게 외모나 성격이 유키나를 닮았다는 사실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원래 사람들은 첫사랑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라고 자기합리화 했다.



그 연애는 모두 오래가지 못했다. 긴 연애가 1년 남짓? 리사는 그렇게 마음 한 곳에 공허함을 남겨둔 채 30대를 맞이했다.



“리사언니~ 이노우에씨가 제발 연락 받아달래!”



“에? 그 사람 아코한테까지 연락한거야?”



“아코의 음대 선배니까~ 음... 이노우에씨는 리사언니랑 이렇게 헤어질 수 없다고 하던걸?”



“무슨 소릴 하는거야! 사귄 적도 없어.”



“정말? 사겼다고 하던데!”



“나참... 질척대는 사람인줄 몰랐는데....”



아아,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니다보면 이런 일도 발생하는 법. 그래도 30대에 들어선 다음부턴 마음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태도를 바꾸려 노력 중인 리사지만 꼭 원치 않게 타인과 엮이는 일은 생긴다. 외롭고 심심한 마음에 데이트 두어번 했던 상대가 집착을 보이길래 라인 계정 차단을 해버렸더니, 어떻게 알고 아코한테까지 얘기한 모양이었다.



“아코한테까지 피해준 것 같아 미안.”



“아코는 괜찮아요~! 하지만 리사언니가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정착하는걸 보고 싶어!”



“아...하하하....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예고 후배이자 현재 리사가 속한 오케스트라의 동료 단원은 우다가와 아코. 한참 어린 여동생같은 이미지의 아코가 성인이 되어 연애 조언까지 하는걸 보며, 리사는 오죽하면 저럴까 하고 생각한다. 아코가 보기에도 리사의 연애사가 우스웠던 것일까.



더 조심해야겠네....

맘 속으로 중얼거린다.



단원들끼리 대연습실에 모여 시끌시끌 수다 떠는 사이 저 앞의 메인 문이 끼이익 하고 열린다. 문 틈으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걸어들어오는 작은 체구의 여성의 등장에 리사는 한숨을 내쉰다.



리사가 대학 졸업 후 교수님의 추천으로 독일에서 2년 정도 유학생활을 하는동안 유키나도 유럽에 있으니까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리사는 일부러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 통해 리사 소식을 접한 유키나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지만 리사 쪽에서 거절했다.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엔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씁쓸함이 있기에, 지금도 만나면 흔들릴지 몰라서 유키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미나토 유키나입니다. 10개월 임시입니다만, 잘 부탁드립니다.”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된 걸까.

일본 최고 재벌 중 하나인 츠루마키 가문의 외동딸 코코로와 친분이 생긴건 우연이었다. 고교시절 어쩌다 알게 된 사이였는데 그 츠루마키 코코로가 가문이 운영하는 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대뜸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들겠어!”라며 취미로 소비하던 클래식 음악을 하겠다며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코코로야 어디까지나 재단 일의 차원에서 후원이라지만, 일본 내 젊은 음악가들에게 대거 투자를 하며 데려와 정규직 신분과 음악할 기회를 주었으니 여기저기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어진, 그럭저럭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흥 오케다.



비록 국공립 오케스트라까진 아니어도 제법 실력 괜찮은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배테랑 지휘자와 함께 그럭저럭 잘 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 지휘자라는 사람이 건강상 문제가 생겨 휴식기를 갖게 되었고 그 기간을 대신할 사람을 모셔온다더니,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그 사람이 ‘미나토 유키나’였다.



유명 콩쿨 입상 경력 다수에 최근 굵직한 유럽 내 전통 있는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맡은 바 있는 천재 음악가가 무엇하러 이런 변두리 오케스트라에서 10개월이나 지낸다는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한 번쯤 고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는데 츠루마키 이사장이 좋은 기회를 주어 수락했어. 마침 스케줄이 비어 있었거든.”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싶은 말투지만, 오케의 지휘자들이란 원래 저런 존재니까. ‘선생님’이라 불리는 지휘자들의 거만한 태도에 익숙하다.



스케줄이 비었다는 유키나의 말은 거짓말이 분명하다. 유키나쯤 되는 지휘자들은 2~3년치 스케줄이 한 가득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 우연찮게 이 오케의 지휘자가 요양을 떠나고 그 사이 10개월이나 빈 스케줄이 생겨서 왔다는 것이 매우매우 수상쩍지만 단원들은 그럭저럭 좋아한다. 핫한 젊은 유명인이 오케를 맡아준다는데 싫어할 리 없지.



단 한 명, 리사만 빼고....

고백했다 차인 첫사랑을 15년 만에 마주쳤는데 기분 좋을리가.

의도적으로 유키나의 시선을 피하는 리사지만 자꾸만 그녀가 자길 보는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진다.



‘쟤는.... 여전히 예쁘네. 동안이고.’



더 짜증나는건 여전히 유키나가 엄청 예뻐보인다는 사실이다. 3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10대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키나는 성공하고 부자되서 좋은거 많이 먹고 살아서 그런지 뽀얀 피부에 찰랑이는 머릿결이... 말 그대로 빛이 났다. 옷도 엄청 비싸 보이는 실크 재질의 원피스.... 원래 상당히 오만해 보이는 표정을 짓곤 했던 유키나지만 지금은 더욱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자신감 넘쳐 보였다. “멋있어졌네”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발표를 하겠어.”



유키나는 단원들을 쭉 둘러보더니 리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작은 입술을 열어 말을 꺼낸다.



“첫 번째, 새 지휘자를 알릴겸 정확히 1개월 뒤, 츠루마키 재단의 자선사업과 엮어 무료 연주회를 열 거야. 기존 지휘자와 다른 곡을 연습 중이었다고 들었지만. 내 선호에 맞춰 곡을 변경하기로 했어.”



에???? 모두 술렁인다. 이미 1개월 동안 브람스 교향곡을 연습 중이었는데 바꾼다고...? 단원들 입장에선 그 동안의 연습이 물거품이 되는 느낌이라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프로 오케 단원들이니 곡이 변경되면 그에 맞춰 연습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아깝잖아.



모두의 반응과 달리 유키나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1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자는 일본 출신의 피아니스트 시로카네 린코로 섭외완료. 2부는 슈만 교향곡 4번을 할 거야. 이견은 받지 않아. 츠루마키 이사장과도 협의된 사안이니까.”



라흐마니노프와 슈만이라니. 어떠한 접점도 없어 보이고.... 다만, 지금 이 순간 이마이 리사는 혼자 멍한 얼굴로 유키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저를 보는 유키나의 미동 없는 표정 뒤에서 강한 감정의 무언가가 느껴진다. 뭘까, 이 느낌은.... 너는 무슨 생각이야 유키나.



라흐미나노프 피협 2번과 슈만 4번은 모두 리사가 가장 좋아하는 곡들이었다. 왜 하필 그 곡을..... 더 고민할 시간도 없이 유키나가 리사의 생각을 끊고 말을 잇는다.



“두 번째, 지금부터 공개 오디션을 할 거야.”



에엑?????



“악장, 각 파트별 파트장. 모두 기존 지휘자 기준으로 짜여졌으니까. 이번엔 나의 기준으로 재평가 하는게 맞다고 생각해. 당신들은 이 오케에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 있어?”



유키나, 정말....!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 감정 생각 안하고 말 막 내 뱉는건 역시 유키나 답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인간미라는게 있었다. 지금은 모두의 감정 이런걸 정말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벽만 보고 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새 지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대로 된 인사의 시간도 없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 오디션이라니? 이미 파트장 등 특정 자리를 갖고 있던 단원들 입장에선 혹시나 다른 단원보다 자신이 못할까봐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첫 타자는 이 오케의 악장인 퍼스트 바이올린의 수석 히카와 사요였다. 리사와는 음대 동기로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지만 악보를 완벽하게 해석해서 ‘정석’대로 연주하는 성실한 타입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요의 정확한 음정과 박자에 유키나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다른 바이올린을 들을 필요도 없이, 당신의 악장 자리는 유지하도록 하겠어.”



저건 칭찬이다. 엄청난 칭찬이야... 리사는 유키나가 사요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한다는걸 알 수 있었다. 조금 질투나는데....? 유키나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니.



반면에...



“다시.”



“히이잉....”



“애도 아니고, 박자가 제일 중요한 팀파니가 시작부터 엇박으로 나가면 어쩌자는거야?”



“기, 긴장 해서....!”



“긴장도 실력이야. 연주 날 긴장 했다고 실수하면 누가 알아주지?”



“그게....”



“다시. 하... 또 틀렸어. 도대체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프로 오케 단원이 된 거야? 남들의 3배는 더 연습하도록 해.”



“죄송합니다...”



“우다가와 아코. 악보 이리줘.”



“네.”



“자, 내가 표시한 부분. 내일 오후 연습까지 완벽하게 해서 와. 또 이런 하급 실수를 보이면 그 땐 당신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겠어.”



“죄송합니다....”



“죄송? 왜 나한테 죄송하지? 전공자면서, 프로면서 그 정도밖에 못 하는 자신에게 죄송해 하도록 해.”





와.... 미쳤다. 아코는 단상에서 내려오면서 울기 시작했다. 본래 감정표현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지만 최대한 숨죽여 울려고 억지로 소리를 참는 아코를 보며 리사는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서둘러 아코에게 달려가 자켓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준다. 지휘자라는 사람들 특유의 독설에 익숙한 리사지만 오늘의 유키나는 도가 지나쳤단 생각이 든다. 아무리 독설가여도 부임 첫 날부터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는 오디션을 개최해 본인 내키는대로 비판만 하는건.... 지금까지 제대로 된 칭찬을 받은 사람이 사요 한 명이라는건 너무하지 않아?



아니, 그 정도로 우리들이 유키나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족한 오합지졸일 뿐이란건가....

하지만 소꿉친구가, 첫사랑이 1년 넘게 동고동락 하며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단원들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건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뭐야?”



저를 노려보는 리사의 시선을 눈치챈 유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사 쪽을 쳐다본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리사는 늘 유키나에게 맞춰주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크게 화를 내거나 질책한 적 없다. 15년. 헤어진지 무려 15년이다. 그 기간동안 성인이 된 이마이 리사도 많이 변했다.



“미나토 유키나 선생님.” 공과 사를 구분하기 위함도 있지만 유키나로 하여금 조금 멀게 느끼게 하고 싶어 일부러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되진 않으세요?”



“....리사?”



“부임 첫 날부터 정작 본인에 대한 정중한 소개는 하나도 없이 단원들 기를 꺾는 이런 오디션은 지나친 것 같아요. 팀파니의 아코가 박자 실수를 한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의 말을 들을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왜 일까. 나를 거절한, 상처입은 너에 대한 작은 투정어림도 섞인 복합적인 감정으로 너에게 따지고 싶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일개 단원이 오케의 중심인 지휘자에게 함부로 해선 안 되지만, 오늘은 조금 무례해지고 싶다. 미나토 유키나, 너에게.



유키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앙 다문 입술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말 없이 리사를 응시하더니 갑자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확실히, 내가 일본의 문화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 건지도 모르겠네.”



그게 아니잖아.... 유키나!



“이마이 리사. 아까 너의 연주를 듣고 내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알아?”



또각또각. 유키나가 천천히 리사에게로 다가온다. 모두의 시선이 이 두 여성을 향하고, 미나토 유키나는 손가락 끝으로 리사의 얼굴을 들어 자신을 마주하게 만든다. 굽이 높은 힐을 신었기 때문인지, 유키나의 시선이 리사보다 조금 높아 내려다 보는 시선이라 기분이 이상하다.



“특별함이 없었어.”



뭐....?



“음정도, 박자도, 기교도. 무엇하나 틀리진 않았어. 대신 특별함도 없었지. 저기 있는 사요처럼 완벽함이 느껴질 수준은 아니면서 애매하게 틀리지만 않은... 그런 연주로 첼로 파트장을 하고 있다? 이런 오케니까 가능한거지, 다른 프로 오케스트라였어도 가능했을까? 리사. 너는 그 정도로 만족할거야?”



“나, 나는.....”



아,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런게 아니라고 따지고 싶었는데 마음과 몸이 따로 논다. 리사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어쩔줄 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마치 15년 전, 그 옥상에서 유키나에게 거절당한 후 울었던 것처럼.... 또 다시 유키나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울지마.”



울려놓고 울지 말라고? 손을 뻗어 제 눈물을 닦아주는 유키나의 태도에 화가 난다. 리사는 저를 향한 그 소꿉친구의 손을 외면해버렸다. 찰싹. 손 대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마치 리사가 유키나를 한 대 때린 것처럼 조금 큰 소리가 났다. 그 상황에 당황했는지 유키나도 눈을 크게 뜨고 리사를 보더니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런게 아닌데.....

다시 만났을 때 서로 이런 모습을 보이려고 한게 아닌데.....

리사는 꿈 꿔온 유키나와의 재회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며 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속에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 믿고 싶을 정도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이어서 하도록 하지.”



무미건조한 억양. 유키나는 제대로 된 목례조차 없이 수행비서를 데리고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가기 무섭게 긴장의 끈이 풀려 리사는 더 울기 시작했고, 옆에서 같이 훌쩍이던 아코와 부둥껴안고 울었다.



“그 개자식!!!!!!!!”



탁! 아코가 술잔을 세게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유키나가 연습실을 나가기 무섭게 울면서 욕을 하기 시작하던 단원들 답게 저마다 연습 후 뿔뿔히 흩어져 술 자리를 가졌는데 리사나 아코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파트는 다르지만 대학시절 앙상블을 같이 하면 친해진 적 있는 리사, 사요, 아코는 이렇게 종종 사석에서도 함께 시간을 갖곤 했다.



오늘 저녁은 마침 모두의 절친은 시로카네 린코도 합류했는데 (피아노 협연 예정인 그 린코 맞다) 1차는 저녁 먹으며 생맥주로 간단히 끝냈으나, 2차로 넘어와선 큰 사이즈 팩 사케를 벌써 2병째 마시고 있었다. 그 술의 대부분을 아코와 리사가 마시고 있는걸 보아 결국 모든 원인은 미나토 유키나가 아닐까....



“개자식. 재수탱이. 왕재수!”



“아, 아코짱...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거야?”



“어디긴 게임이지! 린린도 겜 할 때 가끔 욕 썼잖아?”



“그, 그건... 사람들 앞에선... 비밀이야....”



“아무튼!!! 리사언니랑 사요씨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둘 다 왜 이렇게 조용한거야? 아코만 이상한거야? 그 사람, 빨리 내쫓을 계획이 필요하다고? 츠루마키 코코로 이사장님한테 부탁해볼까... 이게 게임이라면 그 사람은 질 나쁜 보스몹이야.”



“저기, 아코짱...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나가서 바람 좀 쐴래?”



“린린~~~ 아코는... 아코는....으아아아앙앙....”



취한 사람을 말리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실컷 욕을 하고 소리 치더니 이젠 울고 있는 아코를 보며 린코는 어쩔줄 몰라 두리번 거린다. 평소 같으면 리사가 나서서 중재하고 도와줬겠지만 오늘은.... 이미 취할대로 취해 계속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며 자꾸만 젓가락으로 제 머리를 꽁꽁 떄리고 있는 리사의 모습을 보아 불가능 할 것 같다.



“음.....”



린코와 함께 유일하게 멀쩡한 사요는 2명의 취객을 번걸아 바라보며 한숨을 쉬더니 린코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늘 시로카네씨에게 폐를 끼치네요.”



“아, 아니요.... 히카와씨, 어떻게 할까요? 저는... 아코짱을 데려다 줘야 할거 같아서요.”



“네. 확실히, 이 이상 술집에 있다간 가게에 폐를 끼치겠어요. 일단 나가죠. 제가 계산 할게요.”



사요는 또 젓가락으로 머리를 꽁꽁 때리는 리사를 저지하며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았다.



“이마이씨. 왜 이렇게 많이 마신거에요? 미리 말리지 못한 제 탓이기도 하네요.... 집에 가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알겠죠?”



“사~~~요~~~~”



“이마이씨, 일어나요.”



사요가 리사를 부축해 일으키지만 그 와중에도 리사는 연신 손가락 끝으로 사요의 얼굴을 꾹 누르고 헤실헤실 웃으며 몸을 이러저리 휘청인다. 아코도, 리사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비틀 거리는 꼴을 보아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엄청나게 고생할건 뻔한 일....



“사요~ 너는 좋겠다~ 칭찬도 받고~”



“무슨 소릴 하는거야, 당신!”



“좋겠다~ 나도... 나도....”



“집이 어디 쪽이셨죠? 주소 말해주실 수... 이, 이마이씨!!! 잠시만!!!! 조심해요!!!!”



리사가 비틀거리며 차에 치일 뻔하자 놀란 사요가 달려가 리사의 허리를 잡아 간신히 제 쪽으로 당긴다. 휴우... 십년감수했네 진짜. 이마이씨가 이렇게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한건 처음 보는걸....



“역시... 지휘자 선생님 말이 신경 쓰여요?”



“유키나 바보....”



유키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닐텐데....



“저기, 히카와씨. 저는 택시가 잡혀서 아코짱 데리고 갈게요.”



“네, 매번 정말 감사해요, 시로카네씨. 조심히 들어가시고 무사히 도착하면 메세지 남겨주시겠어요?”



“네... 히카와씨도요.”



“조심히 가요.”



아코와 린코가 택시타고 가는 뒷 모습을 보며, 사요는 이제 저에게 기대어 잠든 리사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리사의 집 주소를 모른다... 주소도 모르는데 어떻게 데려다 준다는 말인가. 우리 집에 데려가기엔 민망한데....



“사요.”



어....? 이 목소리는?



인기척에 놀란 사요가 뒤를 돌아보니 낮에 본 옷차림 그대로의 미나토 유키나가 있었다. 거리의 화려한 네온 사인 아래 그녀의 모습은 조금 이질감이 들었다.



“미나토....선생님?”



“그녀는 취한건가?”



“이마이씨요? 네. 보시다시피. 집에 데려다 드려야 하는데, 주소를 몰라서....”



“그럼 내가 데려가지.”



“네?”



“두 번 말하게 하지마. 내가 데려간다고.”



유키나는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더니 사요에게 기대어 있는 리사를 제 쪽으로 데려온다. 하이힐을 신고 있는 다리가 아주 조금 휘청이는걸 보고 놀란 사요가 다시 리사를 부축하려 했지만 유키나가 신경질적으로 사요의 팔을 밀치더니 어떻게든 리사를 본인이 직접 부축한다. 뭐지...?



“악장이 술 취한 단원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는건 좋지 않아.”



“뭐, 뭐라고요?”



내가 언제? 사요는 조금 어이가 없어 화를 낼 뻔했지만 이 사람이 오케의 지휘자라는걸 다시 생각하며 간신히 참는다.



“아까, 허리를....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설마... 아까 차에 치일 뻔할 때 허리 좀 잡고 있었다고 그런건가? 아니, 그 전에 당신 언제부터 우릴 보고 있었던거죠? 사요는 이런저런 의구심이 들어 너무너무 물어보고 싶지만 미나토 유키나라는 사람은 절대 솔직하게 말 해줄 것 같지 않아 욕구를 억누르며 억지로 태연한척 한다.



“그런데 이마이씨의 집 주소는 알고 계세요?”



“당연하지. 우리 부모님과 옆 집에 사니까.”



“네?”



“리사가 나에 대해 안 말 했나보네....”



유키나는 아주 살짝 삐친듯 저에게 축 늘어져 기대 있는 리사를 째려보더니 자신의 수행기사를 불러 검정색 세단 뒷좌석에 리사를 태운다. 그러고보니 처음 술집에서 나왔을 때부터 근처에 저 자동차가 있었다. 신형 벤츠 세단. 회장님 자동차 같은 타입의... 저런걸 타고 다니나. 유키나의 외모와 어울리진 않는다 생각하며 사요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혹시, 우리를 따라오신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사요?”



“계속 우릴 보고 계셨죠?”



“오해야.”



“하지만....”



“오해라니까.”



“조금 이상해서 선생님한테 이마이씨를 맡기기 걱정되네요.”



“걱정? 리사와 나는 소꿉친구야. 내일 리사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사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리사와는 가까운 사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신도 어서 집에 들어가도록 해. 내일도 연습이잖아?”



리사가 마음만 먹으면 술자리에서 얼마든지 유키나와의 사적인 친분을 말 해주었을 것이다. 지금 유키나의 태도를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리사가 알려주지 않은건 둘 사이에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있을 터. 배려심 깊은 사요인지라 남들의 사정에 더 이상 관여할 생각은 없다. 사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건낸다. 유키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리사를 태운 뒷 좌석의 문을 열고 사라진다.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사요는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감에 서둘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술 냄새...."



차 안에 진동하는 술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며 창문을 열었다. 리사로부터 느껴지는 진한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한 데 어우러져 조금 어지러워 진다. 유키나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저에게 안기듯 기대어 있는 리사를 밀치진 못 한다. 아니, 밀치고 싶지 않았다.



"후우....."



가까이 느껴지는 리사의 숨결과 체온에 몸이 뜨거워진다.



"에어컨 틀어주겠어요?"



운전 중인 수행기사에게 에어컨을 부탁한 후 흐트러진 리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로부터 반갑다는 인사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한채, 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을처럼 굴었는지.... 스스로의 어린 감정에 대해 자책하고 싶은 유키나였다.



'상처 줄 맘은 없었는데....'



낮의 오디션 때 리사에게 한 말른 결코 그녀를 비난하고자 했던 말이 아니었다. 리사가 자극 받아 더 성장하길 바라며, 자신과 함께 하며 더 잘될 것이라 믿으며 그녀를 위해 했던 말인데.... 특별함이 하나도 없다는 표현은 결코 욕이 아니었다. 그 특별함이 없는게 오케스트라의 단원에겐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리사.



부족한게 있다면 나와 함께 채워나가먼 돼.



"너는 정말...." 바보야.



"바~보~!"



뭐?



"바보 유키나!"



"리, 리사?"



언제 깼어? 집에 거의 다 와가는데...잠, 잠깐 리사! 잠에서 깬 리사가 갑자기 유키나 위에 올라타 자신의 체중으로 그녀를 짓누르더니 양 손으로 유키나의 얼굴을 잡고선 이리저리 문지르고 꾹꾹 누른다.



"미나또오 유끼나! 피부 탱탱한 것 죰... 봐~ 졸라 귀욥네 지짜"



"뭐, 뭐 하는 거야...."



"짜증나게 이뿌....하아.... 바~보!"



"무슨 소리야? 바보는 리사잖아?"



"그래! 나 바보다! 너 바께~ 모르눈~ 바~~~보!"



뭐라는 거야 정말....



"히이잉....너 진짜...나빴어 즈응말.... 내 인생 네~~가 다 망쳤어....으엉엉...."



"리사?"



망치긴 누가 뭘 망쳤다는거야. 얘 정말 왜 이래. 이미 리사의 막무가내 행동에 입술의 립스틱과 화장이 우습게 번져버린 유키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어떤 꼴인지 예상된다. 리사, 이렇게 술 버릇이 나빴나? 앞으로 금주 시켜야 겠어....



"야!!!!!"



"왜, 왜...."



"유~키~나~! 너 지금 딴 생각 했찌~~? 사뢈이이~ 말을 하믄 좀 드러라? 너어는~ 니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줄 아세여? 맞아 너 쫌 잘났어...인정... 이뿌고 잘생겨써.. 멋있고 재능있고...내가 그래서...너 엄청 조아해짜나~ 으이으..엉엉.... 또 샌각나네 옥상 엉엉...너 진짜 나빴어....내가 너 음청 좋아해단말야"



"리, 리사...."



이거 비싼거란 말이야. 리사는 눈물 콧물 범범 된 얼굴로 흐엉 흑흑 히이 훌쩍훌쩍 거리며 유키나의 실크 원피스에 얼굴을 비빈다. 자, 잠깐 그러면 내 가슴이 닿는다고 리사. 미치겠네 정말....



"왜... 나타났어?"



리사는 유키나의 품에서 얼굴을 떼며 진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미워 보이지 않고 예쁘다. 적어도 유키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난 15년 동안 의도적으로 리사를 방치하진 않았다. 오히려 종종 리사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취한건 유키나고, 그 제안을 거절한 사람이 리사였다. 너야말로 날 피해놓고 왜 피해자인척 하는거야. 유키나는 리사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의 리사의 눈물이 단순 오늘 오디션 때문이 아닌게 느껴져서 더 혼란스러웠다.



"리사, 나는...."



"웁....우웁..."



"어? 리사?"



"우웨엑......"



아..... 피할 틈도 없었다. 이마이 리사는 순식간에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구토했다. 그 토사물은 고스란히 유키나의 상의에 쏟아져 차 안을 온통 불쾌한 냄새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아.... 아......"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유키나 입장에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운 반면, 리사는 저가 한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지 헤실헤실 웃더니 다시 잠들어 버린다.



"차 세울까요? 거의 다 왔는데...."



수행기사가 조수석 서랍에서 물티슈와 수건을 꺼내 뒷 좌석으로 던져준다. 사고의 회로가 정지된 유키나는 머뭇거리다 멈추지 말고 빨리 목적지로 가자고 제안했자. 멍 때리다 물티슈와 수건으로 리사의 입술과 얼굴부터 닦아준다. 내 옷이 더러워진 것보단 리사가 더 중요하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남의 토사물을 닦아 주면서 문듯 어린시절 유키나가 아파서 비슷한 행동을 했을 때 어린 리사가 어른스럽게 챙겨준 순간이 떠오른다.



"빚은 갚았어...."



그 순수한 어린날이 떠올라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난다. 생각해보면 리사는 항상 저를 위해 양보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내가 다가갈 차례인지도....



"리사. 도착 했어. 걸을 수 있겠어?"



대충 묻은 것들을 닦는 정도로 마무리 한 후 리사를 부축해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버선발로 뛰어나온 리사의 부모님은 유키나와 리사가 풍기는 냄새와 몰골에 놀라 연신 유키나에게 고개 숙여 미안하고 고맙다고 사과한다.



"유키나짱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우리집에서 씻고 갈래? 우선 이거라도 갈아 입어."



"감사합니다. 저기... 리사는 제가 씻길게요. 저도 씻어야 하니까."



"괜찮겠어?"



"어차피 이런 꼴이라 제가 하는게 나아요. 두 분은 주무세요."



"그 유키나짱이 이렇게 멋진 숙녀로 자라다니! 우리 리사가 폐 끼쳐서 정말 미안해, 유키나짱."



"아니요. 리사가 이렇게 취한건 제 탓이니까...."



리사의 부모님을 뒤로한채 취한 리사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갔다. 소꿉친구라지만 서로의 알몸은 본 건 아주 어렸을 때 이후 처음.... 유키나는 최대한 리사의 몸을 안 보려 노력하며 힘겁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욕조로 안내한다. 리사는 취한 와중에 상황판단이 안 되는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유키나가 해주는대로 알몸이 되어 샤워기가 내뿜는 따뜻한 물줄기에 기분 좋은듯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당황스럽다.



리사가 걱정되었다. 취했다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몸을 맡기다니... 나쁜 사람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이러다 큰 일 난단 말이야, 리사...."



리사의 몸을 이런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얼굴이 뜨거운 이유는 온수로 가득찬 이 곳의 열기 탓이 아닌 빠르게 뛰고 있는 제 심장 탓일 것이다.



"포근해...."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마이 리사는 알몸의 상태로 유키나에게 푹 기대어 새근새근 잠이 든다. 정말 큰 일이네, 얘.... 길 바닥에서도 잠 들 기세야.



"역시 내가 챙겨야겠어...."



유키나는 맨 살에 닿는 리사의 온기를 느끼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아마도 내일 아침 눈 뜨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채, 아무 것도 모른채 웃기만 할 이 소꿉친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기분 좋아..."



"리사....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리 나라도 기분이 이상해져."



하아.... 오늘 밤은 잠들긴 글렀다. 유키나는 한숨을 쉬며 제 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어떠한 욕구를 간식히 억누르며 수건으로 리사의 몸을 닦아준다. 파자마를 대충 입히고, 어린시절과 다를 바 없는 이 집구조를 더듬어 리사의 방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이어서 지친 제 몸을 그 옆에 안착시켰다. 새근새근 잠든 리사의 민낯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함이 있었다. 사랑스럽네, 리사는....



'오늘 잠은 다 잤다....'



후우.... 유키나는 잠든 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마음 속으로 이런저런 선율을 떠올린다. 선율과 함께 주마등처럼 리사와의 오랜 인연이 스쳐 지나간다. 감정표현에 서툰 자신에게 실수가 있진 않았나 하면서...





"으음....."



목 말라.... 심한 갈증이 느껴지는 와중에 물을 찾으며 눈을 뜬다. 이마이 리사는 분명히 동료들과 술 자리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집에 와 있는거지? 하며 '필름 끊겼구나...'하고 깨닫는다. 종종 과음 후 있는 상황이라지만 늘 눈을 뜨고 우리집 침대라는걸 안심할 때마다 찝찝함과 불쾌감이 자신을 괴롭힌다.



"목 말라...."



물 마시려면 아랫층 내려가야 하는데....



"이제 정신이 들어?"



조금 낮은, 차분하고 다정한 음성이 들려온다. 분명 우리집인데. 내 침대인데 도대체 이건.... 아..... 으음???????



"에에에에엑~~~~~???????"



"목 말라? 혹시 몰라서 물 갖다 놨어. 잠시만."



제 옆에 누워 있다가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선반 위 생수를 컵에 따라 주는 사람. 지금 입고 있는 그거, 내 잠옷 아니야?? 아직 촉촉한 물기가 느껴지는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팔짱을 자신을 내려보는 저 무표정.



"유, 유키나가 왜 여기에 있어????"



미나토 유키나가 왜 여기 있지? 분명 어제의 술 자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고정 술친구 멤버들인 사요, 아코, 린코가 아니었나? 분명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유키나가 합류한 적 없다. 아니, 애초에 유키나가 어떻게 알고 거길 왔겠어?



"설마 했지만 역시 하나도 기억 못 하는구나, 리사?"



"내, 내가 무슨 실수라도....? 잠시만! 혹시 나 씻기고 옷 갈아입힌....?"



리사는 제 몸을 살피며 새로 입힌게 분명한 속옷과 파자마, 물기 묻은 머리카락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씻기고 옷 갈아입혀 눕혔을거라 추측한다. 여긴 우리집이고 부모님은 집에 계시니 당연히 어머니가 하셨을거야 그렇지???



"우리 엄마가 하신거지? 맞지? 제발 맞다고 해줘."



"리사는 그렇게 믿고 싶을지 모르지만 내가 샤워 시키고 옷도 갈아 입혔어. 물론 속옷까지. 혹시 나한테 토한건 기억해? 새로 산 실크 원피스가 엉망 되버려서 버렸어."



"으아아아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왜 그랬지... 유키나한테 민폐라니.... 그 옷 새로 살게!"



"디자이너 한정판이라 이제 못 구할텐데? 애초에 리사 정도 단원에겐 월급 수준 가격이 아닐까 싶어."



"아....."



"리사. 물 안 마실거야?"



"마, 마실게....."



미치겠다. 이게 무슨 일이야. 15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에게 술 취해서 추태나 부리고...내가? 도대체 유키나는 어디서 나타난거야? 내, 내 알몸 다 본 거야? 미쳤어 정말... 요즘 살 쪘는데... 잠시만. 살 찐게 뭐 어때서. 쟤한테 잘 보여서 뭐한다고.



"혼자 무슨 생각 중이야? 뭔가 마음 속으로 내 욕하는 것 같아 불쾌한걸."



"아냐! 내가 왜 유키나를....! 미안해서 미칠거 같은데... 근데 어째서 어젯밤 우리가 같이 있었어?"



"글쎄. 우연히 신주쿠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는 리사를 발견했다고 할까?"



"저, 정말?"



"아니. 실은 거짓말이야. 이번엔 솔직히 말해야겠어. 나도 성인이 되며 많이 변했거든."



"유키나?"



유키나는 리사의 옆,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 손을 뻗어 리사의 뺨을 쓰다듬고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준다.



"미안했어. 나는 리사를 비난하거나 상처줄 생각 없었는데 리사가 상처 받은 것 같았거든. 리사라면 당연히 알거라 생각했는데, 내 말투는 많이 서툴러서 본심과 다르잖아? 너무 걱정되서 리사의 뒤를 밟았어. 몇 시간을 기다리니 술 취해 히카와 사요에게 매달려 나오던걸? 조금 화났어. 다른 사람에게 리사를 맡기고 싶지 않았어."



아, 믿기지 않는다. 지난 15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던거지? 유키나가 날 걱정해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고...? 아니, 생각해보면 어린시절 유키나는 무심한듯 다정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아닌 리사 자신에겐 한결같은 감정의 교류라는게 있던 사람이다. 이마이 리사는 어쩌면 자신이 유키나를 단단히 오해했다고, 잘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저기....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괜찮아."



유키나. 언제부터 이렇게 어른스러웠지? 으음.... 계속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유키나의 손길에 리사는 몸이 뜨거워지는걸 느낀다. 미쳤어, 정말. 고작 이런 스킨십만으로도...



'어쩌면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걸지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15년간 무분별한 리사의 연애사 중심엔 유키나가 있었다. 짧게 만난 수 많은 연인들은 저마다 미나토 유키나의 어떠한 면을 닮은 이들이었으며 리사는 그들과 이별하는 순간마다 유키나를 떠올렸다.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미련 갖지 않았다면 조금 다른 결말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의도적으로 유키나의 연락을 거절 했지만 실은 지금도 책상 밑 상자엔 15년간 모아온 유키나의 인터뷰가 담긴 클래식 잡지들이 한 가득이다. 아무리 아니라 우겨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유키나를 향한 감정이라는 이 사실에 리사는 울고 싶어진다.



애써 부정하며 잘 버티고 있었는데 왜 다시 나타나 마음을 흔드나 싶다. 그것도 이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응?



유키나는 리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고 옅게 미소 짓는다.



"리사. 어젯밤 기억 하나도 안나?"



"왜, 왜? 내가 더 실수한 것 있어?"



"실수....일까? 리사는 나 보고 예쁘다, 멋지다, 귀엽다 그런 말들을 했지. 내가 리사 인생을 망쳤다는 말도, 나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말도. 취중진담이란 단어를 여기에도 적용 해도 되는걸까? 맨정신일 때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겠어?"



맙소사... 미쳤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술이 웬수다. 미쳤어 미쳤어...



"자, 잠시만!"



리사는 부끄러움에 잽싸게 베개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파묻는다. 말도 안 돼.... 차마 유키나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얼굴 뜨거워 죽겠어....



“가리지 마.”



“시, 싫어!”



“리사. 취중진담이었냐고 물었잖아.”



“대답하기 싫어! 왜 그런걸 물어보는거야? 유키나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리사를 좋아하니까.”



“그게 무슨! 에....? 유키나, 뭐?”



“그러니까 얼굴 가리지 말래두....”



유키나는 놀란 리사의 손을 잡고 그녀의 품에 있던 베개를 끄집어내 옆으로 던져 버린다. 둘의 얼굴이 가깝게 맞 닿아 1cm만 더 닿으면 입술이 닿을지도. 아슬아슬하게 코 끝이 맞닿은 상황에서 리사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얘가 왜 이러지....?



“리사.”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갑자기가 아니야. 오랜 시간동안 내 연락을 거부한건 리사였잖아? 나는 그동안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해.”



“그, 그... 유키나는 내 고백 거절했잖아...!”



“그러는 리사는 날 좋아한다 해놓고 15년 동안 어지간히 많은 사람을 만난 것 같던데? 연애 경력이 장난 아니던걸.”



뜨끔. 얘가 이걸 또 어떻게 알고.... 잔뜩 삐진 얼굴로 입술 쭉 내밀고 있는 유키나는 제법 귀엽다.



“그걸 유키나가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어.”



“혹시 내 뒷 조사 했니?”



“그런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알아?”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무려 15년이라고! 그 시간 동안 아무도 안 만났다고 하면 더 거짓말 아니야? 나는 평생 네가 연락해주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너만 기다려야 했어? 내 고백은 네가 거절했잖아!”



“.....나는 아무도 안 만났어.”



뭐, 뭐? 지금.... 서른이 넘었는데, 그 얼굴로! 그 능력으로! 그 귀여움으로! 모태솔로 선언하는거야...? 미나토 유키나, 음악 밖에 모르는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해하지마. 음악 때문이 아냐. 리사 때문이야. 내가 취임 기념 선곡으로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과 슈만 4번을 고른걸 봐도 모르겠어? 전부 리사 취향이잖아.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의 멜로디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하다며. 난 리사를 위해 그 콘체르토를 해야겠다 생각했어.”



“무슨....”



“이제와서 이런 말 해서 미안해. 그 때는 그게 리사를 위한거라 생각했어. 큰 마음 먹고 유학 가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를 상황인 내가 ‘나도 리사를 좋아해’라고 말 하면 결국 일본에 혼자 남을 리사를 더 힘들게 하는거였잖아? 어쩌면 나 때문에 리사의 진로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고. 어차피 리사에 대한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준비 되었을 때 리사한테 마음을 전하겠다고 다짐 했었어.



유키나, 설마.... 그 때, 너도 날 좋아했다고 말 하는거야? 이제와서? 15년이나 지나서... 사실 나도 널 좋아했어...라는 그런 말을 하는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말에 화 나기보단 기분 좋아지는 난 어떡하면 좋아? 어떻게 할 거야? 너 진짜 내 인생 책임져야 하는거 아냐....?



“미안해, 리사. 그래도 유학 간 후에 꾸준히 연락 했잖아. 나는 여러번 리사에게 날 보러 오라고 권유했어. 그걸 거절한건 리사야. 이런저런 루트로 리사의 연애사를 전해 들으면서 이제 나 같은건 아무래도 좋은건가...하고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알아?”



“나 때문에... 상처 받았어?”



“뭐, 아무래도 좋아. 결국 리사의 마지막은 내가 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런 시시한 애들보다 내가 훨씬 괜찮지 않아?”



언제부터 그렇게 자신만만해진거야.... 유키나, 많이 변했네. 이런 모습도 귀여워.



“내 첫키스도, 다른 모든 처음도 다 리사야.”



“뭐? 우리가 언제....?”



우리가 언제 키스를 했어...? 라고 물으려는 찰나에 유키나의 따뜻한 두 손이 리사의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입술을 포개어 왔다. 유키나, 야밤에 사탕이라도 먹었나?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한 기운에 머리 속이 아찔하다. 오랜 시간 무수한 사람을 만나도, 그 누구와의 키스에서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 했는데... 단순한 욕정이 아닌, 어설픈 감정 교류가 아닌 진득한 교감 속에서 리사는 이게 진짜 키스구나 하고 생각했다. 살며시 벌린 입술 안으로 서툴게 들어와 부드럽게 뒤엉키는 유키나의 혀와 타액을 느끼며 몸이 간질거린다. “하아...” 긴 시간이 흐르고 입술이 떼어질 때 벌개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지금 했으니까 내 첫키스는 리사야.”



잘도 저런 말을.... 유키나, 유학 기간 동안 음악말고 연애 공부 했니? 버터 바른 빵만 먹다가 혀에 버터 발랐나... 근데 싫지 않아. 사실 좋아.



“나, 나는.... 유키나라면 금발머리 쭉쭉빵빵 언니들이랑 많이 사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 이미지는 어떻게 된 거야....”



“근데 정말 처음이야?”



“뭐가?”



“키스....”



“당연히 처음이지.”



“근데 왜 이렇게.... 잘 해....?”



“윽.....”



“......”



“그럼 한 번만 더 해도 될까? 더 잘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좋아....”



그렇게 서로를 껴안고 쪽쪽 입술과 혀를 엉키며 서로를 탐닉하고 빨아들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달콤한 입맞춤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달라 붙어서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반복하고 그러다 어느샌가 유키나의 몸이 리사의 위에 포개어져 아주 조금 야한 자세가 되어버리는 순간까지. 이미 연애의 모든 것을 경험해본 리사 입장에선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어 더욱더 자극적이지만 유키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이상의 시도를 하진 않는다.



“하아....”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오랜 입맞춤을 계속하다가 그 시간을 방해 받은 것은, 어느새 해 뜰 시간이 되어 리사의 어머님이 방 문을 두드르는 순간이었다. “리사~ 유키나짱. 일어났니?”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유키나가 으어어어엇 하다가 리사의 입술을 깨문 것은 한 순간의 실수. 뒤엉킨 몸을 허둥지둥 일으키며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어머님 앞에서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하며 식은 땀을 흘렸다. “유키나짱, 어디 아프니?” 걱정하는 아주머님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이 드는 유키나였다.



하지만 그런 유키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엄마 몰래 그녀의 손을 만지작 거리는 리사가 있다. 이제 이 손을 놓지 않아도 되는거야, 유키나? 정말로? 진짜 꿈 아니지? 정말이지? 유키나도 날.... 좋아하는거지?



“사랑이야.”



엄마가 방 문을 닫고 나갔을 때, 유키나는 리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리사를 사랑해.”



“유키나, 갑자기 훅 들어오면... 너무 떨린단 말이야. 심장에 무리야.”



“나는, 엘가처럼 리사를 사랑할거야.”



엘가처럼.... 이성관계 난잡한 아티스트 투성이인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 사랑한 엘가의 순애보. 그런 엘가의 손에서 탄생한 곡 <사랑의 인사>.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한 엘가와, 그를 사랑한 아내 앨리스의 특별한 러브 스토리가 담긴 그 곡은 언젠가 리사가 이상적인 프로포즈의 조건으로 말한적 있는 곡이었다. 내가 바라는 프로포즈는 엘가의 사랑의 인사와 장미꽃 한 송이면 충분하다고. 비록 지금 장미 꽃은 없지만, 사랑의 인사를 연주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디선가 그 선율이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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