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편 들 모 음.
사람의 온도는 일정하다. 물론 감기가 있다거나, 특별한 상황이 있다면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도 있다. 당장 몇 주 전의 토모에도, 감기가 걸려 40도를 넘나들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람의 온도는 36.5도를 크게 웃돌지 않는다.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더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 아무리 가을이 짧아졌다 해도 시월의 바람은 차다. 그런데도 복도에서 간혹 맞닿곤 하던 바람들은, 저마다 따스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사실 조금 더 잘 느껴보면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복도에서부터 분위기가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호객행위를 위해 제각각 목청을 높이고, 구경하는 사람들 이마엔 땀줄기가 송송 흐르고, 서로 팔짱 낀 손엔 먹음직한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오전을 지나 오후가 되니 사람들은 더더욱 하네오카 고등부 건물로 찾아왔다. 중등부도 오늘은 오전 수업만 해서, 하네오카 중학생이 평소보다 훨씬 눈에 많이 띄었다.
“언니!”
아니나 다를까, 보라색 머릿결을 트윈 테일로 잘 정리한, 중등부 옷을 입은 학생이 토모에를 꼭 안았다. 후끈 달아오른 복도인데, 서로의 온기마저 고스란히 나눠가졌다.
이러니 덥지, 안 더울 리가 있나.
“아코, 공부 잘 하고 왔어?”
“응!”
아코는 토모에에게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의상의 원단을 제법 좋은 걸 쓴 터라, 아코는 토모에의 품이 더욱 기분 좋게 느껴졌다. 토모에는 아코의 머리를 한번 넘겨주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밥은?”
“안 먹고 왔어!”
솔직히 그 대답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토모에는 짐짓 화난 척 손을 옆구리에 두고, 그러면서도 눈은 장난스럽게 치켜뜨고 아코를 바라보았다. 살짝 기울인 몸이 꽤나 과장스럽다.
“도시락은 어디다 팔아먹고 왔길래.”
“치, 돌아다니면서 뭐 먹으면 되잖아. 그리고 애초에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뭐.”
아코가 입을 내밀며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이 하네오카 문화제라고 하자, 우다가와 자매의 어머니도 도시락을 특별히 싸주지 않았다. 그 대신 맛있는 거 많이 사먹으라며, 평소보다 용돈을 더 많이 주었다.
“사람은 밥심이야, 밥심.”
그래도 사람은 꼭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게 토모에의 지론 중 하나였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마음이 아니라 밥이다, 밥.
“그래도 뭐... 오늘은 괜찮나?”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토모에도 빙그레 웃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사실 이렇게 말하는 토모에도 도시락은 없다. 황새가 뱁새 앞에서 젠체한 꼴이었다.
“만세!”
그것도 모르고 귀여운 동생은 손도 번쩍 들고, 발도 번쩍 들어 점프를 번쩍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모습이 괴도도 부럽지 않겠구나.
복도를 걸어가다 도너츠를 하나 사고, 도너츠를 입에 넣다 와플 하나를 더 샀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무언가를 더 사려고 할 때엔 어김없이 붙어 있는 SOLD OUT 딱지. 그 문구가 참 얄궂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다른 메뉴에 눈길이 가 토모에와 아코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위에서 말했듯 토모에는 밥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간단히 카레라이스를 주문했다. 아코는 와플과 도너츠에 금세 배가 불렀는지, 간간히 토모에가 먹여주는 카레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분명 양은 깨작깨작인데, 먹는 모습 자체는 꽤나 복스럽다. 비교한다면 히마리랑 비슷하려나. 아, 히마리는 양도 복스럽지.
“아, 언니네!”
복도로 이어졌던 계단을 내려가다, 연극부의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본 포스터와 같은 포스터는 아니었다. 그늘진 조명을 받아,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토모에. 그러나 눈빛은 확실히 살아있는 그녀의 얼굴이 포스터에 확실히 인쇄되어있었다.
“엄청 부끄럽네...”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토모에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캐릭터 컨셉샷이라며 찍은 사진이었다. 포스터에 쓴단 말을 했던가, 안 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중요치 않은 말이라 그냥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냐, 아냐, 아냐. 엄청 멋져.”
부끄럽다는 토모에의 말에, 아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전히 언니는 묘하게 이상한 곳에서 부끄러움이 많았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언니는 언니의 멋짐에 대해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언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우다가와 아코의 언니니까, 언니는 내 마음을 좀 더 알아줬으면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사람이야, 유키나 씨보다 더.”
그래서 아코는 평소보다, 좀 더 솔직히 토모에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신보다 훨씬 큰 언니를 그 작은 눈동자에 모두 담았다. 문득 언니가 이렇게나 작았나 하는 생각도 좀 들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내가 큰 거겠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쁘다.”
그리고 토모에는 아코의 시선을 살짝 피해버렸다. 아코의 진지한 말에, 토모에는 정말 평범하게 기뻤다. 굳이 특별히 어떠한 말을 더 덧붙이지 않아도, 그저 평범하게.
마땅히 더 할 것도 없어, 두 사람은 학교 건물 밖으로 나왔다. 교정으로 이어지는 길 한 구석에선 야외특설무대에서 만담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재미는 별로 없었다.
“라이브, 저기서 하는 거지?”
아코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야외특설무대를 가리켰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던 태양이 또 다시 한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토모에의 시선이 그 끝을 향하다가, 이내 밑으로 떨어졌다. 긍정의 표시였다.
“그렇지, 뭐.”
특설무대도 예정이 한참 남아 있어서, 드럼은 아직 세팅하지 못했다. 사실 오늘 라이브 세팅은, 애프터 글로우의 모두에게 맡겨두긴 했지만 말이다.
“언니.”
태양과 맞닿은 하늘 사이, 사이에 구름 몇 조각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코의 목소리도 그러한 구름을 타고 토모에에게로 다가왔다.
“응.”
토모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실내와는 다르게 조금은 시원해진 공기가, 그녀의 살갗을 한번 쓰다듬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역시 언니는 드럼 칠 때가 제일 멋있어.”
그런 토모에의 뺨을 아코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간질였다. 참지 못한 그녀는 결국 손을 들어 손톱으로 제 뺨을 긁적였다. 그것을 시원하다 느끼기 이전에, 아코의 목소리가 참 시원스럽다.
“오늘 좀 직설적이네. 아코.”
방금 먹었던 도너츠와 와플에 자백제라도 들어간 걸까. 아니면 평소와 다른 들뜬 분위기에 취해버리고만 걸까. 오늘의 아코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언뜻 보이는 옆모습이, 많이 컸다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동생은 자라만 간다.
“직설적...? 그게 뭐야?”
어휘력도 그만큼 좋아진다면, 좀 좋으련만.
“솔직하단 뜻이야.”
저를 바라보는 동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여전히 제 손길을 곱게 받아주는, 하나뿐인 내 동생. 그래도 그런 어설픈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연극도, 라이브도 꼭 보러 와.”
“응!”
내 동생은, 그런 애니까.
마야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동선 체크 겸 마지막 결의를 다지는 겸해서 슬슬 체육관으로 와달라는 문자 메시지 하나. 앞은 그렇다 쳐도, 굳이 뒤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코는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고 싶다며 다시 교내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자리를 미리 선점해두었으니, 츠구미에게 직접 말하라고 아코에겐 미리 언질을 주었다.
무료 연극이라 초대권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연극부의 지인들에겐 좋은 자리를 한 석씩 줄 수 있다는 부장의 전언이 있었다. 더 많은 자리를 주고 싶었는데, 체육관이 좁아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프로 연극도 아니고 학생 연극인데, 특별한 경험을 함께 나눌 사람은 그래도 있어야 한다는 게 부장의 주장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배려를 감사히 여겨, 지인들을 한 명씩 초대했다.
토모에는 누구를 초대할까 진심으로 고민하다, 결국 아코를 택했다. 애프터글로우는 자신을 포함해 다섯 명이니까, 누구 한 명을 초대하기도 애매했다. 이럴 땐 가족을 고르는 게 역시 안전빵이다.
반면 그러한 토모에의 선택과는 다르게, 가족이 아닌 친구를 선택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가령 예를 들면 시라사기 치사토가 그러했다.
“토, 토모에 쨩.”
하네오카 교내로 들어오는 입구엔 장식물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얼마 전 토모에가 하구미를 길에서 마주쳤을 때, 하구미는 그 장식물을 보고 구름사다리라곤 했었는데.
“아, 안녕하세요.”
“안녕...”
그 구름사다리 밑에, 카논 선배는 제 몸보다 훨씬 커 보이는 꽃다발들을 들고 서있었다. 혹시라도 떨어트릴까봐, 전전긍긍한 게 토모에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이마자락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이 그 증거였다.
“꽃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토모에는 그 중 하나를 찾아 들었다. 다른 두 개의 꽃다발에 비해 조금 작았지만, 그래도 각각의 색이 살아있어 제법 괜찮았다. 꽃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꽃이 예쁜 건 알고 있으니까.
“그거, 토모에 쨩 거야.”
“아.”
카논의 말을 들은 토모에의 입에서, 외마디 말인지 신음 소리인지 모를 것이 튀어나왔다. 하나는 무조건 세타 선배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 치사토 선배의 것이겠거니 했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카논 선배한테 꽃다발을 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그런 생각을 지닌 채 받아서 그랬는지, 더욱 마음에 다가왔다.
“미리 받아둘게요.”
“끝나면 주려고 했는데... 뭔가 아쉽네.”
“아뇨, 아뇨.”
카논이 미안하다는 듯, 입가가 살짝 풀린 채 어설피 웃음을 지었다. 꽃다발을 받아든 토모에는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한번 들이 맡았다. 카논 선배가 건넨 꽃다발은, 생각과도 같이 향기로웠다. 조금 새삼스럽게도 이번 연극을 통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고,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선배.”
꽃다발에 가린 토모에의 목소리가, 카논에게는 살짝 그윽하게 들렸다. 생각 이상으로 기뻐하는 것 같지만, 기뻐하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저는 준비한 게 없는데.”
“괘, 괜찮아! 토모에 쨩! 뭘 받으려고 준비한 건 아니었으니까...”
토모에의 말에 카논은 전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내저었다. 순수한 호의가 담긴 선물이었으니, 카논도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 밥이라도 살게요.”
그렇다고 마냥 받기만 할 토모에가 아니었다. 기어코 후배인 저가 밥을 사겠다며, 그녀는 쾌활히 웃어보였다.
“그때는 치사토 쨩도 같이야.”
카논도 토모에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어보였다. 상의 없이 먼저 약속을 잡았지만 같이라고 했으니, 분명 치사토 쨩도 용서해줄 거라 생각한다.
“물론이죠.”
토모에 쨩도 저리 말했으니까.
“하네오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입장은 오후 16시부터입니다! 아직 입장은 하지 않고 있사오니, 예비 관람객 여러분들도 조심히 대기해...”
“하자와, 씨~!”
조금 차가운 음료수 캔을 츠구미의 뺨에 대었다. 화들짝 놀란 츠구미가 팻말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해서, 토모에는 그보다 먼저 손으로 그것을 받쳐주었다.
“토모에 쨩!”
자신을 놀라게 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츠구미의 얼굴은 확연히 밝아졌다. 츠구미의 얼굴을 보던 토모에도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연습을 같이 하며 어느 정도 감정이 풀린 것도 사실이지만, 멋대로 화를 낸 것에 대해 아직 변변찮은 사과를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고생하네, 츠구.”
그녀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한 마디였다. 이번 일로 인해 특히 츠구미가 감정 노동을 많이 한 것 같아, 토모에는 그것이 쭉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 학생회인걸.”
그런데도 츠구미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츠구미는 사실 생각 이상으로 강단이 세다. 밴드를 시작하자고 한 것도 그녀였고, 걸즈잼에 나가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이런 사람을 외유내강이라고 하던가, 사실 츠구미는 생각이상으로 강할지도 모르겠다.
“연극, 보러올 수 있겠어?”
벌써부터 쭉 이어진 인파들을 바라보며 토모에는 한 마디를 했다. 세타 선배와 치사토 선배 덕에, 아직 15시 밖에 안 됐는데 사람들이 참 많이도 왔다.
“맨 뒷자리에서라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츠구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허실실 풀린 입 꼬리를 내려버렸다. 기왕이면 란 쨩과는 같이 보고 싶었는데, 히마리는 세타 선배의 초대석에 모카는 일이 있다고 했으니...
“굳이 뭐 안 보러 와도 되니까, 나는 뭐 부끄러운 꼴 조금 덜 보였다고 생각하면...”
“토모에 쨩, 나 눈 좋아.”
츠구미는 저도 모르게 토모에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연극에 임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그 극에서 파리스 백작이 어떠한 역할인지 그녀 또한 알아버렸다.
그래서 츠구미는 토모에 쨩의 연극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무너진다면, 그때 지탱해줄 사람은 너희라는 말을 시라사기 치사토에게 들었기 때문에.
“...응, 고마워.”
그것을 알지 못한 토모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정도 느낌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서로의 생각들이 복도 위에서 겹쳤다.
“아, 나도 이만 가볼게. 동선 체크가 있어서.”
“으, 응! 힘내! 토모에 쨩!”
토모에는 들고 있던 팻말을 다시 츠구미에게 건네주었다. 츠구미도 다 마신 이온음료 캔을 탁자 한 구석에 두었다. 음료수 캔엔 미처 숨기지 못한 땀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츠구!”
복도 너머로 사라지려던 긴 붉은 그림자 하나. 들릴지, 안 들릴지 모르는 목소리를 힘껏 소녀를 향해 내본다. 그리고 학생회 완1장을 찬 소녀는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아본다. 눈이 좋은 것은 맞는 것인지, 소녀도 붉은 그림자를 향해 흰 손을 흔들어보였다.
팻말이 좀 큰 탓일까, 소녀가 손을 흔들 때마다 팻말도 함께 바람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너도 힘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했어야 할 말을, 헤어지기 직전에서야 해버렸다. 그러나 소녀는 그 말을 해준 게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살짝 눈물이 고여 버렸다.
“알았어!”
제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 표정까지는 쉬이 확인할 수 없다. 소녀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힘껏 손을 흔들었다.
“라이브 때 봐!”
아무 것도 모르는 그림자는 그렇게 외쳤고,
“응!”
어느 정도 사정을 알게 된 소녀도 그렇게 외쳤다.
“자, 자. 이제 고, 고, 공연 시, 시작도 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대의상이 불편하다거나, 동선이 꼬인다거나 이제 그, 그, 그런 건 진짜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차, 참아주세요. 무대 위에서 부딪힌다거나 그러면 위험해, 진짜 존나 위험해! 하, 하하! 하하하!”
“부장... 너무 긴장하는 거 아님까...”
마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부장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작년 하네오카 연극 때도 그랬지만, 부장은 필요 이상으로 겁을 집어 삼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또 연극에 소홀하진 않았다. 긴장은 있는 대로 다하면서, 연극에 대해선 세심하며 철저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떨고 있었던 주제에!”
작년 문화제 때는 함께 벌벌 떨었던 사이면서. 요즘엔 어디서 담이라도 쌓고 오는지, 완전히 간이 커져버린 마야가 부장은 살짝 원망스러웠다. 밴드 활동을 한다고 들었는데, 밴드 활동이 무슨 우황청심환이라도 되는 거야?
“부장한텐 죄송하지만, 전 실전에 강해서 말임다.”
“아야 쨩이랑은 다르게 말이지.”
준비를 마친 치사토가 마야의 옆에 섰다. 치사토의 말에 마야도 살짝 소리내어 웃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토모에와 카오루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연극에 나설 시간이었다.
“부장,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이것 또한 하늘에 계씬 우리 아버지가 내려주신 시련이니.”
“버, 벌써부터 연기에 빠진 거야? 진짜, 적당히 하라고.... 카오루.”
“자, 자. 한번만 눈 딱 감고해요, 네?”
“아, 알았어요. 알겠다구요, 우다가와 씨.”
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랍을 뒤져 열쇠를 꺼냈다. 현장 지휘는 마야에게 전권을 일임한 터라, 아무래도 관객석 뒤에 있는 조명실로 먼저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부장, 조금만 더 있다 가시죠?”
“됐어.”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하품을 길게 하는 부장. 겉으론 툴툴대도 이번 연극을 위해 요 며칠간 제대로 못 잤다는 게, 마냥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익, 쾅 하고 나는 소리가 부장의 모습을 그대로 잘라먹었다.
“부, 부족하지만 이번 연극의 현장 지휘를 맡게 된 야마토 마야입니다.”
지휘부 역할을 맡았건만, 휑하니 홀로 남은 마야만 불쌍하게 되었다.
“치사토 씨도, 카오루 씨도, 토모에 씨도, 그리고 연극부의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저랑 저 위에 있을 부장은 무대 뒤에서 여러분들을 확실히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야는 면면들을 둘러보며,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으로 말했다. 무엇 하나 허투루 쓰일 사람들이 없었다. 한명, 한명 모두가 연극의 소중한 구성원들이었다.
“후후, 마야 짱을 위해서라도 이번 연극은 꼭 성공시켜야겠네.”
“그대의 말에 동감하는 바요, 줄리엣.”
“마야 선배가 저렇게 말하니, 저도 뭔가 엄청 불타오르네요.”
세 사람의 말이 퍼져나가자, 그대로 연극부원들도 웅성웅성 제각기 다짐을 다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슬슬 공연 시작입니다! 준비 부탁드립니다!”
객석을 확인하고 있던 연극부원이 대기실을 향해 큰 목소리를 내었다. 그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연극부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위치를 향해 떠나갔다.
“자, 가자. 줄리엣.”
물론 로미오 또한, 줄리엣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의 손을 잡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무대를 향했다. 로미오의 차가운 눈빛이 줄리엣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줄리엣은 끝까지 로미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제 발걸음을 유지했다.
마야 쨩에겐 많이 미안한 일이지만... 이 연극, 쉬이 성공시킬 생각은 딱히 없다. 최악의 경우엔 연극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것으로 인해 카오루가... 아니, 카오쨩이 깨어난다면. 그리고 토모에의 마음도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할 거야.
그러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아직 막이 열리지 않은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관객석들을 훑어보았다.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터라, 관객석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는 보였다. 란도, 아코도, 카논 선배도, 츠구미도, 모카도 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왜 너만은 그렇게 잘 보이는 걸까, 네가 단지 관객석 맨 앞을 차지해서 그런 걸까? 그것도 내빈석이라고 불리는 자리를?
아니야. 그건 아마도 너이기 때문에 보였던 거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나한테 별 같은 존재였어. 자신을 태워 길을 밝혀주고, 곁에 서고 싶다 생각해 꿈을 준 사람이었어. 그래서 그리 어두운 곳에서도, 너는 그렇게 잘 보이는 거야. 그래서 너는, 나한테 별 같은 존재야.
네가 어디 있든, 나는 너를 찾아낼 수 있다.
여전히 너는 나에게 별과 같은 사람이다.
그게, 힘들었다.
어느새 거리마저 아득히 멀어져, 이젠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것조차 별을 닮아버려서, 나는 한동안 석양이 아닌 밤하늘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난 이 자리를 빌어, 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을 죽이려고 한다. 파리스 백작이란 배역에 빌어, 나 자신을 없애려고 한다. 유약한 너이기에, 조금 극단적이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는 절대 알 수 없게, 나 홀로 이 마음을 끝낼 생각이다. 부디,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일은 없었으면 한다.
물론 아플 수도 있다. 도려낸 마음이 비어버려, 그 허망감에 후회할 수도 있다. 견딜 수 없는 상처를 받아 한동안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질 수 없다면, 이젠 끊어내는 게 맞다.
네 곁이 아닌 네 옆에 서기 위해서, 나는 그러려고 한다.
삐익, 하고 신호음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안내방송을 맡은 연극부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지금부터 연극부 특별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파리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막은 사정없이 올라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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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글 2장 이벤트 달리느라 좀 늦었음.
7월에 완결 못 낼 것 같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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