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불호 갈릴 소재 있음.
깨끗하게 살 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더럽게 살 땐 시간도 어쩜 그리 찐하게 늘어지는지.
피자 위에 올라간 크러스트 치즈처럼 쭉 늘어나다가, 입에 착 달라붙는 것이 어쩌면 치즈가 아니라 타르와도 같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의 꿈은 달았다. 그 시절 자주 먹던 케이크와 과자처럼, 중학교 다닐 때 처음 마셨던, 입맛에 너무나도 써 시럽을 잔뜩 넣어버린 그때 그 아메리카노처럼. 우리도 머리에 피 좀 말랐다며, 난생처음 입에 물었던 구름과자와 처음 가본 기념관에서 마셨던 에비스 맥주처럼.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우다가와 토모에란 사람은 항상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냥 애써 안 그런 척, 자신을 속였을 뿐.
“야! 우다가와!”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들은, 정말 하나같이 죄다 역하고, 미웠고, 또 그리웠다.
“사아야.”
토모에는 사무실을 박차고 들어온 사아야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저를 토모에라고 불러주지도 않는다. 근데 그게 섭섭히 느껴지지도 않는 걸 보니, 마음속에선 이미 체념을 한 듯하다.
저를 가로막는 어깨들을 헤치고, 사아야는 토모에를 향해 걸어왔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 토모에는 소파에 몸을 푹 뉘인 채 비켜주라는 듯 손짓만 여러 번 했다.
사아야는 그런 토모에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에선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초록색 앞치마가 군데군데 헤져, 참 오래도 입었다는 토모에에게 감흥을 느끼게 했다.
거 얼마나 한다고, 저리 낡은 걸 아직도 입고 있는 거야.
“플로라, 벌써 돈 걷었어?”
사아야가 꺼낸 플로라란 단어에, 토모에는 저 앞에 놓여있던 장부를 뒤져보았다. 플로라라는 단어가 토모에의 입안에서 한번 맴돌다 사라졌다. 플로라, 꽃의 여신의 이름. 그리고 신의 이름을 가게에 빗대어 쓴 사람들.
어렸을 적부터 상점가를 놀이터처럼 뛰어다녔던 토모에였기에, 그년도 그 한적한 꽃집이 어디 있는지 잘 알았다.
“다리 떨지 마, 복 나간다.”
장부를 살펴보다, 불안스러운 듯 떨리는 사아야의 다리를 향해 토모에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사아야는 잠시 다리를 멈추었다가, 이내 보라는 듯 더욱 떨어댔다. 그런 모습이 앙칼진 여우를 떠올리게 해서, 토모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웃음보따리를 받은 사아야는, 정작 더욱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젠 고개를 휙 돌리기까지 했다.
“여기 있네, 플로라.”
그 고개를 다시 저의 쪽으로 돌리기 위해, 토모에는 볼펜을 하나 꺼내 장부를 가리켰다. 딸칵, 딸칵 거리는 볼펜 소리가 사아야에겐 가위 소리라도 되는 것 마냥 불안하게 들렸다.
플로라는 야마부키 베이커리의 이웃상점이다. 나이가 적잖은, 이제는 노부부의 반열에 든 두 부부의 오래된 꽃집. 상점가의 사람들도 두 분이 오래 하는 것을 알았기에, 꽃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플로라를 찾아가곤 했다.
“세 달이면 우리도 많이 봐준 거야? 땅 파서 돈 나오는 거 아니잖아.”
당연히 돈은 그렇게 많이 벌진 못한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산다 기도 뭐한, 그런 꽃집이다. 그러나 정말 주먹으로 안간힘을 다 써 쥐어 짜내면, 달달한 과즙처럼 흘러나오는 게 또 돈이라는 놈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두 분이 어떤 사람들인지 너도 잘 알면서....”
“사아야.”
사아야의 우물쭈물한 목소리를 토모에가 확 끊어버렸다. 사아야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하고, 토모에는 장부를 덮었다. 토모에 본인은 감정적인 사람이지만, 어설픈 감정론에 엮어 들어갈 만큼 그렇게 허술한 사람도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아마추어처럼 굴지 말자. 우리.”
그년은 일부러 조금 더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기생한지가 벌써 몇 년 째다. 쓴 건 뱉고, 단 것도 뱉고, 미지근한 것들도 다 뱉었다. 아가리에 쑤셔 넣은 것들은 술이라도 진탕 처먹은 것 마냥 모두 토해냈다.
“받을 거 받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내줄 거야?”
이런 불만사항은, 그냥 묵살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이제는 그런 것에 죄책감마저 옅어져만 갔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엔 이미 마음에 털이 한 움큼 난 채다.
그래서 벌을 받았나보다. 짜악, 하고 힘을 꽉 준 천벌이 볼을 마찰하고 지나갔다. 무뎌질 것도 같은데, 이렇게 감정을 담아 때리는 사람들의 손맛은 항상 매웠다.
특히 사아야는, 평소 반죽을 만져서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아, 괜찮아. 괜찮아.”
금방이라도 달려드려는 어깨들을 향해, 괜찮다며 토모에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이윽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아야에게, 그년은 자신의 왼쪽 뺨을 내밀었다. 붉게 물들은 오른쪽 뺨에 비해, 왼쪽 뺨은 마치 바나나의 속살처럼 참 하얗기도 하다.
“뭐하는 건데, 지금.”
사아야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토모에를 바라보았다. 오랜 친구이자, 이제는 낡아버리고, 상처받은 그년을 바라보았다. 식어버린 눈빛에서 저에 대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그게 더 무섭다.
“때려.”
아니, 그 무섭고 서늘한 말이 저의 마음을 쿵, 하고 때리는 게 더 무섭다.
“뭐?”
토모에의 때리라는 말에, 사아야는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되물었다. 어색한 목소리와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목소리가 저를 때렸다.
“오른쪽 맞았으니까, 왼쪽도 맞아줘야지.”
쿵, 하고 때린 것이 심장 소리인지, 아니면 그저 저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인지 사아야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 수 없어, 사아야는 혼란스러웠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거 몰라?”
천벌을 받은 주제에, 신의 말을 빌리는 것이 더욱 역하다. 그것도 ‘사랑’이란 단어까지 겹치면서 말이다. 우울감과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섞여 들어와, 그대로 사아야의 눈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우다가와.”
그것을 억지로 참고, 사아야는 토모에의 성을 불렀다. 언뜻 정신을 팔아버리면, 그대로 그년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 많이 불러서 익숙할 법도 한데 여전히 ‘토모에’에 비해, ‘우다가와’는 입에 익숙지 않다.
“넌 진짜 나쁜 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아야는 끝까지 제 할 말을 마쳤다. 긴 말뚝을 그대로 토모에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죽일 년, 개년, 씨발년,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날 년. 진짜 별의 별 소리를 다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 나쁜 년이란 한 마디가, 왜 이리 마음에 쿵, 하고 다가올까.
문이 낸 소리인지, 마음의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혔기에, 토모에는 저의 뒤에 있던 어깨에게 말했다.
“담배.”
그년이 입에 문 하얀 막대에 빨갛게 불이 붙었다. 조금만 더 가늘었다면 어렸을 적의 사탕과 비슷한 모습일 텐데, 이젠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마저 사치다.
그래도 단 맛 나는 건 조금 비슷하다. 특히 끝맛이 지독히 단 거, 그거 하나는.
언제부턴가 고향엔 깍두기들이 많아졌다.
멋들어지게 정장을 입어놓고 하는 짓은 피 묻히기. 심심하면 재떨이가 날아다니고, 그 뒤로 비명 소리가 날아들고, 그 뒤로 온갖 짭새가 다 달라붙어도 그 문제들은 해결의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안 거지만 겉으로는 범죄와의 전쟁이라며 오버를 떨어도, 뒷구석에선 우리 짭새님들과 폭력단 오빠님들은 서로 형님, 아우하며 잘 살았더란다. 심지어 그것도 꽤 오래 됐다며, 단속 뜰 때 미리 연락을 주고 돈까지 받아먹는다며, 온갖 비리들과 유착한 경찰이 직접 말해줬다.
표면적으로는 별 일 없어보였지만, 상점가는 꽤나 활기를 잃었다. 그 풍경을 오래토록 봐왔기에, 토모에도 그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감정은 동하지 않는다. 상점가에 대한 미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폭력단이 들어와서 그런지, 상점가에는 이전에 잘 보이지 않았던 술집이 제법 늘었다. 혼자 마시는 사람도 많고, 친구랑 마시는 사람도 많고, 여자를 끼고 마시는 사람도 많았다.
토모에는 혼자 마시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예전의 친구들과는 연락을 죄다 끊어버렸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는 좀처럼 속을 터놓고 마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 마시는 걸 좋아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주체를 못하고 마신다는 점일까.
얼굴은 잔뜩 붉어지고, 스마트폰의 액정은 흐릿하게만 보이고, 심장 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뛴다. 조금은 쌀쌀해진 겨울의 한기가 그년을 제 멋대로 할퀴고 지나갔지만, 달아오른 몸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시리고 시려, 이제는 눈물까지 나오려 하게 했다.
“츠구, 고생했어!”
“아냐, 히마리 쨩!”
들려오는 목소리에 토모에는 황급히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만 내밀어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렇게 달라져 있는데, 그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세상은 어제와 같으면서도 오늘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그녀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츠구네 가게를 도와주러 간 걸까, 히마리.
먼지가 서린 이름을 기억해내자, 토모에의 이가 빠득, 하고 갈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행여나 그 소리가 저 들에게 들릴까 싶어, 그년은 겁쟁이처럼 그렇게.
“내일 봐!”
“응~!”
내일이라는 말에, 토모에는 눈물이 더욱 나려고 했다. 그녀들에게 내일은 있지만, 그년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멀어지는 그림자 꼬리를 잡으려 손을 뻗어도,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땐 그저 나방과 같았다. 그게 불인지, 달빛인지, 전등 빛인지도 모르는 채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끝내버렸기에, 그저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
꺼진 조명들 사이 켜진 달빛 아래에서, 그녀는 정처 없이 사람의 온기를 찾았다. 혼자라는 것을 자각할 때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우다가와?”
술 냄새보다 더욱 익숙했던 것은, 저를 안은 그년의 육향이었다. 이따금씩 그년은 이렇게 밤에 자신을 찾아오곤 했다. 너는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라도 한다는 냥, 잔인하게.
“따뜻하다, 너.”
“하지 마.”
앞치마 속 청바지 안을 파고드는 손길에, 사아야는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이번엔 바지가 아닌, 복부 쪽으로 토모에의 손이 향했다. 신줏단지라도 모시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그년의 손이 차가웠다. 얼굴은 그렇게 뜨거운데도, 손은 그렇게나 차가웠다.
“왜, 너도 좋잖아. 안 그래?”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토모에는 사아야의 귀에 속삭였다. 달짝지근한 게 아닌, 끈적이는 토모에의 숨결이 사아야를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싫어.”
“싫다고, 내가?”
사아야의 말에 토모에가 반문했다. 브래지어로 향하던 그년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러나 열감이 느껴지는 얼굴로 토모에는 되물었다.
“응.”
사아야는 날씨에 맞게 시원스레 답했다. 단칼이라고 불러도 모자랄 어투에, 동장군도 칼을 거둘 지경이었다.
“좆 까지마.”
그러나 토모에도 기죽지 않고, 질세라 표독스레 그녀에게 다른 답을 주었다. 갑작스런 욕설에 사아야는 얼굴을 찌푸렸다. 냉랭한 것도 아닌, 우울한 것도 아닌, 짜증남이 듬뿍 담긴 얼굴로 그녀는 그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이 마주쳤다.
“너 나 좋아하잖아, 씨발...”
잠깐 시선이 마주치자, 토모에는 흔들리는 눈빛을 띄다 이내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아야는 꿍한 표정으로 토모에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고개를 올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개차반이 된 인성이지만, 그래도 염치라는 게 남아 있는 걸까.
“왜 그런 표정을 짓는데.”
그러면서도 할 말은 하는 게, 또 토모에다워서 사아야는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너는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사람 짜증나게.”
짜증난다는 것은,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사아야는 토모에의 손을 잡고는, 그대로 베이커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말 꼬리의 끝을 부여잡은 낡은 앞치마 끈이, 그대로 풀어져 겨울바람에 슬며시 휘날렸다.
제일 먼저 기억난 것은, 처음으로 맡아본 밀가루 냄새였다. 그 다음으로 생각난 것은, 기특한 꼬마라는 소리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것 같았다. 딱히 그 말 뿐만이 아닌, 칭찬을 받는 게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축제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있었다. 어쩔 때는 솜사탕처럼 녹아드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가끔은 팝, 팝 터지는 풍선껌과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날 축제는 솜사탕도 아니고, 풍선껌도 아니었다. 딱 그 중간. 말하자면 캐러멜 같은 느낌.
그 날 한참 빵을 팔고 있었는데, 저보다 몇 살 어려보이는 꼬마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그러나 다가가서 물어보니 그게 아니라 가족을 잃어버렸다며 꼬마 아이는 소리 내며 울었다.
“이름이 뭐니?”
“아코, 우다가와 아코.”
내 말에 그 조그마한 아이는, 그 자그마한 입술로 말했다. 그리고는 작달막한 눈 꼬리에 다시 눈물을 한 아름 매달았다.
그러나 그때의 난, 솔직히 말하자면 우다가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별 쪼잔한 일에 태클을 걸고, 소꿉놀이를 하면 방해를 하고, 가끔은 슈슈를 멋대로 훔쳐가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미운 건 첫째고 둘째는 죄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아코의 손을 붙잡고 걔가 더 울지 않게 빵을 하나 물리고 토모에를 찾아 축제를 돌아다녔지. 분명, 그랬었다.
난 아코와 함께 걸어가면서 토모에에 대한 얘기를 조금 나눴었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은 두 가지. 우다가와 토모에는 집에서는 좋은 언니라는 것, 그리고 야마부키 사아야를 가리켜 ‘이쁘장한 얼굴과는 다르게 한 마디도 안 지려하는 못된 계집애.’ 라고 말한 것을 알게 되었지.
처음엔 그게 화가 났지만, 도리어 생각해보면 그저 어린 아이의 귀여운 생각이라 여기니 이젠 웃기기까지 해.
아무튼 그렇게 토모에를 찾아다니다, 문득 들린 소리에 아코와 나는 귀를 기울였어. 그러자 그 어렸던 아코의 트윈 테일이 번쩍 들리면서, 눈 깜짝할 새 내 손도 놓은 아코는 그대로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갔었지. 그땐 그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뚫고 달려갔어.
둥, 두웅, 둥... 하며 소리는 더욱 강해졌지.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가까워지면서 들리는 소린 그게 곧 북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했었어. 곧바로 난 토모에가 마을 축제에서 큰 북을 친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말았어. 그러나 그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 혼자 뛰어간 아코가 중요했어.
숨을 가쁘게 몰아쉰 나는, 겨우 겨우 아코를 붙잡을 수 있었어. 뭐라고 한 마디를 해주려고 했는데, 아코의 눈빛은 이미 나에게서 떠나가고 없었지. 그래서 나도 본능적으로 말을 멈추고, 아코의 눈빛을 따라 좀 더 높은 곳을 우러러보았어.
큰 북을 치는 토모에는 평소와 많이 달라보였지. 북을 치면서 땀을 흘리고, 땀을 흘리며 달아오른 몸이 리듬에 튕겨 오르면서, 조명에 반짝, 하고 빛나는 그 모습이 그저 토모에의 땀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그 여름의 열기가 신기루를 보여줬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어.
다만 쿵쿵, 쿵쿵. 하고. 북 소리가 몸속에서 계속 들려오는 게, 그날의 난 그저 그게 너무나도 신기했었어. 근데 그때의 그 꼬마 아이가, 그렇게 북을 신나게 치던 꼬마 아이가.
“그 꼬마 애가, 이렇게 못된 계집애가 되다니.”
“뭔 소리야.”
“아무 것도 아냐.”
사아야는 하품을 내뱉으며,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살짝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그대로 닦아버렸다. 저의 머리카락에 누군가 손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은 이내 슈슈를 그대로 빼내어, 한 곳에 묶여져있던 머리카락을 모두 흘러내리게 했다.
“사아야.”
그 범인이 피해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듯, 사아야도 토모에의 부름에 답이 없다.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토모에는 그대로 사아야를 품에 안았다. 씻고 나와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훨씬 서로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부끄러워 사아야의 얼굴 온도는 더욱 더 높아져만 갔고, 또 그걸 숨기고 싶어, 사아야도 그대로 토모에의 가슴팍에 안겨버렸다.
“난 존나 나쁜 사람이야.”
“알아.”
사아야의 대답이 살짝 뭉개져서 들렸다. 그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토모에는 말을 이어갔다.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그렇겠지.”
여전히 그녀의 반응은 단칼이다. 품에 은장도라도 들고 다니는 듯, 싹둑 토모에의 무드를 잘라먹었다. 그게 머쓱해 토모에도 멋있는 척은 포기해버렸다.
“반응, 심플하네.”
“그럼 천국여행이라도 갈 줄 알았어?”
“아니.”
천국여행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 말을 입에 담기에는, 신의 자비를 기대하기엔 이제 자신은 너무나도 멀리 왔다. 그래서 그녀는 사죄의 말을 평소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거, 이대로 막 살다가 가자.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너한텐 좀 미안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모에의 마음엔 사아야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저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잊을 수 없고, 사아야 또한 자신을 잊을 수 없어서, 서로를 파멸로 이끌 연결 고리는 여전히도 건재했다. 좀 끊어지면 좋을 텐데, 아직도.
“딱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러나 사아야는, 토모에가 놀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어렵게 말을 꺼낸 게 무안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원래 다 그러잖아, 존나 호구거나 존나 갑이거나... 둘 중 하나잖아.”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그 흔하면서도 절대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 사아야는 그 말에 대한 저의 느낌을 통렬히 깨달았다.
“그냥, 그냥 넌 나한테 갑이었을 뿐이야.”
자신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품에 안기기만 해도 행복한데, 이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토모에였다. 그래서 나는, 절대 그녀를 놓을 수 없다.
“미쳤네, 너.”
입술을 겹치기 직전, 토모에가 사아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는 슬픔이 너무나도 진히 담겨 있어서, 바라만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게.”
그래서 그 말만 남긴 채, 사아야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 사랑한다고 해줘.
- ...미안.
- 너 진짜, 쓰레기다.
- 그래서 더, 미안.
-
중간의 첫사랑 부분은 여기서 따왔음을 밝힙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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