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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요망한 천사와 지조가 위험한 범생이 이야기

고요한새벽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11.25 14:27:16
조회 358 추천 13 댓글 1
														




 등교 길, 노란 은행잎들이 카펫처럼 깔렸다. 교복치마를 하늘거리며 학생들이 스쳐간다. 그 때마다 상큼 달콤한 샴푸향이 코끝을 맴돈다. 바닥에 눌러 붙은 은행 열매를 밟지 앉으려고 땅따먹기 하듯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그래, 이 맛에 여고생 하는 거지.’라는 생각도 잠시.


“어이, 거기 너 이리와. 치마 대.”


  교문 앞을 막고 선 빨간 추리닝이 고귀한 아침의 행복을 방해했다. 물론, 나를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치마 길이를 재고 싶은 건지, 치마를 들치고 소녀의 다리를 탐하고 싶은 건지 의도를 모르겠다. 그럴 땐, 간단하다. 일단 찍어두자. 재킷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기록을 남긴다. 이 사진들이 유용하게 쓰일 일이 부디 없길 바라며.


  후우-.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심호흡을 한다. 습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오늘도 잘 해내는 거야.’라는 나만의 준비운동.
  드르륵- 문이 열리자 달콤한 향, 새콤한 향이 마구 섞여서 덮쳐온다. 어지럽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은 괜찮은 편이다. 오늘 주번이 환기를 잘 했군. 하지만 오후가 되면 각종 체취가 더해져서 매우 곤란하다.


“주은성, 오늘은 혼자네?”
“유나는 병원 가는 날이겠지, 바보야.”


  잔잔하고 낮게 울려 퍼지는 고요한 목소리, 지민이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밝고 경쾌한 느낌의 촐랑거리는 목소리, 하령이구나. 두 사람의 아침 만담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1교시부터 체육은 좀 아니지 않나 싶다. 그치?”
“그러게. 체육복 갈아입기 넘나 귀찮은 것.”
“야, 주은성! 너 코피!”


  아, 이런…. 방심했다. 이건 나의 고질병이다. 변명을 하자면, 절대로 눈앞에서 옷을 마구 벗어젖히는 이 조심성 없는 여고생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것도 매우 자극적이긴 했지만.
  일단은 지혈을 위해 양호실에 가야겠다.


“괜찮니, 은성아? 아침부터 무리한 거야?”


  다정하고 차분한 목소리, 머리를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대화를 할 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습관. 여성스럽다는 말은 아마 양호선생님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괜찮아요. 피 멎을 때까지만 잠깐 있다가 갈게요.”


  익숙하게 양호실 한 쪽에 놓인 침상에 걸터앉는다. 등 뒤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커튼이 살랑이며 그림자가 함께 춤춘다. 운동장에서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피를 쏟아서인지 나른하다.


“요즘은 어때?”


  조심스러운 양호선생님의 말투에 괜스레 장난기가 발동했다.


“체육쌤이 또 허벅지를 만졌어요. 제 다리는 아니었지만.”
“뭐어?!”


  양호선생님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멈칫하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차분히 자리에 앉는다. 참 알기 쉬운 선생님이라니까. 이런 순하고 여린 선생님이 왜 빨간 추리닝이랑 만나는 걸까? 사람 속은 도무지 모르겠다.


“흠흠. 선생님은 그걸 물은 게 아니란다. 그리고 그 문제는 체육선생님께 내가 나중에 따로 말씀 드릴 게.”
“그 촌스러운 빨간 추리닝도 제발 좀 입지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기억하기 쉽긴 하지만요.”
“그건…. 그건 나미선생님의 자아…같은 거라서 말이야….”


  풉-.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황급히 입을 가려본다. 양호선생님 죄송해요. 하지만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빨간 추리닝이 자아가 되는 건지 전 도무지 모르겠네요. 아직 수행이 부족한가 봐요. 하지만 두 분의 안전한 비밀연애를 위해, 아니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저의 즐거움을 위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할게요.


“유나는 오늘도 결석이니?”
“네….”
“은성이는 똑 부러져서 다행이지만, 유나는 걱정이네. 겨우 출석일수만 맞추고 있으니 말이야.”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잘 얘기해볼게요.”



-----



“아주머니, 저 왔어요.”
“은성이 왔구나. 유나는 방에 있을 거야. 올라가보렴.”


  등에 짊어진 가방 무게에 키가 더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게 다 차유나 때문이지. 이러니 내가 제대로 성장을 할 수가 있나. 이렇게 매일 두 사람분의 책을 메고 다니니까 말이야. 어릴 때만해도 분명 내가 유나보다 훨씬 컸었는데, 지금은…. 됐다. 생각을 말자.
  딸칵- 우왁…!


“벗고 있는 건 난데, 왜 네가 더 놀라는 거야.”


  또 코피가 터질 것 같아서 일단 바닥을 보며 숨을 고른다. 달아오른 얼굴이 좀체 식질 않았다. 한창 성장기인 청소년에게 이런 자극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속옷차림의 로션플레이라니! 물론 유나가 온 몸에 구석구석 정성스레 바르고 있는 건 피부약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극적인 건 자극적인 거라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적응 좀 하지?”


  거울이나 좀 보고 말해라, 이 잔인한 것.


“됐으니까, 이리 와서 등에 좀 발라줘.”
“어디 나갈 거야?”
“뭐 좀 살게 있어서 잠깐.”
“그럼 필기 정리만 끝내놓고 같이 갈까?”


  유나는 고개를 젓는다. 궁금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집순이에 짠순이가 비싼 약까지 챙겨 바르면서 나가려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건 그렇고, 뒤에서 봐도 이건 절경이구만. 매끈하게 흘러내리는 이 우아한 곡선,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어 더 하얗게 빛나는 피부. 군데군데 얼룩진 흉터는 약으로도 덮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깝지만. 열심히 쓰다듬고 매만져주면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마음을 담아서 이렇게….


“언제까지 만지작거릴 셈이야?”


  흠칫하며 손을 뗐다. 나 지금 왠지 빨간 추리닝 같지 않았어? 아, 주은성 자제해라 진짜.


“뭐야 이거? 오늘은 또 누구야?”


  아차차차, 오늘은 여러모로 수난이구나. 유나는 심통 난 얼굴로 내 블라우스 끝을 잡아당겼다. 넥타이로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코피자국을 들킨 것 같다. 하여간 이런 데는 민감하다니까.
  얼굴이 가깝다. 예쁜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심장이 일찍 멈출까 걱정이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코피 흘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게 마음대로 조절이 됐으면, 이 고생을 안했겠지. 아니, 그 전에 등교를 하지 않은 차유나 탓도 있지 않은가? 솔직히 이건 조금 억울한 부분도 있다고요, 네….


“벌로 오늘은 마주보기 십 분 연장이야.”


  세상에, 선생님 그건 최고의 보상 아닙니까?


  우리는 서로 눈을 맞춘다. 그녀는 나를,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얇지만 탐스러운 입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를 머릿속에 새긴다. 그 전에 옷을 입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말하면 또 화낼 테니 일단은 그냥 넘어가자. 시선 내리지 마라, 본능아….


  ‘서로 마주보기’ 이건 처음 유나를 만났을 때부터 지난 십 년 동안,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우리 둘만의 약속이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넋 놓고 바라봤을 뿐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녀 쪽에서 보채는 일이 더 많아졌다.
  유나는 걱정이 많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한 모양이다. 오늘처럼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코피를 흘리고 온 날에는 더 안절부절 못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녀로 착각할까봐,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의 얼굴조차 잊어버릴까봐.


  잊을 리가 없잖아, 내가 너를….


  유나가 외출한 동안 노트정리를 좀 해볼까? 그녀가 알아보기 쉽게 다시 써야지. 아, 집중해야 하는 데 큰일이구만. 방 안에서 유나의 향기가 난다. 이래저래 단련된 몸이라지만, 이럴 때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오감이 나를 힘들게 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타박타박- 계단을 오르는 유나의 발소리가 들렸다. 왜 문 앞에서 멈췄지? 밖에서 뭔가 달그락 거린다. 문이 열리고, 등 뒤로 어색하게 뭔가를 감추고 있는 유나가 서있다. 요 녀석,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얼굴하지 말라고! 내가 다 부끄럽다고!


“일단 경고하는 데, 오늘은 얼굴에 크림 묻히는 그런 유치한 거 하지 말자.”
“그거 알지? 항상 시작은 너거든?”


  그렇구나. 어쩐지 엄마가 아침부터 없는 실력으로 분주하게 상을 차리더라니, 오늘이 내 생일이었구나. 난 또 선생님이랑 무슨 좋을 일이 있었나 했지 뭐야.
  탁자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본다. 눈을 감는다. 지난날의 기억들이 영화 속 장면들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너….


“무슨 소원을 그렇게 오래 빌어?”
“비밀.”
“치사해.”


  입술을 삐죽 거리는 것도 귀엽다. 본인이 본인에게 질투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심술이 났는지, 양손으로 내 볼을 꾸욱-하고 누른다. 그러더니 쪽-.


“나만 보고, 나한테만 집중해. 알았어, 주은성?”



  그렇게 나는 다시 천사와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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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궁금해 해 준 백붕이 둘에게 감사인사를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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