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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1.5명 분의 용기 (카스아리)

카스아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05 03:10:30
조회 932 추천 28 댓글 12
														

감았던 눈이 자연스럽게 뜨였다. 방은 꽤 어두워서,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의자나 책상의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였다. 바깥의 어슴푸레한 빛만 바닥까지 내린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와서 방에 네모난 그림자를 남겼다. 지금이 몇 시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요즘은 늘 그래서,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 ...핸드폰. '


머리맡에서 충전 중일 핸드폰을 잡으려고 베겟머리를 더듬거려 봤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가 침대와 벽 사이 틈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비틀자, 배 쪽에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얼른 이불 아래로 손을 집어 넣어 보니,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잡혔다.


" ...... "


버튼을 꾹꾹 힘 주어서 눌러도 화면이 잠잠하다. 완전히 방전된 것이 틀림 없었다. 누워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깜빡 잠들었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딱히 연락이 올 곳도 없었지만, 핸드폰이 꺼지고 나니까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느낌이 싫어서 얼른 충전기를 연결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웅- 하는 기분 좋은 진동음과 함께 화면이 밝아졌다.


' 오후 3시... '


디지털 시계의 숫자를 읽고 나니까 김이 팍 새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일정이 있어서 시간을 확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날은 밤을 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하루종일 자기도 했다. 날짜 감각이나 요일 감각도 이미 상실한 지 오래다. 그저 졸리면 잠을 자고, 졸리지 않으면 깨어 있었다. 깨어 있다고 해서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3시인데, 어째서 벌써 해가 떨어져 버린 걸까. 다시 핸드폰을 켜자, 잠금 화면에는 '10월 22일' 이라고 써 있었다. 뜬금없게도, 기분 좋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분날으로부터 딱 한 달이 지난 날이니까, 적경 값을 계산하기에 편해서 지구과학 문제에서 자주 나오는 날짜였던 게 기억이 났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펜을 잡아 본 적이 언제였더라... 머리가 아파져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딴 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그냥, 구름이 많이 껴서 저렇게 어둡겠지.


부웅 - 하는 진동음에 감았던 눈이 다시 뜨였다. 게임 알림이나, 스팸 문자 메세지일까. 몇 번이나 차단을 했는데도 알림은 항상 어딘가 새로운 곳에서 꾸준히도 울렸다. 짜증이 나서 머리맡에 던져 놓은 핸드폰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아예 비행기 모드로 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 부재중 전화 (카스미) - 15분 전 ]


[ 문자 메세지 - 카스미 ]


생각지도 못한 알림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준비 자세도 없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카스미가, 갑자기 왜 전화를...? 우리 집에 오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을까? 분명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빠서 자주 못 올 수도 있다고 그랬는데. 15분 전이니까, 지금이라도 전화하면 받을까? 통화 버튼에 엄지를 살짝 올렸다가 다시 떼 버렸다.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부재중 전화 알림만 멍하니 쳐다 보다가, 뒤늦게 문자 메세지를 확인했다.


[ 아리사, 갑작스러워서 미안! 지금 아리사네에 갈게. 일주일 만이지? 아리사가 보고 싶어! ]


그래, 정말 일주일 만이었다. 나도 모르게 늘어난 티셔츠의 가슴 부분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카스미로부터 온 문자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분명, 지금 오겠다는 얘기가 틀림 없었다.


" 아, 씨발... 하... "


문자 하나 봤다고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가슴이 불편하고, 답답했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상관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학교에 나가지 않게 된 뒤로 욕을 하는 빈도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속이 이렇게 시커먼 년인 주제에, 그렇게 내숭을 떨면서 학교를 잘도 다녔었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 아리사? "


1층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왜 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계단을 타고 오르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도 연신 방망이질을 했다. 분명 반가운데, 가슴께가 너무 답답했다. 카스미가 이렇게 우리 집에 찾아오게 된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도, 이 이유모를 불안감은 익숙해지기는 커녕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카스미가 올 때는 자는 척을 했다. 아예 이불까지 머리 위로 덮어 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시각과 청각이 어느 정도 차단되자, 살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 아리사...? 자? "


굳게 닫혀 있을 내 방문이 살짝 열리고, 카스미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의 기분이 이랬을까. 말을 하려고 해도 무언가 끓는 소리만 날 뿐, 성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온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리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카스미, 설마 내가 정말 자는 줄 알고 다시 가 버리는 걸까? ' 카스미한테 말을 건다 ' 는 그 간단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불 속에 숨어서,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진흙탕에 빠진 바퀴처럼 처량하게 공회전시킬 뿐이었다. 그러다, 발걸음 소리가 정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 카, 카스, 미....!! "


이불을 확 걷고, 카스미의 이름을 냅다 불렀다. 꼴사납게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본 것도 얼추 일주일 만인 것 같았다.


" 아리사...!? 자는 거 아니었어? "


불을 확 켜버린 카스미 때문에 눈이 부셔서, 카스미 쪽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카스미가 내 쪽으로 다시 달려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제대로 떠 지지도 않는 눈을 부비고 있으니,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카스미의 팔이겠지.


" 아리사, 많이 피곤해? "


피곤할 게 뭐가 있겠어. 맨날 누워서 놀다가 자다가 하는 걸 반복하는 거 너도 알잖아. 걱정해주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짜증이 났다.


" ...아니. 눈이 부셔서... "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곁눈질로 카스미와 눈을 마주쳤다. 전체적으로 살짝 야윈 느낌. 요즘 한다는 아르바이트 때문일까? 이 녀석은 한 번 시작한 건 제대로 하는 성격이니까, 학교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무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다시 눈을 피해버렸다. 이치가야 아리사, 네 주제나 알아라. 등교 거부 하고 있는 년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데?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하게 되는 자기 비하였다.


" 아리사, 이제 일어났구나? 자꾸 밤에 늦게까지 안 자는 버릇 들이면, 몸에 안 좋다고 말 했었잖아, 아리사가... "


그런 말을 하면서, 꼴사납게 헝클어져서는 제멋대로 내려와 있을 내 앞머리를 엉키지 않게, 천천히 쓸어 넘겨 주었다. 카스미의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이 기분 좋았다. 내 허리를 상냥하게 자기 쪽으로 끌어 안아 주는 것도 좋았다. 언니가 있었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머리도 감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는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카스미가 내 방에 막 드나들기 시작할 때는 아마 부끄러웠던 것 같지만.


카스미는, 내가 등교 거부를 다시 시작한 뒤로 이렇게 가끔 우리 집에 와서 내 상태를 봐 주고 간다. 어떨 때는 주말 내내 찾아 오기도 하고, 며칠 걸러 찾아 오기도 한다. 아마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 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절대로 방 안에 들여주지 않았다.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구역질이 치밀어서... 전화나 문자조차 무리였으니까.


그래도 카스미는 계속 찾아와 주었다. 아무리 저리 꺼지라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악을 질러 봐도 우리 집에 오는 걸 그만 두지 않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다시 학교에 나가자고 설득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포피파 멤버들이나 자기 근황 얘기를 했다. 근황이라고 해 봐야, 오늘 상점가에서 키타자와 씨네 고로케가 파격 세일을 했다느니, 오타에네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질리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 것 뿐이었지만. 대답을 해 주지 않았는데도 어쩜 그렇게 신이 나서 얘기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미는 내가 만나는 유일한 지인이 되었다. 전에 알던 사람들과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인간관계라는 건 어쩌면 담배나 술 보다도 끊기 힘든 마약일지도 모른다. 다른 미사여구를 붙일 것도 없이, 채 일주일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리워졌다. 포피파 단체 카톡방에서 밤을 새서 이어지던 실없는 이야기나, 점심 시간에 나눠 먹던 도시락 반찬이나, 창고에서 조잡하게 맞춰 보던 포피파의 세션... 히키코모리 생활은 경험이 있는 만큼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가 너무 답답했다. 대양에서 헤엄치던 벨루가나 상어 따위를 아쿠아리움에 데려오면, 열에 여덟은 스트레스로 이상 행동을 보이거나 죽어 버린다고 한다. 그것과 비슷하게,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졌다. 혼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내 방도 더는 내 발로 나갈 수 없는 작은 수족관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카스미밖에 없는 수족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카스미가 계속 찾아와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그 애를 매정하게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나는 비겁한 년이니까... 또 다시 밀려오는 자기 혐오가 싫어서 억지로 도리질을 했다.


" 아리사, 어깨가 많이 결려? "


" 내가 무슨 할머니냐? "


" 에헤헤, 아리사 할머니~ 키우시는 분재들은 요즘 건강해요~? "


내가 생각해도 아차 싶을 정도로 퉁명스럽게 말했는데도, 카스미가 능글맞게 받아치면서 내 볼을 살짝 잡아당긴다. 옛날 같으면 당장 손을 뿌리치고 화를 낼 장난이지만, 지금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냥 기뻤다. 카스미랑 얘기하고 있는 게, 카스미가 나를 만져 주는 게 기뻤다. 아까까지 얘랑 만나는 걸 왜 그렇게 불안해 했는지 모를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자, 카스미도 따라서 웃어 주었다. 카스미의 미소는, 정말로 예쁘다...... 아까랑은 다른 느낌으로 심장이 두근, 두근 뛰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살짝 들어서 카스미의 볼을 만졌다. 마치 길이 잘 든 강아지처럼, 카스미는 내 손이 볼에 닿아도 더 생글생글 웃어 줄 뿐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 닿는 카스미의, 부드러운 뺨의 감각.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뺨을 쓸어 보기도 하고, 손바닥을 대 보기도 한다. 정말, 강아지 같아... 귀여워...


" 아리사는...... 정말 나를 만지는 걸 좋아하네. "


카스미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확 든다. 내가 뭘, 만졌다는 거야...? 아니, 만지긴 했지만! 그냥, 뺨이잖아... 친구 사인데, 그 정도는 그냥 만질 수 있잖아. 이제 와서 뭘, 뺨을 만진 것 정도로...


" 무슨, 우쭐대지 마, 바보 카스미... "


" 아얏. "


짓궂은 표정을 짓는 것이 왠지 열이 받아서, 카스미의 뺨을 살짝 꼬집는다. 그래도 다시 상냥하게 웃어 주더니, 두 팔을 활짝 벌린다. 가슴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다. 아기가 엄마에게 안기듯, 나도 주저 없이 카스미에게 안긴다. 카스미가 우리 집에 찾아 온 지 거의 한 달이 넘었으니까, 이제는 이런 스킨십도 별로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이 순간이 기다려진다고 해도 좋을 정도......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마주 보게 안겨서, 카스미가 해 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누가 해 달라고 해서 하게 된 행위는 아니었다. 그냥 내가 어느 순간 카스미를 안았고, 늘 그렇듯이 카스미는 상냥하게 받아 주었으니까.


"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알바, 한다는 건 그때 들었는데.... "


" 으응,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이 잘 안 나서... 이제는 사장님이랑 근무 시간 조절 했으니까, 주말에는 내내 아리사 보러 올 수 있어! "


카스미의 말 한 마디에 또 웃음이 나온다. 그럼 이제, 주말에는 확실히 매일 보러 오는 거구나.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 혐오를 애써 짓누른다. 학교 공부에, 아르바이트 까지 하는 애를 주말 내내 집에 부르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가 봐도 민폐, 어린애 같은 응석일 뿐이다. 그런데도 오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무서우니까, 카스미가 정말 오지 않게 되는 것이... 그러니까 카스미의 상냥함에 자꾸만 기대어 버린다. 쓰레기를 길거리에 버려도 다음 날이면 환경 미화원 분께서 깨끗이 청소를 해 놓으니까, '이번만, 이번만' 하는 생각으로 계속 버리게 되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곳에서 힘들어하는 카스미는,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스스로한테 정이 떨어질 만큼 이기적인 생각이다. 카스미가 오지 않는 날에는 뒤늦은 후회가 들어서, 몇 번이고 이제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문자를 쓰지만 정작 보내지는 않는다. 조금만 있으면 카스미가 날 보러 와주니까. 구역질이 치미는 자기 혐오를 며칠만 참으면, 카스미가 와서 나와 얘기해 주고, 나를 만져 주고, 안아주니까.


" 으, 응. "


카스미는, 늘 그렇듯 도란도란 혼자만의 이야기꽃을 피웠다. 뭐라고 했는지는 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뭐랬더라...... 아마 에도가와 악기점에서 랜덤 스타의 조율을 다시 했고, 사아야네 빵집에 신 메뉴가 나왔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제대로 못 듣는 게 당연하다. 카스미가 그런 얘기를 해주는 동안, 나는 그냥 카스미를 느끼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


어린애처럼 응석부리면서 카스미의 품에 얼굴을 묻기도 하고, 신나게 얘기를 하는 카스미의 입에 손가락을 올려서 말을 끊는 장난을 치거나, 조금 대담해지는 날에는... 쇄골 부근을 살짝 깨물어 보기도 한다. 그래도 나한테 화를 내기는 커녕, 귀여운 동생을 보는 것 처럼 웃어 주기만 할 뿐인 카스미를 보고 있으면...... 차오르는 고양감에 얼굴이 확 달아 오른다. 정말, 이 상냥한 애는 어떤 장난까지 허락해 주는 걸까 하고......


" 아리사는, 어땠어...? 지난 일주일. "


그 고양감을 깨 버린 것은, 카스미의 상냥한 한 마디. 머리가 일순간 멍해진다. 지난, 일주일...?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 카스미를 올려다 보자, 카스미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설령 내가 너만큼 말주변이 있는 아이라고 해도, 지난 일주일에 있었던 일 따위를 너처럼 얘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던 모바일 게임에서, 드디어 좋은 아이템이 나왔다는 애기? 할머니가 계란말이를 이틀에 한 번 해주게 되었다는 얘기? 한 번 밤을 새고 나면, 오후에 최소 4시간 정도는 자게 된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는 얘기?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사회성 제로 히키코모리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건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카스미. 네가 오지 않는 동안은 내 시간은 멈춰 있으니까. 오직 네가 내 방에, 나의 세계에 찾아와 주었을 때만 내 시간은 의미가 생겨. 네 문자를 받은 뒤부터 시간이 흘러가서, 네가 언제 갑자기 방문을 열까 하고 조바심과 불안함에 떨기 시작하고, 네가 나를 안고 있는 동안에만 모래알처럼 손을 빠져나가는 시간에 아쉬움을 느껴. 그리고 네가 이윽고 ' 이제 가 볼게 ' 라는 말을 꺼내고, 나를 보고 상냥하게 한 번 미소를 지어주고, 내 방문을 닫고 나간 다음부터는...... 시간이라는 건, 나한테는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 아리사...? "


그걸 알고 있으면서, 너는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심지어 억울하기까지 했다. 내 시간은 온전히 너를 위해서 쓰여. 토야마 카스미가 모르는 이치가야 아리사 따위는 이제 없단 말이야. 그런데 그걸 굳이, 이렇게 비참하게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잖아. 나도 알고 있다고......


" ....스미. "


" .....? "


" 토야마 카스미!!! "


" 아, 리사...? "


카스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조금 남은 이성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 댄다. 그만하고, 입 다물라고. 카스미마저 잃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고. 그런데도, 하고 싶은 말이 목에서 흘러넘치려는 것만 같다. 정말 오랜만에, 더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밀려오는 감정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져서, 순식간에 눈앞의 카스미가 흐려진다.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으면서 이윽고 말을 잇는다.


" 너는, 지금 다 가졌잖아.... 좋은 친구도, 모난 데 없이 둥근 성격도, 열정도, 꿈도, 목표도.... 나는 이제 너를 빼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왜, 그딴 질문을 해...... 왜!!!


" 아리사... "


" 너는, 넌 내가 지금 이러는 게 불쌍하기만 하고, 전혀 이해가 안 되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비좁은 방에서 뛰쳐 나와서, 다시 학교도 다니고, 포피파 애들한테도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키보드라도 두드리면서 반짝반짝이니 두근두근이니 속 편하게 지껄이면 될 텐데!!! "


" ...... "


카스미가, 아무 말도 없이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준다. 카스미의 눈을 보면서 열심히 감정을 읽으려고 해 보지만, 그런 게 지금 와서 될 리가 없다. 애초에 난 그런 거에 서툴렀으니까. 그냥, 카스미가 나를 봐 주는 게 좋을 뿐이다. 너무너무 비참하고 서러운데도, 카스미가 아직도 나를 봐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 나는, 그냥 그게 안 돼. 머리로 알고 있어도 안 돼...... 너랑 다르게, 겁쟁이라서. 무서워, 무섭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너 같이 상냥하지 않으니까..... "


문득, 무서워진다. 카스미에게 심한 말을 해 버렸다는 자각이 생기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방금 멋대로 지껄인 내 자신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화도 났다. 떨리는 양손에 억지로 힘을 주어서, 카스미의 손을 잡는다. 자존심 따위 다 버리고,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이미 늦었지만.


" 미, 미안해. 흐윽.... 카스미. 방금 소리 지른 거, 화 낸 거, 미안해.... 조, 좋아해, 나 진짜 너 좋아해... 그러니까, 가지 말아 줘. 맨날 찾아와 줘. 제발, 제발.... 나, 다른 거 안 바란다...? 지금처럼만... 계속 나 보러 와서 안아주고, 만져 주고, 응석 부리게 해 줘...... 응...? 제발... 흑, 흐윽... 내가 잘못했어... 읏.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스미가 나를 밀어 넘어뜨린다. 익숙한 내 침대의 냄새와, 카스미의 향이 섞여서 이상한 느낌. 볼을 쓰다듬는 카스미의 손이 기분 좋아서, 방금 전에 울어 놓고는 또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카스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키스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혀가 들어오는 느낌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단순히 혀가 얽히는 것 뿐인데,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 때문에 숨이 가빠져서 미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그 달뜬 느낌을 견딜 수 없어서, 카스미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애당초 내 완력 따위로 떨쳐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숨이 달려서, 괴로운데...... 카스미의 혀가, 내 혀에 얽히고, 자꾸만 부드럽게 훑어서....


" 흐....윽, 읏, 읍..... 하아, 하아.... 하.... 캇, 카스, 카스미..... "


" 하아... 하, 흐읏, 하.... 나도, 나도 그래... 아리사. "


뭐가, 너도 그렇다는 거야...? 아직도 이해 못했잖아. 화가 나서 카스미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완전히 카스미의 밑에 깔려 있어서 손 조차도 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못 하고 카스미를 노려 보기만 할 뿐인 내 얼굴을 계속 쳐다보면서, 카스미가 입을 열었다.


"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아리사의 집에 찾아가는 내가 있다...? 아리사를 안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 보면 말이야, 옛날처럼 아리사랑 같이 다니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거, 아리사가 다시 용기를 내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약해진 아리사의 응석을 받아주게 돼. '이렇게라도 좋아하는 아리사와 같이 있게 된다면 나쁘지 않은 거 아닐까'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게 되는 거야. 학교에 가자는... 그런 말을 꺼냈다가 다시는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할 까봐. 아리사가 다시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까봐 겁이 나서. 바보 같이... "


" ...... "


" 아리사가 아까 화낼 때, 나, 진짜 무서웠어.... 그래도, 이제 욕심 부리고 싶어졌어. 오늘은 그럴 각오를 하고 왔으니까. "


" 이제 와서, 무슨... "


" 늦은 거 하나도 없어. 아리사가 지금 용기만 내 주면, 우리 반 친구들도, 학생회도, 포피파도.... 모두 그 자리에 아직 있어. 아리사를 좋아하는 나도, 지금 아리사의 앞에 그대로 있어. "

카스미가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 넘겨 준다. 식은땀이 흐른 이마에 시원한 공기가 닿는다. 카스미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았다 떠 봐도, 정말 그대로.


" 있잖아, 아리사가... 다시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나는 아리사를 계속 좋아할 거야. 약속. 어떤 선택을 해도, 평생 아리사랑 같이 있어 줄게. "


" 그래도, 나 진짜 슬플 것 같아... 아리사가 다시 학교에 나가지 않고, 포피파도, 이대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흐윽... 나, 그 생각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와.... 아리사랑 있을 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아리사 방문을 닫고 나오면, 다시 그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 그러니까, 아리사가 용기를, 흐윽... 내, 줬으면, 좋겠, 어.... 흑, 흐아앙...! 흐윽.... "


" ...... "


굵은 눈물 방울이 내 얼굴 위로 똑, 똑 떨어졌다. 카스미의 예쁜 얼굴이 내 위에서 눈물 범벅으로 물들어서, 나도 모르게 카스미를 살짝 끌어 안았다. 그렇지, 너도 겁이 많았었지... 항상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기만 하던 네가 너무 좋아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날의 약한 너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겁이 많은 네가, 먼저 용기를 내 준 거구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해 주었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무엇보다, 이 방에서 나가지 않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처음으로 불안함이 가셨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카스미는 나랑 같이 있어줄 테니까. 만약 내가 다시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위에서 흐느끼는 카스미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카스미가 서럽게 흐느낄수록 신기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치 게임처럼, 카스미한테서 용기를 모두 받아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카스미랑 같이 있으면 두 명분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셈인 걸까? 둘 다 겁쟁이라서, 합쳐 봤자 1.5인분 밖에 안될지도. 실없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지...? 바보 카스미. "


" 에, 으응....!? 아니, 아니야! 협박 같은 거 아니야! 그냥, 나는 이랬으면 좋겠다고....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너 지, 진짜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그치? 그렇게 울면서 말하면, 내가 거절 못 할 줄 알고. "


" 아니야! 나, 나도, 그만큼, 아니 훨씬 더 아리사를 좋아해.... 우으.... "


완전히 울상이 된 카스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자, 내 눈치를 자꾸만 보면서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카스미와 함께 있으면 예전부터 늘 이랬다.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자꾸만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아무리 화가 나고 우울한 일이 있더라도 서서히 잊혀져 버린다. 방금까지, 그게 뭐라고 그렇게 화를 냈을까 하고 부끄러워질 정도로.... 조금이지만, 오랜만에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 반가웠다.


" ...밥, 먹고 갈래? "


" 에....? "


" 할머니가 곧 장 봐 오시니까, 조금 더 있다가 밥 먹고 가... 어차피 내일 주말이잖아. 내일도 올 거라면서.... "


" 아, 으응...! 에헤헤.... "


좋아하기는. 피식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애써 숨기면서, 손가락으로 방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임기를 가리킨다.


" 여기 계속 있으면, 그 뭐냐... 답답하니까. 나가서, wii 할래...? "


" 아, 에....? 지금, 갑자기...? 푸흡.... 아리사, 완전 초딩.... "


" 이익...! 싫으면 하지 말던가!! "


" 에, 하고 싶어!! 아리사, 오늘이야말로 마리오 카트로 아리사를 완전 이겨 버릴 테니까!! 그럼 게임기 설치하러 간다~! "


" 흐흥~ 백 년은 이르다고, 토야마 카스미! "


방 문이 활짝 열리고, 카스미가 게임기를 들고 아래층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 밖은 어느새 샛노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 불을 꺼버리고, 블라인드를 완전히 걷어 버렸다. 얼마 만에 창문을 활짝 열어 보는 걸까. 어느새 구름이 걷혔는지 아름다운 노을 빛이 방 안에 한 가득 들어왔다.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어서, 한참 동안이나 바깥 풍경을 바라 보았다. 몇 년이나 봐 왔던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열린 창문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슴이 반짝반짝 두근두근해서, 지금 별의 고동소리가 들린다고...


" 아리사아아~!!! 게임 안 할 거야~?? "


" 아, 지금 가~!! "


처음으로 방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고 느꼈다. 등교 거부 중인 주제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뻔뻔하게도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가서 거실로 달려갔다. 경쾌한 게임 배경 음악과 함께 게임용 핸들을 잡고 개구쟁이처럼 미소 짓는 카스미가 보였다.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활짝 웃어 주고 말았다. 이런 표정 보여주는 거 부끄러운데... 가슴이 두근, 두근.


별의 고동소리라는 거, 무도관까지 가지 않아도 이렇게 쉽게 들리는 건가 하는 생각에 또 웃음이 나왔다.


*


갑자기 조금 피폐한 아리사를 써 보고 싶어서 쓴 건데 좀 괜찮아...? ㅋㅋㅋㅋ 모종의 이유로 다시 등교 거부를 시작하게 돼서, 카스미한테 엄청나게 의존하는 아리사인데 어렵다 어려워 ㅠ 원래 아리사가 계속 의존하는 새드엔딩으로 끝내려다가 마음이 아파서 그냥 해피로 바꿈...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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