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끼리 연애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수선한 시국이었고,

한창 외롭고 예민한 나이였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해방이니 뭐니 하는 사상이 들어온 시기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우린 답답했었던 것 같다.

그때 역시 동성애를 탄압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여자들이란 늘 몰려다니는 족속이었고

파시스트들은 굳이 교실까지 쳐들어오진 않았다.

나 역시 집단의 관성에 휩쓸렸고,

후배 한명과 교제하고 있었다.

가볍게 키스하거나, 껴안고

같이 자고

가끔씩 소풍을 가기도 하고

전철을 타고 박물관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유행이란 지나기 마련이다.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간호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아예 조기에 졸업해

일선에 뛰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꽤나 명문이었던 덕분에

징집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런 만큼 다가올 전란에

일찍 결혼하거나 해외로 피난가거나 하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 서로 멀어졌고,

교실은 점차 비어갔다.

"같이 가요 선배. 태평양 건너에 할머니가 있어요.

큰 공장을 가지고 계시는데, 물려줄 사람이 없다 하셨어요.

제가 다 할께요. 풍족하게 살 수 있을꺼에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게 이 관계는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녀를 달랬겠지만

급박한 때였고 나 역시 여유가 없었다.

거절에도 끊임없이 들이대는 그녀가 부담스러웠고

나는 결국 큰 상처를 주면서 헤어져야 했다.

그때 그녀는 내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장난일 뿐이였냐고

그저 여흥거리였냐고 내게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나는 부정하지 못한채 그녀를 외면했다.

돌아서자 더욱 서럽게 울던 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결혼했고

시간은 흘렀다.

그녀는 다른 나라로 떠나진 않았지만,

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가끔씩 그 시절의 앨범을 둘러보면

항상 눈에 밟히곤 했다.

그녀는 개구리였고, 나는 장난스레 돌을 던진 셈이었다.

이기적이고 순수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당신이 반역자와 모의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부인."

사진에는 식당에 있는 나와 한 여자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내 모습이었으니까.

"말도 안 돼요. 이 사람은 지역구 연방의원의 부인이란 말이에요!

부녀회 회장이라 자주 만났을 뿐이에요.

이런 사진이라면 수 백명이 넘을 꺼에요"

나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절대 반역의 증거가 될 수 없어요"

나는 거의 속삭이듯이 겨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부인.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슈나우퍼 중령이 대령이 되는 걸 막을 정도의 일인 겁니다."

총통께서는 반역자를 싫어하시니까요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정치 선전부 집행관이 내게 말했다.

나는 두려움에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멀쩡한 사람도 없었던 존재로 만드는 이들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법은 있습니다."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일종의 게임이에요. 부인.

가족을 위해서, 어디까지 가실 겁니까?" 

가족을 지키기 위한 보빔...

이건 굉장히 귀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