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동용 별관 1층 구석. 라커룸 및 미팅룸으로 사용하는 여자야구부실은 적막하고 어두웠다.
완전한 어둠이 아니라 무대 연극처럼 부실에서 가장 깊은 곳에만 자그마한 조명이 켜진 상황. 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시라사키 부동의 4번이자 부부장인 나카무라 유우키.
그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뽑아버렸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전력을 다해서, 장래희망이 폴더폰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강렬하게 고개를 숙인다. 하늘을 뚫을 드릴같은 기세의 완벽한 90도 사죄 포즈.
무엇을 뽑았는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자세가 줄 없는 번지점프 이용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사쿠타가 조명 아래로 향하면서 유우키는 고개 숙인체 비킨다. 그리고 빔 프로젝터를 기동. 이제 시대의 두자릿수가 바뀌려고 하지만 VR 같은 건 여전히 비싼 것이다.
“그럼 주목.”
이미 주목 중인 화면에는 흰색과 검은색만이 있었다. 흰색은 이름이고 검은색은 줄.
“이게 ‘전국 고등학교 여자 경식 야구 선수권 대회’, 그 도쿄 예선 대회 대진표입니다.”
사쿠타의 조작에 화면이 좌측 끝으로 확대되고, 각각의 교명이 보다 확실하게 보인다.
“저희는 A블록. A시드인 사립 세이호 여학원 고등부와 같은 곳입니다. 위치는 정반대. 만나는 것은 준준결승인 8강전입니다.”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제 4시합. 가까운 것 같지만, 토너먼트이기에 한없이 멀기도 한 곳이다.
또한 본격적인 순위권 앞에서 세이호를 만난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준결승 진출을 위해서는 시드교나 시드교를 이긴 학교와 격돌해야 하니까.
“즉 3승을 거둬야 하는 것이네요. 어느정도 페이스 조절을 해야겠죠.”
당연한 말이기에 아이나에게 끄덕이는 일부 부원들. 그리고 깨닫는데.
“잠깐, 너 세이호랑 붙을 생각이랑 이길 생각으로 가득하잖아?!”
“아이나, 괜찮아?”
“그것보다 혼자서 다 던질 작정이야?”
2유간과 정포수의 지적에 시선이 집중되고, 순간 압도당해 의자 등받이와 일체화되는 아이나.
“뭐, 기합이 들어갔다면 좋은 거 아니겠어?”
“긍정적인 마인드는 정신적인 영향이 많은 투수에게는 좋은 것이죠.”
좋은게 좋은거다. 대충 그런 느낌으로 이 화제는 마무리되었다.
“일단 그 세이호까지의 과정입니다만...”
A블록의 최우측으로 확대. 일단 시라사키가 보인다. 그리고 1회전 상대도 두 글자 한자로 된 교명을 가졌으니.
“류...오?”
“아무래도 강자를 끌어들이는 기질인 모양이라~.”
“넌 끝날때까지 조용히 있어, 유우키.”
3년 전과 2년 전의 2년 연속 우승. 작년에는 세이호에게 호되게 당했지만 그래도 결승 단골.
“네. 그 류오 학원이 저희의 첫 상대입니다.”
노 시드인 탓에 누군가는 1회전 상대를 해야 했는데, 그 폭탄을 시라사키가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망했다고 체념할 생각은 없지만-”
“-초반 상대로 적절하다고 보기에는 어렵지.”
화면은 좌측으로 이동.
“2회전은 연습 때 싸운 시라카바가쿠엔과 유라 고교 중 승자입니다. 순리대로라면 유라겠죠.”
부원은 아직 18명 정도지만 학교 자체가 최근 스포츠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학교로, 초청한 전문 감독이 직접 발품을 팔아 인재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
“최속이 있는 최속의 팀...”
료는 그 감독을 직접 만났기도 했고, 아는 사람도 있다.
“분명 에이스가 같은 시니어였지, 료?”
이번에는 료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맞아. 오키타 쇼요 씨. 중학교 3학년 때 남자들 틈에서 127km/h를 던지고 타순도 6번이어서 스포츠 신문에도 나온 적이 있어. 2학년인 지금 비공식 최고 구속은 132km/h. 공식은 129km로 그래도 현재 도쿄에서 ‘최속’이라고 불리지...무서운 사람이야.”
또 하나의 최속에 대해서는 사쿠타가 이어받는다.
“그녀를 에이스로 해서, 유라 고교의 선수들은 작년에 팀 최고 도루율을 기록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전 육상부원들도 있고 야구 경험자들 중에서도 특히 주력이 높은 선수들을 모아놓은 것을 볼 수 있죠.”
발이 빠르다는 것은 단순히 도루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단타도 2루타로 만들고, 외야가 뚫렸다간 3루까지 허용한다. 그걸 알기에 야수들은 조바심내서 실책을 쌓아가고, 투수는 신경이 마모되어 승부에 집중하지 못해 무너진다. 그것이 유라 고교의 기동력 야구입니다.”
화면은 다시 왼쪽으로.
“중앙의 4개교도 모두 쟁쟁한 팀입니다. 단순하게 작년 성적으로 가능성을 계산하면 작년 8강의 고쿠다이 고교를 상정할 수 있겠군요. 부원은 11명. 작년을 제외한 근 5년 정도의 성적은 최악. 타격은 특별하게 강하지 않지만 신입생 베터리가 상당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이가 엄청 좋더라~.”
“두 번째로 상정할 만한 학교는 항상 최소 16강이라 불리는 철벽의 수비 테루이. 다음으로는 문무겸비의 스이세이 정도군요.”
아이나와 카나를 제외한 멤버들은 다들 한번씩 들은 적이 있는 이름들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A 블록은 이상하리만치 네임드가 몰려있다는 뜻.
“제대로 저질러 줬구나, 나카무라...!”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네요, 선배...”
운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도 있고, 부원들도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단 주목해야 하는 것은 눈앞의 적입니다. 오늘은 연습 시작 전에 류오 학원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사쿠타는 따로 준비한 화면을 꺼낸다. 나타난 것은 류오의 그라운드.
“여자고교야구 초창기부터 이어진 전통을 바탕으로 현재 부원은 46명이고 메니저가 3명. 사람이 많은 만큼 당연히 인재가 많죠.”
대략 설비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나오고, 다음은 가르마 쪽에 공들여 멋을 낸 단발의 선수가 나온다.
“대표하는 선수 중에 한 명이 이 5할 후반~6할 타율의 츠쿠모 란. 고타율과 거의 없다시피 한 삼진이 특징인 부동의 1번입니다. 메인 포지션은 좌익수. 수비는 안전하게 하는 스타일입니다.”
다음은 보디빌더 같은 근육이 인상적인 거구.
“용의 왕들 중에서도 왕을 뽑자면 이 선수, 이시가미 미츠키입니다. 현재 3학년. 최고 구속 128km/h에 통산 36개 홈런을 기록하는 에이스에 4번이죠. 투수가 아닐 때는 항상 1루수입니다만 수비도 구멍 수준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것은 후보 투수들. 강호의 증명인지 아무리 느려도 110대 후반의 구속을 지닌 선수들이다.
“마지막으로 소문에 따르면 즉시 전력감의 투수 신입생이 있다고 합니다. 이쪽은 데이터가 없어서 어쩔 방법이 없군요.”
이렇게 또 하나의 ppt가 종료. 사쿠타는 한번 선수들을 둘러본다.
“이렇게까지 설명해도 불안해하지 않는 점은, 감독이자 교사로서 정말로 자랑스럽군요.”
솔직히 상황은 좋지 않다. 최초의 적이 거의 최강에 조도 최악의 조.
반면에 이쪽은 최소 출전 인원이 겨우 갖춰져있다. 류오의 참모인 스노하라 유메로서는 유우키와 료 이외에는 조사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거다.
하지만.
“질 생각부터 할 정도로 근성 없는 놈은 감독님의 펑고를 못 견뎌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는 카에데.
수비는 결코 약점이 아니다. 철저한 수비기본주의자인 사쿠타한테 지도받았으니까.
“최악의 최악까지 고려해도 적어도 유우키가 1점은 내주겠죠.”
마야의 말대로 도쿄 밖의 강호들 상대로 고타율과 홈런을 기록한 유우키가 있고, 료도 장타력과 밸런스를 고려하면 뒤지지 않는다.
“저는 아이나를 믿으니까요.”
리에가 신뢰하는, 좌완으로 한정하면 아마 최속일 아이나까지.
누가 출전 불가 수준의 부상이라도 입는 순간 끝장인 팀이지만, 단판 승부에서의 전력을 비교하면 압도당할 정도의 레벨 차이는 아니다.
“리에...”
숨을 삼키는 아이나.
‘아니, 이기러 가야 해.’
아직은 망설임이 있다. 하지만 큰소리 친 것이 있기 때문이라도.
“네. 믿어주세요.”
가능한 단호하게 말해본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전 여러분을 믿겠습니다. 이제 개막식의 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마지막 ppt. 비교적 시합과 상관이 없는 내용이기에 다들 집중이 어느정도 흐트러진다.
거의 완전한 어둠속에서 아이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리에.
‘망설였지만, 말해도 되겠어.’
리에로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이나는 시합에 대한 망설임이 조금 줄어들었다.
어제 츠바사와 만나서 받은 전언을 들려줄 수 있다.
‘아이나, 뭔가 멋진 부분도 생긴거 같아.’
그리고 반대편에서 처다보는 카나. 어둠 속에서 실컷 감상할 작정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는다.
““!””
반사적으로 눈을 돌리는 둘. 그리고 다시 각자 생각한다.
‘카나는 어쩐지 가깝지. 나보다 사이 좋은 것 같고.’
‘‘친구로서’ 라는 거, 지금도 그대로일까? 한 번 정도는 찔러봐야겠어.’
그러는 틈에 개막식에 대한 설명은 끝. 이제는 나갈 때다.
월요일의 펑고는 짧은 마무리 펑고뿐. 기본적으로 컨디션 점검과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과제 확인이라는 느낌이다. 대표적으로는 투수진이 다 던져보는 날이다.
물론 제일 대접받는 것은 에이스. 불펜을 처음 밟는 것은 아이나다.
그리고 리에와 사쿠타의 앞에서 밝힌다.
“체인지업...말이야?”
“체인지업...인가요?”
사실 리에와 사쿠타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다. 슬슬 변화구를 가르칠 정도로 아이나의 피칭은 안정되지 않았나 하고.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에 연습 시즌이 끝나버린 것.
흔히 투수는 화려한 주인공이라는 인식이 있다. 실제로 활약할 때 제일 눈에 띄게 활약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투수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화려함이 아니다. 항상 정성스럽게 유지한 평소대로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구위와 변화를 유지하는 지속성과 안정감이다.
구종의 증가는 안전을 해칠 수도 모르는 것. 그렇기에 시합에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는 거다.
“네...이런 시기에 얘기해서 죄송해요.”
이틀 전의 시합에 기록한 탈삼진이 14개. 직구만으로 싸우기에 망설임을 버린 체 힘의 승부를 할 수 있던 것. 물론 류오 같은 강호라면 보다 얻어맞겠지만 지금도 싸울 힘은 있다.
“아니, 상담하지 않은 건 섭섭하지만 이것저것 궁리해보는 건 좋아.”
중요한 것은 그 완성도다. 어쩐지 길게 느껴졌지만 최근의 훈련과 오늘과는 단 하루의 시간밖에 없었다. 즉 벼락치기다.
“제가 타석에 서죠. 아야나미, 던져보세요.”
아무리 손목의 스냅이나 특정 손가락에 힘을 싣는 등의 기술이 필요없는 것이 체인지업이라지만 장착할 가치가 있는가는 의문. 그것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사쿠타가 타석에 선 것처럼 자세를 잡는다.
원래 공을 받을 예정이었기에 리에도 장비를 몸에 두른 상태. 그대로 앉는다.
‘포심과 똑같이, 포심과 똑같이.’
불안한 것은 잡는 방식의 변화에 의한 릴리스 감각의 차이. 직구처럼 때린다는 감각이 아니라 잡은 손 전체로 밀어내는 감각. 거기에 주의하고, 팔을 휘두른다.
“...!”
손이 나오는 타이밍은 직구랑 동일. 배트도 들고있지 않건만 저절로 왼발을 들어올리는 사쿠타다.
그리고 느려진다. 직진코스를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급브레이크를 거는 경주용 카트처럼.
롤러코스터의 정점에 다다른 것처럼 한계까지 속도를 낮추고는.
“우왓!”
리에조차 순간 놓칠뻔한 기세로 떨어진다. 그것도 우타자 기준의 바깥쪽, 즉 미미하게 오른쪽으로.
급하게 무릎으로 주저앉으며 글러브를 사이에 둔다. 공 한개 정도 차이로 앞에 떨어진 공이 튕겨 몸통 보호대에 맞는다.
“......”
“......”
“......”
불펜의 시간이 멈춘다. 그라운드에서 토스 배팅 중이던 다른 선수들도 손에 잡히는 듯이 묘한 침묵에 처다본다.
“떨어졌죠?”
“확실히 원래 궤도에서 떨어졌습니다. 그것보다-”
직구보다 더 떨어지는 공 쯤은 얼마든지 던질 수 있다. 아무렇게나 잡고 아무렇게나 패대기 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변화구로서 성립하려면 어느정도의 구속을 지니고 배트보다 빠르고 급격하게 떨어져야한다.
“-처음부터 느리게 나온 게 아니라 느려졌다...그 점이 핵심입니다.”
물론 착시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원리가 아닌 결과. 특수한 궤도에 의한 착시가 떨어지는 변화를 강화한다는 점.
간단히 표현해서, 상당히 훌륭하다.
“아, 아이나! 해명해!”
처음 만난 날과 같은 기세로 아이나를 붙잡는 리에. 양 어깨를 잡고 흔들지만 체중차가 있다보니 그다지 흔들리지는 않는다.
“꽤 에전부터 연습한거야? 출처는 독학? 아니면 능력자 배틀물처럼 정체모를 아저씨 비주얼의 20대 후반이 전수해주기라도 한거야?”
해명을 요구해도 차마 사나다 유키에게 배웠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일단 어제 밤에 생각해둔 대사를 읊어본다.
“최근에 야구에 관련한 영상들을 보다보니, 너튜브에 관련 영상으로 이런저런 변화구 강의가 떠서. 마당에서 연습투구를 할 때 간간히 연습해봤는데요...”
흔들리는 통에 말이 끊겨서 나오고.
“말을 해줘, 야지...!”
대답도 마찬가지.
실전에서의 채용 여부는 천천히 검증하기로 결정하는 리에와 사쿠타였다.
아야나미 츠바사는 스파이커 개인으로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지금의 학교에 있다. 아이나에게도 이어진 듯한 선천적인 파워가 있고 공중전 기술이 뛰어나다. 최강 무기가 속공일 뿐이지 다채로운 공격이 가능한 것.
즉시 전력감으로서 벤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름에는 선발 출전이 단 한번. 나머지는 핀치 서버로 나간 경우밖에 없었다.
은퇴하는 주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심플했다. 점수는 올렸지만 다들 싫어했다고.
파트너인 나가이가 주전이 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츠바사는 아직 그 이유를 찾고 있다.
피가 끓는 일을 찾았다. 거기에 모든 걸 걸고 노력하고 있다. 무드메이커나 리더 성격은 아니지만 찬물을 얹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네. 팀메이트인 스즈키 료라고 합니다.”
“아, 아아, 안녕하십니까! 베터리를 짜고 있는 타카하시 리에입니다!”
후배가 농담조로 “귀염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님까?” 하는 말에 평소 나가이의 조언대로 꾸밀 것을 찾아 나온 지금. 이 둘과 만났다.
“베터리...?”
단어의 의미를 묻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나의 포지션을 몰랐던 만큼 그녀로서 살짝 놀랐고, 입안의 중얼거림이 밖으로 새어나갔을 뿐이다.
“아, 네! 포수로서 아이나에겐 항상 의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긴장해있어.”
료의 딴죽에 동의하는 츠바사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렇군.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계속 열심히 하고 있구나.”
솔직히 부러워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키도 추월당했고 근육으로 붙어도 이길 자신은 없다. 무엇보다 탐나는 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능력. 하고자 하는 것만으로 다른 종목에 적응하는 그것이 너무나도 부럽다.
“네. 성실하고 착하고 재능있고-”, “리 짱, 좀 진정하라고.” 같은 소리가 들리지만 츠바사의 사고는 그녀의 내면을 향한다.
‘원래 긴장에 약한 건 알고 있었다.’
아이나가 굳어버린 것만으로 화를 낸 것은 자신의 어리숙한 열정과 시기, 질투로 저지른 실수가 아니었을까. 시간은 츠바사에게 그 정도 생각을 할 여유 정도는 주었다.
“...한 가지 정정해야 할 게 있다.”
대상은 처음 봤을 때의 인사.
작지만 분명하게 발음한 말은 료와 리에에게 똑바로 전해졌다. 곧 그녀들이 바라본다.
“분명 자매지만, 나는 지금 아이나의 언니를 자칭할 수 없을 것 같다.”
동공이 커지는게 보인다.
“심한 짓을 했고, 아이나는 내 앞에선 만족스럽게 말도 못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무뚝뚝하다. 자세한 내막을 말하지 않는 것이 추하다.
그래도 이기적인 요구를 해야만 하겠다.
“네가 파트너라면, 부디 지켜봐주고 이해해줘. 그리고 전해줬으면 좋겠다. ‘공식전이 있다면 보러 가겠다. 여름이 끝나면 만나자.’ 라고.”
등을 돌리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하게 잡아냈지만 비교적 작은 가죽 소리. 불펜에 앉은 리에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정면의 사람에게 공을 던진다.
“...솔직히 비교되지?”
허스키하면서도 맑은 목소리. 카나다. 굳이 따지자면 제 4선발. 혹은 올라운더라는 이름의 패전조.
“아니, 그, 응...”
연습시즌을 거치면서 폼이 안정되어 후보투수들도 구속이 많이 올랐다. 110대 중반까지는 끌어올려 변화구도 본격적으로 휘기 시작했고, 카나도 커브를 장착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투수진에서 제일 약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카나. 아주 느린 공도 아니고 제구는 좋은데 이상하게 얻어맞는다.
“나카무라 선배는 너무 정직해서 재미없다고 상대를 안 해줘.”
“그건 분명 선배가 괴물인 거야.”
아무리 무브먼트가 밋밋하다고 해도 기계도 아닌 인간이 몇번을 던져도 쳐낸다. 그게 정말 인간인가.
사쿠타가 급한 전화로 자리를 비운 지금, 마지막으로 점검받는 카나와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 구도가 되었다.
‘단둘이 대화한 적이...있던가?’
없지는 않지만 전부 일상적인 것이지 수다는 아니었다.
“아무튼, 이왕이면 에이스한테 맡기고 싶어...!”
반은 요행이겠지만 미트를 겨눈 곳에 정확히 온다.
“역시 메인 포지션이 아닌 곳을 지키라는 건 평범하게 싫지.”
외야까지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동안 익숙해졌지만 내야를 맡긴다면 리에는 솔직하게 도망칠거다.
“카나는 아이나를 전적으로 믿는구나.”
“리에는 안 믿어?”
“안방마님은 너무 많은 걸 알게 되거든. 투수의 장점과 단점 전부 다. 결점 없는 투수는 없으니까 믿는다 해도 99프로 정도?”
“나는?”
“좀 더 묵직하면 좋을텐데!”
“입학하고 나서 체중이 안 늘어. 분명 근육은 붙었을텐데.”
잠시 소매로 땀을 훔치는 카나.
“소리만 들어도 묵직한 아이나는 좋아할 수 밖에 없겠네?”
“대체로 눈에 띄는 포지션을 서포트 하는 포지션은 그래. 단순하게 물리적으로 강한 파트너가 편하지.”
리에의 뇌피셜이지만 아무튼 그럴거다.
“파트너...그것뿐이야?”
“응?”
“사적으로는 어떠냐고.”
묻는 이유는 모르지만 순순히 답한다.
“역시 어릴 적 일도 있고, 아무래도 운명적인 건 느끼지. 거기에 예쁘고 착하니까 미워할 수가 없고.”
“그렇구나. 역시 싫어할 점이 없으니까.”
어쩐지 기합이 들어간 듯이, 보다 과장된 동작으로 와인드업.
“나도 좋아해, 아이나를.”
평온한 목소리로 전력투구. 스피드건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지만 분명 최고구속이 찍혔을 것이다.
‘무겁네. ‘좋아해’가.’
“좀 더 특별하고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포수가 부러워.”
솔직하게 말한 단 두 문장. 그것은 듣는 이의 시점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한번 마음이 있는지 찔러보자. 카나의 그런 판단이 일으킨 나비의 날개짓이었다.
마무리가 지어지면 항상 울리는 그 말.
“수고하셨습니다!”
그건 샤워 하면서 ‘오늘도 힘들었다’라는 요지의 대화 후에 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탁받은 것이 있으니까.
“아이나.”
“네.”
평소처럼 조용하게 가방을 챙기면서 하는 대화. 그렇지만 집의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잠깐 같이 가자.”
“?”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렇게 베터리는 역도 정류장도 아닌 근처 강의 다리를 향한다. 만화에 흔히 나오는 풀로 뒤덮인 경사면이 있는 그런 다리다.
“아까는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으응. 노력하는 건 좋지.”
웃음기 있는 사과지만 가볍게 받지 못하는 리에. 평소보다 생각하게 된다.
아야나미 아이나는 근본이 남 돕기를 좋아한다. 친절하고 귀찮아하지 않는다.
“얘기할 거는 역시 대회랑 관련되어있나요?”
그러나 이 말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쪽 얘기일 거라는 확신과, 3개월간 여전한 존댓말에서.
“대회라기보다는...야구일까? 아닌가?”
물음표를 거듭하며 머릿속을 정리한다.
“아이나는, 어째서 옛날 약속을 지키겠다고 생각했어?”
카나와의 대화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남이 싫어할 것을 하지 않고 기뻐할 것만 한다. 그런데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필요하다고 말해주셨으니까요.”
다리의 인도에서 바람을 쐬며, 흩날리는 금색 비단을 손으로 억누르고 마주보는 아이나.
츠바사를 만나지 않은 리에였다면 그저 아이나 특유의 친절함으로 납득했으리라.
“그게...전부?”
“물론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막아내면 기쁘죠.”
변명하듯 말하고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저는 더 강해져서, 더 요구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최근에는 프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예쁘다고 생각하던 미소에 황혼의 빛이 섞이자 동전의 뒷면을 보는 듯 했다.
추상적이지만 확실하게 이야기가 연결된 느낌을 받은 리에다. 이제 본론을 꺼낸다.
“그...츠바사 씨, 그러니까 아이나의 언니와 만났어.”
다시 강가를 처다보던 시선이 고작 몇도 정도지만 아래를 향한다.
“리에.”
평소와 같은 억양과 발성, 그리고 다른 온도.
“당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에요.”
바람이 멎는다. 해가 거의 완전히 산에 가려지기 시작한다. 얕은 어둠에 그림자같은 색을 띈 아이나가 내려다본다.
주제를 알라는 듯이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처음으로 보이는 명백한 거절. 그것은 리에의 가슴속에 박힌 뒤 회전하여 커다란 구멍과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
평소라면 여기서 꼬리를 말았다. 리에도 인간관계에 능숙하지가 않으니까. 저 조용한 압력에 침묵했을 거다.
“분명 같은 말을 했겠죠. 여전히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싸우지 말라고. 중요한 곳에서 평소대로 하지 못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아니다. 그런 건 들은 적 없다.
“괜찮아요. 전부 사실이니까. 전 배구 자체에 그렇게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수룩해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래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에요. 각오를 다지고, 쓸모있게 되면, 분명 가족이 모이는 날에 한 마디 정도는 말을 걸어 주겠죠.”
아이나는 잘못된 걸 알면서도 반쯤 체념하고 있다. 어차피 그런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마음 쓰지...”
돌발적인 상황에 애써 만든 표정을 지키지 못하는 건 아마 본성이리라.
“아이나...”
그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고, 실제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슬픈 이유는 두 가지다.
“어째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혼자 끌어안는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 리에는 스스로에게도 실망하고 있다.
선을 그은 건 아이나만이 아니다. 자신도 어느샌가 좋은 베터리에 만족했다. 따뜻하니까 화상을 입지 않는 간격에 머무른 거다.
“저 때문에 우는 걸, 보기 싫어서였는데...”
“그런 건...!”
엉망진창인 호흡을 다잡는다.
“합숙 직전의, 나랑 마찬가지잖아. 그런 거, 나도 섭섭해!”
베터리이기 이전에 같은 사람이니까. 서로에게 있어서 입학 후 처음으로 사귄 친구니까.
말한 부분도 말하지 않은 부분도 전부 전해져, 아이나는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움직였다.
“같은 상처를 준 거군요. 정말, 정말로 죄송해요.”
약하지만 확실하게 감싸안아 눈물을 몸으로 받아낸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아요.”
두 번째 이유는, 오해하고 있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아이나. 적어도 내가 본 츠바사 씨는 너를 싫어하지 않았어.”
“네...?”
“내가 베터리라니까, 잘 지켜봐주고 이해해달라고 했어.”
지켜본 결과로 깨달았다. 사소한 몸집 하나 억양 하나에 집중하며 바라보고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은 아이나에게 베터리, 친구 같은 단어 이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는 거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도 담아서, 부탁받은 말을 전한다.
“시합을 보러 온다고. 대회가 끝나면 만나자고 전해달라고 했어.”
“...!”
사실 만나자는 말 자체는 아이나에게 반가운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무서우니까.
하지만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마운드에 서는 근본적인 목적은 그걸 극복하기 위함이니까, 여기서 움직이지 않으면 다 헛된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질 수가 없게 되는군요.”
유키가 피운 불씨를 츠바사라는 장작이 키운다. 동시에 또 하나의 도전과제가 추가된다.
당당하게 싸워서 이겨야 한다. 지더라도 패기를 보여야 한다.
“리에.”
팔에 힘을 주어 끌어안는다. 그것은 의지의 표명이다.
부르는 소리에 붉어진 눈으로 처다보는 리에에게 말로서 전한다.
“이기고 싶어요. 함께.”
“응. 같이.”
몇번이고 했던 맹세지만 보다 특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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