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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술 못하면서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

legaldrug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1.17 00:53:41
조회 604 추천 22 댓글 2
														

(딱히 안 봐도 상관없는)이전 화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lilyfever&no=641243


======


 '이건 미친 짓이야.'


 불안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했다. C가 자기 친척 1명 대신 만나서 놀아주고 오면 10만원 준다고 해서 덥썩 물었는데 하필이면 소개팅 자리였다. 당일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화로 사실을 밝힌 C는 사탄 새끼가 틀림없다.


 "미쳤어?"


 "아, 미안. 어렵게 딴 소개팅인데 주선자랑 상대 엿먹이면 다신 안 잡아줄 것 같았단 말이야."


 "상대한테는 대타가 나올 거라고 미리 알리고 나만 모르는 소개팅이었던 거야? 난 가볍게 생각하고 그냥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 입고 나왔다고!"


 "......그래서 내가 과제 밀린 공대생처럼 입고 가지만 말라고 했잖아."


 "한 번 만나고 끝날 니 친척인데 내가 굳이 그러겠냐? 그리고 난 너처럼 그런 쪽 아니거든?"


 "B님, 제발 소수자를 어여삐 여겨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나중에 28대 맞을래?"


 "어차피 이미 도착했고, 돈도 받았잖아."


 '아아아아악!'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비명은 속으로만 질렀다.


 "상대 도착하기만 해봐라. 바로 큰소리로 손뼉 치고 핑거 스냅하면서 '여기에요!'라고 외치는 걸로 시작할 거니까."


 "돌았어?"


 "미친 건 너....."


 좀 더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긴 생머리를 한가닥으로 묶고 회색 세미 정장을 입은 여자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억.....'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황급히 통화종료를 눌렀다. 난 상대의 얼굴을 몰라도 상대가 C한테서 미리 내 사진을 받았다면 나를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입은 차림새와 스튜어디스 뺨치는 얼굴에 면접관 앞에 선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긴장되었다.


 "B씨 맞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쪽은 A씬가요?"


 "네, 만나서 반가워요."


 'C, 진짜 나중에 죽인다아아아!'


 얼굴이 예쁘고, 예의 바르고를 떠나서 초면인 연상 앞에서 긴장하는 버릇이 있는데 하필 상대가 이런 사람이라니. 심지어 난 그냥 아는 친구 만나러 나온 듯한 차림이라 왠지 모르게 찔렸다.

 깽판을 치겠다는 다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긴장해서 상대의 말에 기계적으로 답하는 대화만 반복되었다. 사실 대답을 하긴 했는데 내가 제대로 질문에 맞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B씨는 공대생이신가요?"


 "어, 굳이 따지자면 자과대생이긴 한데....."


 '아, 젠장 그놈의 체크무늬 남방.'


 딴에는 숨기려고 한 것 같지만 내 상의를 힐끔보고 빠르게 다시 내 얼굴로 돌아온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소개팅에 왜 이렇게 입고 나왔냐고 돌려 말하면서도 불쾌하게 꼽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세이프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그쪽에서 먼저 과를 안 물어보시길래 궁금해서요."


 "아, 괜찮아요. 어차피 세간의 공대생에 대한 편견은 얕게 겪어보면 그저 편견인 것 같아도 깊게 겪어보면 90 % 일치하니까요."


 "네? 아하하."


 '아, 막말은 자제하려고 했는데.....'


 딱히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내 대답에 상대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 그래서 A씨는 자취한다고 하셨죠? 학교가...."


 "XX대요."


 "예?"


 "네?"


 놀라서 커진 내 목소리 때문에 상대도 덩달아 조금 놀란 듯했다.


 "어..... 같은 학교네요?"


 "아, 그래요?"


 '아니, ㅅ발, 같은 학교면 앞으로 또 마주칠 수도 있는 거잖아. 레즈비언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이 같은 학교래요. 아하하, 심지어 난 레즈비언도 아닌데. 다시 마주치면 뻘쭘해서 어떻게 보냐!'


 A씨의 웃음으로 조금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 돌아왔고, 카페를 나오고 난 이후로도 무슨 정신으로 같이 놀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겐 소개팅 중인 사이가 아니라 고딩 동생과 주말에 같이 데리고 노는 회사 다니는 언니로 보였을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들어가기 전까진.


 "원래 나오기로 했던 C씨로부터 술 잘 마신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년아!'


 술까지 마실 분위기에 당황해서 어버버하고 있는데 상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연상이고 뭐고, 여기까지 하면 돈 받은 값은 한 것 같았지만 오늘 하루종일 보여줬던 어른스러운 표정이 아닌 기대감에 찬 아이 같은 표정에 나도 모르게 승낙해버렸다.


 "아아, B씨 너무 좋아요."


 "하아...."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표정이 풀어져서 헤실헤실 웃는 A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레즈비언은 다 이래? 소개팅에 대충 입고 나와도 일단 사람 수준만 되면 레즈비언 희소성 때문에 OK인 거야?'


 지금 생각하면 더럽게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내가 그런 쪽에 대해 아는 건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C가 알고보니 동성애자였다.' 정도였으니...... 게다가 C한테 속아서 나오게 된 소개팅 자리가 불편했고, 성질 죽이고 있느라 대신 생각이 평소보다 더 막 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A씨, 취하신 거 같은데요....."


 "시킨 건 다 마시고 가요."


 "......그럼 남은 건 제가 마실게요."


 "아아, 이전 여친은 제가 너무 애 같대요....."


 묻지도 않은 전 여친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진짜 위험하다 싶어서 은근슬쩍 술병을 내쪽으로 가져왔다. A씨의 전여친 얘기를 들으며 빠르게 술을 비웠고, 다행히 A씨는 자기 얘기를 하느라 자신한테는 술을 안 따라주고 있다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갈까요?"


 "어? 다 마셨네요? 와, 술 쎄시다, 하나도 안 취하셨네."


 '취했으면서 내가 취했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는 건데.'


 실실 웃는 A씨를 데리고 술집에서 나왔는데 A씨의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A씨?"


 "네?"


 "지금 대각선으로 걷고 있어요."


 "아닌데요."


 "맞는데요. 도로와 동선이 이루는 각도가 15도 정돈데요."


 "아닌데....."


 "......"


 그냥 대화를 포기하고, 손을 잡고 A씨의 자취방까지 같이 갔다.


 "B씨....."


 "네?"


 "오늘 아침에 용 모양 구름을 봤어요."


 "네."


 "아, 그리고 저번에 친구랑 수업 가다가 여치를 봤는데요....."


 "깡패를 보셨네요."


 "친구가 방아깨비냐고 묻더라고요, 아하하."


 자취방까지 가는 동안에도 A씨는 이런저런 얘기를 즐겁게 얘기했다. 솔직히 귀엽긴한데 첫인상과 안 어울린다고, 건물로 들어가는 A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아까 전여친 얘기를 생각하면 소개팅 기대하면서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애쓴 것 같아서 어..... 뭐라고 해야하지...... 하찮아서 귀엽다? 재미있다? 이게 아닌데, 아, 나도 취하긴 했네 왜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르냐.


 '......사랑스럽다?'


 "왁!"


 순간적이지만 내가 한 생각에 내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A씨는 이미 들어갔고,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이건 진짜 아니야. 긴장감이 풀렸고, 술에 취했기 때문이야. 방금 건 머리 속에서 에러가 난 거라고 계속 되뇌며 걷다가 기숙사에 도착했다. 소개팅 끝나자마자 C한테 전화해서 욕할 거라고 했던 다짐을 까먹었다는 건 다음 날 아침에서야 깨달았다.


======


(지딴에는) 일코하느라 과묵했던 B한테 빠진 A와 코스프레 벗어던진 A에게 조금 끌린 B

를 쓰려고 했는데 내 뇌와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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