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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말 할 수 없다면 펜을 들어서

삼일월야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2.15 04:56:59
조회 803 추천 19 댓글 3
														

 사각사각하는, 샤프심이 종이에 깎여나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나와 아진이, 우리 둘은 서로 마주 앉아 있다. 마주 앉은 채로 우리는 서로 샤프를 들어 흑연을 종이에 깎아내린다. 


 사실 이건 오늘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둘이 모여 둘만의 공부를 이어나갔었으니까. 때로는 텅 빈 교실에서, 그도 아니라면 방과 후의 학교 도서관에서, 또 어떤 날에는 산 위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서. 그 내용은 국화를 꽂는 사람이 배에 숨긴 칼에서부터 이 우주의 넓이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사실 이런 것들은 학교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데도. 어딘가 무의미 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아진이의 곁에 함께한다. 단순히 지식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아진이의 곁에 있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시간,  함께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 그것들을 내 손으로 직접 취하기 위해 함께 한다. 추억이라고 부를까, 그것도 아니라면 강렬한 경험이라고 부를까. 어쩌면 둘 다 일 지도 모르는 그러한 것들을 내 안에 하루하루 쌓아가고 있다.


 오늘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내가 지금 함께하고 있다는 감각의 연장선상. 그러다 가끔 고개를 들어 볼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는 아진이의 얼굴. 변하지 않지만 언제라도 보고 싶은 그런 모습이 있다.   


“왜, 지루해?”


 내 시선을 느꼈을까, 아진이가 묻는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멈춘다. 귀에 들려오는 건 오직 좁은 방에서 내쉬는 둘의 옅은 숨소리. 너무도 작아 정적과 다를 것은 없었다. 


“잠깐 쉴까?”


 방 안에 소리의 색채를 채운 것은 아진이였다.


“조금 지친 것 같으니까…”

 그러면 뻗는 오른 손은, 희고 길게 뻗은 그 손가락은 펜을 쥐고 있는 책상 위에 올려진 내 왼손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도 그랬었던 것 처럼. 아진이는 가끔 이런 식으로 나와 접촉했다. 그 기다란 손가락을 툭 하고 내게 가져다 대는 것으로. 나와 맞닿는 그 순간,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온기. 그 온도의 차이 때문에 늘상 손 한 구석은 달아올랐다. 그리고 지금도 똑같이, 아진이의 손이 닿은 곳에 조금 열이 올랐다.


“간지러워.”


“장난이야, 장난.”

 

 그러면서 웃는 얼굴은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어서 가만히 바라보지를 못했다. 조금 들뜬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늘상 봐서 익숙한 연한 하늘빛 벽지, 언젠가는 어느 밴드의 포스터를 붙여놓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부 떼내어 치운 아무것도 없는 천장. 그렇게 조금 숨을 돌리고 돌아봤을 때, 아진이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금방 그렇게 고개나 돌리고.”


 그리고 어딘가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그러는 너는 금방 이렇게 장난이나 치고.”


“이런 거, 그래도 좋아하잖아.”


 엷게 웃음 짓는 그 얼굴은 확실히 내 마음 속에 있다. 지금까지 쌓인 경험들 중에서도 가장 각별한 형태로.


“...”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더라도 아진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아진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혼자만의 시작, 그리고 혼자 맺는 끝. 그리고 거기에 끌려다니는 나. 그것은 변하지 않는 채로 남아 나 또한 펜을 들고 책으로 눈을 옮겼다. 새로이 쌓아 올린 추억과 함께.


 방은 다시금 흑연이 표면을 스치는 소리로 감싸여, 우리의 숨소리조차 미약하게나마 느끼는 공간으로 변한다. 그런 정숙한 공간 안에서 정녕 사람은 극한으로 집중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집중력은 서서히 궤도에 올라 사람을 무아의 경지로 이끈다. 주변 상황이 어떻게 되었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에, 예컨대 지금의 나를 경우로 이야기하자면 지식을 쌓는 일에 몰두하게 만드는 그런 정신 상태. 하지만 펜을 든 나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하.”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장난이었을텐데 왜 오늘따라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숨이 되어, 어떻게 제대로 분출할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 그래? 힘들어?”


 한숨 소리를 듣고 아진이는 고개를 들어 또렷이 나를 바라본다. 분명 이유는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그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짐짓 모르는 척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런 얼굴.


“아냐,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데.”


“정말로, 그냥...문장이 조금 이해가 안 되서.”

“그렇구나.”


 그런 내 말을 듣고 아진이는 내가 읽던 책을 낚아채 가져간다.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어.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없어.’ 라니. 직설적으로 다가오는데?”

 같잖은 변명이란 이렇게도 쉽게 들통나는 걸까.


“그런데 나는 이해를 못 해.”


“거짓말.”

 아진이는 단언한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나는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까. 맞닿은 그 손에 달아오른 것이 있어 떨고 있을 뿐이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여태껏 쌓아올린 추억이, 너의 모습이 언뜻 비쳐서 무언가를 바라볼 수가 없다고. 나는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괜찮아, 말하기 괴로운 일이라면.”


 그런 괴로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대답을 원했으면서 아진이는 그런 말을 한다.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여 놓고는 순간에 구속의 끈을 놓아버린다. 고민이란 것이 무의미해지도록.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괜찮은거야.”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아진이의 모습은 여유롭게 웃는 그대로.


“그래도 말야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있어.”


 나를 두고 한 말일까.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 이미 들킬대로 들킨 마음이면서 드러내지 않는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일까.


“아니야, 너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고 있어.”


 늘상 짓는 그런 여유로운 미소, 상대의 마음 속을 알고 있어야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아진이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으니까. 아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저 내가 직접 입밖으로 내뱉기를 바라기 때문에. 숨기기에 급급한 내가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너는...너는 알고 있어. 내가 할 말 같은 건 이미 알고 있다고. 그래서 늘상 여유롭게 미소 지으면서...장난치고.”


“글쎄.”


 내 말에 답하는 아진이는, 그래도 웃고 있지만 어딘가 유쾌한 느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기대받아도 괴로운 걸.”


 그런 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우울함.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슬픈 감정. 


“그런 얼굴은 짓지 말아줘.”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감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원인은 전부 나한테 있으면서도, 이기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왜?”


“왜냐면 그야…”


 지금 당장에라도 말 할 수 있다. 입 밖으로 내뱉어 구체화할 수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속에서는 완성된 문장을 내보내려 하고 있지만 정작 내 몸은, 그런 말을 끝내 씹어 삼킬 뿐이었다. 쓴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아진이에게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시간은 무정히 흘러만 간다.


 그래도 표현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고,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도 남아 기어코 몸을 움직인다. 팔로 하여금 내려놓은 펜을 들어, 페이지의 구석으로 향하게 한다. 비어있는 공간에 하나씩 하나씩 선이 그려진다. 선은 하나의 문자가 되어, 그리고 그 문자들은 합을 이루어 단어가 되어.


‘좋아해.’

 

 아진이는 이제 확신할 수 있을까, 진정 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지금 아진이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 답일 지 모른다.


“...울고만 있으면 난 너의 마음을 몰라.”


“그래, 맞아...그렇지.”


 조금 흘린 눈물을 닦고는 아진이는 펜을 들었다. 눈물로 번진 노트의 위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적어내려간다. 지읗, 오, 히읗, 이응, 아, 히읗, 마지막으로 애. 그렇게 완성된 건 눈물로 번져버린 사랑의 속삭임. 


“이걸로 대답이 됐을까.”

“금방 따라하기나 하고.”


 그러면서 아진이는 천천히 희고 긴 손가락을 내게 뻗었다. 그에 맞춰 나도 아진이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나도 아진이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두 손이 마주했을 때, 우리의 얼굴이 가까이 마주했을 때 방을 가득 메운 것은 옅은 숨소리. 가까워 귀를 울리는 우리의 소리.   


_______________________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니

말을 하지 않으면 끝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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