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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불건전]낙화(落火)와 두 사람의 종말 - 4 -앱에서 작성

AGBM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2.26 0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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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가 잠에서 깬 것은 비행기가 이륙한 지 30분이 지나서였다. 눈앞에 보이는 낯선 사람들과 군인들. 무미건조하고 특색 없는 회색 동체. 무기질적인 뼈대 같은 내부 인테리어. 기분 나쁜 항공유 냄새. 그리고 은혜의 부재.

눈을 뜨자마자 민희는 벨트를 풀고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리려 난동을 피웠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은혜는 어디로 간 건지. 당장 든 생각은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것이었다. 진정시키러 달려온 병사가 검문소에서 짜증 나게 했던 헌병을 닮은 것 같아서 바로 얼굴을 때려버렸다. 소리 지르며 날뛰는 민희를 제지하기 위해 5명이 달려들었다. 팔다리를 붙잡히고도 민희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고함을 지르며 한동안 날뛰었다. 은혜를 부르는 그녀의 고함은 항공기의 소음 속에 묻혀 갈 곳을 잃고 떠돌 뿐이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약 기운과 힘을 쓴 반동으로 민희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울다가 지쳐 잠들어 버린 민희를 군인들은 벨트로 단단히 결박했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민희는 자면서도 은혜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갑작스러운 사태를 당혹스럽게 지켜보던 탑승자들도 민희가 진정됨에 따라 평정을 되찾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아까 군인들에게 업혀서 온 사람 같던데."

"필시 가족이나 친구를 난리 통에 잃었나 보구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한마디씩 툭툭 내던졌다. 비행기에 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대기권으로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파편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 비행기가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 때문에 조금 전까지 비행기 안은 기분 나쁜 엔진소리와 격한 기류가 만들어낸 진동만이 채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뭔가 말할 거리가 생긴 사람들은 불안을 환기하기 위해 영혼 없는 말을 하나씩 던지고 있었다.

또다시 비행기가 흔들렸다. 창문이 없는 수송기였기에 바깥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창밖으로 불타고 있는 대지와 공기를 보는 것보다야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은 것일지도 몰랐다. 착륙해서 벙커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꿈속에서 머무는 게 나았을 민희처럼.

다시 빠져든 흔들리는 꿈은 온통 붉은 세상이어서, 민희는 계속 은혜를 찾았다. 은혜가 없이는 무서운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

*

'베르무트는 한국 시각으로 오전 11시경 캄차카반도에서 1,000km 떨어진 베링해 해상에 충돌할 예정입니다. 과학자들은 공룡을 멸종시킨 충돌과 비슷한 여파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치직거리는 저음질의 라디오가 마지막 예언을 설파하고 있었다. 스마트 폰의 시계를 쓱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대략 3시간 정도. 덜컹거리는 자동차 서스펜션의 소음과 아까보다 부쩍 늘어난 굉음들이 은혜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이것으로 방송을 마칩니다. 모두 무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는 기계적이고 직업적인 느낌이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펑펑 울면서 절망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애초에 녹음된 방송일수도 있었다. 민희가 없으니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만 하게 되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은혜는 남은 보리차를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치지직거리는 잡음만 퍼뜨리고 있는 라디오의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모든 채널에서 잡음만 흘러나왔다. 정말로 조금 전 방송이 한국어로 퍼지는 마지막 전파였을까. 마지막 전파를 들은 인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혜는 그것도 나름대로 하나의 좋은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듣는 목소리는 네 목소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무심코 혼잣말이 나왔다. 은혜 자신도 놀라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수석에는 아무도 없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부드러운 입술 감촉과 입술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딱딱한 손가락 감촉이 머릿속으로 동시에 들어왔다. 다시 어지러움이 몰려와서 은혜는 차를 세웠다. 손가락과 입술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감촉이 서글펐다.

하나만 느낄 수 있었다면. 민희의 손가락을 입술로만 느낀다면. 민희의 입술을 손가락으로만 느꼈다면. 한 번에 하나씩 들어오니까 어지럽지 않았을 텐데. 동시에 들어온 두 가지 촉감이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가슴 속에 쑤셔 넣고 싶었지만, 보리차도 방금 다 마셔버렸다. 그저 들숨으로 눈물을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차 안의 공기가 폐 속으로 연거푸 들어와서 현기증이 심해졌다. 은혜는 차 문을 박차듯이 열고 나왔다. 삐었던 발목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차 밖의 공기는 매캐한 재 냄새와 싱그러운 쑥 향기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우측에 작은 등산로가 나 있어서 은혜는 절뚝거리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하이힐이 아니라 운동화여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운동화도 민희가 선물로 사 준 거였지. 가끔은 조깅도 하라면서. 기어코 거절하고 신발장에서 썩어가고 있었는데. 급하게 나오는 그 순간에도 민희는 앞으로 긴 여정이 될 수 있다며 편한 운동화를 신으라고 말해주었다.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은혜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민희와 연결되어 있었다.


"잊으려고 했는데…… 난 잊을 수가 없는 거구나."


민희에게 전해질 리가 없는 혼잣말을 흘려보냈다. 울창한 숲에 가로막혀 전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끓어오르는 눈물이 넘쳐서 말의 형태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검붉은 하늘 아래 광야에는 새의 지저귐도 라디오의 전파도 없어 빽빽한 숲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자박자박 불협화음을 내며 걷는 은혜의 발소리가 숲과 풀에 가로막히듯이 사그라들었다.


빽빽한 숲을 어느 정도 거닐었을까 광활한 공터가 나왔다. 매캐한 냄새보다 씁쓸한 쑥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공터로 나오자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정말 예쁘다. 그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민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붉은 실이 대여섯 개 정도 얽히고설키듯 뭉쳐진 꽃들의 무리가 공터를 뒤덮고 있었다. 탁한 색이 잔뜩 섞인 하늘과 달리 꽃밭의 석산(石蒜)들은 맑고 투명한 붉은 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발목을 삔 것도 잊고 무심코 달려가려던 은혜에게 브레이크를 걸듯 날카로운 통증이 솟아올랐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잠시 주저앉은 은혜는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살금살금 공터의 중심으로 향했다. 따끔따끔한 야생초의 감촉이 양말을 뚫고 발을 괴롭혔지만, 그 통증마저 기분 좋았다.


"민희야, 너도 이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


혜성이 지구를 휩쓸어 버리면 이 피안화의 밭도 사라질 테지. 어두컴컴할 벙커 속의 풍경보다는 훨씬 이쁜데.


"그래도 살아있다면 이보다 더 이쁜 풍경을 원 없이 볼 수 있을 거야. 난 고작 2시간밖에 못 보니까."


자신을 타이르듯이 되뇌는 목소리는 은혜 자신도 놀랄 만큼 잠겨있었다. 은혜는 독하게 마음먹었지만 그 독이 은혜의 마음과 심장을 천천히 좀먹어 갔다.


피안화의 한가운데에서 은혜는 그대로 대자로 드러누웠다. 양말과 바지가 가리지 못한 발목의 맨살을 풀이 간질거렸다. 기분 좋은 따끔함과 가려움이 느껴졌다.


'민희, 무사히 착륙했을까.'


민희는 원래 잠자리에 들면 잠꼬대를 슬프게 할 뿐, 잠 자체는 깊이 자는 타입이다. 아마 착륙해서 군인들이 깨워주기 전까진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다만 여전히 어수선한 하늘이 조금 불안할 따름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불덩어리에 맞지 않기를 은혜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야속하게도 그런 걱정에 기름을 붓듯 또 한 개의 불이 창공(蒼空), 아니 적공(赤空)을 가로질렀다.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차단된 시야의 양 끝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느님, 비록 제가 지금껏 신앙을 가지지 않았지만 제 목숨과 제 죄를 모두 바쳐 빕니다. 민희를 살려주세요. 민희의 벌까지 제가 받을 테니 민희를 무사히 지켜, 아니 살려주세요. 염치없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흙더미를 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감은 눈가에서 보석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떨리는 대지의 울림이 은혜에게 전해졌다.


그때, 은혜의 허벅지에서 떨림이 퍼져나갔다. 대지의 떨림이 아닌 명백한 인위적인 진동이었다. 놀란 은혜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푸른 빛으로 빛나는 액정에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의 애칭이 찍혀있었다.


잊어버리기로 한 결심이 무색하게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 겨우 현실감이 들었다.


"은혜야! 드디어 연결됐네! 야 이 나쁜 년 아!"


듣고 싶었던 목소리는 격앙에 차 있었다. 그래도 은혜는 기뻤다. 욕설로 가득 차 있어도 기뻤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도 두근거렸다. 통화 품질이 떨어져 섞여 들여오는 치직거리는 잡음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세계는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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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화 밭 너무 이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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