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꿈처럼 지나갔다. 미래는 불확실했지만 둘이 함께 한다면 힘든 것도 잘 극복할수 있을 거 같았다.

유신의 일은 점점 많아지고 근무시간은 불규칙했다. 밤 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다. 주중에 만나는 건 불가능했다. 주말이라고 해서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요일인데 유신은 자기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민이 커피를 내려 유신이 일하고 있는 작업대 위에 내려 놓았다. 

"일이 많아?"

"응. 오늘 밤까지 넘겨 달라고 해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야. 미안해. 주말인데 데이트도 못 하고."

"힘들진 않아?"

"지금처럼 재촉할 때는 힘든데 그래도 할 만해. 경력 더 쌓이면 여유가 생길 거야. 그 때까진 참아야지. "

수민이 박스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유신의 입에 넣어 줬다. 유신은 여전히 작업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입만 벌려 받아먹었다.

"스탕달 신드롬 들어 봤어? 걸작을 본 순간 심장이 마구 뛰고 온몸에 전율을 흐른다는 거야.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심지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대. 너무 굉장하지 않아? 나도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황홀감을 주는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

"네 사진엔 느낌이 있어. 넌 훌륭한 포토그래퍼가 될 거야."

유신의 사진을 보며 수민이 말했다.유신은 열심히 손을 움직여 편집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일해."

수민은 정신없이 일만 하는 유신을 뒤로 하고 방을 나갔다.

유신은 많은 대쉬를 받았다. 하지만 일과 연애를 철저히 분리하고 싶어 모두 거절했다. 수민과 교제 중이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거절할 때는 최대한 정중하게 했다. 혹시 앙심이라도 품으면 그 동안의 좋은 평판을 쌓기 위해 공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연말이라 송년 파티가 많았다. 실력 못지 않게 인맥이 중요한 곳이라 유신은 들어오는 파티 초대를 모두 승낙했다. 하나라도 빠뜨지지 않으려고 하루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한 파티에서 적당히 인사하고 다음 파티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추웠고 눈발이 흩날렸다.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하며 움직였다.

'이 근처인 거 같은데...' 

유신은 앱을 켜고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비교해 보았다.  

'저기 커피숍이 있으니까.... 그 다음 건물이네.' 

커피숍 다음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불편한 장면이 유신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신은 그 자리에 서서 커피숍 윈도우 너머 테이블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매장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문제의 그 인물 앞에 섰다. 

"일어나." 

수민을 보는 유신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수민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망신당하고 나올래? 조용히 나올래?" 

유신이 수민의 손을 잡았다. 수민은 무기력하게 일어서서 유신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근처에서 회식하다가 끝나고 커피 마셨고... 바쁜 사람들은 다 가고 둘만 남은 거야. 곧 일어나려고 했어." 

"다 봤어.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어디까지 간 거야? 잤니?"

수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잤구나."

수민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네가 배신할 줄이야...뭐라고 말좀 해 봐.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 

"심각한 거 아냐. 그냥 사고였어." 

"근데 단둘이 또 만나?" 

"동료인데 어떡해? 회사 그만 둘까?" 

"동료 핑계대고 계속 만날 거야?" 

"조금만 시간을 줘. 정리할게."

수민이 손을 잡으려고 하자 유신은 얼굴을 찡그리고 거칠게 밀어냈다.

"더러워. 너하곤 끝이야."

유신은 수민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겨 원래 가고자 했던 건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한쪽 구석으로 가서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 생각했다. 그 때, 회사 동료가 다가왔다. 

"어디 아파? 얼굴이 창백해." 

"피곤해서 그래. 요즘 계속 야근에 파티에... 잠을 거의 못 잤어." 

"적당히 해. 그러다 쓰러져."

"여기...좀 숨이 막혀. 바람좀 쐬고 올게." 

유신은 파티장 밖 화장실로 가 거울을 봤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서 눈을 감고 벽에 기대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온작가님 맞죠?" 

"...절 아세요?" 

"지난번에 사진 찍어 주셨잖아요."

"아...기억나요.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바로 기억 못했어요. 미안해요."

"그때 찍어주신 사진으로 광고 땄어요." 

"그래요? 축하해요." 

"고마우니까 제가 술 살게요." 

평상시라면 거절했을텐데 오늘은 달랐다. 유신은 술이라도 많이 마셔서 아까 있었던 일을 잊어 버리고 싶었다. 

"작가님도 이쪽이죠? 여긴 커밍아웃해도 문제없어요. 파워 있는 사람들 중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 

"불이익 당할까봐 얘기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알아 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 나가요. 여기 말고 진짜 재미있는 곳으로 가요. 오늘 플레저에서 매스커레이드 있는 거 알아요? 여기보다 백 배는 재밌을 거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얼굴을 가렸지만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큰 키의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들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유신은 캐주얼한 차림이었지만 동행한 모델은 패션화보라도 찍는 듯 화려했다.

"연예인인가?"

"누구지?"

여기 저기서 수근댄다. 동행한 모델이 들뜬 목소리로 유신에게 말했다.

"재밌죠? 당신하고 같이 있으니 시선이 더 집중되네요. 기분 너무 좋아요."

"시선 받는 게 그렇게 좋아요?"

"시선을 받는 게 좋지 않으면 모델하지 말아야죠. 받아도 받아도 더 받고 싶은 게 시선이에요. '언니 예뻐요. 누나 멋져요.' 이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또 듣고 싶어요. 내가 왜 당신 사진을 좋아하는 줄 알아요? 제가 제 모습에 반하게 만들어요. 누가 찍은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주문한 술이 나왔다. 유신이 술을 따라 연거푸 마시고 있다.

"왜 그렇게 급하게 마셔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냥 빨리 마시고 취하고 싶어서요."

"애인 있어요?"

"네... "

"있으시구나...혹시나 했는데."

"전 술 마시러 온 거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가셔도 돼요."

"저쪽에 취향이 있긴 한데..."

"저 신경쓰지 말고 가세요."

모델을 보내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가면을 쓴 사람이 맞은 편에 앉았다.

"이런 날 왜 혼자 술 마셔요?"

"가면 벗어 볼래요?"

"그럼 매스커레이드가 아닌데요?"

"매스커레이드 같은 건 관심없고, 당신 진짜 얼굴이 보고 싶은데."

"그쪽이 먼저 벗으면."

유신이 가면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자 상대도 따라 벗었다.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며 유신이 물었다.

"마음에 들어?"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그럼 나갈까?"

==========================================================================

링크모음

https://gall.dcinside.com/m/lilyfever/691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