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유신에게서 레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들은 이후 수민은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유신의 옆자리는 수민의 것이었다.

그동안 유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수민이 차단하기도 했지만 유신 스스로도 폐쇄적이었다.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도 않았다.

수민도 수년을 유신에게 공을 들이다가 포기하고 떠나려고 하던 찰나, 유신이 겨우 마음을 열고 고백한 것이다. 이렇게 겨우 차지한 유신인데, 결혼한다고 잠시 틈을 보였을 때 레이가 치고 들어 온 게 너무나 괘씸했다.

수민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유신이한테 직접 들으세요."

"이미 들었어요. 레이씨한테서도 듣고 싶어서요."

"그 때 이후에요. 수민씨 결혼한 날."

"그 전부터 좋아했죠?"

"네. 그래서 수민씨한테 고마워요."

"뭐가요?"

"어리석은 짓해서 유신이 놓친 거. 유신이가 당신 떠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스틸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레이의 선제공격에 수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기와 딴판이네요. 얌전해 보이더니."

"보이는 걸로 사람을 판단하다니 역시 어리석군요."

레이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시면서 말했다.

수민도 이미 유신의 마음이 돌아선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의 마음을 흔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수민이 잘 쓰는 수법 중 하나가 현실왜곡이었다. 현실을 왜곡하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신에게는 아주 효과가 좋았다.

"유신인 아직 날 사랑해요. 결혼하고 나서도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어요. 레이씨만 빠져주면 돼요."

수민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레이에게 보라고 건네 줬다. 먼저 보여준 건 그동안 유신과 수민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어서 결혼식 이후 유신이 수민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여 줬다.

레이는 그걸 찬찬히 다 읽어 보고 고개를 들었다. 한숨을 쉬더니 수민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죠?"

" 이만 퇴장해 달라는 말이에요."

" 훗. 나보다 어리니까 말 놓을게. 네가 유신이를 순순히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거 이미 예상했어. 그동안 유신이에게 한 짓만 봐도 네 수준 나오니까."

"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 네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유신이는 죽을 만큼 힘들었어. 넌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르는 척했고. 넌 결혼하면서 유신이한테는 애인으로 남아달라고 했다면서? 치욕스러웠지만 널 사랑해서 거절 못했다더라."

"유신이에게 다시 돌아갈 거니까 방해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아니.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말 유신이한테서 직접 들었어. 그리고 유신이가 애원하며 보냈다는 그 문자들... 나하고 사귀기 이전에 보낸 거잖아. 모를 줄 알았니?"

"이제 시작한 주제에 건방지네. 며칠이나 됐다고."

수민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 말을 믿을까? 밤새 날 사랑한다고 하고 아침에도 확인시켜준 유신이 말을 믿을까? 애인두고 바람피우다 결혼까지 한 파렴치한 사람의 말을 믿을까? 지금 유신이 불러서 삼자대면하는 건 어때? 유신이가 널 원하면 내가 깨끗이 포기하지."

수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레이가 말을 이었다.

"유신이도 참 눈이 낮지. 어쩌다가 너같은 애한테 10년을...너같은 부류를 잘 알아. 사랑하는 척하며 고통만 주지. 조종하고 지배하는 게 재밌는 거잖아. 유신이를 네 악세사리처럼 가지고 노는 게 재밌었니? 그 가면을 10년이나 쓴 거야? 유신이가 불쌍해. 걘 너와 사랑했다고 믿고 있던데...더 보여 줄 거 있니?"

수민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레이가 일어나 나가면서 말했다.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그 사람만 사랑하는 게 너한텐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자만하지 마.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 같지? 네가 유신이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자만해? 넌 아무 것도 몰라."

레이가 가고 난 후 수민은 그 자리에 앉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레이를 흔들어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유신 역시 애인할 생각 없다고 이미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짜 끝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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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은 2층 테이블에 앉아 1층을 내려다 보며 레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앨리와 주영은 이미 작업하러 나가고 유신 혼자 있다. 그러던 중 레이가 바 안으로 들어와 일하는 걸 보고 조르르 달려 내려가 레이 앞 빈 자리에 앉았다.

"레이, 어디 갔다 온 거야? 언제 오나 계속 기다렸어."

레이가 유신을 보며 웃는다.

"배 고프구나? 금방 만들어줄게."

레이가 만들어 준 밥을 유신은 또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더니 숟가락을 놓는다.

"넌 내가 밥 줘서 좋아하는 거니?"

" 큭큭. 내가 개야? 왔는데 레이가 없어서 쓸쓸했어.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는 사람이 와서 잠깐 얘기하고 온 거야."

"누군데?"

"그냥...있어."

"설마 벌써 다른 사람 숨겨 놓고 만나는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혼자 놀고 있어. 바쁘니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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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은 바 쪽이 잘 보이는 플레저 2층에 자리잡고 앉았다. 레이는 일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유신이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 사이에도 작업은 들어왔다. 플레저는 혼자 온 뉴비를 가만두는 곳이 아니었고 수민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정석 미인이었다.

"저기... 혼자 온..."

"스트레이트예요."

주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민이 칼같이 잘라 말했다.

"방금 전까지 저도 그랬는데 당신을 보고 나니 바뀌네요."

"흣.깜찍하네."

수민이 주영의 작업에 피식 웃었다.

"그럼 앉아도 되나요?"

"아뇨."

"그럼 전화번호라도?

"귀찮으니까 적당히 하고 가요."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또 봐요 그럼~."

주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물러났다.

유신이 보던 핸드폰을 내려 놓고 레이를 보고 있다. 레이는 일하면서 틈틈이 유신과 눈을 맞추고 웃는다. 유신이 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한다. 레이가 몸을 기울이자 유신이 레이의 입술에 살짝 키스한다.

이후에도 유신의 시선은 온통 레이에게 향해 있다. 사랑에 빠진 게 확실했다.

유신은 수민에게도 저랬었다. 눈만 마주쳐도 키스했고 반짝이며 웃어 주었다. 그리고 질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주인을 보고 꼬리는 흔드는 강아지처럼 한 사람에게 꽂히면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쳐다 볼 줄 몰랐다. 그래서 영원히 옆에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민과의 관계는 이제 시들어 버렸다. 유신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람에게만 반짝거리는 웃음을 보여 주고, 그 사람만 바라 보고 있다.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그 사람만 사랑하는 게 너한텐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아까 레이가 수민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유신의 고통을 외면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벽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유신은 수민에게 속엣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소외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외로웠다.

이제 그만 놓아달라는 유신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화풀이하듯 원나잇하던 때하고는 달랐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게 분명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건가...'

수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와서 1층만 보다가 그냥 가네. 또 올까?"

주영이 앨리에게 말했다.

"누가?"

"저기 지금 나가고 있잖아. 엄청 예뻐. 완전 내 타입이야. 근데 너무 차가워."

주영이 턱으로 나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자 앨리가 보더니 표정이 변했다.

"꿈 깨. 유신이 전여친이야. 친구 건 건드리는 거 아냐."

"네가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유신이랑 둘이 같이 왔었어. 그 때 넌 못 봤어?"

"난 처음 보는데?"

"쟤 맞아. 심하게 예쁘긴 해. 결혼하고도 당당하게 애인으로 남아 달라고 한 걸 보면 얼굴값 제대로 한 거야. 완전 재수없어."

"유신이 까고 결혼했다는 그 사람?"

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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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이 퇴장한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님

얘기는 많이 남았으니 아무쪼록 계속 지켜봐 주기 바라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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