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 흉내 / 엄마함락일기

alstl · 2021.01.12 14:08:42

*여자끼리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세계관

연화는 어깨를 살짝 넘는 갈색 머리에 눈망울이 예뻤다.

서로 소꿉친구였을 때는 별거에도 다 울던 울보였고 그 주제에 나를 지키겠다고도 했다.

초등학교때는 늘 서로의 집에 놀러 가 부부놀이를 하고 손을 잡으며 잤다.

중학교 때는 멀리 떨어져 살았던 적도 있는데 어느 날 열차를 혼자 타고 밤늦게 나를 찾아와 나를 놀랬켰던 적도 있다.

본인 말로는 보고 싶었다고 벌인 짓인데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많이 무모한 짓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기억할 필요도 없는 갈등을 겪고 난 후 연화가 나에게 먼저 고백했다.

결혼식 날에는 엄청나게 울면서 나를 또 당황하게 하고 아이를 가진 날에는 나에게 연신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연화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모든게 내 탓이었다. 연화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 생각할 때 말리지 않은 내 잘못이었고 연화의 몸이 약해졌을 때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방에서 며칠 정도 미친것처럼 술만 마셨다. 차라리 미쳐서 죽은 연화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 며칠 정도 미친 후에 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딸을 데려오고 나서 난 연화의 죽음을 아이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도 다행히 속으로는 딸에게 책임을 지워도 겉으로는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내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딸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엄마를 연기해야만 했다.

딸에 대한 원망이 생길까 두려워 나는 강박적으로 좋은 엄마를 연기했다.

억지로 힘을 낼 때마다 힘겨웠다. 그럴 때마다 연화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갔다.

연화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연화의 위로를 받고 싶다. 연화의 갈색 머리와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미소가 그립다.

연화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악마가 내 소원을 들은 것일까

연주가...소름끼칠정도로 연화와 닮은 내 딸이

죽은 아내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오늘의 일기

<2017년 6월 7일>

요즘 엄마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이상해진다. 이유는 모르겠다. 일기라도 써야지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한번 써본다.

<2017년 6월 8일>

친구랑 얘기해봤는데 이거 짝사랑 아니냐고 한다. 짝사랑? 엄마를 내가 짝사랑하나?

<2017년 6월 12일>

내일은 엄마랑 데이트 하는 날!

<2017년 6월 13일>

또다. 엄마 오늘도 또 운다. CCTV로 살펴보니 죽은 연화 엄마 사진 보고 또 울고 있다. 언제까지 울기만 할 거야?

오늘 백화점 다녀오면서 나랑 함께해서 행복하다며? 행복한 날이라며? 엄마는 언제까지 나 속이기만 할 거야?

<2017년 8월 2일>

오늘 나는 엄마한테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엄마도 그냥 사랑한다고 했지만 내가 연인이 되고 싶다고 하자 정색하며 안된다고 했다.

내가 그래도 사랑한다고 매달리자 내 뺨을 때리고는 울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CCTV로 보니 지금 엄마는 연화 엄마 사진 앞에서 울고 있다. 우리 딸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엄마 다 들려

연화 엄마가 대체 뭐길래 그래?

<2017년 8월 5일>

보물상자 발견! 연화 엄마 사진이랑 동영상 그리고 연화 엄마 일기가 모여있는 상자를 창고 구석에서 발견했다.

일기는 하루도 빠짐 없이 작성되어있었다.

연화 엄마는 갈색 머리네? 머리도 조금 짧고

내일 미용실 다녀와야지~

<2017년 8월 6일>

엄마가 내 모습 보고 몸을 떨었다 ㅋㅋㅋㅋㅋㅋㅋ

<2017년 8월 7일>

오늘부터 연화 엄마 연습을 시작한다

상자 안에 있는 연화 엄마는 목소리가 나보다 살짝 높았기에 목소리 높이는 연습부터 했다.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연기에 꽤나 소질이 있나보다.

7시간쯤 하자 목이 쉬기는 했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발성 연습이 끝나고 연화 엄마 중학교 영상이나 봐야지

엄마는 충격이 컸는지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한다

<2017년 8월 8일>

엄마가 방안에서 나오지 않길래 CCTV로 보니 연화 엄마 사진을 멍하니 보고있다. 그래도 내가 방 앞에 가져다준 음식은 잘 먹나보다. 방 안에 화장실도 있으니 밥만 잘 갔다주면 되겠지.

오늘은 연화 엄마가 열차를 혼자 타고 엄마를 만나러 간 심정을 반복해서 읽었다

조금만 기다려 혜영아 내가 너를 만나러 갈게

<2017년 8월 20일>

다 됐다. 이제 거울을 봐도 무조건 연화다

혜영이가 연화를 사랑하면 내가 연화가 되면 되는 거다.

거울을 보고 나는 서연화다를 10번 말한다

혜영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엄마가 될게요

<2017년 9월 18일>

[오늘 한일]

-내 고등학교 시절 일기 정주행

-내가 자주 입던 옷 사오기

-내 발성 따라 하기 <-- 이제 자연스러움

-거울 앞에서 "나는 서연화다" 20번 말하기

<2017년 10월 3일>

오늘은 혜영이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다

굳게 닫힌 문을 열면 그리운 너가 홀로 있겠지

혜영아 미안해 너를 혼자 그렇게 둬서

내가 없는동안 네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겠지

하지만 이제는 완벽히 연화의 입장으로서 너를 안아줄 수 있어

사랑하는 나의 혜영아

이제 문 열어도 될까?

<2021년 1월 12일>

이제 이 일기도 오랜만에 쓰네요.

이 일기는 학창시절 연주가 쓴거랍니다.

그 날 혜영이는 제 모습을 보자마자 저에게 달려들어 제 목을 졸랐습니다.

하지만 혜영이의 본심이 아니었는걸요 제가 죽은 연화의 목소리로 달래주자 혜영이는 금세 풀어져 저에게 안겨 울었습니다.

저에게 연신 못 지켜줘서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죽은 연화가 평소 그랬듯이 말없이 쓰다듬어줬지요

그리고 혜영이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후 혜영이는 눈에 띄게 밝아졌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활발한 혜영이가 되었지요.

물론 지금의 저는 완벽한 연화지만 그때는 부족한게 많았어요 연주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는것은 쉽지 않았죠

다행히 혜영이가 죽은 연화가 어땠는지를 잘 알려줬기에 극복할 수 있었어요.

힘들기도 했지만 취업을 하고 지금은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어요. 지금 혜영이는 제 옆에 귀엽게 잠들었답니다.

그런데 이 일기를 보고 궁금증이 생겼어요.

저는 혜영이의 방문을 열때 연주로서 연화를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일기를 읽으니 그 시점에서는 이미 저는 연화였어요.

연화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관계를 만든것은 연주일까요 아니면 연화일까요.

어쨌든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의 우리는 다시 행복한

그 시절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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