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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욕망]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도다

Ly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2.20 09:38:16
조회 661 추천 17 댓글 9
														

Side-A 그저 사랑하고 싶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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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B


  “너희들, 그만 달라붙어. 언니 힘들잖아.”


  친했던 동생이 있었다. 내 곁을 맴돌며, 신경을 써 주던 아이가.


  “괜찮아. 자애를 나누는 것도 신께서 명하신 의무거든.”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왜 웃지 못하는지 몰랐다.


  “오늘도 우리에게 자애를 베푸는 신께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같이 기도하던 아이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안 돼요! 병사들도 있잖아요! 언니는 가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여러 나라가 악마에게 멸망되었을 때, 너는 나를 말렸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나를 말렸다. 그건 분명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를? 자기를 부정하던 신? 왕국을 무너트리던 악마? 이제 와선 알 수 없었다.


  “용사가, 용사가 나타났대요!”


  급하게 달려와 소식을 알린 너였지만, 미소 짓던 너였지만, 눈은 웃지 않았으니까. 안심과 뒤섞인 다른 무엇이 있었으니까.


  “아뇨, 속이 조금…….”

  용사의 승전을, 인간의 승리를 기뻐하던 축제에서, 너는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용사가 사라졌을 때도 마냥 슬퍼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술기운에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울었는데도.


  “용사, 가 돌아왔대요, 그런데…”


  용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몸을 떨고. 용사가 악마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손을 부여잡던 너는…


  아니었을 거라, 믿고 싶었다.


  “너는 이쪽으로 오는 게 낫지 않겠니?”


  그게, 나를 지키려 한 행동이라 믿고 싶었다. 악마의 시선에서 날 가린 게, 약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를 좋아하기에 한 행동이라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우린 결국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너는 마을에서 사라져버렸으니까.


  벌써 몇 년,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악마들과 싸우고, 아니 발버둥 치고 있다. 우리는 신의 이름 아래, 별 볼 일 없는 창에 매달려, 저 모독적인 악마들에게서 발버둥 친다. 언젠가, 새로운 용사가 내려올 것이라 믿으며 달려든다.


  가망 없는 전장, 언제부터인가 빛나지 않던 성표는 그저 손 등의 흉터에 지나지 않았다. 동료들은 죽고 납치되었다. 부대는 모두 흩어져, 단지 십수 명에 불과했다. 이젠 무너트릴 성조차 남지 않아, 악마도 겨우 한둘 씩 다닌다는 게 다행일까.


  “마지막이다! 돌격!”


  용사가 오기까지, 악마의 한 걸음을 물리치고, 한 모금 숨을 쉬기 위해 가망 없는 전쟁을 이어간다. 녹슨 창끝이 질긴 피부를 뚫지 못하고 부러진다. 썩은 장대가 후려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꺾인다.


  철저한 무시, 그들은 항상 가판대의 싸구려 장신구처럼 바라본다. 애초에 눈치챘다는 듯, 기습에도 놀라지 않고, 쓱 훑어 또 한 사람을 납치해간다. 이것도, 시간을 끌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빛을 잃은 눈으로 주저앉아 다들 찢어진 손아귀만 쥐었다 펼 뿐이다.


  “신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실까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체도, 까마귀도 없이 파릇한 풀로 뒤덮인 화사한 전장. 아름다운 지저귐이 비참한 이 대지에서, 우리는 손등의 흉터를 매만졌다.


  “찾았다!”


  까마귀 대신, 작은 악마가 내려앉았다. 부러진 창 대신, 주먹을 휘둘러보아도, 허무하게 막혔다. 칼도 들어가지 않는 이들에게, 나약한 살덩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나빴어!”


  장난처럼 튕긴 손가락에 맞은 이마가, 휘청 넘어갔다.


  “괜찮아, 이모는 내가 금방 착하게 해 줄게.”


  “헛소리!”


  잡힌 팔을 휘둘러도, 떨쳐낼 수 없었다. 악마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걱정 마. 엄마 선물이니까 상처는 안 낼 거야.”


  이모, 엄마, 그 아이처럼 짙은 갈색 머리. 너는 결국 인간을 등졌던 걸까. 악마와 함께 춤을 추고, 악마의 아이를 낳아버린 걸까.


  “난… 굴복하지 않을 거다!”


  한구석에 몰아넣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손도, 발도, 휘두르는 대로 검은 덩어리에 묶여버렸다. 팔려가는 닭처럼, 우스운 꼴이 되었다.


  “신이시여, 다만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읍!”


  “이모, 어차피 신은 끝났어. 이것도 이젠 그냥 흉터일 텐데.”


  핏방울 맺힌 수정 같은 눈이, 성표를 바라보았다. 몸을 묶은 것과 같은, 검은 덩어리가 재갈처럼 채워져, 더 발버둥 칠 것이 남지 않았다. 몸을 아무리 뒤틀어도 검은 덩어리는 단단했다.


  “그럼 다들 안녕. 나는 이모 찾았으니까 가볼게.”


  우습게도, 정말 반가웠다는 듯 작은 악마는 손을 흔들었다. 다른 이들은 내가 잡혀가는 것으로 안심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얼이 빠진 건지 모를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너무 몸부림치면 안 돼? 나 별로 힘 안 세니까?”


  정말로 걱정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천진한 눈. 이제는 볼 수 없던, 마을의 아이들 같은 눈. 악마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티끌 한 점 없는 표정을 흉내 낸다는 건, 역시 그 아이가 가르쳤으리라.


  작은 악마가 날개를 한번 퍼덕일 때마다, 동료들이 한참 멀어졌다. 거센 바람에 몸이 마구 휘둘렸다. 발버둥을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었다. 악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번도 들은 적 없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음률이었다.


  한참을 날던 악마가 우뚝 멈춰 내려갔다. 나를 데려온 곳은, 깔끔하게 정리된 동굴이었다.


  “짠, 여기가 한동안 이모가 지낼 곳.”


  아이들의 비밀기지처럼, 너저분한 잡동사니, 어설프게 엮은 의자와 탁자가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천장의 수정에서 은은한 빛이 나왔다는 것뿐.


  “으음, 뭐 엄마 생일까진 몇 달 남았으니까 괜찮으려나.”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목은 벽에 달린 사슬에 매여버렸다.


  “밥은 제때 갖다 줄 거니까 걱정 말고. 일단 좀 쉬고 있어.”


  작은 악마도 빛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건지. 전부, 악마에 붙은 배신자들 탓이었다. 용사도, 그 년도, 그리고 홀려버린 다른 년들도.


  쇠사슬을 아무리 당겨봐도, 벽에 박힌 말뚝이 뽑히지 않았다. 너무 지쳤을까, 아니면 애초부터 강한 적이 없었을까. 돌이켜보면, 공격이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명 한명, 스러지고, 잡히고, 죽어가면서 단지, 깎여나갔을 뿐. 그동안 했던 대로라면, 악마에게 아양을 떨며 시간을 끌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어버려야 하는 걸까.


  혀를 지그시 씹어본다. 질기다. 끊어버리려면, 단숨에 물어야겠지. 숨을 크게 몰아쉰다. 콱, 그렇지만 혀는 끊어지지 않는다. 피 흐르는 상처가 괴롭다. 피를 뱉어낸다. 숨이 막힌다. 동굴을 채우는 쇳내가 어지럽다. 다시 한 번. 끊어지지 않는다. 턱에 힘이 빠져서일까. 시야가 흐려진다.


  “일어났어?”


  흐린 눈앞에 그 년이 보인다. 죽은 나를 따라와 더 모욕하려는 걸까.


  “퉤!”


  혀가 욱신거리며, 붉은 침이 튀어나간다.


  “이러면 곤란한데.”


  토라진 것처럼 뺨이 부푼다. 시야가 점점 뚜렷해진다. 그 년이 아니라, 작은 악마였다. 그렇게나 닮았을까. 어차피 다를 것도 없을까. 죽지도 못해, 악마에게 몸이 더럽혀질 거란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다시, 검은 재갈이 물렸다. 손과 발도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걸까. 잡동사니와 보잘것없던 가구도 모두 치워져 있었다.


  “일단, 고민 좀 해볼 테니까, 머리 좀 식혀.”


  아무 소리 없이 수정이 어두워진다. 사슬 소리와 고독이 동굴을 채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비릿한 맛이 나는 혀를 완전히 끊어놓을 수도, 가슴에 뭔가를 찔러넣을 수도 없었다. 차륵, 차륵. 작은 악마는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들리는 숨소리는 하나, 그렇지만 나간 소리도 없다.


  목에 걸린 사슬에 체중을 실어보아도, 너무 긴 사슬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버린다.


  “뭐해?”


  번쩍이는 붉은 빛. 아마도, 지금은 뭔가 더 하긴 무리인 모양이었다. 소리가 들리던 방향은 아마 입구, 사슬을 뽑아낸다 하여도 도망칠 수 없게 막고 있으리라. 가능한 건 조금이나마 깊게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묶인 몸으로 벌레처럼 몸부림쳐서라도, 동굴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 게, 그나마 위안을 얻는 방법이었다.


  “갈게. 이따 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돌풍이 일고, 고요가 찾아왔다. 안광조차 빛나지 않는 완전한 어둠. 시간을 알 리도 없이 나는 잠이 들었다.


  “나 왔어, 이모.”


  악마인 주제에, 기이하게 맑은 목소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루 종일, 아니 얼마나 벌려져 있었는지 모를 턱이 뻐근했다.


  “이모는 우리가 싫어? 왜?”


  손이 입가를 스치고, 재갈이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핏방울 두 개가 허공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으로.


  “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알고 있다. 얘기를 해선 안 된다. 하면 할수록, 악마의 논리에 휩싸여 타락하리라. 그렇지만, 모르는 척 하는 저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보통은 다들 행복해하는걸?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행복? 무엇이 행복이란 말인가.


  “악마 따위에게 홀려 짓게 된 표정을 보고 행복이라고? 그렇다면, 다들 썩은 보리라도 집어 먹고 죽어버리면 평화롭겠네.”


  “흐응흐응.”


  붉은빛이 사라졌다. 고개라도 끄덕이는지 머리칼이 흔들리는 소리.


  “좋아, 알겠다. 이모가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무슨 헛ㅅ……흑!”


  목에 뜨겁고 축축한 무엇이 닿았다. 무언가 빨려 나가는 느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단지 목덜미를 빨아내는 게 아닌, 보다 근본적인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 척추를 타고 오르는 전율. 온몸의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어때?”


  “잘, 알겠네. 썩은 보리나 다름없구나.”


  몸이 저릿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조그마한 악마보다 못한, 꿈틀거리는 벌레로 보일지라도 나는 멈출 순 없었다.


  “뭐, 됐어. 이모도 천천히 알아주겠지.”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작은 악마의 손엔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탁, 손쉽게 열린 상자 안엔 먹음직스러운 색깔의 빵과 식은 고깃덩이가 하나 들어있었다.


  “먹어. 인간은 이런 거 먹어야 살잖아.”


  신을 모욕하는 저들이, 대지의 은총을 받았을 리가 없다. 어딘가에서 약탈한 거겠지.


  “노려보지만 말고. 좀 먹어.”


  한숨을 쉬며 빵을 입에 꽂아넣는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부드럽고 달콤한 빵. 얼마 안 되는 침만으로 사르르 녹아내려, 목 너머로 사라졌다.


  “맛있나 보네.”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리 부족하게 먹은 지 오래라 하지만, 정신도 못 차리고 먹어버리다니. 그것도 악마의 손길로 건네진 것을 넙죽넙죽 말이다.


  “그럼 마저 먹고. 몸이나 좀 보자.”


  “…풀어줘.”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다.


  “싫어.”


  딱 잘라 말하고는, 고기마저 손수 잘라, 한 점씩 입에 넣어주었다. 수치스럽다. 어째서 죽지 못했는지.


  “그럼”


  딱, 하고 손가락 퉁기는 소리와 함께 검은 덩어리가 온몸을 감쌌다. 그렇지만 발버둥 치려 한 것도 허무하게, 검은 덩어리는 해진 가죽 갑옷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와, 심하네.”


  그럴 만도 했다. 억지로 붙인 근육 위는 온몸이 흉터투성이였으니까. 우스운 건, 그 흉터 중 단 하나도, 악마가 만든 상처가 아니라는 거였다. 훈련으로, 악마에게 달려가다 제풀에 쓰러져서, 서로 엉켜서.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전사의 흉터처럼 자랑스러운 게 아닌, 수치의 훈장에 불과했다.


  “모자라려나.”


  가늘게 뜨인 눈. 그 눈엔 특정한 욕망도 없이, 그저 몸을 살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게 더욱 수치스러웠다.


  “큰 엄마 몰래 가져온 거라 들키면 혼나는데.”


  투덜거리며, 악마는 작은 파우치를 꺼냈다. 그 안엔 끈적하게 흐르는 갈색 고약이 있었다. 손짓 한번에, 내 사지는 벌려져 고정되었다. 온몸을 가릴 수도 없이 드러나는 수치도 잠깐, 진득한 액체가 피부에 닿는 게 소름 끼쳤다.


  “이모가 이렇게 흉 진 거 보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런 배신자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 금방 나아지겠지만.”


  가는 손끝이, 맨피부에 닿아, 엷게 펴 발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 몸을 꿈틀거리며 발버둥 쳐도 작은 악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대담하게, 무감정하게 배를 지나 가슴, 목, 손끝, 다시 돌아와 가랑이 사이부터 발끝까지. 날갯죽지부터 엉덩이 사이까지도, 빈틈 없이 사무적으로 발라주었을 뿐이다. 그 손짓 하나하나에 움칫하는 내 몸이 도리어 원망스러웠다.


  “다행히 모자라진 않네. 이모가 거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작은 악마는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체를 몰랐다면, 정말로 아이인 줄 알았으리라.


  “닦이면 안 되니까, 일단 그대로 있어. 귀한 거라 나도 막 못 훔쳐오니까. 그럼 내일 봐?”


  또다시, 악마가 사라지고 침묵으로 가득 차는 동굴. 허공에 팔다리를 뻗고 매달린 탓에 관절이 아팠다. 덕분에 잠도 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어둠 속을 지새워야 했다. 도대체 얼마나 지났는지, 악마들을 막아 내고는 있을지, 암담했다.


  신께서, 이 고난을 지켜보고 계신 건지도.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도 그 증표가 빛나지 않는 지도. 의문은,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묻었다. 어째서 단 한 명의 용사가, 그마저도 타락하였는가. 신의 영광과 자애는 전능하실 텐데. 그렇다면 왜 그런 용사를 내리셨는가. 아니, 하다못해 더 많은 용사를 내리지는 않으시는가.


  갑작스레 왼 어깨가 뜨거웠다. 불타는 듯한, 물컹한 무언가. 다음에 찾아온 것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 강렬한 느낌. 입만을 벌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입술에 떨어지는 세 방울. 말라버린 몸에 뿌려지는 생명수에 허겁지겁 입술을 핥았다. 붉은 불길이 어둠 속을 스쳤다.


  어둠 속에서, 반복됐다. 목을, 어깨를, 다리를, 손가락을, 발끝을, 배꼽을. 수도 없이 빨려 나가고, 단 세 방울이 주어졌다. 어지러웠다. 죽을 것처럼 빨려 나가는 저것이, 차 오르기는 하는 걸까. 고통 뒤에 찾아오는, 그 황홀함과 세 방울은 신께서 시련에 대해 내리시는 보상인 걸까. 어둡다. 어둡다.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기도가 닿지 않는다. 그저 빼앗긴다.


  신이시여, 부디 세계를 구하소서. 신이시여, 부디 인간을 구하소서. 신이시여, 부디 우리를 구하소서. 신이시어, 부디 저를 구하소서. 부디, 저를. 부디…….


  나를 찾았느냐. 기도가 이뤄졌다. 눈앞에 어둠 속에도 빛나는 신이 계셨다. 아름다운 몸을 갖추신 빛나는 신이. 신님은, 그분은… 그는…… 내 위로 몸을 겹쳤다. 등을 훑는 것으로 시작된 손끝이 점차 대담해졌다. 가슴을 스치고, 배를 타고 내려가, 가장 소중한 곳에도. 몸부림을 쳐봐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내 버둥거림에 얼굴을 찌푸리고, 도리어 예민한 곳을 고통스럽게 꼬집었다. 고통스런 신음이라도 내뱉으려 하면 입에 손을 찔러 넣어 틀어막았다.


  어둠 속에서, 오직 그만이 빛나는 시간이 흘렀다. 눈물이 마르고, 매달린 손목과 발목이 몸부림으로 쓰라릴 때가 되어서야. 그 형상은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흐느꼈다. 이젠, 입술의 세 방울만이 지탱해주는 모든 것이었다. 분명 신도 나를, 우리를, 세계를 버렸으리라. 그건, 신이 아니라, 도리어 악마라고 해야겠지. 기도를 듣기만 할 뿐, 우리를 좋을 대로 흔드는 자라면. 차라리 이 세 방울을 건네는 이가 천사이리라.


  동굴에, 부드러운 빛이 비쳤다. 작은 천사가 내 손발을 풀어, 땅에 내려놓았다. 손등에 박힌 흉터는, 매끈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래, 애초에 그건, 성스러운 표식이 아닌 하잘것없는 가축에게 찍는 낙인에 불과했으리라.


  “이제 몸도 깨끗해졌네, 머리카락만 정리하면 되겠다.”


  천사님은 다리에 내 머리를 뉘었다. 가는 손가락이, 머리를 빗었다. 거칠게 꼬이던 머리카락이 올곧게 정리되었다. 감사를 표하자 어린 천사님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리고 좀 씻자. 예뻐졌어도, 냄새나.”


  천사님께 안겨 하늘을 날았다. 어두운 동굴에서만 있던 탓에 눈이 시렸다. 들어올 땐, 아직 푸른 잎사귀가 남아있었을 텐데, 피부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풍덩, 차가운 강물이 몸을 뒤덮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문질러 씻었다.


  고요하게 흐르는 물. 나는 왜 그 아이를 미워했더라. 미움받아야 할 건 우리일 텐데. 해방의 천사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아이를 핍박한 우리가 문제일 텐데. 눈물이 주룩 새었다. 강물에 얼굴을 담가 얼굴을 닦았다.


  물에서 나와 몸을 가리니, 검은 덩어리가 물기를 닦아냈다. 사라지고 나니 흑색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머리를 숙였다.


  “그럼 몸 잘 준비하고 있어. 곧 생일이거든.”


  안겨 날아가는 나에게 작은 천사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생일을 축하할 자격이 없을 터였다. 바랄 수 있는 건 혹시라도 나의 사죄가 기분을 풀어주는 것. 배신감을 잊게 해줄 수 있다면…


  천사님은 과일을 쌓아두셨다. 나는 어두운 동굴에서 손을 더듬어 달콤한 과일을, 물이 될 때까지 씹어 삼켰다. 하나라도 낭비할 수 없었으니까. 쌓인 과일만큼, 씨앗도 한구석에서 산을 이루었을 때 작은 천사님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하늘을 날았다. 시린 빛을 피해 눈을 감고, 찬 바람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엄마! 나 왔어! 큰 엄마, 엄마는?”


  내가 지냈던 집과 막사보다도 크고 깔끔한 곳. 그 넓은 홀에는 오직 마을을 찾아온 천사님 혼자뿐이었다.


  “어서 오렴. 근데 저건…?”


  그분은, 나를 보는 표정이 편치 않으셨다. 눈을 피했다. 그래, 당신의 아내를 박해한 것이 나였으니까.


  “엄마 선물!”


  천사님이 한숨 쉬었다. 주변에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에라도 있는 걸까?


  “알았다. 관리는 알아서 잘하려무나.”


  “응, 내가 잘 돌볼게.”


  어린 천사님은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도착한 곳은 2층의 어느 방. 문이 열리고 보인 내부는 친숙했다. 아니 정겨웠다. 분명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을 법한 도자기들인데도, 부드러운 천으로 이루어진 침구인데도, 낯설지 않은 느낌. 얼마나 배려를 한 것인지 알 만했다.


  “엄마, 이거 선물.”


  어린 천사가 나를 가리켰다. 침대에 앉아있던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져, 그 앞에서 엎드려 빌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답이 없었다. 어째선지, 침대 아래에는 나를 매었던 것과 비슷한 사슬이 흘러내려 있었다.


  “너, 너, 너…”


  “왜? 엄마, 싫은 거야…?”


  어린 천사님의 울먹이는 목소리.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나가! 당장 나가! 이 미친 악마 새끼들, 결국, 결국…….”


  흐느끼는 목소리. 무언가 등을 넘어 날아가고, 와장창 깨지는 소리.


  “언니, 언니, 왜, 하필……”


  알 수 없었다. 왜, 용서를 비는 나를 껴안고 우는지. 천사님들을 악마라 부르는지. 어째서, 자신이 낳은 어린 천사를 울리고 쫓아냈는지. 도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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