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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여동생에게 EBS 폴더를 털린 사연 -21-(완결)

LL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2.22 21:26:03
조회 797 추천 36 댓글 5
														

 당했어! 당했어!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유리한테 있으니까! 시도때도 없이 덮치려고만 하지 말라고! 아니지. 지금은 이런 꽁트나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잠시 마음을 가다듬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리가 나를 포기한다거나 그런 대화가 아니다. 채희와 엮였던 건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정말 진지하게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생각으로 찾은 거니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꺼내야 할 말을 정리했다. 그러나 역시 추궁보다는 사과가 먼저 떠올랐다. 이번 일로 정말 미안했으니까.


 "우선 사과할게. 나는 네 행동을 그저… 장난이나 일그러진 성욕정도로만 받아들였어. "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지는 것 같지만 해야 할 말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나리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함께 올바른 답을 찾아나갔다면… 하는 후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만약 그랬으면 나리가 필요 이상으로 상처를 받을 일도 없었고, 일이 쓸데없이 커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말을 제대로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도망치다가 일을 키웠어."


 말하고 나니까 다시금 실감했다. 나 정말 최악의 언니였구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걸 닦으며 나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이상은 그저 무의미한 변명이 될 테니까.


 "뭐야.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날 잡은 거야?"


 고작? 언니의 진심어린 사과를 고작이라고 받아친 거야? 아니야. 난 지금 화를 낼 입장이 아니구나. 채희에게 잡혔던 이후에도 내 독선으로 나리가 더욱 큰 상처를 받았으니까. 내가 나리를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했으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겠지.


 "그런 말은 집에서 해도 되잖아. 굳이 여기서 잡아가면서 할 필요가 있는 거야?"


 "그렇지만… 여기서 널 놓치면 평생 나한테서 마음을 닫을 것 같아서."


 나리는 한숨을 내쉰 다음 턱을 괴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까? 여러모로 복잡해 보이는 심경이었다. 조금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도 경치를 살펴보았다.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과 놀이기구들. 유원지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미소는 석양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여기서 복잡한 심경을 품은 것은 어쩌면 우리뿐인 걸까.


 "사실 사과는 내 쪽에서 해야 했어. 채희랑 언니가 엮인 것도 결과적으로 내 책임이고."


 "아, 아냐! 네가 유리 집으로 찾아왔을 때 바로 돌아가기만 했어도!"


 나는 침울해 보이는 나리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니 지금의 모습을 보니 대강 알 것 같았다. 너무나 미안해서 함부로 낯을 못 본다는 그런 느낌이다. 방금 전까지 키스까지 시전 했던 주제에…….


 "사실… 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어. 그러다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일선을 넘고 말았어. 처음엔… 본능대로 하라고 조언했던 채희를 원망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내 선택이었어."


 나름의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구나. 근데 본능대로 하라는 채희의 조언? 조금 신경 쓰였지만, 대강 어떤 느낌의 대화가 오갔을 지는 예상이 갔다. 뒤에서 나름의 연애상담 비슷한 거라도 했던 것이겠지.


 "처음엔, 언니를 찾아가서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인데… 막상 오랜만에 얼굴을 봤더니 내 안에서 날뛰는 짐승을 제어할 수 없었어."


 "그 부분은 나도…!"


 "아냐.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행동이었어. 크리스마스 때 채희에게 역으로 당한 뒤에야 얼마나 터무니없고 불쾌한 일인지 깨달았으니까. 으흑… 난 바보야!"


 나는 손으로 울고 있는 나리의 눈가를 닦아주고 얼굴을 끌어안아주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동생에게 모질게 대할 언니는 없으니까. 그리고 사실 내 잘못 지분도 없다고 할 수 없으니까.


 나리가 유아퇴행이 왔을 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듯, 나리도 채희에게 당하면서 아마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으흐윽… 사실 어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이런 나라도 사랑해주고 돌봐주는 언니를 보며 생각했어. 나에게는 정말 과분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이젠 얼굴까지 감싸 쥐며 지나치게 의기소침해진 여동생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줄 대사는 떠오르지 않았다. 허울 좋은 위로를 해줘봤자 가슴 깊이 박힌 죄책감은 쉽게 덜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리가 자신의 잘못이라 말하지만, 나 역시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편하게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이 무거운 분위기부터 타파하고 결국 우리가 한걸음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결국 서로에게 잘못한 거니까 퉁치자."


 "응?"


 나리는 얼떨떨하게 굳어진 모습이었다. 한참 진지한 성찰의 시간 아니었어? 하고 역으로 묻는 듯한 표정. 물론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건 좋지만, 그걸로 스스로에게 필요 이상으로 채찍질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나도 네가 유아퇴행이 왔을 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거든. 네가 나를 용서한다고 말해준다 해도 나 자신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어. 너도 그런 거 아냐?"


 "으, 응."


 "그러니까 퉁치자고."


 어쨌든 마음에 진 족쇄는 평생 지고 가는 것이겠고, 여기서 울고불고 질질 짜봤자 해결책은 평생 안 나오니까. 서로 없었던 것처럼 퉁치면 복잡하지 않으니까.


 "잠깐! 머, 먼저 진지한 이야기를 하자고 한 쪽은 언니…."


 "난 진지해."


 물론 진지하게 퉁치자고 하는 쪽도 이상한 거 아는데… 정말 진지하게 퉁치고 끝내고 싶었으니까. 나도 덜 괴롭고 싶고, 너도 덜 괴로웠으면 좋겠으니까.


 어차피 이대로라면 내가 미안해! 내가 더 미안해! 아냐! 나야말로 더 미안해! 왜냐하면! 하면서 평행선을 달릴 뿐이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래서는 결론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 무한순환은 정말 피곤하니까!


 "난 한없이 미안했던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네 본심을 듣고 마주하고 싶었어. 이미 필요한 만큼 전했고, 네게서 전해 받았다고 생각해. 서로 내가 더 미안하다고 자책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랬구나."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나리에게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대로면 분위기 가라앉으니까! 분위기 가라앉히고 싶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고 한 게 아니니까!


 "진지하게 불러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퉁치자는 표현이나 쓰는 못난 언니지만 용서해 줄 수 있어?"


 나리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해보았다. 그리고는 눈가에 투명한 물이 가득 고여 흘려 내렸다. 정신이 어려졌을 때만큼 맑고 투명한 눈물.


 "응! 그러니까 언니도 나를…!"


 "당연히 용서할게."


 나는 점점 땅바닥이 보이는 높이까지 내려오자,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켜 보았다. 조금은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벌써 한 바퀴 다 돌았네. 내리자."


 "응."



 결국 내 쪽의 일방적인 생각일 지도 모르지만… 진지한 대화도 원만하게 해결되자 좀 더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오늘 나리와 특별히 가까워진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다시 기념품 상점으로 끌고갔다.


 "오늘을 기념해서 뭔가 사자! 아빠 돈이지만 언니가 쏠게."


 "언니. 회복이 참 빠르구나."


 나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난 무거운 분위기에 익숙하지도 않고, 오래 끌 생각도 없었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그저… 이젠 나리도 빨리 털고 일어섰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나리만을 위한 느낌으로 그 의향을 최우선으로 존중해줄 생각이다.


 "나리는 어떤 거 갖고 싶어?"


 "잠시만 살펴볼게."


 나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까 어린이인 척 했을 때와 다른 모습에 흐뭇해졌다.


 이따 집에 도착하면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정신이 되돌아왔다고 이야기해야지. 사실 어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사실상 내 업적이니까!


 "난 이거. 언니랑 세트로 사고 싶어."


 손으로 가리킨 걸 살펴보니, 중세에서 백합을 표현할 때 쓰는 것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진 반지였다. 일단 비싸 보이지 않는 재질이라 상관없긴 한데 이걸로 만족인 걸까? 좀 더 예쁜 디자인도 제법 보이는데. 그래도 본인이 만족했다면 이게 맞는 거겠지.


 "그래! 그럼 한 세트로 사자."


 나는 그 반지를 두 개 산다음 나리와 하나씩 들고 가게를 나왔다. 벌써 한밤이 되어 달빛이 은은하게 흰 빛으로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백합 문양을 달빛에 비쳐보니 정말 꽃이 핀 것처럼 보여 어딘가 어울리는 느낌. 이 경치도 포함해 드디어 화해 기념품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제 이걸 볼 때마다 서로 퉁치면서 용서하던 때를 생각하자고.


 "언니. 부탁이 있는데."


 "소원으로 안 될까?"


 아까의 복수다. 여기 따라오면 뭐든 소원 들어준다고 했던 걸 어길 생각은 없었다. 근데 너도 가볍게 털어내라고.


 "어려운 게 아니라서."


 "일단 들어보고."


 나리는 반지를 들고 머뭇머뭇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뭐 이리 고민이 많지?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 부탁 아냐?


 "그, 저기… 그 반지. 왼손 약지에 한번만 끼워 봐줄 수 있어?"


 결혼반지처럼 끼라고? 그건 상징성이 있어서 심리적인 저항이 느껴지는데. 유리의 부탁이었으면 모를까, 나리의 부탁은 조금 애매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여기다가 소원을 털어내라고 할까?


 "결혼반지도 아닌 걸 여기에 함부로 끼긴 좀…. 그 정도면 소원으로 하는 게 어때?"


 "오늘의 소원은 언니의 평생까진 무리니까…, 하룻밤만 내 마음대로 하게 해달라는 건데."


 자, 잠깐 반성한 거 아니었어? 뭐 갑자기 그런 부담스러운 소원을 꺼내드는 거야! 안 돼! 절대 들어줄 수 없어! 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아퇴행 탈출기념, 화해기념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돼!


 "자, 잠깐 아까 반성한 거 아니었어?"


 "퉁치자며."


 쓸데없는 데서 적응이 빠른 녀석이다. 아마 이런 논리로 싸운다면 나리를 이길 수는 없겠지. 역시 이렇게 협상테이블로 끌고 오는 건가? 제법이야 나리.


 "여기 반지 끼는 걸로 타협을 보는 건?"


 "그걸 결혼반지처럼 껴주면 소원의 내용을 대폭 완화시켜줄게. 언니 몸에 손대는 소원이 아니라고 약속할 테니까. 그 대신 안 끼면 언니의 오늘 하룻밤은 내가 차지할 거야. 무슨 일을 할 생각인지 말해줄까? 우선 언니의 가ㅅ…."


 "스톱! 스톱! 지금 낄 테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잠깐 기념사진 찍고 혼자 만족하는 정도라면 싸게 먹히는 거겠지. 하룻밤을 넘기는 것과 비교해서 유리에게도 켕길 게 없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하고 왼손 약지에다가 반지를 껴 보았다. 다시 봐도 결혼반지로 쓰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다. 그래도 아까도 느꼈듯 은은한 달빛을 받아서 그 어느 반지도 가지지 못할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내 소원은 말이야."


 "응?"


 나리는 매우 오싹한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차라리 하룻밤을 넘기는 게 나은 소원일 지도? 뭔가 위험한 예감이야!


 "그 반지 내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절대 빼지 말아줘.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이렇게 된 거야! 이해해 줘!"


 나는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필사적으로 설명을 했지만, 유리의 마음은 아직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뺨을 살짝 부풀리며 토라진 모습이 사랑스러워보였지만 말로 하면 진지하지 않다고 화내겠지.


 언니로서 약속을 깨는 것도 없어 보이고, 내 딴엔 정조를 지키려고 한 행동인데 이해 좀 해 줘. 내 마음만은 언제나 네 것이니까!


 "그래서 그 반지는 언제쯤 뺄 수 있어?"


 "나, 나리가 허락하면."


 "흥!"


 아무래도 잔뜩 화가 난 모양이다. 이럴 땐… 몸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그동안의 경험 상, 몸으로 밀어붙이면 유리는 비교적 쉽게 용서해주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특히 오래 만나지 못해서 잔뜩 욕구가 쌓여 있을 테니 무조건 먹힐 거야! 최선을 다해서 내 진심을 전하겠어!


 "고작 반지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내 몸도 마음도 유리 거니까. 응?"


 나는 토라진 유리의 뺨에 가볍게 키스한 다음 살며시 밀어 넘어트렸다. 화내고 있으면서도 거부하지 않는 걸 보면 몸은 정말 솔직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유리의 옷 아래로 손을 넣었을 때였다.


 "역시 그만두자."


 "응?"


 유리는 고개를 돌린 다음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몸으로 밀어붙이는 작전이 실패하다니! 방금 전까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는데 어째서? 뭐가 문제였던 거지?


 "그… 반지가 피부에 닿아서. 안 좋은 의미로 실감이 나서."


 유리는 눈조차 마주칠 생각도 하지 않고 등이 보이게 몸을 휙 돌려버렸다. 나리이이이이이이이! 요망한 녀석! 두꺼운 녀석을 고른 데는 이런 계산도 있던 거였어? 이대로는 우리 관계가 위험해! 정말 위험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왼손을 쓰지 말아야 하나? 오른손과 입만으로? 아니면 역시 나리 몰래… 할 때만 뺄까?


 "그럼… 잘 자."


 채희 그년이 내게 기습 키스한 이래, 우리 커플 최대의 위기였다. …역시 빼게 해달라고 나리에게 사정사정 하자.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유리와 몸을 섞을 때만 몰래 빼고 원상복귀하면 들키지 않겠지. 나리야, 언니는 이렇게 최악의 여자란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다음 날 아침 바로 본가를 찾아 갔다. 망할 동생이 메시지도 전화도 일방적으로 씹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몇 달간 씹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 일들 퉁치자고 했다고 너무 막나가는 거 아냐?


 "엄마! 나리 있어?"


 "아침부터 웬일이니? 나리? 곧 4학년이라 취직준비 겸 자취를 하겠다고 방 알아보러 나갔단다."


 진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연락은 씹고, 집에도 없다고? 그럼 진짜 한동안 마주칠 일이 없는 걸까? 그리고 자취라니! 언니하고 그런 상담도 안하고! 우리 화해했잖아! 이제 사이좋게 이런 이야기쯤은 터놔야하는 거 아냐?


 "알았어."


 나는 결국 어떠한 수확도 얻지 못한 채 유리의 짐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나리와의 상담이나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반지를 벗는 건 언니로서 할 짓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나리와의 의리를 우선시해서 이걸 끼고 있는 것은 연인으로서 유리에게 할 짓이 아니잖아! 결국 둘 중에서 택해야 하나? 아니면 유리가 좀 더 이해심이 많으니 며칠만 더 벌어봐야 할까?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오늘 밤은 유리를 위한 최선의 접대를 해서 마음을 녹이는 작전으로 가기로 했다. 우선 내가 알바 하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현 근황과 안부를 전한다음 호두봉봉과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포장해왔다. 유리가 좋아하는 맛은 이미 확인해뒀으니 디저트 부분은 실패가 없겠지.


 그다음은 유리가 좋아할 만한 수제요리차례인데. 아무래도 사랑의 오므라이스를 우려먹기는 식상했다. 그래도 정성이 잔뜩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 속이 따뜻해지는 밥상이 좋겠지.


 유리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회상해 보았다. 유리의 성향이라면 아마도 내게 처음 차려준 것과 비슷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적어도 본인이 싫어하는 것들을 먹으라고 내놨을 리는 없으니까.



 오늘따라 유리가 유독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특별히 따뜻한 밥과 표고와 감자가 잔뜩 들어간 내 특제 된장찌개, 얇게 썬 야채들이 들어간 계란말이 등을 만들어두고 퇴근시간에 맞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 식을 것 같아서 다시 원래 냄비와 밥솥에 담고 언제든 다시 데울 준비를 해야 했다.


 보통 늦는다면 미리 연락을 할 텐데 너무 안와서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초조하게 시계를 보면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내 생각보다 많이 삐진 걸까? 역시 돌파구는 나리의 반지를 빼는 수밖에 없을까? 아니면… 혹시 사고에 휩쓸리기라도 한 걸까?


 "미안. 늦었지?"


 각종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때쯤에 유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연락도 받지 않고 있어서 걱정했다고! 저 온화한 얼굴을 보니 절로 눈물이 날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정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우와아앙! 안 돌아오는 줄 알았어!"


 "아하하하, 내가 아리를 두고 안 돌아올 리가 없잖아."


 유리는 미소 띤 얼굴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외투를 벗었다. 나는 그걸 받아든 다음 옷걸이에다 곱게 걸어주었다. 어쨌든 돌아와서 다행이야.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늦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마음을 단단히 먹은 나는 유리가 만족할 서비스 멘트를 날려보았다.


 "저… 식사부터 할래? 아니면 먼저 씻을래? 그도 아니면… 나… 부터?"


 나는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윙크를 해보였다. 전형적으로 귀가하는 남편을 맞이하는 신혼 초 부인의 희심의 대사라고!


 최근 들어 외모에 부쩍 자신감이 생겼으니까 이런 행동도 창피하진 않았다. 유리는 물론 나리도 나를 좋아하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채희도 내 외모를 맘에 들어 했고, 나리와 유원지에 갔을 때도 헌팅도 당해봤고, 이용하려고 꼬셔본 남자도 한방에 넘어왔었다.


 지금까지의 표본만 두고 보면 나는 마성의 여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아마 지금 선택지도 헬렐레해져서 식사나 씻는 것보다도 나를 고를 거야! 이걸 시작으로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려야지.


 "그럼 식사부터 부탁해도 될까?"


 "…응."


 졌어! 내가 고작 식사 따위에게 졌다고! 급격히 창피해! 이럴 줄 알았으면 '아니면 나부터?'같은 민망한 멘트는 추가하는 게 아니었어! 


 나는 후회를 하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이동했다. 그래 원래 목적은 따뜻한 밥을 먹이는 거였으니까. 앞으로 이런 창피한 짓 다시는 하지 않을 거야. 내 흑역사 한 페이지에 내용이 이렇게 추가되었어.


 "라고 할 리 없잖아. 당연히 아리부터야."


 유리는 뒤에서 살포시 끌어안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의기소침했던 나는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양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갑자기 변한 이런 표정 보이기 부끄러우니까. 이, 이렇게 감동시켜도 되는 거야?


 "유, 유리야아!"


 결국 부끄러움을 이겨낸 나는 유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오늘밤 반드시 화해할 거니까! 그러려고 반지 보이지 말라고 라텍스 장갑까지 껴놨으니까! 조금 뭉툭해도… 이 촉감이 잘 느껴지지 않겠지.


 준비 만땅이야! 막상 밀당을 시전한 유리도 '아리부터'라고 했던 말이 부끄러웠는지 새빨간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귀, 귀여워! 이대로는 이성이 위험해!


 "그, 그전에!"


 유리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아주 조그마한 상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이게 뭐지? 깜짝 선물을 주려고 일부러 연락도 안 받고 늦게 온 것일까?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리본을 천천히 풀어보았다. 뭘 주든 놀란 리액션을 취할 준비는 되어있으니까.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상차를 매우 천천히 열어보았다. 안에는 흰 보석이 박힌 가느다란 반지가 나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그… 나도 껴봤어."


 유리는 살짝 떨리는 동작으로 왼 손을 들어보였다. 약지에는 이미 이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몰래 나리에게 대항심을 불태우는 것 이겠…지? 질투심마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 바로 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정했어! 타협하지 않겠어! 오늘 밤은 나리가 준 반지를 빼고, 저 반지를 낀 채로 유리와 하나가 될 거야! 다 끝나고 나면 나리의 반지는 언제든 뺄 준비를 하기 위해 위에다가 끼겠어! 이 반지는 평생 낄 거니까!


 나는 우선 라텍스를 벗은 다음, 바로 나리가 줬던 반지를 빼 보았다. 속으로 나리에게 몇 번이고 약속을 깬 걸 사과했다. 언니 이렇게 야비한 년이니까 정말 포기해도 좋아.


 그 다음 떨리는 손으로 유리가 준 반지를 바로 껴보았다. 내 손에 딱 맞고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감격스러운 눈으로 유리의 왼손과 내 왼손을 천천히 번갈아보았다. 동일한 디자인의 반지 덕에 이걸로 진짜 커플이 되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감격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유리는 얼굴을 붉힌 채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한쪽 발끝으로 바닥을 부끄럽게 비비고 있었다.


 "사랑해! 유리야!"


 나는 유리를 와락 끌어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눕혀 쓰러트렸다. 오늘이야말로 오랫동안 쌓였던 욕구를 풀어줄 테니까! 나도 풀 테니까! 함께 행복한 밤을 맞이할 테니까!


 내 반응에 유리의 호흡은 벌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거칠게 입술을 겹치고, 쮸웁! 하는 소리가 나도록 그 입안을 탐할 때였다.


 쾅쾅!


 옆집에서 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우릴 방해해왔다. 그렇게 소리가 거칠었던 것일까? 이번엔 조용조용히 해야지. 유리의 가슴을 살짝 꼬집으며 귀에 바람을 살짝 불어넣자, 그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이정도 크기면 거슬리지 않을 거야.


 쾅쾅!


 다시 옆집에서 항의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무슨 고양이귀인가? 벽에 귀라도 대고 엿듣는 걸까? 어떻게 듣는 거야? 차라리 아까 '사랑해! 유리야!'할 때가 시끄러웠으면 더 시끄러웠지. 그렇게나 거사를 방해하고 싶은 걸까?


 똑똑똑!


 이번엔 현관문을 크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신경질적이네. 아직 옷을 벗어던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인상을 살짝 쓰며 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 잠수하고 있던…


 "나, 나리야?"


 "발정 난 짐승 같아. 한시라도 방심할 수 없네. 정했어! 나 지금 바로 저 방 계약할 거니까. 각오해 둬!"


 뒤에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중개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나리는 팔짱을 낀 채로 터무니없는 선언을 하고 있었다. 옆집 그동안 빈집이었구나.


 그, 그나저나 유리는? 로맨틱했던 분위기를 방해받은 유리의 표정은… 완전히 안 좋았다. 세상이 모두 끝난 것 같은 표정이야. 큰일이야! 정말 큰일이야!


 그리고는 내 약지에 시선이 닿고 말았다. 큰일이야! 몰래 뺀 거 들켰어! 어쩌지? 하필 이 타이밍에? 눈이 죽어있어! 틀림없어! 나중에 뭔가 저지를 거야!


 “호오… 언니 내가 안본다고 몰래 약속을 어겼구나? 보상은 천천히 생각할 테니까 각오해 둬. 절대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이, 이건 그러니까!”


 그냥 언니를 포기해주면 안될까? 역시 유원지에서 그냥 찾는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나았을까? 갑자기 그 때의 행동이 살짝 후회스러워져왔다.


 나리는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유리에게 검지를 뻗어보였다. 부, 불안한 느낌이야!


 "그리고 거기 있는 유리 언니에게도 선포할게."


 "으응?"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리와 유리가 직접 이런 식으로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 안 돼! 일이 복잡해질 예감이야!


 "반드시 되찾아 보일 테니까! 각오해 둬!"


 아무래도 유리와의 공동생활은 앞으로 조금 다사다난해질 것 같다. 



-----------------------------------------------------------------------------------------


 확실한 유리엔딩에서 후편의 회로만 조금 남겨놓은 정도로 끝냈습니다.

 원래 5천자 아래씩 끊거나, 붙여도 되겠다 싶었던 부분을 붙이다보니 21편정도로 압축이 되네요.

 총 글자수는 오히려 예전보다 조금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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