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떤 이베리아 회사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내가 쓰는 글 중 그게 아닌 게 더 귀하겠다마는.

2001년, 세 명의 스페인 오타쿠 페르난도 리스트, 까를로스 토레스, 필라르 리베로라는 이들은 TRPG 모임에서 시작해 15mm 미니어처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설정은 있었지만 페인팅을 할 수 없었던 이들은, 당시 젊은 시기의 앙헬 히랄데즈를 꼬셔 자신들의 첫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 회사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건만, 이들의 첫 미니어처 라인업은 전쟁까마귀 (Warcrow), 스페인어로 Corvus Belli라는 네이밍이었다.

지금 감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미니어처들은 그럭저럭 팔렸다. 이들은 이후 자기들의 첫 게임인 워-크로우를 회사 이름으로 삼았고,

코르부르 벨리(전쟁-까마커)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세우게 된다.

다만 이 초기 워크로우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으며, 시장에는 워해머 판타지라는 압도적인 선점자가 있는 상황. 세 오타쿠들이 처음 시작한 프로젝트는

냉정히 말해 시장성도, 인지도도 없었으며 그저 그런 게임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면 좋소기업이 고를 선택지는 하나였다. 틈새시장.

하여 인피니티가 탄생했다. 이게 2005년의 일이다. 

20년 동안 코르부스 벨리는 인피니티 게임을 키워왔고, IP를 기반 삼아 컴겜도 만들고 소설도 내며 나름대로의 싸펑 스커미시 생태계를 구축한다.

그 결과 인피니티의 입지가 탄탄해지고, 20년이 지나갈 무렵, 이 회사의 광고판에 하나의 새로운 IP가 내걸린다.

IP는 '판타지 분대 액션 전술게임' 을 지향한다고 했으며,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 뭘 더 내놓을 수 있겠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럴 바에는 그냥 기존 IP 인피니티를 좀더 다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많았지만,

공개된 새 프로젝트를 본 팬들은 에휴 미친 놈들아 하는 소리를 내게 됐다. 그 이유인즉..

"이 새끼들은 그냥 자기들의 최초 프로젝트를 잊질 못했음"

20년 전 스페인 골방 오타쿠들은 자기들이 맨 처음 만들었던 IP, 워크로우를 다시 공개했던 거다.

더 이상 골방 오타쿠도 아니고 엄연한 좋소기업의 발기인들이 되어서, 20년 동안 갈고닦은 조형 실력과 돈을 바탕으로 그 시절 잠깐 팔린 모델들이 아닌

엄연한 하나의 프랜차이즈로 만들어보겠다는 무브먼트다.

그리고 룰북이 공개되고, 워크로우는 곧 런칭을 앞두고 있다.

솔직히 이게 게임성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만, 일단 이 놈들이 자기들 최초 프로젝트를 여전히 잊지 못한 보드게임-스네이프 같은 놈들임은 이제 알 것이다.

돈 많아진 오타쿠 놈들에게 기술과 자본을 쥐어주면 자기들의 로망을 찾아간다 하겠다.